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9 : 정현식 이사
친구들과 헤어진 박승환은 집에 간다는 말과 달리 집이 아닌 대치역 인근 카페에 앉아 있었다.
몇 시간 전 친구들과 함께 있던 박승환과는 다른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눈앞에 놓인 커피를 바라보고 있었다.
커피잔을 바라보고 있는 그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차갑게 가라앉아 있었다.
친구들 앞에서 한 번도 보여주지 않은 차가운 눈이었다.
‘어쩔 수 없어.’
박승환은 속으로 그렇게 말했다. 그렇게 스스로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렇게 커피잔을 노려보는 박승환에게 누군가가 말을 걸었다.
“많이 기다리셨습니까?”
박승환은 고개를 들어 목소리의 주인을 바라보았다.
짙은 색 양복을 입은 건장한 체격의 장년 남자가 박승환을 바라보고 있었다.
박승환은 자리에서 일어나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갑작스럽게 전화를 드려 죄송합니다.”
박승환의 말에 남자는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듯 가벼운 미소와 함께 작게 고개를 숙였다.
“신경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장년 남자는 그렇게 말하며, 박승환 맞은편에 앉았다.
“갑자기 어쩐 일이신지.”
장년 남자가 물었다.
박승환은 대답 없이 그런 남자의 얼굴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잠시 동안 말없이 장년 남자를 바라보던 박승환의 입이 열렸다.
“부탁드릴 것이 있습니다.”
박승환이 말했다.
“말씀하시죠.”
장년 남자가 말했다.
“장영호에 관한 일입니다.”
박승환의 말에 장년 남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내용을 알고 있다는 신호였다.
박승환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했다.
눈앞에 있는 장년 남자, ‘법무법인 철주’의 보안담당 최고 책임자인 정현식 이사는 박기준 변호사의 오른팔이었다.
당연히 그도 이번 일에 대해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어쩌면 박승환이 모르는 것을 정현식 이사는, 아버지는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하시길 원하십니까?”
정현식 이사가 물었다.
박승환은 정현식 이사가 모르고 있을 사실을 말해 주었다.
어제, 그리고 오늘 일어난 일이었다.
물론 모든 것을 다 이야기해준 것은 아니었다.
장영호에게서 윤기훈을 빼내 왔다는 것이 내용의 핵심이었다.
정현식 이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박승환의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그러나 무표정한 얼굴과는 달리 정 이사는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한 시간 전, 박승환의 전화를 받았을 때, 이번 일에 관한 부탁일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것이 아니라면 5년 전, 그날 이후로 단 한 번도 연락을 하지 않았던 소계주가 자신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예상대로 이번 일에 관해서였다.
하지만 그 내용은 예상과는 달랐다.
자수했다는 학생의 가족들을 보호해 달라. 그게 박승환의 요청이었다.
“장영호에게 경거망동하지 말라고 경고하면 되겠습니까?”
박승환의 말을 들은 정현식 이사가 물었다.
박승환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감시만 붙여주세요. 혹시라도 일이 생기면 막아주시고.”
박승환의 말이었다.
정현식 이사는 말없이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장영호를 처리해 달라. 또는 장영호를 압박해 이번 일이 자신이 일으킨 일임을 자백하게 해달라.
그런 요청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려울 것은 없었다.
장영호쯤은 정현식 이사의 손짓 한 번이면 날려버릴 수 있었으니까.
하지만 박승환의 요청은 예상과는 달랐다.
장영호에 대한 것이 아니라, 자수한 가해자의 가족을 보호해달라는 것이었다.
그것도 직접 장영호에게 손을 쓰지 말고, 간접적으로만.
“가능은 합니다.”
정현식 이사가 말했다.
박승환은 정현식 이사를 바라보았다.
가능은 하다. 하지만.
뒤에 따라 나올 말이 있었다.
“변호사님의 허락이 선결되어야 합니다.”
정현식 이사가 말했다.
거짓말이었다. 그 정도의 일쯤은 박기준 변호사의 허락 없이 정현식 이사의 권한으로도 충분했다.
하지만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5년 전 그날 이후, 서로에게 손을 뻗지 않는 부자간에 화해의 다리를 놓으려는 것은 아니었다.
그저, 걸음마를 떼지 못하는 아기 때부터 보아왔던, 이제는 성인이 되어버린 미래의 주인이 어떠한 결정을 할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이유를 불문하고 지시 하나를 따르겠다, 그렇게 전해 주세요.”
박승환의 말이었다.
이유를 불문하고 지시 하나를 따른다.
