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79화 (79/271)

79 : 샤프한 얼굴을 한 남자

퇴원이라는 것은 옷 갈아입고, 그동안 보살펴 준 간호사 선생님들에게 감사했다고 인사하고, ‘자. 이제 집에 가야지’ 하고 단순하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입원진료비 확인해야지, 원무가 가서 수납하고, 영수증 받아야지.

그뿐인가? 이런저런 서류도 발급받아야 한다.

예를 들어 학교에 가서 ‘제가 뻘짓 하느라 수업을 땡땡이친 것이 아니고, 입원을 해 있느라 수업을 듣지 못했습니다. 그러니 제발 출석미달 F만은….’이렇게 애원하려면 의무기록서류를 발급받아야 한단 말이다. 뭐 진단서까지는 필요 없고, 입원확인서류 정도면 되겠지.

아무튼, 서류 받고 끝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야. 퇴원 교육도 받아야지, 퇴원약도 받아야지. 병원에서 안 주는 약은 외부 약국 가서 또 사야지.

또 있다. 입원한 기간 동안 사용한 물품도 챙겨가야지.

뭐 집에서 가지고 온 것이라고 해봤자 핸드폰과 태블릿, 그리고 충전기뿐이지만, 회장님과 원장님이 가지고 오신 위문품도 있다, 이거다.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간식 창고의 간식들이야, 그동안 고생하신 간호사 선생님들 나눠 드시라고 하면 되기는 하겠다만, 그중에서도 내가 특히 좋아하는 간식 몇 개는 챙겨가고 싶은데.

아무튼, 퇴원이라는 것은 은근히, 아니 대놓고 번거로운 절차다 이거다.

근데? 나는?

그러한 절차를 싸그리 무시해버렸다.

샤프하게 생긴 남자가 가지고 온 옷을 갈아입고,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가서, 대기하고 있던 차량 뒷좌석에 앉으니 끝!

뭐지? 이 상황은 뭐지?

나는 말 없이 운전에 집중하는 남자의 뒷모습을 바라보면서 의문을 떠올렸다.

저 샤프한 얼굴의 남자는 누구인가? 두 번째로 어찌해서 내가 작은 어르신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그리고 중요한 질문 하나.

왜 서현 님이 안 오시고 저 남자가 온 것인가? 어젯밤 나누었던 대화, 그리고 이어진 무거운 분위기와 관련이 있는 것일까?

다시 말해 서현 님이 화가 나신 걸까?

그런 내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운전석에 앉은 샤프남이 말한다.

“강서현 대리는 오전에 중국으로 출국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모시게 되었습니다.”

뭐야. 이 샤프남. 독심술이라도 익혔나?

“아…. 네.”

그나저나, 서현 님, 또 중국 가셨다고? 그럼 언제 오시는 거지?

“오후에 회장님과 함께 돌아올 예정입니다.”

샤프남이 또 독심술 스킬을 시전하셨습니다.

무섭다. 무서워. 이게 말로만 듣던 중앙그룹의 정보수집능력인가?

“알겠습니다. 알려주셔서 감사합니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남자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좋아. 질문 하나는 해결했고, 이제 두 개 남았어.

누구십니까? 그리고 내가 작은 어르신이라는 거 어떻게 아시는 건가요?

그렇게 속으로 생각했지만, 샤프남은 독심술 스킬이 쿨타임 중인지, 아니면 알았는데도 무시하는 것인지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고, 반대로 질문을 해왔다.

“혹시 오늘 오후에 외출하실 예정이 있으십니까?”

“아니요. 딱히. 아니. 없습니다.”

집에서 기다리고 있어야지. 서현 님이 다시 돌아오셨을 때, 집에서 조신하게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보여드려야지.

“알겠습니다. 혹시 외출하실 예정이시라면 이쪽으로 연락을 주십시오. 바로 차량을 보내도록 하겠습니다.”

샤프남이 그렇게 말하며, 센터콘솔 암레스트에 명함 한 장을 올려놓는다.

“아. 네.”

나는 명함을 집어 들었다.

거기에는 중앙그룹 로고와 함께 ‘중앙그룹 글로벌전략기획실 3팀장 강우현’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다.

강…우현?

강우현!

손위처남?

아니! 지금 헛소리할 때가 아니야!

서현 님 친오빠?

명함에 쓰인 이름을 보고 다시 운전석에 앉아 있는 남자에게로 시선을 막 옮기려는데, 타이밍 좋게, 내 핸드폰이 힘차게 울려댔다.

핸드폰에는 서현 님의 이름이 쓰여 있었다.

나는 재빨리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한수 씨? 지금 어디세요?

“아. 저. 지금. 저기. 집에 가는 중인데요.”

-퇴원하셨어요?

