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77화 (77/271)

77 : …저에게도 말해주세요 (2)

내가 머무는 병실은 소위 VIP 전용 병실이기에, 병실 내부에 화장실과 샤워실이 갖춰져 있었다.

하지만 서현 님은 다른 곳에서 샤워를 하고 오겠다며, 캐리어를 끌고 병실 밖으로 나가셨다.

솔직히 아쉽기도 했지만, 또 한편으로는 내심 다행이다 싶은 것이, 서현 님이 여기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샤워를 하신다면, 내 심장이 버텨낼 수 있을지 감당할 수가 없다.

물론 내 미니미도.

뻥 하고 터져버릴지도 몰라.

아무튼, 그렇게 캐리어를 끌고 나가신 서현 님은 30분 정도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병실로 돌아오셨다.

“죄송해요. 너무 오래 걸렸죠?”

그렇게 말하는 서현 님에게 나는 굳은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30분. 남자에게라면 충분한 시간이지. 너튜브 보면서 큰일도 보고, 이도 닦고, 샤워도 하고, 면도도 하고, 애프터 쉐이브까지 바른 다음, 거울 보면서 배에 힘 한번 주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내가 아무리 여자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해도, 화장 지우고, 씻고, 말리고, 옷 갈아입는 데 30분이라는 시간이 충분하지 않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그런 내 생각을 증명하듯, 서현 님의 머리에는 아직 물기가 남아 있다. 머리끝에 물방울이 방울져 뚝뚝 떨어진다.

물론 얼굴에 홍조도 발그레.

“안 돼요.”

내가 말했다.

“네?”

“그렇게 젖은 머리로 다니시면 안 돼요. 감기 걸려요.”

내가 엄한 표정으로 말했지만, 서현 님에게는 씨알도 먹히지 않나 보다.

“그러면 한수 씨가 말려 주세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나에게로 다가온다.

내가 어떻게 반응하기도 전에 서현 님이 내 앞에 등을 보이고 다소곳하게 앉는다.

다시 말해, 내 두 무릎 사이에, 서현 님의 엉, 엉, 엉덩….

아니. 저기요. 서현 님? 저기. 너무 가까운데. 자세가 저기 아주 많이 행복, 아니 불편한데요.

나도 모르게 침이 꿀떡 넘어간다.

그런 행복하고 불편한 자세로, 서현 님이 드라이기를 들고 머리를 말리면, 나는 깁스 없는 팔에 수건을 들고 열심히 서현 님 머리의 물기를 닦아낸다.

지금 자세만으로도 미치고 환장할 지경인데, 머리가 들어 올려질 때마다 슬쩍슬쩍 보이는 서현 님의 하얀 목덜미가 아주 사람을 미치게 한다.

아니. 서현 님! 이건 반칙이죠! 날 아주 말려 죽이시려고 작정을 하신 건가요?

그렇게 나는 한참 동안 한 손으로는 열심히 물기를 닦아내며, 서현 님의 목덜미를 훔쳐보며, 마음속으로 주기도문과 반야심경을 번갈아 암송해야 했다.

***

적당히 머리가 마르자 서현 님은 차를 마시겠냐고 물었고, 나는 산책 가자는 말을 들은 강아지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서현 님이 만든 두 잔의 찻잔을 사이에 두고 우리는 마주 앉았다.

“오늘 못 돌아오시는 줄 알았어요.”

내가 말했다.

“못 돌아올 뻔했어요.”

서현 님이 말했다.

“그럼 회장님도 같이 돌아오신 거예요?”

“아니요. 할아버지는 내일 오전에 들어오실 거예요. 저만 혼자 돌아왔어요.”

“어? 그래도 돼요?”

“사실은 안 돼요. 하지만 한수 씨 보고 싶어서 몰래 도망쳐 왔어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며 장난꾸러기 같은 미소를 짓는다. 마치, 선생님에게 작은 장난을 치는 여고생 같은 눈을 하고 있었다.

우리 서현 님은 출근용 오피스룩을 입었을 때는 정말 세상에서 가장 섹시한 커리어 우먼 같은데, 이렇게 평상복에 화장 지운 얼굴로 웃고 있으면 이제 막 대학에 입학한 여대생, 가끔은 여고생 같은 얼굴이 있다.

열라게 매력 있어. 이러니까 내가 뻑이 가지.

아니.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도망…이요?”

내 말에 서현 님이 다시 쿡쿡쿡 하고 웃더니, 말을 이어간다.

“인편으로만 전달해야 하는 서류가 있어요.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만 맡길 수 있는 그런 서류. 그 서류를 제가 들고 왔어요.”

아하. 그럼 그렇지. 난 또 나 보고 싶다고 진짜로 강 회장님 버리고 도망쳐 온 줄 알았네.

근데 진실을 알고 나니 뭔가 좀 섭섭한데?

