95 : 어딘가 처연한 아침노을
다음날,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서현 님과 함께 병원부터 갔다.
병원에 가야 하는 이유가 두 개 있었다.
우선 병원 진료확인서를 발급받기 위해서.
오늘 할 일이 많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학교에 갈 수 없을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서 진료확인서를 하나 발급받아야 했다.
‘정말정말정말 성실한 학생인 저는 오늘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학교에 꼭 가고 싶었는데, 하필 오늘 하루 종일 병원에서 진료와 검사를 받아야 해서 어쩔 수 없었습니다.’라는 서류를 제출해야 결석을 피할 수 있다.
뭐 아직 아슬아슬한 정도는 아닌데, 그래도 앞일은 모르는 거니, 핑계 댈 수 있으면 대야지.
뭐, 실제로도 병원에서 진료를 받기도 했다.
“…논문을 써야 하나.”
내 팔 엑스레이 사진을 본 교수님의 중얼거림이다.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에 뼈가 붙어버렸다는 이야기다.
당장 캐스트(깁스)를 풀어도 되는 상태이기는 한데, 조금만 두고 보는 것이 어떠하겠냐고 제안하셨고, 나도 동의했다.
경찰서에 가서 폭탄을 터트리기 전까지는 냅두는 것이 좋겠다는 계산이니까.
문제는 진료가 고작 10분 만에 끝나버렸단 거지.
서류상으로 하루 종일 병원에 잡혀 있어야 하는데.
그래서 원장님을 찾아갔다.
아니, 사실 가라 서류를 만들기 위해서 원장님을 찾아간 것은 아니고, 더 중요한 부탁이 있기는 했지.
“그러면 오늘 입원한 것으로 처리하면 되겠군요.”
나의 불손한 부탁에 원장님이 바로 말씀하신다.
아 부끄럽다. 자꾸 이렇게 옳지 않은 방법을 택하면 안 되는데.
“죄송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원장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아닙니다. 어차피 서류상 작업이니 특별히 신경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원장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왜 이렇게 부끄러운지.
아니, 그건 뭐 중요한 거 아니고, 원장님을 찾은 진짜 목적을 말씀드려야지.
“알코올 중독 전문 병원을 소개받고 싶어요.”
서현 님이 주저하는 나를 대신해 그렇게 진짜 방문 목적을 원장님께 전달한다.
아니. 서현 님. 그렇게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냥 막 이야기하시면 안 되죠.
전후 사정은 이렇고, 저렇고, 그런 걸 말씀드려야지. 아무리 그래도 우리가 부탁하는 입장인데, 그리고 원장님이 우리보다 어른이신데….
“언제까지 준비하면 되겠습니까?”
원장님은 그런 자잘한 설명은 필요 없다는 듯, 시원하게 말씀하신다.
“빠르면 빠를수록 좋아요.”
역시 서현 님이 받는다.
“그럼 내일까지 준비하도록 하겠습니다.”
원장님은 나에게 그렇게 말하고는 서현 님을 바라보며 계속 말을 잇는다.
“서현이 너에게 연락하면 되겠지?”
“네. 감사해요. 고모부.”
서현 님의 상콤한 미소와 함께, 병원에서의 일정이 끝이 났다.
***
병원에서 나온 우리는 서현 님의 차를 타고 성남으로 갔다.
왜냐고? 서류를 받아와야 하니까.
윤기훈이 그 자식이 미성년자라 법정대리인의 동의 없이는 임대차 계약이 불가능하다.
그래서 법정대리인, 즉 윤기훈의 부모님이 계셔야 한다.
윤기훈 말로는 어머님은 어렸을 때 이혼하신 후 연락이 끊어졌다고 했고, 아버님은 모시기 힘든 상황 아니던가.
어제 우리는 그런 상황을 할머니에게 잘 설명 드렸고 할머니가 아침 일찍 주민센터에 가셔서 법정대리인용 서류를 발급받아 주셨다.
우리는 그렇게 서류와 할머니를 모시고, 김창회 자취방으로 가서, 윤기훈을 픽업한 다음 망우동 부동산으로 향했다.
계약의 검토는 서현 님이 담당하셨다.
중앙그룹 회장 비서실의 엘리트 인재인 서현 님께서 등기부 등본을 비롯해 서류를 꼼꼼하게 점검하셨다.
서현 님의 오케이 사인이 떨어지고 나서야 나는 보증금과 첫 달 월세를 주인 할머니에게 송금했고, 바로 근처 주민센터로 이동해 전입신고와 확정일자까지 마무리했다.
아, 물론 특약 조항을 넣는 것도 빼먹지 않았다.