정현식 이사는 박승환의 말을 속으로 다시 되뇌었다.
별것 아닌 일이다. 그런 별것 아닌 일에 대한 대가로는 상당했다.
그가 모시는 박기준 변호사는 약점은 보완하고 이점은 철저하게 공략했다. ‘이유를 불문하고’라는 단서는 박승환에게 불리하게, 그것도 매우 불리하게 작용할 가능성이 있었다.
“알겠습니다. 언제부터 시작하면 되겠습니까?”
정현식 이사가 말했다.
“빠를수록 좋습니다.”
박승환이 말했다.
정현식 이사는 전화기를 꺼내 들었다.
그리고는 박승환이 보는 앞에서 지시를 내렸다.
장영호를 감시하고, 윤기훈의 본가에 사람을 보내라는 지시였다.
박승환은 그 모습을 보면서, 정현식 이사가,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이번 사건에 대해 조사를 마쳤고, 많은 부분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하나로 이유를 규정할 수 없는 불쾌감이 피어올랐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전화를 끊은 정현식 이사가 말했다.
박승환은 고개를 끄덕였다.
30년 가까이 어둠의 세계에 강한 영향력을 발휘해온 남자의 말이었다.
그가 걱정할 필요 없다고 했으면, 그대로 될 것이다.
“다른 도움은 필요하지 않으십니까?”
정현식 이사가 물었다.
박승환은 고개를 저었다.
불쾌감은 이 정도로 충분했다.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정현식 이사는 그렇게 말하고는 가방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냈다.
“이건 제가 도련님께 드리는 개인적인 선물이라고 생각해 주십시오.”
정현식 이사가 베이지색 서류봉투 하나를 책상에 내려놓으면서 그렇게 말했다.
***
지연이를 바래다준 나는 바로 집으로 가는 대신, 신림동으로 갔다.
외상값 갚으러.
“야, 임마! 이런 건 뭐하러 사 왔어? 그나저나 생각보다 많이 안 다쳤나 보네. 걱정했는데, 다행이다.”
고깃집 사장 형님이 내가 사 온 홍삼 박스를 바라보며 그렇게 말한다.
“형님. 죄송해요. 입원하고 퇴원하고 한다고 정신없어서 그날 고깃값을 미처 생각을 못 하고 있었어요. 얼마 나왔어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 외상값 드리려고 5만 원짜리를 현찰로 다섯 장 뽑아왔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마지막으로 확인했을 때, 대략 15만 원 언저리였는데, 설마 내가 후드려 맞는 그 사이에, 미친놈들이 10만 원어치를 더 처먹지는 않았겠지.
“고깃값? 그거 받았는데?”
“네?”
내가 되물었다. 그저께, 모였을 때, 분명 아무도 안 냈다고 했는데?
“그제 밤에 중훈이가 와서 주고 갔어. 늦어서 미안하다면서. 짜식이 현찰 찾아왔더라고.”
이중훈이?
“네? 저번에 이야기하기로는 그냥 CCTV만 물어보고 왔다고 하던데요?”
“어. 그건 그그저껜가? 아무튼 더 전에. 그저께는 고깃값만 주고 가고.”
“…그랬어요?”
“그런데 니들 싸웠냐? 왜 다 따로 오고 난리야?”
“네? 따로 오다뇨?”
“아니, 중훈이 녀석 오고 나서, 창회랑 찬희랑 승환이랑 다 돈 낸다고 각자 왔더라니까. 네가 제일 꼴찌다.”
형님은 그렇게 말하며 껄껄껄 웃는다.
아이고. 이 미친놈들. 지들이 무슨 돈이 있다고.
특히 창회 그 자식은 자취한다고 생활비도 많이 들 텐데. 정신 나간 놈 같으니!
아무튼 그건 그거고, 그날 돈 안 냈다고 했더니, 이 자식들 바로 행동에 들어갔나 보다.
아니, 그럴 거면 이야기해서 돈을 모아 가든가, 지들이 무슨 의좋은 형제도 아니고, 남들 모르게 각자 움직이고 있어.
“그래도 홍삼 사 온 사람은 저밖에 없을 것 같은데요.”
“그래. 홍삼 사 온 사람은 너밖에 없다. 근데 뭐 학생이 이런 걸 사 왔어. 이거 비싼데. 야. 그리고 내가 나이가 몇인데 홍삼은 무슨 홍삼이냐. 가져가서 부모님이나 드려 임마.”
