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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을 이어라-84화 (84/271)

84 : 씨앗 심기 (4)

윤기훈이 도착한 시간은 주소를 보내고 한 시간 정도가 흐른 뒤였다.

카페 문을 열고 들어오는 남자, 아니, 남자라고 하기엔 좀 그런 게 진짜 유도를 했는지 덩치는 산만 했지만 얼굴에는 아직 풋풋함이 남아 있는 녀석의 모습에서 나는 본능적으로 저 녀석이 윤기훈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저 녀석이지?”

박승환도 나랑 같은 느낌을 받았는지 낮은 목소리로 나에게 물어본다.

“그런 것 같다.”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박승환이 자리에서 일어나 겁먹은 표정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리는 그 녀석에게 다가가 말을 걸었다.

“윤기훈이. 빨리 왔네?”

박승환은 마치 예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도 되는 것처럼, 그 녀석에게 다가가 어깨에 팔을 둘렀다.

갑작스러운 박승환의 행동에, 그 녀석은 당황했다.

당연하겠지.

경찰에 전화를 받았고, 경찰을 만날 것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지금 자신의 어깨에 팔을 두른 박승환은 어떻게 봐도 경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으니까.

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하거나, 팔을 뿌리치지는 않았다.

박승환은 당황한 얼굴의 그 녀석을 재빨리 우리 자리로 끌고 왔고, 안쪽에 밀어 넣고, 그 옆에 앉아 도망갈 길을 막았다.

자리에 앉고 나서야 윤기훈은 나의 존재를 알아차렸다.

그 녀석은 나를 보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녀석의 시선은 내 팔의 깁스를 향해 있었다.

팔을 바라보던 시선이 내 얼굴을 향해 움직였다.

눈이 마주쳤고, 그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고, 바로 시선을 피해버렸다.

묻지 않아도 나는 알 수 있었다.

그날, 그 자리에 이 녀석이 있었다.

***

그 녀석이 도착하고, 나는 5분 정도 아무 말 없이 그 녀석을 바라보았다.

녀석은 고민하고 있었다.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하는지, 그래도 되는지, 그런 고민이 녀석의 눈동자에 투영되고 있었다.

“제이슨 임.”

그렇게 5분여가 흐른 후, 내가 꺼낸 첫 번째 단어였다.

“그때 각목으로 날 내려친 놈. 너가 대신해서 감옥에 가야 하는 개자식의 이름이 제이슨 임이야. 이제부터 네가 왜 그 자식을 대신해 감옥에 가야 하는지 이야기해줄게.”

녀석의 눈빛이 흔들린다.

생각이 있는 녀석이라면 그동안 계속 궁금했을 것이다.

그 자식이 누구인지, 왜 나를 습격했는지, 그리고 이후에는 어떻게 되는지.

“제이슨 임. 그 자식이 학교에서 사고를 하나 쳤어. 여자들을 도촬하고 다녔지. 그게 문제가 되었고, 형사 고발을 하자는 이야기까지 나왔어. 처음에는 변호사를 데려왔지. 돈으로 해결하려고 했고. 그런데 그 방법이 먹히지 않았지.”

무슨 말을 하는 거지?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보고 있다.

“할머니.”

내가 말했다. 녀석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나중에 그 자식의 할머니라는 분이 학교에 찾아왔지. 학교에 와서 눈물로 읍소했어. 손자를 잘못 키웠다고, 다 자신의 잘못이라고. 자신이 감옥에 가겠다고.”

눈동자가 조금 더 흔들린다.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할까? 피해자는 차마 눈물을 흘리는 할머니 앞에서 손자분은 죄를 지었으니 벌을 받아야 한다고 말하지 못했어. 그저 알겠다고, 용서한다고 말할 수밖에 없었지. 하지만 의문이 하나 남았어. 과연, 그 할머니가 그 자식의 친할머니일까?”

윤기훈은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그 눈빛에서 그 녀석이 나와 같은 의심을 하고 있다고 확신했다.

“만약 나였다면, 나라면, 내가 감옥에 갔으면 갔지, 할머니에게 그런 수모를 겪게 하지는 않을 거야. 절대로.”

“….”

