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94화 (94/271)

94 : “손을 보탤 생각입니다.”

***

“마약이요?”

서현 님이 놀란 눈으로 말씀하신다.

당연히 놀라겠지.

“네. 증거를 찾았어요.”

“위험한 일을 하신 건 아니시죠?”

서현 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며 물어보신다.

뭐, 당연한 이야기다.

폭행이나 폭행 사주도 충분히 큰 죄지만. 마약이라니. 그건 대한민국에서 중범죄니까.

나도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제일 먼저 박승환이 위험한 짓을 한 게 아닌가 싶어서 덜컥 겁이 났었잖아.

서현 님도 마찬가지겠지.

이 자식이 어디 가서 위험한 짓 한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이 가장 먼저 들겠지.

하지만 우리 착한 서현 님은 내 멱살을 잡는 대신,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고 계신다.

“승환이가 가져왔어요. 어떻게 구했는지도 말씀드려야겠지만, 그게 승환이 녀석의 프라이버시하고 관계되어 있어서 말씀드리기가 좀 그렇네요.”

내 말에 서현 님은 작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그렇겠지. 서현 님이 궁금한 것은 박승환의 가정사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이 증거물이 어디에서 나왔는지, 위험해지는 것은 아닌지, 그 부분이 중요할 테니까.

“하지만 이 증거 때문에 저나 승환이가 위험해질 것 같지는 않아요.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리고 혹시라도 상황이 나쁜 쪽으로 흘러가면 SOS 칠게요. 그때는 구해주셔야 해요. 서현 씨 말고는 믿을 데가 없어요!”

나는 두 손을 들어 항복하는 자세를 취했다. 일종의 애교작전이랄까?

그런 내 모습에 서현 님은 작게 한숨을 쉬신다. 그리고는 어쩔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아. 그리고 부탁드릴 게 또 생겼어요.”

내가 그런 서현 님을 보고 말했다.

“네. 말씀하세요.”

서현 님이 말씀하신다.

“저기. 그. 뭐랄까. 서현 씨 힘 안 빌리겠다고 해놓고, 자꾸 이렇게 부탁하는 게 좀 부끄러운데, 아무리 해도 제힘으로는 좀 쉽지 않은 일이라서요.”

“괜찮아요. 아니. 오히려 도울 수 있다면 저는 좋아요.”

우리 착하고 아름답고 현명하신 서현 님이 그렇게 말씀하신다.

그럼 염치 불구하고 말해볼까?

“윤기훈, 그 녀석 아버지요.”

“네. 치료가 필요하시다는.”

“네. 최대한 빨리 병원에 입원을 시켰으면 하는데, 혹시 원장님에게 부탁해서 입원을 부탁드릴 수 있을까 싶어서요. 알아보니까, 병원비도 정부나 지자체에서 지원받을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리고 아마 그 집이 차상위계층으로 분류되어 있을 것 같으니, 지원금도 조금 더 받을 수 있을 것 같아요. 근데 나쁜 병원이 좀 있다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혹시 믿을 만한 병원을 좀 소개받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지난번 진철이 형 아버님도 도움을 받았는데, 또 이런 부탁을 하자니 민망하기 그지없구나.

하지만, 지금으로서는 방법이 없다.

일단 철판 깔고, 나중에 은혜 갚는 방법으로 나가야지.

“네. 알아볼게요. 최대한 빠를수록 좋다고 하셨죠?”

“네. 빠르면 빠를수록.”

“알겠습니다.”

서현 님은 그렇게 말씀하신다.

아, 부끄럽다. 자꾸 이거 도움만 받네. 부끄럽고 민망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바로 휴대전화를 집어 드시지는 않으셨다는 거.

만약 바로 휴대전화를 들어 여기저기 전화를 하셨다면 아주 민망할 뻔했어.

아니지.

한수야. 한수야! 이 부끄러움을 모르는 금수 같은 녀석아!

서현 님께서 전화를 하시면 그저 고맙다고 오체투지하고 눈물만 뚝뚝 흘리고 있지는 못할 마냥, 지금 체면을 챙기겠다고?

아직 멀었구나.

에휴.

“그건 그거고. 다음은 어떻게 하실 건데요?”

“다음이요?”

“네. 그다음이요. 복수하셔야죠.”

서현 님이 말씀하신다.

***

선정릉 담벼락.

