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7 : 매수 (3)
한 시간 반 후.
나는 골목에 숨어 주변을 살펴보고 있다.
박승환이 윤기훈을 픽업하기 위해 김창회를 데리고 사가정역으로 갔다. 혹시 무서운 아저씨들 따라왔으면 탱시킨다고.
그렇게 윤기훈을 픽업한 박승환과 김창회는 혹시 모르니 면목 삼팔파출소 바로 앞에 위치한 카페로 데려갔고, 나는 카페에서 적당히 떨어진 곳에 서서, 혹시 무서운 아저씨들이 따라오지 않았나 주변을 감시하고 있다.
“오빠. 특별히 따라온 사람은 없는 것 같은데요?”
나와 같이 감시 임무를 부여받은 지연이가 말한다.
나는 그렇게 말하는 지연이를 돌아보다 다시 얼굴을 돌린다.
아오. 이 녀석. 왜 이렇게 가까이 붙은 거야!
지연이는 지금 내 팔짱을 끼고 있다.
단지 팔짱만 끼고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옆에 몸을 찰싹 붙이고 있다.
지금 지연이는 내 여자친구로 위장하고 있는 중이니까.
윤기훈이 혼자 왔는지, 아니면 누구를 데리고 왔는지를 확인하기 위해 지나가는 행인처럼 적당히 거리를 두고 주변에서 살펴보려고 했는데, 지연이가 같이 가자고 말했다.
‘데이트하는 연인처럼 붙어 다니면 의심을 덜 사지 않을까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했고, 지금 팔짱을 낀 채로, 내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알고는 있었는데, 이렇게 몇십 센티미터 거리에서 가까이 보니까, 이 녀석, 뭐 이렇게 예쁜 거야? 얼굴에 잡티 하나 없네.
지금 지연이의 귀엽고 예쁘고 깜찍함을 신경 쓸 상황은 아니지만, 이렇게 옆에 찰싹 붙어있으니, 심장박동이 자꾸 빨라진다.
분위기 파악 못 하는 부교감신경 같으니라고!
“오빠. 혹시 수상한 사람 있어요?”
지연이가 물어본다.
“아니. 없는 것 같기는 한데.”
“심장이 엄청 빨리 뛰는데요?”
너 때문이야!
하지만 그렇게 말할 수는 없지.
“…한 바퀴 더 돌아보자.”
나는 그렇게 말하고 지연이와 다시 골목에서 길가로 빠져나왔다.
밖으로 나오자 지연이가 더욱 몸을 밀착한다.
나도 안다. 지연이가 최선을 다해 연인의 모습을 연기하고 있다는 것을.
문제는 지연이 이 녀석이 너무 예쁘다는 것이다.
지나가는 XY 염색체 보유자들이 다 나를 힐끗힐끗 쳐다본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먼저 지연이 얼굴 보고, 내 얼굴 보고, 다시 지연이 얼굴 보고, 내 얼굴 본다.
마지막 표정은 다들 동일하다.
‘왜 너 같은 놈 옆에 저렇게 예쁜 여자가….’
다들 그런 표정이다.
눈에 띄지 않겠다고 지연이랑 같이 나왔는데, 이 녀석이 하도 예쁘니 더 눈에 띈다.
그렇다고, 이렇게 열심히 연기하는 녀석에게 눈에 띄니까 떨어져 걷자고 말할 수는 없잖아.
그러니 내 입장에서는 어색한 걸음이 계속 이어질 수밖에.
“덩치는 큰데, 얼굴은 아직 고등학생 같네요.”
지연이가 말한다.
윤기훈, 그 녀석에 대한 이야기다.
“유도한 것 같더라고.”
“그렇구나.”
지연이가 알겠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얼굴 찡그려! 최대한 못난 얼굴 하란 말이다!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지. 이 녀석에게는 못난 얼굴이라는 건 없을 거야.
“오빠. 우리 손 잡을까요?”
지연이가 말한다.
“소, 손?”
