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5 : 매수 (1)
윤기훈의 눈동자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당황스러움이라는 감정을 그대로 눈에 드러내고 있었다.
하지만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처음으로 녀석의 눈빛이 바뀌었다.
할머니는 상관없어. 할머니를 끌어들이면 절대로 참지 않겠어.
적개심 가득한 눈동자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노려보면 어쩔 건데? 그렇게 할머니가 걱정되었으면 애초에 사고를 치지 말든가.”
내가 그렇게 말했지만, 녀석은 여전히 내 눈을 노려보고 있었다.
“쓸데없는 소리는 안 했으니까 노려보지 마.”
“…쓸데없는 소리는 안 했다고요?”
윤기훈이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그래. 손자가 폭행 사건을 저질렀고, 내가 피해자고, 그래서 합의금 받으러 왔다. 그런 이야기는 안 했다고.”
“….”
윤기훈의 눈에 담긴 적개심이 조금 사라진다. 그렇다고 눈을 깔지는 않았다. 여전히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옆자리에 있던 승환이가 그 녀석에게 낮게 속삭인다.
“좋게 말할 때 눈깔아. 확 뽑아버리기 전에.”
뭐야. 저거 내가 알던 박승환 맞아? 갑자기 살기가 확 느껴지는데?
저 자식 평소에 뭐 하고 다니는 거야?
“못 믿겠으면 직접 할머니에게 전화해봐. 조금 전 다녀간 두 사람이 뭐라고 했는지.”
내가 윤기훈에게 말했다.
***
할머니가 가슴팍에 꾸깃꾸깃하게 접혀있는 편지봉투를 조심스럽게 꺼내면서 말씀하셨다.
“이거를 돌려주면, 우리 기훈이에게….”
그 봉투를 보는 순간 나는 머릿속에 가설 하나가 떠올랐다.
“제가 좀 봐도 될까요?”
내가 최대한 정중하게 할머니에게 말했고, 할머니가 주저하는 손으로 나에게 봉투를 넘기셨다.
“기훈이가 이걸 언제 주고 갔었나요?”
“그게. 한 일주일 전에….”
나는 봉투를 다시 곱게 접어 할머니에게 돌려 드렸다.
봉투를 돌려받는 할머니의 손이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런 할머니의 손을 가볍게 포개 맞잡았다. 세월의 흐름이 잔뜩 묻어 있는 주름진 손에서 할머니의 온기가 느껴졌다.
“할머니. 저희는 손자분에게 해를 입히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기훈이에게 도움을 주려고 그러는 거예요.”
할머니는 내 눈을 바라보고 계신다.
할머니의 깊은 눈동자를 바라보고 있으니 어쩐지 할아버지가 생각난다.
“기훈이. 다시 돌려다 놓을께요. 할머니 곁으로 다시 데리고 올게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할머니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
직접 전화해보라는 말이 먹혔는지, 윤기훈은 그제야 슬그머니 눈을 피한다.
뭐, 헤어지게 되면 그때 전화를 해보든가 하겠지.
“내가 기회를 주겠어. 다시 되돌아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내가 말했다.
녀석이 다시 나를 바라본다. 그 눈동자가 흔들리고 있다.
“최저시급 8720원, 하루 8시간, 주 5일을 근무한다고 치면 주휴수당까지 포함해 대략 한 달에 180만 원 정도, 국민연금, 건강보험이랑 이것저것 빠져도 160만 원.”
윤기훈의 눈동자가 더 크게 흔들린다.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저 녀석도 이해하겠지.
“서울 외곽이나 위성도시에 방 두 개짜리. 보증금 3천에 월세 30에서 40만 원 정도면 구할 수 있을 거야. 160만 원 받으면 월세 내고, 생활비 하고도 조금은 저축할 수 있겠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은 윤기훈뿐만이 아니었다.
박승환도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하는 시선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안다. 박승환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월세는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보증금이지.
“보증금 3천만 원. 내가 빌려주겠어. 무이자로. 기간은 10년.”
두 사람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나를 바라보고 있다.
“…자수하지 말라는 말인가요?”
윤기훈이 묻는다.
“나는 상관없어. 멍청하게 계속 혼자서 이 일을 다 벌였다고 고집을 부리다 감옥을 가든 말든. 너가 자백을 번복하지 않는다고 해도 나는 다른 방법이 있으니까.”
나는 그렇게 말하고 턱으로 박승환을 가리켰다.
윤기훈의 시선이 박승환에게로 향한다.
박승환이 아까 누구야? 장영호인지, 장호영인지 그 사람 이름을 말했잖아? 그러니 방금 내 허세는 분명 효과가 있을 거다.
“하지만 내가 제안한 대로, 할머니를 모시고 살겠다면, 당연히 감옥에는 가면 안 되겠지. 그러려면 자백을 번복해야 할 테고. 그렇게 하겠다면 피해자인 내가 가서 증언해줄 생각도 있어. 멍청한 윤기훈은 폭행에 가담하지 않았다. 그렇게.”