“그 자식이 왜 내게 앙심을 품었는지도 알려줄께. 조금 전 그 자식이 사고를 친 다음에 변호사와 함께 와서 돈으로 해결하려고 했다고 했지? 그걸 내가 중간에서 막았어. 돈 좀 있다고, 돈으로 해결하겠다는 그 썩어버린 생각이 역겨워서, 그래서 내가 막았고, 그 자식이 내게 앙심을 품은 이유야.”

“….”

“자. 이게 네가 그동안 알고 싶어 했던 이야기의 진실이야. 그다음부터는 너도 잘 알고 있겠지? 그 자식의 복수를 위해서 너희들을 동원했고, 그날 그 사건이 일어났고.”

녀석은 여전히 아무런 말이 없다. 하지만 머릿속은 복잡할 것이다.

“그날 나에게 전화한 게 너지?”

내가 물었고, 윤기훈은 대답하지 않았다.

뭐, 대답을 들을 필요도 없었다. 표정과 눈동자가 그렇다고 말해 주고 있었으니까.

“나는 몰라. 그놈들이 너에게 대신 자수하라는 이야기를 언제 했는지. 하지만 이것 하나는 확실해. 그날 너에게 전화를 걸라고 시켰다는 것은, 처음부터 너를 희생양으로 생각해놓고 있었다는 것. 그거 하나는 확실하지. 너도 어느 정도 짐작은 했겠지만.”

녀석이 고개를 푹 숙인다. 확정이구만.

“특수상해. 형법, 258조의 2. 위험한 물건을 휴대해 상대방에게 상해를 입힌 경우 1년 이상 10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그 개자식을 대신해 네가 뒤집어쓸 죄.”

녀석이 고개를 든다.

“너희 조직에서는 뭐라고 했지? 자수를 했으니, 선처해줄 거라고? 운 나쁘면 소년원 몇 달 정도로 끝날 거라고?”

녀석이 침을 꿀꺽 삼킨다.

“나는 합의하자는 단 한 통의 전화도 받지 못했어. 그게 무슨 말인지 알아? 공소장에 네가 피해보상을 위한 어떠한 노력도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적히게 된다는 이야기야.”

윤기훈을 희생양으로 지목한 조직에서는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금전적인 손해를 보는 것도 싫겠지만, 이 멍청한 녀석에게 모든 죄를 뒤집어씌우려면 애초에 움직이지 않을 것이다.

“단순히 감옥에 간다고 끝날까? 아니야. 민사적 책임이 뒤따를 거야. 입원비, 위자료. 민사 소송에 들어간 재판비용 같은 것들이 오롯이 너의 책임이라는 말이지. 너를 희생양으로 지목한 그놈들이 과연 그 비용을 책임져 줄까? 어떻게 생각해? 나라면 아니라는 데 전 재산을 걸겠어.”

녀석이 다시 고개를 숙인다.

내가 다시 이야기를 이어가려는데, 박승환이 말을 꺼낸다.

“장영호는 책임져 줄 인간이 아니야. 절대로.”

순간 눈동자를 제외하고는 일절 미동도 없던 윤기훈의 고개가 빠르게 돌아갔다.

녀석은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그 눈동자에 놀라움이 깃들어 있었다.

놀라기는 나도 마찬가지였다.

장영호?

그게 누구지?

***

강우현은 박기준 변호사가 건네준 서류를 읽고 있었다.

5년 전 만들어진 서류에는 양재대로 478 지역, 소위 개포동 대규모 판자촌 재개발 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정확히는 판자촌 철거를 위해 어떠한 절차를 진행해야 하는지, 진행 과정에서의 법적 절차와 위법성 회피에 대한 내용이 담겨 있었다.

서류 말미에는 사업에 참여하는 비계구조물 해체공사업체, 실제로는 용역 깡패 리스트가 있었고, 리스트에 ‘장호건설’이라는 이름이 있었다.

장영호의 회사였다.

이름을 확인한 강우현은 고개를 들어 박기준 변호사를 바라보았다.

“척준용역이 나원건설로 바뀌는 과정에서 장영호가 독립해 장호건설을 설립했지.”

박기준 변호사가 말했다.

강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도 알고 있는 내용이었다.