임대차 계약을 종료할 시 나에게 고지해야 한다는 그런 특약.
그렇게 마무리를 한 우리는 할머니를 모시고 계약한 집을 둘러보고 근처 유명한 추어탕 집으로 가서 약간 늦은 점심식사를 했다.
난 몰랐네. 우리 서현 님 추어탕도 잘 드시는구나.
서현 님 이미지 보면 고상하게 포크와 나이프 딱 들고 샐러드 같은 거만 드실 것 같은데, 아니, 샐러드는 나이프가 필요 없나? 아무튼, 그런 이미지의 우리 서현 님은 추어탕도 아주 잘 드신다. 초피가루까지 팍팍 뿌려서.
매력 있어. 우리 서현 님.
아무튼, 그렇게 추어탕으로 점심을 먹고 나서, 우리는 가까운 카페로 자리를 옮겼다.
그리고 윤기훈 할머니가 보는 앞에서 차용증을 작성했다.
일금 삼천만 원정, 기한은 일단 10년, 이율은 제로.
언제나 고객의 곁을 지키는 한수은행을 이용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식아!
혹시라도 떼먹고 도망갈 생각 하지도 마라. 지옥 끝까지 가서 추심해 주겠어.
아무튼, 그렇게 차용증까지 쓰고, 나는 할머니와 윤기훈에게 설명을 드렸다.
“아버님을 모실 병원은 아마 내일 중으로, 늦어도 이번 주에 확정이 될 거에요.”
원장님이 내일까지 준비해주신다 하셨으니, 내일 되겠지?
내 말에 할머니가 놀라신다.
“그. 그렇게 빨리요?”
“네. 최대한 빨리 치료받으시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내 말에 할머니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편하게 모실 수 있는 좋은 병원을 찾고 있으니,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서현 님이 그렇게 말하자 할머니의 표정이 조금 풀린다.
뭐, 이해한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이 사람은 진짜 좋은 사람입니다’라고 얼굴에 쓰여 있는 서현 님의 말이니.
만일 서현 님의 모습을 한 저승사자가 ‘지옥으로 안내해 드릴까요?’ 그러면 나는, 아니, 내가 아니라 거의 대부분의 XY염색채 보유자들은 ‘넵! 잘 부탁드립니다!’하고 따라갈 거다.
“아버님을 모시기 위해서는 친족 2인의 동의가 있어야 해요.”
나는 ‘강제입원’ 대신 ‘모신다’는 표현을 사용했다.
아무리 팩트라고는 해도 할머니 앞에서 그런 말 하면 좀 그렇잖아?
내 말에 할머니가 고개를 작게 끄덕이신다.
“기훈이 너도, 어디 가지 말고 준비하고 있어. 병원 확정되면 바로 아버님 모시러 가야 하니까.”
내 말에 윤기훈이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그렇게 이야기가 마무리되어 가는가 싶었는데, 잠자코 듣고만 있던 서현 님이 갑자기 말을 시작하신다.
“아버님께 말씀드려 보면 어떨까요?”
나를 포함해 세 사람의 시선이 서현 님을 향한다.
“제가 드리는 말씀이 두 분께 상처가 안 되었으면 좋겠어요. 제가 그 부분에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아버님과 같은 어려움을 겪으신 분들 중에서 많은 분들이 괴로운 상황에서 벗어나고 싶어 한다고 들었어요. 하지만 방법을 잘 모르거나, 또는 현실적인 문제 때문에 시도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다고.”
서현 님은 얼굴에 가벼운 미소를 띤 채로 계속 말을 잇는다.
“만약 아버님이 그런 의지가 있으시다면, 그리고 할머님과 기훈 학생이 잘 설명하면 아버님도 이해하시지 않으실까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 할머니의 손을 꼬옥 잡는다.
마치 용기를 나눠주려는 듯.
나는 윤기훈을 바라보았다.
윤기훈은 보기 드물게 얼굴에 불쾌감이 드러나 있다.
아마도 아버지와 감정의 골이 깊어서 그런 것이겠지?
그런 윤기훈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서현 님이 말씀하신다.
“할머니의 마음이 많이 아프실 거에요. 강제로 입원하는 모습을 보신다면.”
그 말에 윤기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말이 없다.
나는 서현 님에게 눈짓을 보냈다.
조손, 두 사람이 이야기를 할 시간을 잠시 주자는 신호였다.
그런 내 신호를 읽어낸 서현 님은 잠시 전화를 하겠다고 자리에서 일어나셨다.
