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78화 (78/271)

78 : 첫날밤

누가 날 다치게 했는지 알려 달라는 서현 님의 말에, 나는 잠시 아무런 말 없이 그녀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서현 님도 알고 있었다. 두 명의 가출청소년이 경찰서에 가서 자수를 했다는 사실을.

그렇게 알고 있는 서현 님이 지금 나에게 묻고 있는 것이다. 누가 범인인지, 누가 나를 폭행했는지를.

나는 서현 님을 말없이 바라만 보고 있었다.

서현 님도 말없이 내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먼저 침묵을 깬 것은 서현 님이었다.

“금요일 밤에 병원에 왔었어요.”

서현 님이 말했다.

금요일, 서현 님이 회사에 출근했던 그날. 지연이가 친구들과 찾아온 그날, 지연이에게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 알려 준 그날.

“9시쯤, 집에 가서 가방을 싸기 전에, 한수 씨가 뭐 필요한 게 있는지를 물어보려고 들렀었어요.”

밤 9시. 한참 동안 친구 놈들과 지연이와 이야기를 나누던 시간이었다.

“친구분들이 계신 것을 알았어요. 그래서 그냥 돌아가려고 했는데, 문 너머로 친구분들의 이야기가 들렸어요.”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듣지 않아도, 서현 님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수 있었다.

“도촬범이라는 단어를 들었어요. 죄송해요. 엿들으려고 한 것은 아닌데, 바로 자리를 피했는데….”

그렇게 말하고 서현 님은 고개를 떨군다.

나는 그런 서현 님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손을 뻗어 테이블 너머에 있는 서현 님의 손을 가볍게 잡았다.

그리고 서현 님에게 말했다.

“무엇보다 이 말을 제일 먼저 해주고 싶어요.”

서현 님이 작게 고개를 끄덕인다.

“일부러 숨기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서현 님이 관계없는 사람이라서, 알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서 이야기를 안 한 것도 아니었어요. 서현 님과 관계없는 일이라서 알려줄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 것도 아니었어요.”

서현 님의 고개가 다시 끄덕여진다.

“그저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믿어 줄지 모르겠지만, 그게 가장 큰 이유였어요.”

서현 님이 고개를 든다. 그리고 나에게 시선을 맞춘 후, 나직하게 말한다.

“…믿어요.”

우리 두 사람은 잠시 동안 말없이 서로의 눈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렇게 짧은 침묵이 흐른 후, 내가 먼저 입을 열었다.

“일단 차 한 잔 더 하실래요? 차가 필요할 정도로 그리 긴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래도 한 잔 더 마시고 싶네요.”

“아. 네. 바로….”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서려 했지만, 일어설 수는 없었다. 잡고 있는 손을 내가 놓아주지 않았으니까.

“제가 타올게요. 서현 씨는 앉아 계세요.”

“아니요. 제가. 한수 씨. 몸도 불편한데….”

“물 끓이고 따르면 되는 건데요. 그 정도도 못 할까 봐서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는 잡고 있던 서현 님의 손을 가볍게 두어 번 두드려 준 다음 자리에서 일어났다.

***

나는 그동안 있었던 대부분의 사실들을 이야기해주었다.

축제 기간 동안 지연이에게 일어난 일, 도촬범이 변호사를 대동하고 벌였던 만행, 내가 어떻게 대응했는지, 도촬범이 나에게 뭐라고 폭언을 퍼부었는지, 그리고 열흘 전 그날 밤, 그 사건이 있던 날의 이야기, 금요일에 왜 지연이가 왔는지, 앞으로 친구들과 어떻게 하기로 했는지.

물론 모두 다 이야기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면, 그 사건이 있기 전, 김민우를 만난 이야기라든가, 사건 당일 날, 어떻게 폭행을 당했는지에 대한 이야기는 생략했다.

김민우 이야기는 아직 확실한 것이 아니었고, 폭행당한 이야기는 전체적인 그림을 그릴 때 꼭 필요한 이야기가 아니었으니까.

물을 끓여 우려낸 차가 다시 차갑게 식을 때까지, 서현 님은 말없이 내가 하는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지연이에게 이야기를 하기는 해야 했어요. 당사자이고. 나처럼 도촬범에게 해코지를 당할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요. 서현 씨에게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지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었어요. 서현 씨가 물어보면 어떻게 이야기를 해야 할까 생각해봤고, 솔직하게 이야기해주자. 그렇게 결론을 내렸어요. 하지만 더 솔직히 말하면 알게 하고 싶지 않았어요. 아까 말했던 것처럼, 서현 씨가 당사자가 아니라서, 관계없는 사람이라서 그런 것이 아니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았어요. 일부러 숨기거나 거짓말을 하려고 한 것은 아니었어요.”

서현 님이 고개를 작게 끄덕인다.

“…고마워요. 이야기해줘서.”

