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80화 (80/271)

80 : 당사자

그러고 보니, 나 데려다준 다음, 전화한다고 그러지 않았나?

“그… 오빠분이랑 통화 하셨어요?”

“네. 한수 씨 잘 모셔다드렸다고 전화 왔었어요.”

“뭐… 특별한 말씀은 없으셨고요?”

“특별히 다른 말은 없었는데요? 혹시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아니요. 특별한 일은 없었어요. 단지.”

“단지?”

“뭐랄까. 쓸데없이 폐를 끼친 것 같아서. 나는 서현 씨 오빠인 줄도 모르고, 그냥 직원분인 줄 알았거든요. 아니. 뭐 직원분이라고 해서 막 대했다는 그런 이야기는 아니에요.”

내 말에 서현 님이 미소를 짓는다.

“알아요. 한수 씨가 그럴 분은 아니죠. 그나저나 우리 오빠가 이상한 소리 안 했어요?”

“아니요. 특별히 말씀 없으셨는데.”

너무 말씀이 없으셨지. 그 침묵이 ‘네놈이 감히 우리 귀한 여동생을’ 이렇게 말하는 것 같아서 무서웠지만.

“어땠어요?”

“네?”

“예를 들어 첫인상?”

서현 님의 질문에 나는 낮에 보았던 서현 님 오빠의 얼굴을 다시 떠올렸다.

“일단은…. 샤프하다?”

샤프한 얼굴이다. 그분이 처음 병실에 들어섰을 때, 가장 먼저 받았던 느낌이었다.

“날카롭다?”

“아니요. 인상이 날카롭다거나, 뭐 신경질적으로 보인다는 의미가 아니고, 뭐랄까요. 그, 이지적인 샤프함? 드라마에 나오는 재벌 3세 실장님 있잖아요. 그런 이미지.”

생각해보니, 서현 님 오빠는 재벌 3세 맞지.

실장님이 아니고 팀장님이라는 것이 다르지만. 그래도 중앙그룹 글로벌전략기획실 팀장이면 웬만한 회사 실장급은 되지 않겠냐?

내 말에 서현 님은 자기가 무슨 기자라도 되는 것처럼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글씨를 쓰면서 말한다.

“날카롭고, 신경질적으로 보였다. 드라마에 나오는 전형적인 재벌 3세 갑질 캐릭터. 그리고요?”

기자가 아니고 기레기셨군요. 이렇게 진실이 호도되면 더 이상 인터뷰 못 합니다.

“…말 안 할래요.”

“미안해요. 장난이었어요. 하긴 우리 오빠는 어렸을 때부터 그런 소리 들었대요.”

“샤프하다는 이야기를 어렸을 때부터 들었다고요?”

“애어른이라는 이야기요.”

“애어른?”

“재벌이라는 집단은 가족 관계가 복잡미묘하거든요. 친척들 사이에 미묘한 그런 게 있어요. 우리 오빠는 강씨 집안의 장손, 할아버지의 장손자니까 아무래도 주목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그런지 어렸을 때부터 애어른처럼 굴었다고 하더라구요. 귀여운 데라고는 하나도 없는 어린아이가 크니까, 그런 과묵함이 이제 샤프하다는 이야기로 듣게 되더라고요.”

그럴 수도 있겠다 싶다. 어릴 때부터 중앙그룹이라는 나라의 세자, 아니지, 왕세손으로 자랐다면.

“그렇다고 하던데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어릴 때부터 세상에서 여동생을 가장 사랑해주는 오빠였으니까요. 항상 웃어주고, 어디 가든 데려가고. 그런 오빠였어요. 지금은 옛날처럼 그렇게 자주 웃어주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직 세상에서 제일 좋은 오빠니까. 샤프하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잘 매치가 안 돼요.”

아무래도 서현 님과 서현 님 오빠와의 관계는 내 친구들이 보여주는 오빠-동생 관계와는 좀 다른 것 같다. 나이 차이가 있어서 그런가?

아무튼, 이야기가 나왔으니 궁금한 거 물어보자.

“그건 그렇고 그, 오빠분도 아시는 것 같던데요. 제가 그…. 작은 어르신이라는 거?”

“네. 오빠도 알고 있어요. 오빠는 할아버지의 뒤를 이어 중앙그룹을 이끌어갈 공식 후계자이니까요. 물론 어르신이나 작은 어르신의 허락이 있어야겠지만.”

허락이요?

서현 님 오빠가 내 허락을 받을 게 아니라, 내가 어르신이 되려면 그분 허락을 받아야 할 것 같은데요?

“오빠는 이미 알고 있을지도 몰라요.”

서현 님이 말씀하신다. 조금 전까지의 목소리와는 달리 무거운 목소리였다.

“무엇을요?”

“한수 씨가 왜 입원했는지, 누가 그랬는지.”