나와 박승환은 거기 쪼그리고 앉아 음모를 꾸미고 있었다.

“일단 요거는 키핑.”

내가 말했다.

일단 가지고 있겠다는 내 말에 박승환이 고개를 끄덕인다.

박승환, 이 음험한 자식. 역시 나랑 같은 생각 하고 있었어.

뭐. 우리의 최종 목표, 도촬범 그 개자식을 일단 어찌저찌 특수상해로 엮어서 재판장 피고석에 앉혔다고 치자.

자. 그 자식이 감옥에 갈까?

아니라고 본다.

아마 초범이겠지? 설마 그 나이 먹고 벌써 감옥에 갔다 오지는 않았을 테고. 초범이고, 있는 집 자식이니까 좋은 변호사 쓰겠지?

높은 확률로 집행유예 본다.

대한민국 사법 정의 마렵다. 진짜.

뭐 아무튼 집행유예로 나왔다고 쳐보자고.

그러면, 두근두근한 마음으로 품속에 꼭 감추고 있던 이 증거를 뻥 하고 터트리는 거다.

자. 다음은 마약입니다! 그렇게 말이지.

여기서 문제가 하나 생긴다.

집행유예를 선고받기 이전에 저지른 범죄로 다시 재판을 받게 되는 경우 집행유예 결격자에 해당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집행유예를 받고, 죄를 저질러야 벌을 두 배로 받게 되는 건데, 이 사진은 제이슨 그 새끼가 날 습격하기 전에 찍힌 사진이고, 그러면, 이 사건과 관련해 집행유예가 또 내려질 수 있다는 이야기다.

제이슨이 또 걸어 나온다 이거지.

그러니, 그냥 처음 재판받고 나왔을 때, 대한민국 사법 정의를 외치며 이 증거를 내밀어봤자 소용이 없다.

그러면?

일단 기다리는 거지.

뭘 기다리냐고?

우리 제이슨이 재판받고 한다고 얼마나 힘들었겠어? 스트레스가 얼마나 많았을 거야?

그런 제이슨이 아, 이제 이렇게 살면 안 되겠다. 갱생해야지. 착하게 살아야지. 그런 생각을 할까?

아니, 바로 약부터 찾을걸?

박승환이 말로는 자기 아버지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이 진짜 악랄한 사람들이라서, 제이슨이 다시 약을 찾아다니면 바로 캐치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즉, 집행유예 이후에 새로운 범죄가 탄생하는 거고, 그러면 우리 제이슨은 진짜로 감옥에 가신다는 말이다.

콩밥! 콩밥이다!

“너는 진짜 나쁜 놈이다.”

박승환이 그런 생각을 하는 날 보며 말한다.

그러는 지는?

너도 똑같은 놈이야!

***

나는 서현 님에게 그런 설명을 하면서 한편으로는 마음속 깊은 곳에 어떤 두려움 같은 게 있었다.

‘한수 씨는 아주 나쁜 사람이네요.’

그런 이야기를 들을까 봐.

하지만 그런 내 걱정과는 달리 서현 님은 경쾌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저는 마음에 들어요.”

역시. 우리 서현 님도 같은 사람이었어.

악을 미워하고 정의를 사랑하는 사람이었어.

아무튼 우리 서현 님의 재가도 떨어졌으니, 이제 남은 것은 함정을 파놓고 기다리는 것뿐이었다.

“하지만 그 전에 또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은데요.”

직장인 아니시랄까 봐 서현 님이 결재 서류를 검토하는 상사 모드로 말씀하신다.

“일단, 그 윤기훈이라는 학생이 증언을 번복하고, 장영호라는 사람이 나온 CCTV 영상이 증거로 있다고 해도…. 제이슨, 그 사람을 상해죄로 고발하기에는 좀 역부족이 아닐까 싶은데요.”

예리한 서현 님. 정곡을 찌르시네.

맞는 말이다.

윤기훈이 증언을 번복하고, 장영호의 얼굴이 나온 CCTV 영상을 제출하고, 내가 사실 날 때린 놈은 장영호고, 장영호는 제이슨 그 새끼의 사주를 받았대요! 그렇게 외친다고 해서 될 일이 아니다.

일단 장영호, 그 사람이 인정할 것인가에 대한 문제가 있다. CCTV 영상이라는 증거가 있다. 윤기훈과 나의 증언이 있다고 해도, 장영호가 자백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어떠한 문제가 생길지 모른다.