내가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십여 분 만에 처음으로 서현 님이 말했다.

고맙다는 말을 들으니 더욱 미안해진다.

이야기하지 않아서, 그리고 이야기해서.

서현 님은 말없이 다 식어버린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간다. 그렇게 입을 적시고는 한참 후에야 다시 말을 시작한다.

“한수 씨는…. 어떻게 하고 싶으세요?”

나는 잠시 서현 님을 바라보다가 말했다.

“…복수를 하고 싶어요. 아니. 복수라는 표현은 적절하지 않아요. 죄를 지었으니 죗값을 받게 하고 싶어요.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다는 것을 알려주고 싶어요.”

나는 더 이상 서현 님에게 감추거나, 돌려 말하고 싶지 않았다.

솔직한 내 말에 서현 님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하지만 쉽지 않네요.”

“네. 쉽지 않을 것 같아요.”

그 말을 끝으로 잠깐의 침묵.

오늘은 이상한 날이었다.

대화와 침묵이 계속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반복된 침묵은 분위기를 무겁게 만들었다.

분위기를 가라앉히는 침묵이 잠시 흐른 후, 서현 님이 말했다.

“한수 씨는…. 할아버지, 어르신 말고, 저희 할아버지의 힘을 이용하지 않으실 생각이신 거죠?”

“네.”

내가 말했다.

“현실적으로 방법이…. 쉽지 않은데도요?”

“솔직히 생각을 안 해본 것은 아니에요. 회장님이 도와주신다면, 아마도 제가 원하는 바를 이룰 수 있을지도 모르죠. 아마, 그렇게 되겠죠. 솔직히 도와달라고 말을 해볼까 생각을 안 해본 것도 아니었어요. 하지만….”

나는 거기까지 말하고 서현 님을 바라보았다.

서현 님의 착 가라앉은 눈을 바라보면서 어떻게 말하는 것이 서현 님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을까를 잠시 고민해 보았다.

하지만 정답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솔직하게.

“도촬범은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서 사람을 동원했어요. 누군가의 금전적인 도움을, 아마도 부모님이겠죠. 도움을 받아 이번 일을 벌였어요. 제가 만약 회장님의…. 중앙그룹의 힘을 빌린다면, 저도 그 도촬범과 똑같은 짓을 한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얼마 전 할아버지에게 내려가서 이렇게 말하고 왔어요. 스물한 해를 사람으로 살았고, 아직은 사람의 마음으로 살고 싶다고. 그렇기에, 회장님의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아요.”

서현 님은 고개를 끄덕이지 않았다. 그저 나를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다시 우리 사이에는 침묵이 흘렀고, 이번의 침묵은 그리 짧지 않았다.

***

심하게 가라앉은 분위기는 다시 쉽게 복구되지 않았다.

서현 님은 잠시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말했고, 나는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티타임이 끝나고 우리는 침대에 누웠다.

물론 서현 님과 내가 같은 침대에 누운 것은 아니었다. 나는 원래 내 자리에, 서현 님은 좁고 불편한 보호자용 침대, 물론 일반 병실에 놓여 있는 보호자용 침대에 비하면 가구가 아닌 과학이라고 불러도 손색없었지만, 아무튼 거기에 누우셨다.

분위기라도 좋았으면, ‘거기 너무 좁고 힘든데, 이리로 올라오세요. 아 물론 같이 눕자는 말은 아니고, 제가 거기에서 잘게요.’ 그러면 서현 님이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그러면서 내가 눕네, 네가 눕네 투닥투닥하다가, 같이 한 침대에 눕는 걸로 아름답게 마무리가 될 수도 있었을 수도 있었을 텐데.

아니. 이건 너무 오반가?

아무튼, 분위기만 괜찮았어도, 이런저런 이야기를 꺼내볼 수 있었겠는데, 서현 님의 얼굴 표정이 너무 심각해서 뭐라고 말을 꺼낼 수가 없다.

아. 물론 아예 한마디도 안 한 것은 아니다.

‘그 침대 너무 불편할 것 같은데….’까지는 시도했지만 서현 님의 짧은 ‘괜찮아요’에 더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아무튼 불이 꺼지고, 나는 내 침대에, 서현 님은 보호자용 침대에 누워 그렇게 밤이 찾아왔다.

어쨌든, 오늘 이 밤이 서현 님과 내가 같은 공간에서 밤을 보내는 첫 번째 날이다. 물론 첫날밤의 정의를 어디까지로 규정하느냐에 따라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광의(廣義)로 본다면 첫날밤이라고, 기록에 남는 공식적인 첫날밤이라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이렇게 무거운 분위기의 첫날밤이라니. 참 슬프다.

그렇게 침대에 누워서 뒤척거리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서현 님 눈치가 보여서 뒤척거리지도 못하고,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가, 새벽이 다 되어서야 잠이 들었고, 잠에서 깨어났을 때에는 이미 해가 중천까지는 아니어도 이미 일반적인 출근 시간인 9시에서 한 시간이 더 지나 있었다.