나는 말 없이 서현 님을 바라보았다.

“작은 어르신에 대한 일인데, 할아버지가 모르고 계시지는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당연히 오빠도 알고 있을 가능성이 있고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국정원에 버금가는 정보수집능력을 갖추었다는 중앙그룹이라면 알고 있을지도.

***

강민철 회장은 서재에 앉아 있었다.

그런 그의 맞은편에는 강우현이 앉아 있었고, 두 사람 사이에는 ‘法務法人 鐵柱’라는 글자가 쓰여있는 서류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강민철 회장의 시선은 서류가 아닌 손자를 향해 있었다.

손자의 얼굴에는 피로감이 드러나 있었다.

“피곤해 보이는구나.”

강 회장이 손자에게 물었다.

“괜찮습니다.”

손자의 대답이었다.

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손자는 중간에 멈추는 법을 몰랐다. 해야 하는 일이 있으면 밤을 새워서라도 해내고야 마는 성격이었다. 그리고 지금 그에게는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강 회장은 책상 위에 놓은 서류봉투로 손을 뻗었다.

빨리 이야기를 끝내는 것이 손자를 위하는 것이었다.

봉투 안에 서류를 꺼내든 강 회장은 아무 말 없이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한 장짜리 서류를 한참 동안 바라보던 강 회장은 서류에 계속 시선을 준 채로 손자에게 물었다.

“박 변호사에게 일을 맡겼더냐.”

강 회장이 물었다.

“아닙니다. 박 변호사님께서 보내오셨습니다.”

강우현이 말했다.

그 말에 강 회장은 고개를 작게 끄덕이고는 서류를 손자에게 넘겼다.

강우현은 넘겨받은 서류에 시선을 주었다.

두 사람의 사진과 인적사항이 적혀 있었다.

제이슨 임, 한국명 임진호, 24세,

장영호, 54세, 장호건설 대표.

강 회장은 서류를 보고 있는 손자에게 물었다.

“같으냐?”

“같습니다.”

강우현의 대답이었다.

“들어보자꾸나.”

강 회장이 말했다.

“우선 제이슨 임. 스물네 살, 아이테크건설 임원영 대표의 차남입니다. 한국과 미국 복수국적자이며, 초등학교와 중학교를 미국에서 나왔고, 고등학교는 한국의 국제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재외국민특별전형으로 한국대에 입학해 현재 재학 중입니다. 마약 관련해서 두 번 입건 되었고, 두 번 다 불기소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강민철 회장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사회적 부를 가진 사람은 그만큼 사회적인 책무가 있다고 생각하는 강 회장이었다.

자식들도, 손자들도 그러한 철학을 가지고 키운 그였기에, 제이슨 임이라는 청년의 행보에 자신도 모르게 눈살이 찌푸려진 것이다.

“장영호, 54세, 경북 상주 출신입니다. 90년대 초반에 상경했고, 척준용역에서 처음 일을 시작했습니다. 척준용역은 비계구조물 해체공사업이라는 간판을 달고 있지만, 국토부 등록업체는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협회 회원사도 아닙니다.”

비계구조물해체공사업종은 25개 전문 건설업종 중 하나이다. 건축물 건조 과정에서 필수 절차인 비계 설치나, 중량물 거치, 그리고 구조물 해체 등을 주로 담당하는 업종이며, 건설기술진흥법에 따라 기술사 2인 이상을 보유해야 한다.

그런데 행정부처에 등록되어있지 않다?

단순 철거업체, 정확히 말하면 용역 깡패라는 이야기였다.

“장영호는 척준용역이 나원건설로 바뀌는 과정에서 몇몇 조직원들과 함께 독립해 장호건설을 설립했습니다. 역시 비계구조물 해체공사업의 간판을 내걸었지만, 실제로는 철거현장에 인력을 투입하는 업무를 주로 하고 있습니다.”

강 회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된 상황인지 그림이 단번에 그려졌다.

건설업계에서 원청과 하청의 관계는 단순히 일감을 주고받는 관계라고 할 수는 없었다. 특히 비계구조물 해체공사업, 소위 말하는 재개발 사업에 있어서는 유독 그 관계가 특수했다.

장영호라는 깡패 출신 사업가가 운영하는 회사가 제이슨 임이라는 청년의 아버지가 운영하는 건설사의 하청기업이라는 이야기는 더 이상의 증거수집이 필요 없다는 의미와도 같았다.

강 회장은 손자를 바라보았다.

손자가 말했었다.

작은 어르신이 중앙의 힘을 필요로 한다면,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를 하겠다고.

그리고 그 말처럼 열흘이라는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사건에 진상에 대해서 파악해 놓고 있었다.

“그 청년이 왜 작은 어르신께 해를 입혔더냐.”

“아직 알아내지 못했습니다.”

“못한 것이냐? 안 한 것이냐?”

“하지 않았습니다.”