“막상 독립은 했지만, 자리를 잡기가 쉽지는 않았지. 고전하는 그에게 손을 내밀어 준 곳이 바로 아이테크건설이었고, 그 덕분에 장호건설은 개포동 일에 참여할 수 있었지.”

개포동 일, 소위 개포동 판자촌 재개발 사업은 그 당시 아주 큰 이슈였다. 재계는 물론 시민사회단체에서도 집중하고 있었다. 2015년 2월에 이루어진 행정대집행에서는 방송국에서 실시간 취재를 할 정도로 관심을 모았다.

강우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박기준 변호사의 법무법인 철주가 법적 검토를 했다는 의미는 재개발 사업에 깊숙하게 관여되어 있다는 의미였다.

거기까지는 이해했다. 하지만 박승환이 장영호를 어떻게 아는지는 아직 알 수 없었다.

그런 강우현의 마음을 알기라도 하는 듯, 박기준 변호사는 계속 말을 이었다.

“승환이 친구가 그곳에 살았지.”

강우현은 자신도 모르게 튀어나오려는 낮은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몇 살 때였습니까?”

“열여섯.”

“…중학교 3학년이었겠군요. 행정대집행 당시 현장에 승환 군이 있었습니까?”

박기준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거기서 장영호를 봤군요.”

박기준 변호사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장영호가 열심히 했나 보군요. 승환 군이 얼굴을 기억하고 있을 정도라면.”

“그래. 누구보다 열심히 했지.”

행정대집행이라는 이름의 철거현장의 모습은 참혹했을 것이다.

각목을 든 사람들, 고성과 욕설,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비명과 선혈.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만 보고 있는 경찰. 여기저기서 터지는 기자들의 플래쉬.

중학교 3학년, 질풍노도의 시기를 겪고 있던 열여섯 살 청소년의 마음에 깊은 상처를 남기기에는 충분했을 것이다.

강우현은 서류철을 덮었다.

박승환이 장영호를 인지하고 있다는 부분은 이해했다. 하지만 아직 퍼즐 한 조각이 남아 있었다.

장영호를 기억하는 것과 박기준 변호사와의 관련되는 부분이었다.

“혹시. 계주님께서도 그날 현장에 계셨습니까?”

강우현이 물었다.

박기준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장영호와 같이 계신 것을 승환 군이 보았군요.”

박기준 변호사의 고개가 다시 끄덕여졌다.

***

“장영호는 책임져 줄 사람이 아니야. 절대로.”

박승환이 말했다.

장영호라는 이름이 나오자 윤기훈의 눈동자는 그 어느 때보다 흔들리고 있었다.

그런 윤기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박승환이 말을 이었다.

“너도 생각해봤겠지. 장영호, 그 사람을 믿어도 되는지.”

윤기훈이 고개를 푹 숙인다.

장영호가 누구인지 나는 잘 모르겠지만, 물론 짐작 가는 사람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아무튼 윤기훈의 반응을 보니, 박승환이 급소를 찔렀나 보다.

“너에게 무엇을 약속했는지 나는 모르겠지만,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을 거야. 장영호에게 있어서 너는 가치가 없으니까.”

숙여진 윤기훈의 머리 위로 박승환의 말이 가차 없이 꽂힌다.

장영호는 아무런 말이 없다. 말없이 그저 고개만 숙이고 있을 뿐이었다.

장영호가 누구인지는 조금 있다가 물어보면 되고. 나도 마무리를 지어야지.

“나는 솔직히 아무 상관 없어. 네가 감옥에 가든, 전과가 남든, 그래서 앞으로 삶이 고달퍼지든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어. 아니, 솔직히 말해서 너도 가해자 중 하나이기에 죗값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

내가 말을 시작했지만, 윤기훈은 여전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나는 그런 녀석의 정수리를 바라보면서 승부수를 던졌다.

“오늘 널 만난 것도 너에게서 특별히 무슨 이야기를 듣겠다고 한 건 아니야. 그저 그 개자식을 대신해 죄를 뒤집어쓴 멍청한 놈이 어떤 놈인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 보고 싶어서였지. 너희 할머니와 할머니 품속에 감추어져 있던 봉투가 아니었다면 당장에라도 일어섰을 거야.”

내 말에 윤기훈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에 적개심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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