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6 : 매수 (2)
다음 날 아침, 내 통장에 삼천만 원이 들어왔다.
입금인은 우리 서현 님. 서현 님께서 한방에 삼천만 원이라는 거금을 입금하셨다.
아니, 아무리 서현 님이라도, 아무리 재벌 3세라고 해도, 삼천만 원은 적은 돈이 아닌데?
“여기저기서 돈을 빌리면 복잡해질 수 있으니까, 일단 제가 빌려드릴게요. 혹시나 해서 말씀드리면 제가 개인적으로 가지고 있는 돈이니까 마음 안 쓰셔도 돼요.”
서현 님의 말씀이시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지만, 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우선 윤기훈하고, 제이슨 임, 그 망할 자식을 해결한 다음 다시 정산을 해야지. 뭐, 지금 내 돈을 보내드리고 어쩌구 하는 이야기로 쓸데없이 심력을 소모할 필요는 없겠지.
“고마워요. 빨리 갚을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서현 님에게 작게 고개를 숙였다.
뭐, 마음 같아서는 안아주고 싶었지만, 그건 좀 오바인 거 같고.
“네. 천천히 갚으세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다.
안아줄까? 확 안아버릴까?
내가 그런 고민을 하는지도 모르는 서현 님이 말한다.
“그나저나, 그 학생에게서 전화가 와야 하는 거네요. 오늘 오전까지라고 이야기하신 거죠?”
“네. 일단 오늘 오전까지라고는 했는데, 그래도 내일까지는 기다려보려고요.”
내 말에 서현 님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 짓는다.
“알겠어요. 그럼 오늘은 집에 계실 건가요?”
“오늘 나갔다 와야 할 것 같아요. 친구 녀석들에게 부탁할 게 있어서요.”
내 말에 서현 님의 표정이 미세하게 변한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뭔가 좀 섭섭하다는? 그런 감정이 느껴진다.
섭섭함을 느끼시면 안 되지. 다른 분도 아니고, 우리 서현 님이 섭섭하시면 안 되지.
“일단 어떻게 할 거냐면요….”
나는 그렇게 내가 그린 그림을 설명해주었다.
***
오전 11시.
나는 김창회 자취방에 있었다.
면목동에 위치한 3층 건물의 옥탑방, 방 두 개짜리 김창회 자취방은 이번 일 동안 임시 작전 본부로서 지정되었다.
그나저나, 김창회 이 자식 혼자 사는데 왜 방 두 개짜리지?
김창회 방 말고, 다른 방은 우리가 아무리 열어보려 해도, 절대로 열어주지 않는 비밀의 방이었다.
김창회니까 여자를 숨겨놓은 것은 아닐 터이고, 뭔가 스테로이드 제조시설이라도 만들어 놓은 것일까?
아무튼, 나는, 아니, 우리, 박승환, 박찬희, 이중훈, 그리고 유지연까지 여섯 명은 좁은 김창회 자취방에 옹기종기 앉아 있었다.
나는 녀석들, 그리고 지연이에게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그 멍청한 녀석의 할머니를 만나 전화번호를 얻어냈다. 박승환이 김창회 이름을 도용해 그 녀석을 불러냈고, 한번 개 갈궈주고 매수하기 위해 떡밥을 던졌다.
보증금 삼천만 원을 10년 무이자로 빌려준다고 하면서.
“삼천만 원?”
이중훈이 놀라 되묻는다.
그래. 놀랄 만도 하지.
삼천만 원이 어디 동네 강아지 이름도 아니고, 빌려준다고 해도 사실 되돌려 받을 수 있을지, 없을지도 확실하지 않으니까.
물론, 그 자식이 정신 못 차리고 나중에도 계속 사고치고 다니면 어떻게 해서든 받아낼 생각이지만.
아니, 사고 안 쳐도 받기는 해야지. 돈이 삼천인데.
“설마, 진짜로 그 돈을 빌려주겠다고?”
이중훈이 다시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까지 해줄 필요가 있을까?”
박찬희의 이야기다.
