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92화 (92/271)

92 : 아버지의 이름으로 (1)

***

“고마워요. 고마워요. 정말 고마워요. 학생들이, 우리 기훈이를 위해서, 기훈이를 위해서…”

윤기훈 할머니는 눈물을 보이시며, 그렇게 몇 번씩이나 우리에게 고개를 숙이셨다.

다행히도, 할머니가 우리의 뜻을 곡해하지는 않으셨나 보다.

하지만 할머니는 성남 집으로 돌아가시겠다고 말씀하셨다.

손자도 손자이지만, 아들을 혼자 둘 수 없다는 이유였다.

뭐, 어찌 보면 당연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지금 상황에서는 손자보다도 아들이 더 아픈 손가락일는지도.

엄마의 마음이 그런 것이겠지.

물론 우리의 계획이 완전히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는 윤기훈 아버지의 알코올 중독 치료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일은 다 하겠다고 말씀하셨다.

사실 치료를 받게 하고 싶었지만 그놈의 돈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시간만 보내다 이런 상황까지 오게 되었다고, 만약 치료를 받을 수 있다면, 입원을 시킬 수 있다면, 꼭 그렇게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그랬다.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할머니의 반의반밖에 살지 않은 우리의 심기를 거스를까 봐, 혹시라도 당신의 말이 우리를 불쾌하게 할까 봐. 거듭 고개를 숙이시며, 조심스럽게 말씀하셨다.

“아니에요. 할머니. 괜찮아요. 그런 말씀 마세요.”

할머니 옆에 앉은 지연이가, 할머니의 주름진 손을 꼬옥 잡고서 말한다.

지금 상황에서 할 말은 아니지만, 지연이 저 녀석 무슨 천사 같구만.

“기훈아. 너의 생각은 어때?”

내가 윤기훈에게 물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 자식아. 너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데!’ 그렇게 강하게 물어보고 싶었지만, 지금 할머니가 계시니 일단은 착한 동네 형 모드로.

“….”

윤기훈이 녀석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아무런 말이 없다.

창회가 그런 녀석의 어깨를 토닥이며 말한다.

“괜찮아. 편하게 너의 생각을 말해봐.”

김창회가 그렇게 말하자, 윤기훈이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한다.

“…부탁드립니다.”

도대체 이 이틀간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아무튼, 그렇게 할머니가 결정을 내리고, ‘프로젝트 윤기훈’ 1단계가 마무리되었다.

일단 할머니는 성남 집으로, 윤기훈이 살 집은 내일 계약, 기훈이 아버지 입원 절차는 최대한 빨리 진행하고, 입원이 진행되면 할머니는 기훈이 집으로 모시는 것으로 그렇게 결정.

중훈이는 다시 성남으로. 할머니 모셔다드리고 일산으로 돌아가려면 고생 좀 하겠네.

기름값 좀 보태줘야겠다.

할머니 모셔다드리는 데 윤기훈과 창회가 동승하면 될 테고. 찬희랑 박승환은 그냥 집에 가고, 나는 지연이 집에 데려다주고 가면 되겠다.

오늘 할 일이 전부 끝났다. 일단 해산. 해산합시다.

뭐 모든 것이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어찌 되었건 오늘 하루 해야 할 일은 끝났다.

***

아니, 완전히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늘 하루 있었던 일들을 우리 서현 님에게 보고해야 하는 마지막 임무가 남아 있었다.

지연이를 집에 데려다주고 나서, 다시 성수동 집으로 가려고 하는데, 갑자기 박승환에게 연락이 왔다.

할 이야기가 있다고, 잠깐 보자고.

다른 때 같았으면 ‘응. 싫어. 꺼져.’하고 쿨하게 씹었을 거다.

어디, 우리 서현 님을 만나러 가는 길에 너 같은 잡몸 따위 신경이나 쓰겠냐?

하지만 나는 왠지 그 녀석을 만나야 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몇 시간 전, 카페에서 보여준 그 표정과 관계가 있을 것 같다는 그런 느낌이….

그래서 그 자식을 만나기 위해 나는 선릉역으로 발걸음을 돌렸다.

약속한 카페에 올라가니 박승환이 심각한 표정을 하고 앉아 있다.