강 회장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유를 알려면 작은 어르신이나, 작은 어르신의 주변 인물들에게 접촉해야 한다. 작은 어르신이 먼저 도움을 요청해왔으면 모를까, 그러하지도 않았는데 먼저 움직이는 것은 불경이 될 소지가 있었다.

“박 변호사가 왜 이 서류를 보냈다고 생각하느냐.”

강 회장이 다시 물었다.

“일종의 질문이라고 생각됩니다.”

“질문?”

“우리가 모를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 서류를 보내온 것은 아닐 겁니다.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강우현의 말에 강 회장은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생각에 잠겼다.

“전화를 해보마. 박 변호사를 만나보도록 해라.”

“알겠습니다.”

강우현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

“오빠분이 알고 계신다면…. 회장님도 아시겠지요?”

내가 서현 님에게 물었다.

“아마도. 알고 계실 거예요.”

나는 잠시 생각해보았다.

만약에 강 회장님이 움직이신다면? 강 회장님께서 직접 내 복수를 해주신다면? 합법적, 초법적인 방법을 동원해서 벌을 내리시겠다 하시면?

장단점이 있다. 일단 내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다는 것이 장점이 되겠지만, 반대로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는 단점이 있다.

내 손으로 직접 무덤 두 개를 파놓고, 직접 반 토막을 내는 것이 가장 좋은데 말이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서현 님이 말씀하신다.

“저는 눈치채고 있었어요.”

눈치채고 있었다고?

“분명 한수 씨에게 내가 모르는 변고가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있었어요. 하지만 묻지 않았어요. 말씀해주실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어요. 결국에는 제가 묻고 말았지만, 말씀해주시지 않으셨다 해도, 제가 따로 알아보거나 하지는 않았을 거예요. 할아버지도 그러실 거라고 생각해요.”

“강 회장님도요?”

“아마 할아버지도 상황을 파악하고 계실 거예요. 어쩌면 작은 어르신보다 더 많은 사실을 알고 계실지도 몰라요. 하지만 먼저 움직이거나 하시지는 않을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어찌 되었건 작은 어르신의 의지에 반하는 행동을 하시지는 않을 테니까요. 제가 어제 들었던 이야기를 오빠나 할아버지에게 하지 않았던 것처럼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 날 지긋이 바라본다.

“말씀 안 드린 건 미안해요. 어제 말했던 것처럼 걱정 끼칠까 봐 그랬어요.”

“…알아요.”

그렇게 말한 서현 님은 다시 입을 닫는다.

또다시 우리 둘 사이에 침묵이 흐른다. 어제 상황이 다시 재현되고 있었다.

이 침묵을 깨려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하는데,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산책이나 나가자고 해볼까?

그렇게 말을 걸어볼까 하는데, 서현 님이 다시 말을 하신다.

“마지막으로 여쭤볼게요. 할아버지의 힘은 빌리지 않으실 생각이신 거죠?”

“…네.”

“그렇다면 중앙그룹의 강서현이 아닌, 한수 씨 곁에 있는 강서현은 한수 씨와 함께해도 될까요?”

“곁에 있는 서현 씨?”

“네. 바로 지금 여기, 한수 씨의 가장 가까운 곳에 있는 저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 내 눈을 바라본다.

“어젯밤, 한수 씨의 이야기를 듣고 난 이후, 계속 생각해봤어요.”

“무슨 생각을요?”

“나는 당사자가 아닌 것일까? 관계없는 사람인 것일까?”

“….”

“지연이라는 그 후배는 당사자이기에 이야기해줬다고 하셨죠.”

“…네.”

“저는 당사자가 아닌가요?”

서현 님이 물었다.

하지만 서현 님은 내 대답을 기다리지 않았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한수 씨가 다쳤어요. 소중한 사람이 다쳤어요. 친구분들도, 지연이라는 후배도, 한수 씨를 위해서 무언가를 할 수 있어요. 그런데, 저는 아무것도 못 하고, 그저 옆에서 지켜만 봐야 한다면, 그저 옆에서 지켜만 보라면, 저에게는 너무 가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렇게 말하고 서현 님은 다시 내 눈을 바라보았다.

“저는 당사자가 아닌가요?”

서현 님이 다시 물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나의 답을 기다렸다.

“서현 님은….”

나는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현 님은 당사자가 맞아요. 그 누구보다 깊숙이 관계되어있는….”

서현 님은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고 있다.

나는 그런 서현 님의 눈을 바라보며 말했다.

“같이해 주세요. 제 곁에 가장 가까이 있는 당사자로서.”

서현 님의 입가에 비로소 미소가 걸렸다.

그동안 서현 님의 미소를 많이 보아왔지만, 유난히 예뻐 보이는 미소였다.

그런 미소가 걸린 입으로, 서현 님이 말했다.

“네. 기꺼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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