“네. 다른 커플들 보니까 팔짱보다 손잡은 커플이 더 많은 것 같아요. 자연스럽게 보이려면 우리도 손잡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는 팔짱을 풀었다. 그리고는 내 손을 덥석 잡는다.
손잡는 데서 그치는 것도 아니고, 깍지를 낀다.
어머. 얘 봐봐. 너무 훅 들어오는데?
심장박동수가 올라간다. 온몸의 혈액순환이 빨라진다. 이거, 손에 땀 나는 거 아냐?
“오빠. 저쪽으로 한번 가봐요. 누가 숨어있다면 저쪽이 가능성 있을 것 같아요.”
지연이가 그렇게 속삭이며, 나를 다른 방향으로 이끈다.
한수, 이 자식아! 정신 차려! 지금 지연이가 이렇게 열심히! 이렇게 진지하게 임하는데, 너는 욕정에 눈이 멀어 있는 거냐?
아니야! 욕정은 아니야! 이건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나 정도 되니까 지연이 옆에서 이렇게 버텼지, 다른 놈 같았으면 벌써 기절했어!
내 마음 안에서는 두 개의 마음이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
내가 밖에서 그 난리를 피우는 동안 박승환과 김창회는 윤기훈을 심문했다.
정확히 말하면 심문을 하다가 어느 순간부터 상담 모드로 바뀌었다고 했다.
“그 녀석. 심성이 나쁜 놈은 아니네.”
김창회의 평가다.
마음에 들었나 보다.
몸이 좋구나. 3대 얼마까지 칠 수 있지? 유도할 때는 근육 어떻게 키웠는데? 지금도 틈틈이 운동하고 있고?
뇌까지 근육으로 단련이 된 김창회는 그런 질문을 하다가 ‘헬창 =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논리회로를 돌려 버렸나 보다.
이 자식아. 그 성실하고 좋은 사람이 날 때렸다고!
아무튼, 나와 지연이가 그렇게 밖으로 도는 사이, 박승환과 김창회는 생각보다 많은 정보를 얻어냈다.
일단, 그날 현장에 나타났던 중년 남자는 박승환이 말한 장영호라는 인간이 맞았다.
경기도 광주에서 철거 전문 건설회사를 운영하고 있는데, 말만 건설회사지 실제로는 철거용역을 동원해주는 깡패라는 말이다.
윤기훈처럼, 운동하다가 중간에 그만둔 아이들, 특히 집안 사정이 어려운 애들에게 숙식을 제공해 준다는 핑계로 합숙소에 모아놓고 교육을 시킨다고 하더라.
그런 내용의 영화를 본 적은 있지만, 진짜 그런 일이 있기는 있구나.
아무튼, 그렇게 합숙소에 있었는데 어느 날 출동명령이 떨어졌고, 나를 노렸단다. 나는 몰랐는데, 내가 습격당한 그날이 3주째였다는 거다.
금요일을 실행일로 잡아놓고, 내 주변을 미행했단다. 그동안 내가 학교만 끝나면 우리 서현 님 품으로 달려가 버려서 기회를 잡을 수 없었는데, 그날 마침 딱 걸려들었다는 거다.
그 이야기를 듣는데, 등골이 오싹하다.
도대체 도촬범 그 자식은 얼마나 준다고 했기에, 그렇게 조직적으로 움직인 거지?
아무튼, 그날, 내가 식당에 있을 때, 윤기훈 그 자식은 나에게 전화를 하라는 지시를 받아서 전화를 했고, 뭔가 잘못된 것 같다는 불길한 기분을 느꼈지만, 이미 일은 벌어진 거지.
할머니 품에 있던 백만 원은 예상한 대로 포상금이 맞았다.
경찰서에 가서 자수하고, 조사받고 나오니 룸살롱에 데려갔단다.
미성년자를 룸살롱에 데려갔다고?
장영호! 이 미친 인간 같으니!
룸살롱에 데려가서 그 봉투를 건네줬다는 거다. 친구들하고 술이나 한잔 마시라고 하면서.
변호사도 고용했고, 법적인 준비도 하고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하면서, 집이 어디인지 알고 있으니 허튼 생각하지 말라는 말도 빼먹지 않았고.