“뭐, 무슨 말인지 안다. 틀린 말도 아니지. 표면적으로 봤을 때, 그 녀석도 가해자 중 하나이니까.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게 세상 이치 아니겠냐.”
내가 체감상 천만 영화의 명대사를 인용하자 박찬희가 재빨리 캐치해낸다.
“해바라기!”
“명작이지.”
“명작이야. 마지막 15분은 백번도 넘게 봤네.”
이중훈과 박승환이 말을 받는다.
물론 유지연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보고 있고.
나중에 보여줘야겠다. 해바라기를 봐야 진정한 남자가 되는 거지.
아. 지연이는 안 봐도 되는 건가?
아무튼,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말했던 것처럼 표면적으로 그 멍청한 놈도 가해자라고 할 수 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그 녀석도 도촬범의 또 다른 피해자 아니겠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아니. 뭐 사실 동정하고 그런 건 아냐. 그저 범인을 잡기 위해서, 잔챙이를 이용하겠다? 그게 맞겠네. 왜 범죄영화 보면 잡범은 놔주잖아. 두목 잡으려고. 그런 관점이지. 그리고 돈, 빌려주는 거라니까? 받아낼 거야.”
“뭐, 영화에서도 병진이 형은 살려주긴 하지.”
박찬희가 이해했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린다.
그건 좀 맥락과 안 맞는 것 같지만, 일단 넘어가고.
“그건 그렇고. 삼천만 원은 어떻게 구할 건데?”
이재에 밝은 이중훈이 물어본다.
“오빠. 제가 저축해놓은 돈이 조금 있어요. 많지는 않지만 빌려드릴 수 있어요.”
잠자코 듣고만 있던 지연이가 말한다.
“저축? 얼마나 있는데?”
눈치 없는 박찬희 녀석이 금액을 물어본다.
“오백만 원이요.”
오백만 원이라는 말에 우리 모두 놀란 눈으로 지연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고작 스무 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몇 달 되지도 않은 유지연 양께서 현찰 오백을 가지고 계신다고?
“20년 동안 받은 세뱃돈 전부 모아놨어요.”
자신에게 모이는 시선이 부끄러웠는지 지연이가 얼굴을 붉히며 말한다.
장하다. 우리 지연이. 입금만 되고, 출금은 안 되는 엄마 은행 대신, 예금자 보호법의 보호를 받은 시중 은행을 선택했구나.
이 녀석, 진짜 괜찮아. 마냥 얼굴만 이쁜 줄 알았더니, 애가 참 현명해.
내가 지연이에게 웃으며 말했다.
“지연아. 고마워. 하지만 괜찮아. 이미 마련했어.”
그 말에, 지연이를 향하던 시선이 나에게로 모인다.
“어떻게?”
이중훈이 물어본다.
“신장?”
박찬희의 시선이 내 복부로 향한다.
“혹시 사채?”
김창회가 묻는다.
“아니. 신장도 안 팔았고, 사채도 안 썼어. 그리고 어느 사채업자가 대학생에게 3천만 원을 빌려주냐?”
내 말에 박승환이 손가락을 흔들며 말한다.
“빌려줘.”
“빌려줘? 대학생인데도?”
“어. 그쪽 사람들은 받아낼 자신 있거든. 그러니 행여나 사고 쳐서 돈 필요할 때, 엄마, 아빠 몰래 처리하겠다고 사채업자 찾아가지 말고, 부모님 앞에 가서 눈물 흘리며 납작 엎드려라.”
박승환이 그런 말을 하니까 어딘가 모르게 현실성이 있다. 무시무시하게 들리네.
어제부터 저 자식 뭔가 좀 다른데?
“아무튼, 돈은 마련했으니까 그 부분에서는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뭐 그것도 그 자식이 전화해서 오케이 했을 때 이야기니까. 일단 대기하자고.”
그렇게 말하고 나는 시계를 보았다.
분침이 숫자 8을 향해 다가가고 있었다. 대략 11시 40분. 어제 있었던 이야기를 하다 보니 40분이 훌쩍 지나가 버렸네.
