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83화 (83/271)

83 : 씨앗 심기 (3)

서초동 주택가에 자리하고 있는 법무법인 철주,

박기준 변호사는 4층에 위치한 자신의 집무실 소파에 앉아 있었다.

그의 맞은편에는 한 남자가 앉아 있었다.

중앙그룹 강민철 회장의 손자, 강우현이었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강우현이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그렇군. 2년 만이던가?”

“그렇습니다. 2년 전 모임에서 인사드린 것이 마지막이었습니다.”

강우현의 말에, 박기준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공식적으로, 두 사람은 일면식이 없는 사이였다. 표면적으로 두 사람은 사는 세계가 달랐다.

의뢰인의 이익을 위해 합법과 불법의 경계에서, 때로는 어둠의 세계에서까지 영향력을 행사하는 곳이 바로 법무법인 철주였고, 그리고 법무법인 철주를 이끄는 수장이 바로 박기준 변호사였다.

‘대한민국에서 가장 실력 있는 변호사’. ‘변호사 자격증을 보유한 조직폭력배’라는 상반된 평가가 박기준 변호사의 입지를 보여주고 있었다.

반면에 중앙그룹 회장의 손자, 글로벌전략기획실 3팀장, 미래의 중앙그룹을 이끌어갈 강우현은 빛의 세계의 거주민이었다.

단순한 거주민도 아니었다. 미래의 중앙그룹 총수인 그의 말 한마디, 그의 행동 하나하나에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그런 그였기에, 법이라는 영역의 가장 어둡고 더러운 곳에서 살고 있는 박기준 변호사를 만나는 것은 강우현에게 독이 되었으면 되었지, 득이 될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강우현과 박기준 변호사는 서로 알고 있는 사이였다.

단순히 안면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중앙그룹의 강우현, 법무법인 철주의 박기준이 아닌 어르신을 모시는 네 개의 기둥 중 하나로써.

“건강해 보이셔서 다행입니다.”

강우현은 그렇게 말하며, 가방에서 서류봉투 하나를 꺼내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았다.

전날, 강 회장이 확인한 서류가 들어있던 바로 그 서류봉투였다.

박기준 변호사는 자신의 회사 이름이 적혀 있는 봉투를 바라보며 말했다.

“언짢게 생각하시지 않으셨으면 좋겠군.”

4개의 기둥은 동일한 의무를 가지고 있었다.

어르신을 보필하는 의무였다.

하지만 모든 기둥이 전부 직접적으로 어르신을 모시는 일을 하는 것은 아니었다.

가장 가까운 곳에서 어르신과 작은 어르신을 모시는 집사의 임무는 강씨 가문에 부여되어 있었다.

박기준 변호사의 행동은 자칫하면 월권으로 해석될 수도 있었다.

“할아버지는 계주님의 뜻을 오해하지 않으십니다.”

강우현은 ‘회장님’ 대신에 ‘할아버지’라는 호칭을, ‘박 변호사님’ 대신에 ‘계주님’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다.

“회장님의 생각은?”

박기준 변호사가 물었다.

“할아버지는 개입하지 않으실 생각입니다.”

강우현이 말했다.

“어르신의 의지는?”

“별일 아닌 일에 신경 쓰지 마시라고 하셨답니다.”

“그렇군.”

박기준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로써 모든 것은 정리가 되었다.

어르신이 결정했고, 강 회장이 따르기로 마음먹었다.

박기준 변호사가 움직일 이유는 없었다.

그렇게 정리가 되었지만, 강우현에게는 아직 질문이 남아 있었다.

“실례가 안 된다면 이번 일을 어찌 아셨는지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강우현이 물었다.

“사건이 있은 다음 날, 아들이 찾아왔었네.”

박기준 변호사는 박승환이 찾아왔던 그날의 이야기를 전해 주었다.

신림동에서 일이 벌어진 그날, 박승환이 장영호를 보았고, 장영호가 이번 일을 일으킨 것이라고 생각했고, 아버지인 박기준 변호사가 관계되어 있는지를 물어보았다.

아들을 통해 그 소식을 들은 박기준 변호사는 장영호의 행적에 대해서 조사를 진행했고, 조사를 통해 작은 어르신과 장영호, 그리고 아이테크건설 임원영 대표의 차남 제이슨 임과의 관계를 알아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승환 군이 작은 어르신의 진짜 정체에 대해서 알고 있습니까?”

강우현이 물었다.

박기준 변호사는 고개를 저었다.

“단순히 친구의 입장에서 움직였다는 말씀이군요.”

“그렇네.”

강우현의 말에 박기준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였다.

“승환 군이 어떻게 장영호를 알고 있는 겁니까.”