거기까지 들으니 진짜 용서가 안 된다.
도촬범 이 개새끼. 도대체 어디까지 일을 벌인 거야? 네놈의 그 알량한 자존심을 회복하기 위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 거야?
겁나게 처맞던 그날보다 더 빡치네.
아무튼, 윤기훈이 그 자식은 어제 나를 만나서 매우 놀랐고, 안 그래도 잘못한 결정이 아닐까 고민하고 있었는데, 기회를 준다는 내 이야기에 마음이 많이 흔들렸다고, 그래서 결국 마음을 정했다고. 그렇게 말했다.
물론 조건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할머니를 보호해 줄 것.
그게 그 녀석이 제시한 유일한 조건이었다.
아무래도 어제 박승환이 장영호 그 인간의 이름을 알고 있는 것을 보고 우리가 대단한 뭐라도 되는 것이라고 착각한 것 같은데.
뭐 그렇게 착각하게 만들었으니 책임을 져야지.
아무튼 그렇게 1차 조사가 끝난 다음, 우리는 그 녀석을 김창회의 자취방으로 데려왔다.
원래는 모텔을 잡아줄 생각이었는데, 김창회가 자기 집에 데리고 있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그래 준다면 나야 땡큐지. 나중에 밥 한번 거하게 사야겠다.
아니지, 김창회 저 자식은 또 탄수화물은 안 먹으니 닭찌찌나 한 박스 사다 줘야겠다.
그렇게 김창회 집으로 자리를 옮겨, 윤기훈까지 7명이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윤기훈이 저 자식, 김창회랑 박승환 앞에서는 조잘조잘 말도 잘했다고 하더니, 내 앞에서는 또 고개 푹 숙이고 있네.
사람 차별하나.
뭐, 가해자의 죄책감이라고 생각하고 일단 넘어가 주자.
“자. 앞으로 어떻게 진행되는지 이야기해줄게.”
나는 윤기훈, 그 멍청한 녀석에게 향후 계획을 말해 주었다.
일단 오늘 이사 갈 집을 찾아 리스트를 작성한다. 그렇게 리스트가 만들어지면 내일 바로 집을 보러 갈 거다.
그중에 마음에 드는 집이 있으면 바로 가계약 하고, 월요일에 관공서 열리면 서류 확인하고 계약한다.
“계약서는 너의 이름으로 쓰겠지만, 돈은 내가 이체해 줄 거야. 계약서 쓸 때도, 내 허락 없이, 네 임의대로 임대차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는 특약도 넣을 거고. 그렇게 계약하면 차용증 쓰고, 공증까지 받을 거야. 돈 빌려주는 기간은 10년, 무이자로.”
내 말에 녀석이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내 말이 끝나자 김창회가 말을 이어받는다.
“집은 형이 알아보고 있으니, 걱정할 필요 없어. 형이 최고의 투룸을 찾아줄게.”
어느새 형이 되어버린 김창회가 걱정하지 말라는 어투로 말한다.
조오오옿겠다! 운동 좋아하는 동생 생겨서!
“할머니를 빨리 모셔와야 되겠네요.”
지연이가 말한다.
윤기훈이 저 녀석이 합숙소를 나온 오늘이 토요일이다.
짐은 다 놔두고 지갑이랑 휴대전화만 들고 나왔으니, 당장의 의심은 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 봤자 하루 이틀이지.
윤기훈이 사라졌다는 것을 알게 된 장영호가 할머니에게 무슨 짓을 할지 모를 일이다.
“내일 바로 모셔오자.”
이중훈이 말한다.
윤기훈이 고개를 든다.
“일단 내일 집 알아보려면 차가 필요하기는 하잖아? 그러니까 내일 내가 엄마한테 말해서 차 가져올게. 내일 한꺼번에 전부 다 처리해버리자.”
“괜찮아요?”
지연이가 드물게 걱정스러운 눈으로 이중훈을 바라보며 물어본다.
“괜찮아. 예배드리는 거 말고 차 쓸 일 없는데, 아빠 차 타고 가라고 하면 되거든.”