나는 손에 들린 휴대전화를 바라보았다. 내가 지정해 준 마감 시간까지 대략 20분 남았다.
“20분 남았네.”
박승환이 말하고, 모두들 고개를 끄덕인다.
망할 놈의 자식 같으니. 전화 안 하기만 해봐. 능력만 되찾으면 아주 지옥을 경험하게 해주겠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전화벨이 울린다.
타이밍 좋게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다들 흠칫하고 놀란다.
하지만 열심히 울리는 전화기의 주인은 박찬희였다.
“스팸.”
박찬희는 그렇게 말하고는 통화차단을 시킨다.
그 모습을 보고 이중훈이 한마디 한다.
“참 다들 열심히들 살아. 무슨 토요일에도 스팸이….”
그렇게 말하는데, 다시 벨 소리가 들린다.
이번에는 이중훈의 전화였다.
“어? 어. 어. 어. 아마도 먹고 들어갈 거야. 어. 어. 알았어.”
그렇게 짧게 통화를 끝낸 이중훈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한다.
“엄마.”
“엄마 전화는 받아야지.”
내가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는데 다시 벨 소리가 울린다.
친구 놈들의 시선이 벨 소리가 나는 곳으로 향했다가 바로 실망으로 바뀐다.
박승환의 전화가 울리고 있었다.
하지만 박승환은 무거운 표정으로 전화기를 나에게 내민다.
“그 녀석이다.”
박승환이 말했다.
***
윤기훈은 내가 아닌 박승환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제 박승환의 전화기로 불러내서 그런 건지, 아니면 어제 저 녀석의 임팩트가 커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박승환에게 전화를 걸어왔다.
내용은 간단했다. 제안을 받아들이겠다.
나는 그 녀석에게 우리가 있는 김창회 자취방이랑 가장 가까운 지하철역인 사가정역으로 와서 다시 전화하라고 말했다.
전화를 끊자 녀석들의 시선이 모두 나를 향해 있다.
이제 어떻게 할 거지? 그렇게 묻고 있다.
“여기까지 오는 데 한 시간 반, 걸린다고 하니까, 그때까지 앞으로 어떻게 할 것인지를 설명해줄게.”
일단, 박승환이 사가정역에 가서 그 녀석을 픽업한다.
혹시 무서운 아저씨들 달고 왔을지도 모르니, 파출소 근처에 커피숍에 자리를 잡고, 그 사이에 내가 멀리서 상황을 살핀다.
윤기훈이 그 녀석이 혼자서 왔다는 것이 확인되면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일단 윤기훈이 머물 장소가 필요하니, 모텔을 하나 잡는다.
어제 박승환이 이야기하기로는, 그 자식이 머물고 있는 경기도 광주는 친구 집이 아닐 가능성이 있단다. 일종의 합숙소? 그럴 가능성이 있다고.
마음먹고 온 녀석에게, 집 구할 때까지 다시 거기 가 있어. 그럴 수는 없잖아? 그러니 일단 모텔 하나 잡아줘야지.
그다음은?
집 구해야지.
“창회야.”
“어.”
“보증금 3천만 원에 월에 30에서 40만 원 정도로 방 두 개짜리 구할 수 있을까?”
우리 중에서 자취하는 녀석은 김창회뿐이다.
나도 지방에서 올라왔지만, 하숙집 출신이니까. 자취방 구해본 경험이 있는 김창회가 방 구하는 건 잘 알겠지.
“서울 내에서는 아마 많지는 않을 거야. 반지하라면 좀 있을런지도.”
창회가 그렇게 말하자 어제 나와 같이 성남에 갔던 박승환이 말한다.
“반지하는 안 돼. 차라리 옥탑이라면 몰라도. 반지하는 안 돼.”
저 자식 은근히 속이 깊어.
“뭐 일단 찾아봐야지. 서울 외곽의 위성도시까지 포함하면 없지는 않을 거야.”