“그러면…. 지금 여기로 오시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중요한 서류, 그거 먼저 전달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아까 한국에 들어온 지 한 시간도 안 되었다고 했지? 그러면 공항에서 바로 병원으로 왔다는 이야긴데.

“이미 공항에서 전달했어요.”

“공항에 사람이 나와 있었어요?”

“네. 얼른 넘겨주고 바로 병원으로 달려왔어요.”

그렇게 말하고 달리는 모양새로 두 팔을 흔든다.

귀여워. 진짜 여고생 같아! 앞머리에 머리핀 꽂고 교복만 입히면 누가 봐도 여고생일 텐데.

아니지! 교복은 안 되지! 교복은 범죄지!

그건 그렇고, 그렇게 중요한 서류인데, 아무에게나 넘기면 안 되는 거 아닌가?

“그럼, 저기, 그 중요한 서류는 믿을 만한 사람이 받아간 건가요?”

내 질문에 서현 님의 눈이 변한다.

조금 전 보여주었던, 장난꾸러기 여고생의 눈이다.

“드디어 한수 씨도 중앙그룹이 한수 씨 것이라고 자각을 하셨네요. 작은 어르신,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잘 전달했습니다. 아닌가? 믿어도 될까요?”

아니, 이 언니 보게? 그렇게 이쁜 얼굴로 무서운 말씀 하시네.

“…누가 받아갔는데요?”

“강우현 팀장님이요.”

나는 멀뚱멀뚱 서현 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강우현 팀장님이라고 해도 내가 어찌 알아?

잠깐. 강우현? 강…?

“글로벌전략기획실 3팀 강우현 팀장. 강민철 회장님의 장손자이자, 회장 비서실 소속 강서현 대리의 친오빠 강우현 팀장이 공항에서 직접 서류를 넘겨받았습니다. 확인해 볼까요? 제대로 전달했는지? 혹시 어디로 빼돌린 건 아닌지. 아니, 지금 당장 이리로 불러서 제대로 일을 처리했는지 보고하라고 할까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 또 쿡쿡쿡 하고 웃는다.

우리 서현 님,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한잔하셨나? 오늘 어쩐 일이시지? 안 하던 농담을 다 하시고.

아니 농담도 농담이지만, 내용이 살 떨린다.

세계 10위 규모의 중앙그룹의 기밀서류,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을 통해서만 전달해야 하는 기밀서류를 가지고 농담이라니. 아니, 기밀서류는 둘째치고, 글로벌전략기획실 팀장? 중앙그룹의 두뇌 역할을 한다는 그 글로벌전략기획실?

그리고 오빠?

아니, 서현 님 오빠가 계셨어?

“…오빠가 계셨어요?”

“네. 저보다 열 살 많은 오빠가 있어요.”

열 살? 열 살이면, 서현 님이 나보다 두 살 연상이니까, 그렇다면 띠동갑?

아내의 오빠를 뭐라고 부르지? 처남, 손위처남. 그럼 띠동갑 손위처남이라고 부르면 되는 건가… 가 아니지!

“부를까요? 지금 당장 여기로 달려오라고 할까요?”

그러면서 서현 님이 전화기를 들어 올린다.

고향에 있을 때, 친구 놈들 중에서 여동생을 가진 놈들을 잘 관찰해보면 두 개의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 번째로 오빠 놈들은 여동생을 싫어한다는 것이다.

나야 형도 누나도, 남자, 여자 동생도 없는 순도 백 퍼센트의 외동이니 잘 모르지만, 여동생을 가진 놈들은 자라는 동안 서로에게 무슨 트라우마라도 주고받았는지, 여동생에게서 오는 깨톡을 볼 때마다 ‘아오 이 미친년이!’를 먼저 시전하더란 말이지.

뭐 그건 여동생도 마찬가지이긴 한데, 내 친구 여동생들이 내 친구들을 ‘오빠’라고 부르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다.

보통 이렇게 말하지. ‘한수 오빠. 우리 집 미친 새끼는 어디로 갔어요?’

두 번째는 그렇게 싫어하는 여동생의 남자친구를 더더욱 싫어한다는, 아니 증오한다는 것이다.

길 가다가 여동생이 남자 놈이랑 나란히 걸어가는 모습이라도 보면, ‘뭐야. 저 새끼는’이 먼저 튀어나오고, 손이라도 잡고 있으면, 욕할 시간도 아깝다는 듯, 냅다 날라차기부터 해버린다 이거지.

모든 오빠가 그러한 것은 아니겠지만, 내가 관찰한 바에 따르면 대다수의 ‘친오빠’라는 놈들의 습성이 이러했다.

그런데, 그런 친오빠를 부른다고요?

손만 잡아도 날라차기를 하는 오빠를 이곳으로? 자고 가겠다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계신 이곳으로 부른다고요?