이중훈이 말한다.
막 던지네. 저 자식.
“그럼, 내일 오후까지 집 보고, 저녁에 할머니 모시러 가고. 어떻게 생각해?”
내가 윤기훈에게 물었다.
녀석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근데, 할머니 오시면 어디로 모셔?”
박찬희가 물어본다.
“여기로 모셔와. 옆방에 모시면 되겠지.”
김창회가 말했다.
비밀의 방? 스테로이드와 프로틴을 조합하는 비밀의 방이 드디어 열리는 건가?
“저 방? 저 방 뭐 하는 방인데?”
박찬희가 우리 모두의 궁금함을 모아 질문을 던졌다.
“여동생 방이야. 지금은 없으니까 써도 괜찮겠지.”
김창회가 말했다.
김창회의 말이 끝났는데도, 아무도 말하는 사람이 없다.
여동생? 여자 사람 친동생?
“여동생이 있었어?”
박승환이 물어본다. 그 녀석답지 않게 놀란 표정과 목소리다.
“어. 한 살 차이 나는 여동생.”
김창회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자신하건대, 지금 우리 모두는 머릿속에 머리 긴 김창회를 떠올렸을 것이다.
우락부락한 근육을 가진 북두의 여동생이 걸걸한 목소리로 ‘오빠’라고 말하는 모습이 떠오른다.
“그럼 저랑 동갑이네요. 동생분은 내일 안 들어오시는 건가요?”
지연이가 물어본다.
“동생은 주말에만 와. 기숙사 있는 학교 다녀서, 오늘은 일이 있어서 못 왔고.”
우리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여동생 방에 할머니를 모시면 괜찮겠지. 최대한 빨리 방을 구해야겠네.
“자. 이번에는 내 순서.”
박찬희는 그렇게 말하고, 윤기훈에게 알코올 중독 치료병원에 입원 프로세스와 정부에서 지원하는 정책에 대해 설명해주었다.
가끔 의심스럽기도 하지만, 박찬희도 한국대에 실력으로 들어온 게 맞기는 한가 보다. 그 짧은 시간에 저렇게 자세하게 조사해서 정리한 걸 보니.
아버지 이야기에 윤기훈의 표정이 바뀐다.
그 얼굴에 부정적인 감정이 드러난 걸 보니 생각대로 사이가 좋지는 않은가보다.
하지만 특별한 말 없이, 고개를 끄덕인다.
“오케이. 이로써 적당히 다 정리되었네.”
내가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모인다.
“미안한데, 내일 부탁 좀 하자.”
“미안해하지 마라. 널 위해서 하는 거 아니니까.”
박찬희의 말.
“지연이를 위해서지.”
이중훈의 말.
“동생. 형만 믿어.”
김창회의 말.
‘오빠. 저는 오빠 편이에요.’라고 말하는 지연이의 눈빛.
“…집에나 가자.”
내가 그렇게 폐회 선언을 했다.
얼른 가서 우리 서현 님에게 보고해야 하니까.
그렇게 말했는데, 윤기훈이 조심스럽게 손을 든다.
응? 뭐 또 조건이 있나?
“왜? 뭐 할 말 있어?”
내가 묻자, 윤기훈은 주저주저하더니 조심스럽게 말을 꺼낸다.
“…경찰서는.”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말을 끝까지 들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녀석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자수를 번복하려면 경찰서에 가야 하는 거 아니냐는 이야기다.
뭐, 저 녀석도 혼란스럽겠지.
당장 경찰서 가서 저는 범인이 아닙니다. 그런 증언 번복을 강요당할 줄 알았는데, 자기 집 구하는 이야기, 할머니 모셔오는 이야기, 아빠 입원하는 이야기만 들었으니.
“너 포커 쳐본 적 있냐?”
내가 윤기훈에게 말했다.
물론 윤기훈은 이게 무슨 소린가 하는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원래 가장 좋은 패는 맨 마지막에 까는 거야.”
내가 그 녀석의 얼굴을 보며 그렇게 말해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