물론 서현 님은 안 계셨다.

대신 쪽지가 남아 있었다.

어제 공항에서 전달한 서류 때문에 오늘 회사에 나가봐야 하고, 인사를 하고 가고 싶었지만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차마 깨우지 못하고 간다는 내용의 쪽지만이 덩그러니 남겨져 있을 뿐이었다.

***

왜 나쁜 소식은 한꺼번에 찾아온다고 하지 않던가.

정확히 말하면 나쁜 소식이라고 말할 수는 없지만, 아무튼 새로운 뉴스가 찾아왔다.

바로 퇴원이었다.

처음 입원했을 때에는 아무리 짧아도 2주는 있어야 한다고 들었는데, 열흘 만에 퇴원하게 되어 버린 것이다.

점심을 먹기 전, 내 팔을 수술해주신 교수님이 찾아오셔서 이제 퇴원해도 되겠다고 말씀을 하고 가셨다.

아니, 뭐, 솔직히 말하면 좀 늦은 감이 있다.

처음 며칠이야 좀 아팠지만, 특히 첫날에는 갈비뼈 부러진 것 때문에, 숨 쉴 때마다 에로배우처럼 신음소리를 내야 했지만, 뭐, 금방 괜찮아졌지. 한 며칠 지나니까 팔 부러진 것 빼고는 아무렇지도 않았고, 그 팔 부러진 것마저도 며칠 지나니까 부기가 빠졌다.

겉으로 보기에, 내 팔에 댄 깁스가 아니라면, 내가 다쳤다는 것도 모를 거다.

뭐, 공식용어로 표현하면 나이롱 환자라는 이야기지.

뭐 나이롱도 나이롱이지만, 지금 이거 병실 입원료도 만만치 않을 것 같은데.

물론 검색해봤다. VIP 병실에서 하루 자는 데 얼마나 하는지.

VIP 병실 입원료는 영업기밀이라더만. 그래서 외부에 노출되지는 않는데, 신문에서는 뭐 대충 하루에 3백만 원 정도로 추산하고 있더라.

그럼 내가 열흘 있었으니까. 입원비만 적어도 3천만 원 정도 나왔다는 이야기네.

병원도 수익을 내야 하는 기업의 일종인데, 나이롱 환자 때문에, 계속 그런 부담을 안고 있을 수는 없겠지.

잠깐만. 설마 입원비 나보고 내라는 거는 아니겠지?

원장님이 찾아오셔서 ‘서현이에게 들으니, 작은 어르신께서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싶기에 그룹의 힘을 빌리지 않으시겠다고 하셨다더군요. 그러니 입원비 3천만 원을 지불해 주시길 바랍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거 아냐?

아오, 진짜! 이놈의 입이 방정이지.

그렇게 생각하며 막 입을 때리고 있는데, 다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네. 들어오세요.”

내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열렸고, 양복을 입은 남자가 들어왔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다.

샤프하다.

그게 남자의 첫 이미지였고, 그 이미지를 떠올린 순간 느낌이 파파팟 하고 왔다.

원무과 직원?

어떻게 하지? 일단 무릎부터 꿇을까? 아니면 배 째라고 해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다가온 남자가 고개를 숙인다.

그리 고개를 많이 숙이지는 않았지만, 정중하고 기품있는 인사였다.

“퇴원을 도와드리겠습니다.”

맞구나. 원무과 직원!

“아! 네.”

“일단 옷부터 갈아입으시죠.”

남자는 그렇게 말하고는 손에 들려있던 쇼핑 백 하나를 침대 위에 올려놓는다.

“문 앞에 대기하고 있겠습니다. 다 갈아입으시면 불러 주십시오.”

그렇게 말하고, 다시 정중하고 기품 있지만 과하지 않는 인사를 하고, 병실 밖으로 나간다.

잠시 어벙벙한 표정으로 그 남자가 나간 문을 바라보다, 정신을 차리고 쇼핑백을 살펴보니, 내 나이 또래의 남자 대학생들이 편하게 입을 만한 옷이 안에 들어있다.

근데, 이거 처음 보는 옷인데? 내 옷 아닌데?

국내 최고의 감동 서비스를 제공한다는 중앙의료원은 집에 갈 때 갈아입을 옷도 준비해 주는 건가?

그런 생각을 하며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뭐야. 딱 맞네?

“크흠. 저기. 옷 다 갈아입었습니다.”

내가 문을 향해 그렇게 말하자, 그 샤프한 얼굴의 남자가 다시 들어온다.

그리고는 주머니에서 입원비 정산서를 딱! 하고 꺼내는 것이 아니라….

“모시겠습니다. 작은 어르신.”

그렇게 말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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