박기준 변호사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책상으로 가서 서류철 하나를 집어 들었고, 다시 소파로 걸어와 강우현에게 서류철을 건네주었다.

‘대외비’라고 쓰여있는 표지를 넘기자 ‘양재대로 478 재개발 사업’이라는 글자가 쓰여있는 속표지가 모습을 보였다.

***

윤기훈의 집에서 나온 나와 박승환은 가천대역 인근 카페에 자리를 잡고 있었다.

“돈?”

박승환이 물었다. 조금 전 봉투를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정도?”

“몰라. 대략 스무 장 정도 되는 것 같던데.”

“백만 원이겠네.”

“그 정도 되는 것 같았어.”

나는 그렇게 말하고 컵을 들어 빨대를 입으로 가져갔다.

씁쓸한 커피의 맛과 차가운 냉기가 입안을 자극했다.

“어떻게 생각해?”

커피를 마시는 내게 박승환이 물었다.

“계약금. 아니, 미끼라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내 말에 박승환이 고개를 끄덕이고는 말을 이었다.

“자수해라. 너는 초범이고, 청소년이니 크게 처벌받지는 않을 거다. 설사 소년원에 다녀온다고 해도, 걱정할 필요 없다. 우리가 뒤를 봐줄 테니까. 그렇게 말하면서 봉투를 줬겠지. 친구들과 술이나 한잔하라고.”

나도 고개를 끄덕였다.

“그랬는데, 그 멍청한 놈은 집에 있는 할머니 생각이 났고, 그리고 아빠 몰래 할머니에게 봉투를 가져다드렸고. 할머니는 그 봉투를 또 어찌하지도 못하고, 아무도 모르게 품에 품고 계신 거고. 혹시나 이 돈을 함부로 썼다가 손자에게 피해가 갈까 봐.”

내가 이어받았다.

“그럴싸하네.”

“그럴싸하지.”

박승환도 컵을 들어 빨대를 입으로 가져갔다. 음료를 마신다기보다는 생각을 위한 동작이었다.

잠시 동안 음료를 마시던 박승환이 무언가가 생각났다는 듯 말을 이었다.

“텔레비전 앞에 사진 봤냐?”

“아니. 무슨 사진이었는데?”

“유도복 입고 있는 사진이 하나 있더라.”

내가 아버지라는 사람과 이야기를 하는 동안 박승환이 집 안을 둘러봤고, 그 사진을 봤나 보다.

“유도복?”

“작아서 자세히는 안 보였는데, 무슨 대회 같더라고. 유도복을 입고 있고, 꽃다발을 들고 있었고, 할머니하고 함께 서 있는 사진이었어.”

“할머니하고만?”

“할머니하고만.”

흠. 아무튼, 대충 그림이 그려진다.

우리 둘은 잠시 동안 말없이 커피를 마셨다.

컵에 담긴 커피가 거의 바닥을 드러낼 때쯤, 박승환이 물어본다.

“전화할 거지?”

그 녀석의 시선이 내 휴대폰으로 향한다.

휴대폰에는 조금 전 할머니에게서 받은 그 녀석의 전화번호가 저장되어 있다.

“해봐야지.”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잠깐만. 내 전화로 하자.”

박승환이 날 제지한다.

“왜?”

“믿어봐.”

나는 잠시 박승환을 바라보다, 전화기를 넘겼다.

박승환의 눈과 말을 믿어보기로 했다.

휴대폰을 넘겨받은 박승환은 자신의 전화로 번호를 옮겼다. 그리고는 통화 버튼을 누르고, 전화기를 얼굴에 가져갔다.

그렇게 약 1분 정도가 흐른 후, 박승환이 전화기를 얼굴에서 떼어내며 말했다.

“안 받네.”

“모르는 번호니까.”

“그렇다면 또 방법이 있지.”

박승환은 그렇게 중얼거리더니, 문자 메시지를 작성하기 시작한다.

“뭐라고 보낼 건데?”

내가 묻자, 박승환이 나에게 화면을 보여주었다.

거기에는 이렇게 쓰여 있었다.

-성남 수정경찰서 김창회 경사입니다. 윤기훈 씨 사건을 이첩받아 추가 조사가 필요합니다. 확인하는 대로 연락 주세요.

***

문자를 보내고,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박승환의 휴대전화로 문자가 들어왔다.

윤기훈이 보낸 문자였다.

‘무슨 일 때문에 그러시는 건데요?’

문장부호를 포함한 열네 글자에 잔뜩 겁먹은 감정이 느껴졌다.

박승환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러 전화를 걸었고, 이번에는 통화가 연결되었다.

“너 어디야!”

통화가 연결되자마자 박승환이 목소리를 잔뜩 깔고서 말했다.

마치, 영화에 등장하는 전형적인 형사의 목소리를 흉내 내기라도 하려는 듯.

