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 : 욕심
집으로 가는 지하철 안,
박찬희가 요상한 얼굴로 말한다.
“포커 쳐본 적 있어? 원래 가장 좋은 패는 맨 마지막에 까는 거야.”
그렇게 과장된 표정으로 날 흉내 내자 지하철 안인데도 이중훈이 웃음을 터트린다.
이 자식들이.
옆을 보니 지연이도 웃음을 참고 있다.
“그러지 마라. 불쌍한 친구 놀리고 그러는 거 아니야.”
박승환이 그렇게 말하자, 지연이는 결국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트린다.
아오. 진짜 씹새들.
나도 말하고 아차 싶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지하철에서까지 이 난리를 칠 필요는 없잖아.
“올해가 아직 많아 남았지만, 자신하건대, 올해 가장 병신 같은 허세가 될 거야.”
그렇게 말한 박찬희는 다시 요상한 표정을 짓는다.
“가장 좋은 패는….”
나는 그런 박찬희의 배에 있는 힘껏 훅을 꽂아 버렸다.
사람이 말야. 참는 데도 한계가 있는 법이야.
***
천호동에 사는 박찬희가 군자역에서 내렸고, 대치동에 사는 박승환은 강남구청에서 내렸다.
하지만 나는 계속 지하철을 타고 가고 있었다.
성수동 집으로 가려면 건대입구에 내려서 2호선으로 갈아타고 뚝섬역으로 가야 하지만, 지연이를 집까지 데려다주기 위해, 나는 계속 지하철을 타고 3호선으로 갈아탈 수 있는 고속터미널을 향해 가고 있었다.
옆자리에 앉은 지연이는 아무런 말이 없다. 뭔가를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전방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다.
나는 그런 지연이를 힐끗힐끗 훔쳐보았다.
뭐, 이 녀석이랑 둘이서 집에 가는 게 처음도 아닌데 오늘은 이상하게 신경이 쓰인다.
아까 전 지연이랑 손잡고 거리를 걸어 다녔던 것이 자꾸 떠오르니까.
뭐 위장이었으니까, 연기한 거였으니까 생각해보면 별것 아닌데 나도 사람인지라 신경을 안 쓸 수가 없다.
아무튼, 다른 날 같았으면,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고 계십니까? 하면서 말을 걸었겠지만 오늘은 그 한마디가 안 나오네.
어색하니까 무슨 말이라도 하기는 해야 할 텐데.
“오빠.”
무슨 말을 해야 하나 고르고 있는데 지연이가 말을 걸어온다.
“어? 응?”
“그 사람이요.”
“어? 누구?”
“오빠 때린 그 학생.”
“윤기훈? 응. 왜?”
“어떤 기분이었을까요?”
“뭐가?”
“집에 들어갈 때마다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한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햇빛 하나 들지 않는 집, 연로하고 건강이 좋지 않은 할머니, 술에 취해 있는 아버지.
집이라는 장소는 몸과 마음에 휴식과 안정을 제공하는 장소였어야 했다.
과연, 윤기훈의 그 반지하 집은 휴식과 안정을 제공하는 장소였을까?
“얼마 전에 소득수준에 따른 교육격차에 대한 레포트를 썼었어요.”
“교양수업?”
“네. 레포트 쓴다고 자료를 찾아봤는데, 소득수준에 따라 학업 성취도에 차이가 있더라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 서울 산다고 전부 다 명문대 가는 것도 아니고, 강남 산다고 전부 다 한국대 들어오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지역별로 분류하면 확실히 지방보다 서울과 수도권 출신 비율이 높다. 서울에서도 소위 8학군이라고 불리는 강남권 비율이 높고.
그 친구들 이야기 들어보면 쉽게 공부했다고 말한다. 한국대 갈 실력이 되니까 집에서도 팍팍 밀어줬다는 말이다.
반면에, 상대소득이 낮은 지방의 경우 그런 지원은 쉽지 않다.