“네.”

-혹시 우리 오빠가 왔나요?

“…네. 아마도 그런 것 같아요.”

내가 운전석에 앉아 있는 손위처남, 아니, 서현 님 오빠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다행이네요. 죄송해요. 저 지금 북경이에요. 예정에 없었는데 갑자기 오게 되었어요. 그리고 오늘 퇴원하신다는 말을 지금 들었어요.

“아. 네. 갑자기 가셨다고 들었어요.”

-오늘 특별한 일정은 없고, 할아버지 모시고 들어가기만 하면 되니까 늦어도 8시 정도면 집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죄송해요.

“아니에요. 저기. 네. 8시.”

-혹시 필요하신 거 있으면 오빠에게 말씀하세요. 아 그리고 오빠에게 모셔다드리는 거 끝나면 전화 좀 달라고 말 좀 전해주세요. 지금 가봐야겠네요.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어색한 표정으로 전화기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더 어색한 표정으로 운전석의 서현 님 오빠를 바라보았다.

뭐라고 말을 꺼내야 하지? 아니. 호칭을 어떻게 해야 하지? 강 팀장님이라고 부르면 되려나?

내 그런 고민을 알기라도 하는 듯, 서현 님 오빠가 먼저 말을 꺼낸다.

“모셔다드리고 전화하도록 하겠습니다.”

통화 내용이 들렸나 보다.

“…네.”

그렇게 말하고 또 어색한 침묵이 흘렀고, 그 침묵은 성수동에 도착할 때까지 계속되었다.

아니, 요즘 들어 왜 이렇게 어색한 침묵이 자주 찾아오는 거야?

아. 불편해.

아무튼, 그런 어색한 침묵은 성수동 집에 도착하고 나서야 끝이 났다.

“인사가 늦었습니다. 강우현입니다.”

나를 집까지 배웅해 준 서현 님 오빠가 그렇게 말했다.

“한수입니다. 괜한 수고를 끼쳐 드린 같아 죄송합니다. 다시 한번 감사드립니다.”

나도 최대한 정중하게 인사를 드렸다.

중앙그룹의 차기, 어쩌면 차차기 리더, 열두 살 많은 연장자, 서현 님 오빠, 그런 걸 떠나서 나를 위해 시간을 내어준 사람이다.

제대로 감사를 표하는 것이 맞다.

“아닙니다. 편히 쉬시고, 지시하실 사항이 있으시면 언제든지 말씀해주십시오.”

서현 님 오빠는 그 말을 끝으로 다시 정중한 인사를 남기고 떠나셨다.

***

다시 서초동 중앙그룹 본사로 돌아가는 자동차 안, 강우현은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말했다.

“잘 모셔다드렸다.”

-고생했어. 근데, 삼촌이 안 가고 오빠가 간 거야?

스피커를 타고 강서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강민철 회장의 차 운전을 담당하는 박 부장을 두 남매는 삼촌이라고 불렀다.

“휴가 중이시잖아.”

강우현이 말했다.

강 회장이 해외에 출장을 나가면 그 기간 동안 운전기사와 수행팀 일부는 휴가를 받았다.

-그건 그렇지만…. 단지 삼촌이 휴가 중이라서?

“무슨 말이야?”

-오빠가 직접 움직일 필요가 있었나 싶어서. 안 그래도 바쁜데.

강서현의 말에 강우현은 작게 웃음 지었다.

동생의 말이 맞았다. 그는 해야 할 일이 많았고, 그 말고도 따로 움직일 수 있는 사람이 있었다.

“누구에게 맡겨야 했을까? 작은 어르신을 모시는 일인데?”

하지만 강우현은 그렇게 말했다.

-…그건 그렇지.

“왜? 마음에 안 들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아무튼, 뭐, 이상한 소리는 안 했지?

강서현이 말을 돌렸다.

“이상한 소리? 무슨 이상한 소리? 이상한 소리가 어떤 건데?”

-….

“많이 부족하지만 제 하나뿐인 여동생을 잘 부탁드립니다. 노파심에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사랑하는 여동생의 눈에 눈물 나게 하시면 작은 어르신 눈에 피눈물이 흐르도록….”

-오빠!

강서현의 날카로운 외침이 차 안에 울려 퍼졌다.

강우현은 다시 미소지었다.

열 살 차이나 나는 여동생이지만, 이렇게 당황해하는 목소리는 자주 들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걱정 마. 쓸데없는 이야기는 안 했으니까.”

전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대답이 없었지만, 강우현은 여동생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을지 눈에 선했다.

뾰로통한 표정을 하고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오빠와 할아버지에게만 보여주는 그런 표정을.

“걱정되면 이따가 들어와서 직접 여쭤봐.”