내 말에 윤기훈이 다시 고개를 숙인다.
생각이 복잡할 것이다. 하지만 하나는 확실하지. 저 녀석이 내 말대로 편의점 알바라도 하면서 할머니를 모시고 살려면 일단 감옥은 피해야 한다는 선결 조건은 확실하다.
선결 조건을 이루기 위해서는 자백을 번복해야 할 테고, 그러면 일이 복잡해질 거다.
내가 원하는 것이 바로 그것이다. 일이 복잡해지는 것. 망할 놈들이 써놓은 그 시나리오를 망가트리는 것.
박승환이 기다렸다는 듯 말을 잇는다.
“장영호는 걱정하지 않아도 돼.”
윤기훈이 다시 박승환을 바라본다. 그 표정에 공포가 깃들어 있다.
뭐랄까? 마치 고양이 앞에서 본능적인 공포를 느끼는 생쥐 같달까?
“네가 그렇게 하겠다면, 장영호는 내가 막을 수 있어. 너하고 할머니에게 손도 까딱하지 못하도록.”
무슨 생각으로 저런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박승환의 말은 내가 듣기에도 그럴싸하게 들렸다.
“….”
윤기훈은 다시 고개를 숙인다
나는 그 녀석의 정수리를 보면서 최대한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그 사람하고는 달라. 내일까지 돈을 준비해 두겠어. 내 제안을 받아들이겠다면 내일 오전 중으로 전화를 해. 12시가 지나면 오늘 이 이야기는 없던 게 되는 거야.”
***
윤기훈, 그 멍청한 녀석과 헤어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 안에서 나는 박승환에게 물었다.
“장영호가 누군데?”
“네가 그랬잖아. 상황을 통제하던 중년 남자가 있었다고. 그 인간.”
“그 인간이 장영호인지 네가 어떻게 알아?”
“그날 봤거든.”
“봤다고?”
“너 전화 받으러 나가서 한참 동안 안 들어오길래 나가봤는데, 그 인간이랑 눈이 딱 마주쳤어.”
“원래 알던 사이야?”
“뭐. 좋은 인연은 아니고.”
박승환은 무거운 표정으로 그렇게 말했다.
나는 두 사람 사이에 어떤 악연이 있는지 궁금했지만, 물어보지는 않았다. 뭐 필요할 때가 되면 이야기해주겠지.
하지만 이건 물어봐야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한 거야?”
“무슨 말?”
“장영호 그 사람은 걱정할 것 없다고. 할머니에게 손도 못 대게 하겠다고.”
“방법이 있기는 하지.”
박승환은 그렇게 말하며 작게 웃음을 짓는다.
그 웃음이 어딘가 모르게 씁쓸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그런 박승환의 옆모습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말했다.
“야. 그거 때려쳐.”
“뭘 때려쳐?”
“뭔지는 모르겠지만 너가 말한 그 방법.”
“…왜?”
“왜는 무슨 왜야? 내 일이니까 내가 알아서 할 거야. 그러니까 너는 쓸데없는 생각 하지 마.”
나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걱정되니까 안 되겠다. 이런 말은 때려죽여도 못하지.
그리고 뭐, 정 안 되면 회장님에게 말해야지 뭐.
당당하게 회장님 힘은 안 빌리겠다고 그랬는데, 한 입으로 두말하는 사람이 돼버리겠네.
하지만 장영호라는 그 인간이 윤기훈 그 멍청한 놈뿐만 아니라 할머니한테까지 해코지하려고 한다면, 그건 막아야지. 내 체면이 뭐가 중요하겠어.
일구이언은 이부지자라고 했는데, 돌아가신 우리 아버지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고 이해해주시겠지.
박승환은 아무런 말 없이 날 보고 있다.
“뭐? 왜?”
내가 물었다.
“너 근데 삼천만 원은 있냐?”
박승환이 나에게 묻는다.
“너 있잖아. 팔백만 원. 이비자 클럽 투어 가려고 모아둔 돈.”
내가 말했다.
박승환은 또다시 말없이 날 바라본다.
나는 그 녀석이 날 보며 무슨 생각을 하는지 눈동자에서 읽어낼 수 있다.
때릴까?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
“돈…이요?”
서현 님이 놀란 눈으로 나에게 되묻는다.
“네. 혹시 가능하시면 천만 원만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무이자로.”
내가 서현 님을 보며 말했다.
어디선가 책에서 봤는데, 돈을 빌릴 때는 최대한 뻔뻔하게 말하라고 했다. 자신감 있게 말이지.
돈을 빌려주는 사람은 그런 자신감을 ‘아. 이 사람은 충분히 돈을 갚을 수 있겠구나’라는 신뢰감으로 오해한다고.
어느 책이었더라? 한 권으로 배우는 사기의 정석이었나?
아무튼, 부끄럽기는 하지만, 나는 서현 님의 얼굴을 보며 당당하게 말했다.
서현 님은 그런 내 얼굴을 바라만 보고 계신다.
역시 못 믿으시는군요.