“광주? 전라도 광주? 경기도? 거긴 왜 가 있는데? 친구 집?”

내가 보기에는 어딘가 어설픈데,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는 먹혔는지 대화가 계속 이어진다.

“너. 지금 풀려난 거 아니고, 불구속 입건 상태니까, 어디 딴 데 가지 말고 집에 처박혀 있으란 이야기 들었어? 못 들었어? 자꾸 이런 식이면 확 구속 수사로 전환해버린다!”

이건 좀 비슷하네.

“성남까지 얼마나 걸리는데? 한 시간? 알았어. 문자로 주소 보내줄 테니까 지금 당장 출발해.”

그렇게 말하고 전화를 끊는다.

그리고는 마치 나 잘했지? 하는 표정을 하고 있다.

나는 그런 박승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만 보고 있었다.

“왜 그런 눈으로 보는데?”

그런 내게 박승환이 묻는다.

“돈 많이 벌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돈은 왜?”

“나중에 너 감옥 가면 변호사 비용이 많이 들 것 같아서.”

“변호사는 신경 안 써도 되고. 사식이나 잘 넣어주라.”

박승환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

우리는 버스로 한 정거장 떨어진 곳에 위치한 수정경찰서로 자리를 옮겼다.

물론 경찰서 안으로 들어갔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경찰이라고 구라를 쳤다고 해서 경찰서 안에서 만나자고 할 수는 없는 노릇 아니겠는가.

그대로 유치장 직행이지.

경찰서로 들어가는 대신, 길 건너편에 위치한 또 다른 카페에 자리를 잡았고, 카페 주소를 윤기훈 그 녀석에게 보냈다.

그리고 그 녀석이 올 때까지 나는 어젯밤 서현 님에게 해주었던 이야기를 승환이에게도 해주었다.

***

“제가 바보도 아니고, 진심을 다해 이야기하면 알아줄 거라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에요. 그저 그 녀석의 마음에 씨앗을 하나 심어 놓겠다는 생각이죠.”

내가 서현 님을 보며 말했다.

“어떤 씨앗을 심으시려는 거죠?”

서현 님이 물었다.

“억울함이라는 씨앗이요.”

“그 씨앗을 어떻게 심으실 건데요?”

서현 님이 아직 미덥지 못하다는 시선으로 말했다.

“시작은 좀 강하게 나가려고요. 네 녀석이 다 뒤집어쓰면 단순히 감옥 가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다. 민사 소송도 이어질 거다. 병원비만 해도 수억 들어갔다. 아. 물론 수억이라는 것은 비유적 표현입니다. 입원비만 몇천만 원 들어갔다. 그거 다 받아낼 거다. 너는 미성년자니까 가족들에게 피해가 갈 수도 있다. 아, 물론 뭐 피해보상을 받아내겠다는 생각은 없어요. 그저 좀 겁을 주고 싶을 뿐이죠. 그렇게 전제를 깔고 나서, 사실을 이야기해주는 거죠. 그 도촬범이 얼마나 추잡한 놈인지, 그런 추잡한 놈을 대신해서 감옥에 간다면 억울하지 않겠냐. 뭐 아직 어리고, 초범이고 그러면 실제로 감옥에 안 갈지도 모르지만, 범죄 기록은 남을 테니, 나중에 사회생활 하는 데 애로사항이 꽃필 거다. 그렇게 억울하다는 마음 정도는 심어두고 싶어요. 그 마음이 싹을 틔우면 틈이 생길 수도 있고.”

***

“괜찮은 것 같은데?”

내 이야기를 다 들은 박승환이 말했다.

“조금 수정을 해야겠어.”

내가 말했다.

“할머니?”

박승환이 물었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할머니를 인질로 잡겠다는 그런 짐승 같은 생각을….”

“아니야! 이 미친놈아!”

나는 헛소리를 시작하려는 박승환의 입을 다물게 한 다음, 수정한 계획을 다시 이야기해주었다.

만약 우리 생각대로, 그 멍청한 녀석이 수고비 조로 받은 백만 원을 그대로 할머니에게 가져다드렸다면, 윤기훈 그 자식이 아주 글러 먹은 놈은 아닐 가능성이 있다.

싹수 따위 없는 녀석이라면 그냥 강한 압박으로 눌러버릴 생각이었는데, 그 망할 녀석의 할머니를 보고 나니, 또 할머니 품 안에 고이 모셔져 있던 돈 봉투를 보고 나니 생각이 조금 바뀐다.

에이. 이게 다 할아버지 때문이다.

할아버지 밑에서 컸더니, 어르신들을 보면 마음이 짠한 무언가가 있다니까.

“그래서 어떻게 할 건데?”

“매수 해볼까 하고.”

내가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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