두 번째로 설사 장영호가 자백했다고 하더라도, 과연 제이슨 그 도촬범과의 연관성을 자백할까?

장영호 같은 인물은 이익에 따라 움직이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자신이 궁지에 몰린 상황이라 하더라도, 그 순간에 어떤 방법이 가장 자신에게 이익이 될지를 따질 것이다.

사주를 받았음을 밝혀 제이슨 임을 끌고 가는 것과 숨겼을 때 얻을 이익을 따져봤을 때, 과연 어디로 저울추가 옮겨질까?

만약 내가 장영호라면? 당장의 감옥을 피하는 것보다 앞으로의 이익을 추구할 것이다.

그 말은 내가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의미가 된다.

제이슨이 줄 수 있는 이익보다 장영호에게 더욱 큰 이익을 주거나, 아니면, 제이슨이 줄 수 있는 이익을 무가치하게 만들어버리거나.

당연히 내 선택은 후자지.

***

강민철 회장 자택 서재.

강 회장은 언제나처럼 자신의 서재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는 강우현이 앉아 있었다.

“마음에 들지 않나 보구나.”

강우현으로부터 그동안 있었던 일들을 보고받은 강 회장이 장손자를 바라보며 말했다.

“아닙니다.”

강우현이 그렇게 대답했다.

그런 대답을 들었지만, 강 회장은 강우현의 표정에서 손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읽어낼 수 있었다.

“기업의 목적이 무엇이냐?”

강 회장이 물었다.

“고객 가치 창출입니다.”

강우현의 대답이었다.

강 회장은 작게 미소 지었다.

“피터 드러커의 말이지. 다시 물어보마. 기업의 목적이 무엇이냐?”

“…이윤의 창출입니다.”

강우현이 두 번째 대답이었다.

“그래. 그 말이 맞다. 기업의 목적은 이윤을 창출하고 극대화하는 것이다. 기업을 경영하는 입장에서 본다면 작은어르신의 행보는 맞다고 할 수는 없겠지. 하지만 작은어르신이 하시는 일은 경영이 아니시지.”

“….”

“어르신께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시더구나. 아직은 사람의 마음으로 살고 싶으시다고. 어찌 보면 치기 어린 말씀이라고 하실 수도 있겠지만, 나는 어쩐지 작은어르신의 그런 치기가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는구나.”

강우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 네가 물었더랬지. 만약에 신력을 상실하신 작은어르신께서 우리의 힘을 이용하면 어찌해야 할 것인지를.”

“네.”

“그때 내가 물었다.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고. 그러실 것 같냐고. 너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었고. 기억나느냐?”

“기억납니다.”

“나도 잘 모르겠다고 말했었더랬지. 하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작은어르신의 요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작은어르신만의 힘으로 해결하기에는 쉽지 않은 상황이었으니까. 너도 그렇게 생각했기에 준비를 했던 것 아니었느냐.”

“…맞습니다.”

강우현이 말했다.

그때는 모른다고 대답했지만, 마음 한켠에서는 요청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신력이 없이는, 중앙그룹의 힘을 빌리지 않고서는, 절대로 작은어르신만의 힘으로 이 일을 해결할 수 없을 것이라고.

“대견하시지 않으냐?”

강 회장이 물었고, 강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일이 해결된 것은 아니었지만, 작은어르신만의 힘만으로 여기까지 온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번 일을 해결하기 위해 작은어르신이 많은 고민을 하고, 현실적인 어려움이 있었음에도 포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그리고 그러한 고민과 노력이 다른 사람에게 긍정적인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었다.

만약 나라면, 내가 그 입장이라면, 나는 그렇게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강우현의 머리에 맴돌았다.

“이제 어떻게 하실 것 같으냐?”

강 회장이 물었다.

“장영호를 처리하실 겁니다.”

“하실 수 있으시겠느냐?”

“어렵습니다.”

강우현의 대답에 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이 그랬다.

지금까지, 작은어르신의 의지로, 힘으로 개입할 수 있는 수준이었다면, 장영호라는 사람은 작은어르신만의 힘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과제였다.

“어찌할 것이냐?”

강 회장이 물었다.

“손을 조금 보탤 생각입니다.”

강우현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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