“뭔데? 별거 아니면 죽는다.”

나는 애써 장난스러운 말투로 그렇게 말하며 녀석의 앞에 털썩하고 앉았다.

평소 같으면 역시 개드립으로 맞받아쳤을 박승환이 오늘은 어쩐지 조용하다.

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다가 가방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회사에서 사용하는 서류봉투였다.

“….”

나는 바로 봉투로 손을 가져가지 않았다.

봉투를 열어보는 대신,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이거였구나.

승환이 녀석이 이 봉투 때문에 아까 그런 표정을 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다른 친구들에게는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기다렸다가 나를 다시 불러냈을 것이다.

“열어봐.”

박승환이 말했다.

나는 그런 박승환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봉투를 집어 들고 열었다.

봉투 안에는 두 장의 서류와 한 장의 사진이 들어 있었다.

나는 가장 먼저 사진부터 꺼내 들었다.

주택가로 보이는 곳에서 배전함을 열고 있는 한 남자의 사진이 찍혀있었다.

제이슨 임. 사진 속 남자는 도촬범 그 새끼였다.

나는 사진에서 시선을 떼고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박승환은 아무 말 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다시 봉투 안에 있는 서류를 꺼내 들었다.

서류에는 SNS 메신저 대화 내용, 그리고 가상화폐 송금내역, 마지막으로 가상화폐 계좌와 연결된 은행 계좌와 계좌 주인에 대한 신상이 적혀 있었다.

나는 다시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그 녀석은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마약?”

내가 물었고, 박승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다시 사진을 바라보았다.

배전함을 열고 있는 도촬범의 모습.

박승환의 말대로라면 마약을 거래하는 장면이라는 이야기다.

“던지기.”

박승환이 설명을 시작했다.

“입금이 확인되면 마약 판매상이 주택가에 마약을 숨겨놔. 에어컨 실외기, 우체통, 화단, 배전함처럼, 어디에나 있지만 사람들의 관심을 끌지 않는 그런 장소에 마약을 숨겨두고, 구매자에게 위치를 알려주면 구매자는 찾아가서 마약을 찾는 거래방식을 던지기라고 불러.”

나는 고개를 들어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이게 그 사진이라고?”

“그래.”

“누가 찍은 건데?”

“판매자.”

“판매자가 왜 이 사진을 찍은 건데.”

“보험용, 또는 협박용으로.”

박승환이 말했다.

나는 사진을 손에 든 채로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다.

너무 많아서 무엇부터 물어봐야 하는지 머릿속이 복잡했다.

“너는 그런 사실을 어떻게 아는 건데.”

내가 물었다.

박승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이 사진과 서류는 어떻게 구한 건데?”

역시 박승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사진과 서류를 다시 봉투에 담았다. 그리고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그리고는 박승환에게 얼굴을 가까이하고 그 녀석에게만 들릴 만한 목소리로 나직하게 말했다.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데?”

***

서초동 중앙그룹 본사, 17층 글로벌전략기획실 3팀장 사무실.

강우현은 자신의 사무실에 앉아서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었다.

모니터에는 파일 하나가 떠 있었다.

20분 전 사내 메일을 통해 그에게 전달된 보고서였다.

중앙그룹은 그 어느 회사보다 보안에 철저하게 신경을 썼다.

특히 강우현이 소속되어 있는 글로벌전략기획실 소속 인원들은 다른 중앙그룹 직원과는 다른 종류의 사내 메신저와 이메일 프로토콜을 사용했다.

지금 그가 보고 있는 보고서도 그러한 절차를 거쳐 전달된 보고서였다.

암호화되어있는 보고서는 작성한 발신자와 수신자인 강우현을 제외한 그 누구도 열람할 수 없었다.

“그런 거였군.”

강우현은 보고서를 보면서 작게 중얼거렸다.

강우현은 어제 여동생인 강서현이 작은어르신 계좌에 3천만 원을 송금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물론 강서현이 이야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던 돈이었으니, 보고할 필요는 없었다.

하지만 강우현은 돈의 흐름을 알고 있었다.

궁금했었다.

3천만 원, 적은 돈은 아니었다.

기업의 입장에서 3천만 원은 그리 큰돈은 아니었지만 대학생인 작은어르신에게 3천만 원은 절대로 적은 돈이 아니었다.