“알았어. 오늘 인터넷으로 찾아보고, 내일 돌아볼 수 있을까?”
“부동산은 일요일에 보통 쉬는데, 오늘 전화해서 내일 볼 수 있냐고 물어보면 해주는 곳이 있기는 있을 거야.”
“그럼 내일 둘러보고, 월요일에 등기부 등본 확인하고, 계약하면 되겠다.”
“바로 계약하려고?”
“빠르면 빠를수록 좋지. 그 자식도 직접 계약서를 써봐야 뻥카가 아니구나 생각할 거 아냐.”
“그건 그렇지.”
“그럼 일단 집 좀 찾아줘.”
내 말에 김창회는 휴대폰을 집어 든다. 부동산 어플로 방을 뒤져보려나 보다.
“그리고 중훈아.”
“어.”
“너 혹시 차 좀 쓸 수 있을까?”
이중훈은 가끔 엄마 차를 몰고 학교에 오곤 했었더랬지.
“내일? 엄마 교회 갔다 오고, 오후에는 괜찮을 것 같은데.”
“아니, 내일은 아니고, 아마도 주중에? 아직 확실한 건 아닌데.”
“뭐, 하루 전에만 이야기하면 가능하기는 한데. 왜? 이삿짐 나르려고?”
“그 비싼 차에 어떻게 짐을 나르냐? 괜히 가죽에 기스라도 나면 무슨 욕을 먹으려고. 나중에 윤기훈 그 녀석 할머니를 모시러 가야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지연이가 손을 들었다.
“할머니 모시러 갈 때 저도 같이 갈게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하자, 이중훈은 바로 고개를 끄덕인다.
“차 쓴다고 말해놓을게. 다음 주 내내.”
이 자식아. 데이트 아니야!
그건 그거고, 할머니를 모시러 갈 때 지연이가 함께 가준다면 땡큐지. 시커먼 남자 놈들보다 지연이 같은 미소녀 있으면 신뢰도가 확 올라갈 거 아냐.
진짜 이 녀석은 왜 이렇게 이쁜 말만 골라서 하는지 모르겠다.
“그럼 중훈이하고 지연이가 할머니 모시는 거 담당하고. 다음은 찬희.”
“옛썰!”
박찬희가 거수경례를 딱 하고 한다.
오바하지 마.
“너는 알코올 중독 전문 치료 병원 좀 알아봐 줘.”
생뚱맞은 내 말에 친구 놈들이 다 나를 바라본다.
갑자기 무슨 소리지?
그런 시선이다.
“그 녀석 아버지. 알코올 중독 같더라. 그 녀석이야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겠지만, 할머니 입장에서는 아들이 죽든 말든, 손자랑 둘이서 행복하게 사세요. 그러면 할머니가 따르시겠냐? 내가 어제 인터넷으로 대충 알아봤는데, 알코올 중독을 전문으로 치료하는 폐쇄병동의 경우 친족 2인의 동의가 있으면 입원이 가능하더라고. 병원비가 비싸기는 한데, 나라에서 이런저런 지원도 있고, 차상위 계층은 더 많이 지원해주는 것 같더란 말이지. 그러니까, 너는 그거 조사 좀 해서, 이따가 그 자식 오면 설명해주라고. 나중에 할머니에게도 해줘야 하니까 최대한 자세하게 부탁드립니다.”
내가 그렇게 설명해줬다.
내 말이 끝났는데도, 다들 아무런 말이 없다.
그저 어이없다는 시선으로 나를 바라만 보고 있다.
지연이까지도.
다른 놈들이면 몰라도, 지연이가 그런 눈으로 바라보는 건 좀 슬픈데?
“치밀한 놈. 무서운 놈.”
침묵을 깨는 이중훈의 말이다.
“저 녀석은…. 분명 감옥에 갈 꺼야. 무슨 죄가 되었든.”
이건 박찬희.
“나중에 감옥 가면 사식은 꼬박꼬박 넣어주마.”
이건 김창회.
“오빠. 면회 자주 갈께요.”
지연이 너마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