예전 우리 삼촌들, 아니 삼촌의 삼촌들이 대학 다니던 시절에는 개천에서 용이 나오는 경우도 있다고도 했지만 요즘은 확실히 서울 쪽이 강한 것이 사실이다.
“또 다문화 가정의 학업 중단율이 상대적으로 높더라고요. 특히 고등학교는 더욱 그렇고. 솔직히 조금…. 아니, 좀 많이 놀랐었어요.”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더니, 잠시 말을 멈춘다.
“저는, 학교도, 학원도, 독서실도 전부 엄마가 태워다 줬어요. 그래서 다른 거 신경 안 쓰고 공부만 하면 됐었어요. 독서실에서 진짜 공부하기 싫을 때, 얼른 집에 가서 침대에 눕고 싶다. 그런 생각 했어요. 집에 가면, 내 방, 내 침대에 누워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어요.”
“….”
“내 주위에 친구들도 다 그랬으니까 그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랬는데 오늘 그 학생을 보니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집에 가는 게 행복했을까? 집에 가고 싶다고 생각했을까?”
“내 주위에도 그런 친구들이 있었어.”
내가 말을 시작하자, 지연이가 날 바라본다.
“나도 시골 출신이니까. 아무래도 시골은 서울보다는 상대적으로 소득수준이 낮지. 돈이 없으면 이런저런 문제들이 생기고, 그런 문제들이 또 다른 문제를 만들고. 그 녀석처럼 집에 문제 있는 녀석들은…. 집에 잘 안 들어가려고 하고. 사실 딱히 큰 문제 없어도 시골에는 맞벌이가 많거든. 그러니까 집에 가봤자 인터넷이나 TV 보는 거 말고는 딱히 할 게 없으니까 자꾸 밖에서 놀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쁜 짓도 하게 되고. 나도 참 사고 많이 쳤는데.”
“오빠도요?”
“고2 때까지는 공부 그렇게 열심히 안 했어. 경찰서 갈 정도의 사고를 친 적은 없지만, 그렇다고 공부 열심히 하는 모범생 그룹은 아니었지.”
“그런데 어떻게 우리 학교 왔어요?”
“유 선생님 책을 봤거든. 고2 여름방학에.”
“유…주원 교수님이요?”
“어. 유 선생님 책을 보고 진짜 감동 받았거든. 저런 분 밑에서 공부하면 괜찮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지연이는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있다.
“근데 알고 보니 그분이 한국대에 계시더라. 그래서 뭐.”
“그럼 1년 반 동안 수시 준비해서 우리 학교 온 거예요?”
“아니. 난 정시. 1학년 때부터 하도 놀아서. 수시로는 방법이 없었거든. 아무튼,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윤기훈이 그 자식. 운동은 왜 그만뒀는지 몰라도, 아마 운동 그만두고 방황 많이 했을 거야. 그 회사에 간 것도 숙식이 보장되니까 그런 것도 있을지 모르고.”
내 말에 지연이가 고개를 끄덕인다.
“내가 얼마나 봤다고 그 자식에 대해서 알겠냐마는. 모르지, 알고 보면 희대의 싸이코패스 살인마일지. 이건 좀 오반가?”
“싸이코패스는 아닐 거에요.”
“그걸 유지연 씨가 어떻게 아세요?”
“할머니 이야기할 때, 눈이 간절했어요.”
“눈?”
“네. 할머니를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감정이 결여된 싸이코패스는 아닐 거예요.”
그 말에 나는 작게 웃었다.
“그래. 나도 그렇게 생각해.”
어제 그 녀석이 보여주었던 눈빛을, 할머니 이야기가 나왔을 때 보여주었던 눈빛을 보면 알 수 있다. 할머니에 대한 마음이 가득하다는 것을 말이다.
“그나저나, 우리 지연이는 참 똑똑한 것 같아.”
“네?”