그리고 그 3천만 원의 용처가 보고서에 적혀 있었다.

이렇게까지 일을 번거롭게 진행할 필요가 있었을까?

강우현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장영호, 그리고 제이슨 임이라는 최종 목표에게 다가가기 위해 윤기훈이라는 실마리에 접근한다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해 못 하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작은어르신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우현이 보기에 윤기훈은 도구에 불과했다. 최종 목표로 접근하기 위한 도구였다. 그리고 도구인 윤기훈을 위해 저렇게까지 수고스러움을 자청할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자신이 작은어르신의 생각이나 결정에 개입할 자격이 없다는 것은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조직의 일원이고, 조직 안의 또 다른 조직을 이끄는 사람으로서, 작은어르신의 방법에는 그리 높은 점수를 줄 수는 없었다.

일단 지켜보자.

강우현은 그렇게 생각하며 다른 파일을 열었다.

법무법인 철주에서 보내온 파일이었다.

박기준 변호사, 정확히 말하면 법무법인 철주와 중앙그룹의 관계는 평등했다. 높고 낮음이 없었다. 어르신을 모시는 각각의 기둥으로써 각자의 일을 할 뿐이었다.

그렇기에, 법무법인 철주에서 보내온 파일은 보고서라고 말할 수는 없었다. 꼭 정의하자면 일종의 업무협조공문이라는 표현이 적합했다.

파일에는 박승환이 윤기훈 가족에 대한 보호를 요청했고, 제이슨 임의 마약 관련 증거자료를 건네주었다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과하다.

그것이 강우현의 첫 번째 생각이었다.

대한민국에서 마약이라는 것은 중범죄였다.

판매가 아니라면 크게 처벌받지 않는 외국과는 달리, 한국에서는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특정범죄가중처벌법의 적용을 받았다.

아직 20대 초반, 고작 대학생에 불과한 박승환이나 작은어르신에게는 버거운 소재였다.

하지만 박기준 변호사는 그 증거를 아들에게 건네주었다.

그 증거가 작은어르신에게 전달될 가능성이 있음에도, 아니, 전달하라고 건네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계승 작업을 시작하시려는 겁니까?”

강우현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

“너, 도대체 무슨 짓을 하고 다니는 건데?”

나는 박승환을 바라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나직한 목소리였지만, 박승환은 내 말에 담긴 분노를 느낄 것이다.

그렇다. 나는 분노하고 있었다.

마음 한구석에서 미친 듯이 분노가 피어올랐다.

마약이라고? 제이슨 임 이 자식이 마약을 하고 있다고? 서류봉투에 든 것들이 다 그 증거라고?

다 좆 까고.

내가 분노하는 이유는 박승환이 이 증거를 가져왔다는 것 때문이었다.

저 멍청한 자식이 위험한 영역에 손을 뻗었다는 것이 나를 분노하게 만들었다.

“위험하지 않아.”

박승환이 말했다.

“미친 소리 하지 마!”

마음 같아서는 멱살이라도 틀어잡고 마구 소리를 지르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상황이었으니, 최대한 얼굴을 가까이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강한 시선으로 박승환을 노려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마약이야. 다른 건도 아니고 마약이라고. 판매책이 협박용으로 찍어놓은 사진이 너의 손에 있었는데, 그게 위험하지 않다고? 말이 된다고 생각해? 내가 아무것도 모르는 등신처럼 보여?”

내가 그렇게 으르렁거렸지만 박승환은 여전히 같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숨김없이 말해. 도대체, 이 사진을, 서류를 어떻게 구한 거야?”

박승환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면, 그래서 혹시라도 피해를 볼 가능성이 있다면 최대한 빨리 바로잡아야 한다.

서현 씨, 강 회장님, 아니, 할아버지의 힘을 빌려서라도 바로잡아야 한다.

하지만 박승환은 나와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뭐라고?”

“어디서 구했는지는 중요하지 않다고. 이 증거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중요하지.”

안 되겠다. 일단 나가야겠다. 나는 그렇게 결정을 내렸다.

소리를 지르든, 멱살을 틀어잡든, 패든, 일단 나가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따라 나와.”

그렇게 말하고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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