이해합니다. 가까운 사이일수록 돈거래는 하지 말라고 했죠.
하지만 준비해 놓은 카드가 또 한 장 있지요.
나는 휴대전화를 꺼내 계산기 어플을 실행시켰다.
“제가 지금 알바하는 카페에서 받는 시급이 이 정도 됩니다.”
나는 계산기에 시급을 꾹꾹 눌렀다. 그리고 내 근무시간. 그러면 내 월급이 나온다.
“지금 이 정도가 제 한 달 수입입니다. 물론 그리 많은 돈이라고는 할 수는 없죠.”
사실 그렇지. 내 용돈 정도니까.
“하지만 제가 스케쥴을 늘리면 이 정도까지는 가능합니다.”
계산기에 새로운 금액이 찍힌다.
“거기에다가 주말에 과외 두어 개 뛰면 한 달에 이 정도까지는 벌 수 있을 것 같아요.”
계산기에 찍힌 금액의 단위가 바뀐다.
과외자리 설마 못 구하겠어? 아무리 그래도 한국대인데.
설마 학점 보자고는 안 하겠지?
나는 서현 님의 눈을 바라보면서 말을 이었다.
“빠르면 1년, 늦어도 18개월 안에 전부 상환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부디 대출해주시옵소서.
내 상환계획을 듣고도 서현 님은 아직 부족하다는 표정으로 날 바라보고 계신다.
역시 신체 포기 각서를 써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서현 님이 다시 질문하신다.
“용처에 대해 제가 알 수 있을까요?”
당연히 알 수 있죠.
나는 오늘 하루 있었던 일을 서현 님에게 하나도 빠짐없이 이야기해주었다.
주소를 찾아가고, 할머니를 만나고, 윤기훈이 녀석이 싹수가 있다고 판단했고, 월세 보증금 3천만 원으로 그 녀석을 매수하기로 마음먹었다.
나의 베스트 프렌드 박승환이 이비자 클럽투어 가겠다고 모아둔 돈 팔백만 원에 따로 꿍쳐둔 이백만 원을 더해 천만 원을 무이자로 3년 동안 빌려주기로 했고, 내가 찔끔찔끔 모아둔 돈 천만 원이 있으니, 서현 님께서 천만 원만 더 빌려주시면 그 멍청한 녀석을 돈으로 매수할 수 있다.
“매수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도와주려고 하시는 것처럼 들리는데요?”
내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서현 님의 평가다.
“뭐. 겸사 겸사죠. 판도 흔들고, 그 멍청한 녀석도 제 갈 길 가게 하고. 그리고 그 돈, 주는 거 아니에요. 빌려주는 거예요. 10년 후에 꼭 받아낼 거에요.”
뭐, 받아낼 수 있을지 모르겠다만. 아무튼.
내 말에 서현 님은 작게 한숨을 쉬신다.
“한수 씨는…. 진짜 고집불통이에요.”
“네?”
“그냥 내놓아라 하셔도 되는데, 꼭 그렇게 빌리는 것으로 하셔야겠어요?”
나는 손을 들어 뒷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아니. 뭐. 회장님 힘 빌리지 않겠다고 그렇게 큰소리를 쳤는데…. 사실 뭐 그렇게 큰돈 빌리는 것부터 서현 님이나 회장님 힘 빌리는 것과 마찬가지이긴 하지만, 그래도 제가 갚으면 힘을 좀 덜 빌리는 것 같고. 사실 뭐, 과외 좀 하고 그러면 메꿀 수 있을 것 같기도 하고. 뭐. 서현 씨한테 미안하기도 하고….”
나는 그렇게 중언부언하다가 힘 빌리는 이야기가 나온 김에, 전부 다 이야기를 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아. 그리고 기왕 이야기 나온 김에, 회장님에게 부탁을 드리기는 해야 할 것 같아요. 돈에 관한 부분은 아니고요.”
“어떤 부분인데요?”
“아까 말씀드렸던 그 장영호라는 사람. 이야기 듣기로는 아마 그 어둠의 세계, 그쪽에 있는 사람 같은데, 그 사람에게서 윤기훈 그 녀석하고 할머니를 보호해야 할 것 같아요.”
내 말을 들은 서현 님은 한참 동안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바라보다가 고개를 작게 흔들고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한수 씨를 보다 보면…. 조금 답답할 때가 있어요.”
서현 님이 그렇게 말했다.
나는 조용히 다음에 이어질 말을 기다렸다.
“우리의 돈도, 우리의 힘도, 모두 어르신과 한수 씨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인데, 한수 씨는…. 본인을 위해서 사용하는 것은 그렇게 거부하시더니, 그 소년과 소년의 할머니를 위해서는 주저하지 않으시네요.”
서현 님의 손이 천천히 움직인다.
“솔직히 조금 답답한 마음이 들지만.”
그리고 테이블 위에 놓인 내 손을 부드럽게 덮는다.
“그런 한수 씨의 답답함, 저는 좋아해요.”
손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와 함께, 서현 님의 아름다운 목소리가 내 안으로 스며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