“아니지. 똑똑하다기보다는 슬기롭다? 현명하다? wise는 나이 많이 드신 분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 같고, 음…. 마음씨가 깊다? 그건 좀 부족한데. 아무튼,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 지연이는 참 좋은 사람이야. 우리 지연이와 만나고 친해지게 된 건 진짜 행운이고 행복이다.”
나는 그렇게 오늘의 지연이를 칭찬해 주었다.
그런데, 그런 내 칭찬이 무언가 마음에 안 들었는지 지연이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인다.
그리고는 가는 내내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
헤어질 때, ‘안녕히 가세요’ 말고는 단 한마디도.
***
유지연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침대에 누워 자신의 손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의 가늘고 긴 손가락을 바라보고 있었다.
손을 잡았고, 깍지를 꼈다.
남자 손을 처음 잡아본 것은 아니었지만, 깍지는 처음이었다.
용기를 냈다.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말은 했지만, 손을 잡자는 말에는 많은 용기가 필요했다.
물론 핑곗거리는 있었다. 연인처럼 보이려면 손을 잡는 것이 더 자연스러워 보인다는 핑계가 있었기에, 조금 더 용기를 낼 수 있었는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그럴 생각은 아니었다. 처음 한수를 따라나설 때만 해도, 그저 순수하게 위장을 돕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 마음이었는데, 팔짱을 끼고, 그와 발을 맞춰 걷고, 연인 같은 대화를 하면서 마음속에서 욕심이 피어올랐다.
그래서 용기를 냈고, 손을 잡았고, 깍지를 꼈다.
유지연은 그렇게 한참 동안 비어있는 손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베개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자, 조금 전 한수가 해주었던 말이 다시 그녀의 머릿속에서 재생되었다.
-아니지. 똑똑하다기보다는 슬기롭다? 현명하다? wise는 나이 많이 드신 분들에게나 어울리는 단어 같고, 음…. 마음씨가 깊다? 그건 좀 부족한데. 아무튼, 알고는 있었지만 우리 지연이는 참 좋은 사람이야. 우리 지연이와 만나고 친해지게 된 건 진짜 행운이고 행복이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유지연의 머릿속에서는 쿵 하고 천둥소리가 울렸다.
그런 칭찬을 처음 들어 본 것도 아니었는데, 특별한 말도 아니었는데, 그의 말에 유지연의 심장은 마치 단거리 전력 질주를 한 것처럼 빠른 속도로 뛰기 시작했다.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 없었다.
왜 그랬을까? 손을 잡아서? 깍지를 껴서?
유지연은 마음속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니다. 그런 작은 스킨십 때문에 마음이 흔들린 것은 아니었다.
영향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유지연의 머릿속에 한수의 다른 모습이 떠올랐다.
김창회의 자취방, 옹기종기 모여 앉은 그곳에서 앞으로의 계획에 대해서 설명하던 한수의 모습이었다.
그것은 설명이라기보다 설득에 가까웠다. 앞으로 어떻게 하고 싶은지를 친구들에게, 그리고 후배인 자신에게 동의를 구하고 있었다.
보증금으로 삼천만 원.
삼천만 원. 대학생에게는 쉽게 상상할 수 없는 큰돈. 아니, 일반 직장인에게도 부담이 되는 거액을 빌려주겠다는 내용이었다.
유지연은 그의 생각을 지지한다는 의사표시로 20년 동안 모아온 세뱃돈을 빌려주겠다고 말했지만, 마음속 한켠에는 그런 생각이 남아 있었다.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있을까?
그런 생각은 이어진 한수의 말에, 어떻게 할머니를 모셔올지, 학생의 아버지를 어떻게 입원시킬지에 대해 설명하는 한수의 진지한 얼굴에 천천히 사라져갔다.
마음속에 자리하고 있는 그의 존재가 조금 더 커지는 느낌을 받았다.
유지연은 눈을 떴다.
그리고 다시 자신의 손을 바라보았다.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그의 손이 있었다. 그의 온기가 있었다.
“…어떻게 하지.”
유지연이 나직하게 속삭였다.
“자꾸 욕심이 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