그 오빠가 높은 확률로 저 가만 안 둘 것 같은데요? 멀쩡한 팔과 두 다리가 부러지는 것으로 끝나면 다행일 것 같은데요?

“장난이에요, 장난. 불렀어도 지금은 못 올 거예요. 제가 전달한 서류 때문에 본사는 비상이 걸렸고, 글로벌전략기획실 소속 직원들 전부 다 지금 회사로 끌려가고 있을 거예요.”

휴우. 다행이다. 오늘은 살아남겠구나.

근데, 중앙그룹 본사에 비상이 걸릴 정도로 중요한 서류를 서현 님이 들고 왔다는 생각을 하니, 새삼 이 사람들은 나와 사는 세계가 다르다는 실감이 든다.

사실 생각해보면 서현 님에 대해서 그렇게 많은 걸 알지는 못하는구나. 나이, 할아버지와 오빠가 있고, 하버드를 나왔고. 그리고?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고 생각했는데, 서현 님에 대해서 모르는 것이 많다.

그런 생각을 하며 서현 님을 바라보자, 서현 님이 내 눈빛에서 뭔가를 읽었나 보다.

“무슨 생각 하세요?”

“네? 아뇨. 그냥.”

“그냥?”

“오빠가 계신 줄은 몰랐어요.”

“이제 아셨네요.”

“하하. 네. 이제 알았네요. 하지만 아직 서현 씨에 대해서 모르는 게 많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알고 싶은 게 있으시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뭘 물어볼까? 신체 사이즈? 아니야! 선물! 선물하려면 알아야 할 거 아냐!

“그렇게 말씀하시니 막상…. 아 그리고 서현 씨도 뭐 저에 대해서 궁금한 거 있으면 무엇이든 물어보세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현 님의 눈빛이 변한다.

뭐랄까, 조금 전 여고생의 장난스러움이 사라졌달까? 진지해졌달까?

“그럼 저도 하나 여쭤볼게요.”

뭐지? 갑자기 등골이 서늘한데.

“넵.”

“아까 전에, 제가 병실에서 한수 씨 기다릴 때요.”

아까 전? 밑에서 한국대 프린스 만나고 다시 돌아왔을 때?

“네.”

“그때 왜 내려가셨다 온 거예요?”

“네? 저기…. 그. 담배.”

내가 그렇게 말했는데, 서현 님은 이미 내 대답을 알고 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나는 그런 서현 님의 모습이 어떠한 의미를 담고 있는지, 알 것 같았다.

왜 사실대로 말해주지 않았느냐.

그런 의미였다.

“미안해서요.”

나는 솔직하게 말했다.

이런 상황에서 괜히 덜 혼나겠다고 거짓말을 하거나, 변명을 덧붙이면 나중에는 더 혼난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고 있으니까.

“미안해서요?”

“…네. 뭐, 담배, 몸에 좋은 것도 아닌데, 서현 씨가 간병해 주는데, 미안하기도 하고, 뭐. 좀 부끄럽기도 하고….”

내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서현 님은 그런 날 보고 마치 솔직하게 잘못을 고하는 유치원생을 보는 듯한 선생님의 미소를 지어주었다.

“고마워요. 그렇게 생각해줘서. 하지만 그러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한수 씨가 하고 싶은 말, 하고 싶은 행동 저에게 숨기지 않으셨으면 좋겠어요. 아. 물론 솔직히, 건강을 생각해서라도 담배는 안 피우셨으면 좋겠다는 생각은 하지만, 그래도 저 때문에 한수 씨가 불편하지 않으셨으면 하는 마음이 더 커요.”

담배 끊으라는 말보다 더 무서운데.

“그리고, 조금만 더 욕심을 내자면….”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입을 다문다. 더 이상 말을 이어가지 않고, 내 눈만을 바라보고 있다.

그렇게 짧은 침묵과 눈 맞춤은 서현 님이 눈을 피하면서 끝이 났다.

“아니에요. 제가 쓸데없는 소리를 했어요. 죄송해요.”

그런 서현 님의 말에 긴장감과 함께 맥이 탁 풀려버린다. 무언가 조금 섭섭한 기분까지 든다.

나는 시선을 피하는 서현 님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현 씨는 서현 씨 때문에 제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셨죠? 저도 같은 생각이에요. 나 때문에 서현 씨가 불편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내 말에 서현 님이 다시 나를 바라보신다.

“욕심내도 돼요. 서현 씨는 욕심내도 되는 사람이에요.”

내 말에 서현 님의 고개가 위아래로 작게 끄덕여진다.

그리고도 다시 한번 짧은 침묵이 흐른 후, 서현 님의 입이 열린다.

“…저에게도 말해주세요.”

“무엇을요?”

“누가 한수 씨를 다치게 했는지.”

내 눈을 보면서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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