“아. 이거 싼 거예요. 부모님 드렸다가는 불효자 소리 들어요. 일단 여기다 둘께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카운터 깊숙한 곳에 홍삼액이 든 쇼핑백을 밀어 넣었다.
“허. 그 자식. 말 진짜 더럽게 안 듣네.”
사장 형님은 그렇게 말했지만, 내심 싫지는 않나 보다.
“그리고 형님. CCTV 영상 모아놓으셨다고.”
“어. 그래. 마침 잘 왔다. 용량이 좀 돼서, 이걸 어떻게 줘야 할지 모르겠네.”
“제가 내일, 아니, 조만간 외장 하드 가져와서 받아갈께요. 일단 제가 좀 볼 수 있을까요?”
“그럴래? 저기 가면 컴퓨터 있거든. 거기 바탕화면에 CCTV 폴더 있으니까 그거 확인해봐.”
형님이 내실로 사용하는 방을 가리킨다.
“감사합니다.”
그렇게 말하고 그쪽으로 가는데 사장 형님이 무언가 생각났다는 듯 나를 부른다.
“아! 그리고!”
“다른 폴더는 건드리지 않겠습니다. 기본 예의죠.”
내가 말했다.
“…고맙다.”
사장 형님이 말씀하신다.
***
하. 이 양반. 이거 바탕화면에 깔아두는 스타일이구만. 자고로 중요한 파일은 따로 모아서 분류를 해둬야지. 조류연구가도 아니고, 무슨 새 이름 폴더가 이리도 많은지.
하지만 나는 그런 폴더는 건드리지 않았다. 사람의 탈을 쓰고 남의 직박구리는 건드리는 거 아니라고 배웠다.
CCTV 폴더를 여니 다양한 종류의 영상파일이 대략 열다섯 개 가량 들어있다. 파일마다 술집이나 식당 이름이 쓰여 있는 걸로 봐서 사장 형님이 분류를 해놓으셨나 보다.
하. 그 형님. 쓸데없이 사람 찡하게 하네. 홍삼 좀 더 비싼 걸로 사 올 것을 그랬나?
아무튼 나는 파일을 하나하나 클릭해서 영상을 재생시켰다.
중훈이가 말한 대로, 화질은 조악했다. 4K는 아니어도 720p 정도는 바랐는데, 대부분이 360p이다. 아니, 240p도 있네.
화질도 낮은데, 금요일 밤 신림동 술집 골목이라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사람은 또 무지하게 많다.
큰 기대를 안 하기는 했지만, 이런 상황이라면 영상이 아무런 가치가 없을 것 같은데.
그런 생각을 하면서 영상을 하나, 하나 확인하는데, 마지막 파일에서 단서가 하나 잡혔다.
다른 영상보다 파일 크기가 커서 혹시나 하고 기대를 했는데, 역시나 화질이 지금까지 보았던 그 어느 것보다 선명하다.
화질도 화질이지만, 구도가 좋다.
내가 다구리 당하던 골목을 비추는 것은 아니지만, 골목 입구에서 신림역 방향을 정면으로 비추고 있다.
만약 날 습격한 그놈들이 일을 마치고, 신림역 방향으로 걸어갔다면, 그놈들의 뒷모습이 찍혔을 가능성이 있었다.
나는 동영상 재생 프로그램의 배속을 늦추고, 영상을 집중해서 보았다.
사람들, 사람들, 수많은 사람들.
혹시나 놓칠까 봐, 그 수많은 사람들의 뒷모습을 집중해서 지켜보았다.
얼마나 집중했는지, 눈이 뻑뻑하다는 느낌이 들 때쯤, 내 눈에 무언가가 잡혔다.
한 무리의 남자들이.
나는 스페이스 바를 눌러 영상을 멈추었다.
화면에 보이는 사람의 수는 대략 다섯에서 여섯. 하나같이 짧은 머리에 건장한 체격을 하고 있다.
마치, 윤기훈처럼.
아쉬운 것은 뒷모습이라는 것이었다.
나는 재생속도를 최저로 늦추고, 다시 재생 버튼을 눌렀다.
남자의 무리는 비정상적인 속도로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다.
그런 그들의 모습을 나는 단 한 프레임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맨 앞에서 남자의 고개가 움직였다.
천천히, 마치 영화의 슬로우 모션처럼 천천히 남자의 고개가 돌아간다.
그리고 남자의 고개가 완전히 멈추었을 그때, 나는 재차 스페이스 바를 눌렀다.
난폭함이라는 단어가 문신처럼 새겨져 있는 얼굴을 가진 남자.
장영호.
나는 그 남자가 바로 장영호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