나도 화장실에 다녀온다는 핑계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렇게 두 사람을 남겨둔 우리는 카페 밖에서 시간을 때우기 위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 원장님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중앙의료원 협력병원 중에서 시설이 괜찮고 좋은 치료프로그램을 운영하는 병원을 섭외했으며, 당장에라도 입원이 가능하다는 이야기였다.
연락을 받은 우리는 다시 카페 안을 들어갔다.
“병원이 정해졌어요. 내일 입원 가능하다고 하네요.”
내가 할머니와 윤기훈에게 말했다.
아버님에게는 치료가 필요하다. 병원에 입원한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는다.
남은 것은 어떻게 입원시킬 것인가 하는 부분이고, 그 부분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가 아니었다.
기훈이와 할머니였다.
윤기훈은 고개를 푹 숙이고 아무런 말이 없다.
할머니는 그런 윤기훈의 등을 부드럽게 쓸어주고 있다.
그렇게 몇 분이 흐르고, 윤기훈의 입이 열린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설득해보겠다. 그런 의미였다.
나와 서현 님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버님이 아침에 일어나시면 술기운이 좀 빠져있는 상황이신가요?”
내가 할머니에게 물었다.
할머니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아침 일찍, 일어나시자마자 말씀드려야겠군요.”
설득을 한다면 혈중알코올농도가 가장 낮은 시간에, 최대한 이성이 살아 있는 타이밍에 설득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일 것이다.
내 말에 윤기훈도 할머니도 고개를 끄덕이신다.
“할머니. 저희도 같이 있을 테니까 너무 걱정하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서현 님이 할머니의 손을 잡으며 그렇게 말한다.
할머니도 서현 님에게 어딘가 서글픈 미소를 지어주고는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
다음 날 아침 일찍, 정확히 말하면 아직 동이 트지도 않은 새벽, 나와 서현 님은 성남으로 향했다.
윤기훈 본가 근처에는 벌써 이송용 구급차와 건장한 체격을 가진 남자 간호사 세 분이 도착해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윤기훈은 창회와 같이 택시를 타고 왔다.
창회 녀석은 올 필요 없었는데, 혹시 힘쓸 상황이 생기면 자신이 돕겠다는 핑계로 직접 성남까지 온 것이다.
짜식. 든든한 짜식 같으니.
나와 창회, 그리고 남자 간호사 세 사람은 현관 옆에 자리를 잡았다. 여차하면 바로 뛰어들어갈 수 있도록.
그렇게 우리가 자리를 잡은 상황에서 서현 님은 윤기훈과 같이 지하 집으로 들어갔다.
마음 같아서는 서현 님을 위험한 저곳으로 들여보내고 싶지 않았다. 내가 들어갔으면 들어갔지, 서현 님을 보내고 싶지는 않았는데, 서현 님이 들어가겠다고 자청하셨다.
내가 들어가는 것보다, 본인이 들어가는 것이 훨씬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준다는 이야기였다.
그렇게 두 사람이 들어가고, 나는 현관 바로 옆에 서서, 귀를 쫑끗 세우고, 혹시라도 고성이 들리면 바로 뛰어들어가기 위해 몸에 힘을 잔뜩 준 채로 1분 같은 1초를, 한 시간 같은 1분을 보내고 있었다.
닫혔던 문이 열린 것은 30년 같은 30분이 지난 후였다.
가장 먼저 모습을 보인 것은 윤기훈이었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눈이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윤기훈 뒤에는 얼마 전에 뵈었던 아버님이 뒤따르고 계셨다.
처음 뵈었을 때 보다 부드러운 표정을 하고 계신 아버님의 얼굴에는 어딘가 모르게 후련하다는 느낌이 묻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할머니를 부축한 서현 님이 모습을 보이셨다.
할머니는 울고 계셨고, 그런 할머니를 달래는 서현 님의 눈도 붉게 충혈되어 있었다.
“저번에 찾아오셨던 복지사 선생님이시군요.”
내 얼굴을 보고 아버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네. 그렇습니다. 아버님.”
“그때는 실례가 많았습니다.”
아버님은 그렇게 말씀하시며 아들뻘인 나에게 허리를 굽혀 인사하신다.
나도 아무 말 없이 허리를 굽혔다.
“우리 기훈이.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아버님은 그런 말을 남기고 구급차에 천천히 몸을 실었다.
건장한 체격의 남자 간호사는 입원 절차가 마무리되면 전화를 주겠다는 말과 명함 한 장을 남기고 구급차와 함께 떠났다.
새벽빛이 하늘을 조금씩 물들이는 그런 이른 아침, 어딘가 처연한 느낌을 주는 아침노을을 받으며 멀어져 가는 구급차의 뒷모습을 우리 다섯 사람은 아무 말 없이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