-안 그래도 그럴 거야.

“할아버지 잘 모시고 오고.”

-알았어. 오빠도 운전 조심하고. 어제 못 잤지? 잠깐이라도 눈 좀 붙이고.

“네. 네. 알겠습니다. 이만 끊는다.”

강우현은 그렇게 말하고 통화종료 버튼을 눌렀다.

그리고는 정면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나직하게 말했다.

“서현이 눈에 눈물 나게 하면….”

***

저녁 8시.

서현 님은 말했던 대로, 그 시간에 집으로 돌아오셨다.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이 열리고, 서현 님의 모습이 보인다.

현관에서 신발을 벗는 서현 님의 모습을 보자 그제야 진짜로 퇴원하고 집에 돌아왔다는 기분이 들었다.

따지면 뭐 며칠 안 된다. 고작 열흘 남짓.

그런데도 두어 달은 된 것처럼 현관에 서 있는 서현 님의 모습이 반갑다.

서현 님은 들어오자마자 옷도 안 갈아입고 거실에 가방만 내려놓고선 말한다.

“저녁 안 드셨죠?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바로 준비할게요.”

훗. 이미 나는 서현 님이 그렇게 말할 줄 예상하고 있었지요.

당연히 저녁은 안 먹었다. 서현 님이랑 같이 먹으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렇다고 요즘 시대에 옛날 할아버지들처럼 일하고 돌아온 아내에게 ‘배고파! 밥 차려!’ 그런 소리를 할까 보냐? 큰일 날 소리! 소박맞아도 할 말이 없다.

사실 마음 같아서야 먼 길 다녀오시는 우리 서현 님을 위해 맛있는 저녁 식사를 준비해놓고 싶었지만, 한쪽 팔이 고정되어 있는 이 상황에서 요리를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지.

그렇다고, 하지만 마냥 조신하게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나는 서현 님이 돌아오실 타이밍에 맞춰 피자를 주문해 놓았다.

8시 30분, 서현 님이 샤워까지는 아니어도, 옷 갈아입고, 화장 지우고, 가볍게 씻고 나왔을 시간에 피자가 ‘딱’ 하고 도착할 수 있도록 말이지.

나는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라고 서현 님을 방으로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내가 예상한 대로 서현 님이 정리를 하고 나오는 타이밍에 피자가 딱! 하고 도착을 했다.

크으. 이놈의 황금 촉 같으니.

아무튼 그렇게 우리 두 사람은 오랜만에 집에서 저녁을 같이 먹었다.

마주 앉아 피자를 먹으면서, 나는 오늘 서현 님에게 일어난 이야기를 들었다.

원래는 오늘 중국에 갈 예정은 없었다고 한다. 예정이 없었는데, 출근하고 얼마 있다가 중국에서 갑자기 요청이 왔다는 이야기다.

표면적으로는 회장님 수행이라고 했지만, 그쪽에서 해야 할 일이 있었다는 뉘앙스였다. 뭐 물어보기도 뭐하고, 물어보면 또 ‘어머. 작은 어르신. 이제 중앙그룹이 본인 것이라고 자각을 하셨네요’ 같은 소리나 들을 테고, 설사 내용을 들었다고 내가 뭐 알기나 하겠냐.

내가 알아야 하는 이야기라면 서현 님이 이야기해주시겠지.

아무튼, 그렇게 갑자기 비행기를 타게 되었고, 이야기를 할까 하다가, 어차피 오늘 돌아오는 것은 확실하니까 나중에 이야기를 하겠다고 마음을 먹었다는 거지.

서현 님이 그렇게 한참 서해바다를 건너가고 있을 때, 타이밍 좋게 병원에서는 퇴원 결정이 내려졌는데, 그게 병원 원장실을 통해서 중앙그룹에 전달이 되었고, 알고 보니 나에 대한 사항은 회장님 일족, 즉 그룹 내 로열패밀리 관련 사항으로 분류가 되어있어서 서현 님 오빠, 강우현 팀장님에게 전달이 되었다는 이야기다.

아무것도 모르고 중국에 도착한 서현 님은 비행기가 착륙하자마자 전화기를 켰는데, 그때에야 내가 퇴원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깜짝 놀라 전화를 했더니, 오빠가 출동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뭐 그런 이야기다.

그런데, 내 입장에서는 그렇게 단순하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어젯밤 공항에서 서류를 넘겨받아 밤새도록 전략실 사람들이랑 서류를 검토하고 대응방안을 모색하던 ‘오빠’가 직접 차를 몰아 나를 ‘모시러’ 왔다는 부분에서 어딘가 모르게 찜찜한 기분이 든다 이거지.

흠. 이거 첫 만남에서부터 점수 왕창 깎인 거 아닌가 몰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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