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 : …저에게도 말해주세요 (1)
참, 이상한 토요일이었다.
서현 님과 꽁냥꽁냥하는 행복한 토요일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갑자기 잡힌 출장 때문에 서현 님은 북경으로 떠나버리셨다.
서현 님 없는 쓸쓸한 토요일이 되겠구나 싶었는데, 다행스럽게도 지연이가 찾아와주었다.
간식 창고에서 비싼 것들만 골라 먹이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다 보니 어느새 저녁 먹을 시간이 되어버렸고, 별로 배고프지 않다는 그 녀석을 억지로 병원 지하의 푸드코트로 데려가서 저녁까지 사 먹였다.
마음 같아서는 밖으로 나가서 맛있는 거 사주고 싶었는데, 아무리 원장님 빽이라도 무단 외출하다 걸리면 욕먹을 것 같아서 나가지는 못하겠다.
나 욕먹는 거야 어쩔 수 없다고 해도, 나 때문에 원장님에게 피해가 가면 안 되지.
아무튼, 그렇게 저녁을 먹이고, 커피도 한잔 마시고, 지하철 타고 가겠다는 것을, 억지로 택시를 태워 보냈다. 기사님에게 꼭 아파트 입구까지 가달라고 백번 부탁하면서.
그렇게 지연이를 보내놓고, 다시 병실로 올라가서 서현 님이 오기 전에 꽃단장을 하려 했는데, 한국시간으로 밤 9시, 중국 현지 시간으로 밤 8시에 서현 님으로부터 깨톡이 왔다.
깨톡 내용을 요약해서 말하면 오늘 못 돌아온다는 이야기였다. 예정과는 다르게 뭔가 중요한 일이 생겨버렸다, 뭐 그런 내용….
중요한 일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뉘앙스로 봐서는 중국에서 엄청나게 높은 누군가가 강 회장님의 발목을 잡았나 보다. 시간을 쪼개서 쓴다는 중앙그룹 회장님의 일정을 바꿀 정도라면, 아마 거기에서도 엄청나게 높은 누군가가 관련되어 있다는 이야기겠지.
마음 같아서야 당장 강 회장님에게 전화를 걸어, 아니, 아무리 그래도 주말 내내 일 시키고 이러면 안 되는 거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그게 뭐 말이 되는 이야긴가.
그리고 솔직히 강 회장님이 잘못한 것도 아니다. 발목을 잡은 중국 쪽 높은 분이 문제지.
이거이거. 혼내줘야 되겠구만.
나는, 아니 할아버지는 한반도의 수호신이라 중국은 관할이 아니려나? 대륙을 관장하는 신에게 업무협조공문 같은 걸 넣어야 하나?
아무튼 그건 그거고, 서현 님 없는 쓸쓸한 일요일이 되겠네.
지연이는 또 안 오려나?
***
예상대로 쓸쓸한 일요일이었다.
놀라울 만큼 그 누구도 (나에게) 관심을 주지 않았다.
서현 님은 귀국하지 않으셨다. 그저, 오늘도 돌아오지 못할 것 같다는 깨톡만 왔을 뿐.
지연이도 문병을 오지 않았다. 친구 놈들도 무슨 작당 모의라도 꾸미고 있는지, 병문안은커녕 깨톡도 오지 않는다.
심심하니까 놀러 오라고 할까 하다가, 뭔가 자존심 상해서 하루 종일 TV만 보고 지냈더니, 하루가 그냥 끝나버렸다.
입원하고 처음으로 온전히 혼자서 하루를 보냈다.
오랜만이다. 온전히 혼자서 이렇게 하루를 보내는 건 진짜 오랜만이네.
마지막으로 이렇게 하루를 보낸 것이 언제였더라?
하숙집에 있을 때, 신지수랑 깨지고 방 밖으로 한 번도 안 나가며 잠만 자던 그때가 있었군.
그때 우울했지. 참 찌질했지.
물론 지금 상황을 그때랑 비교하면 안 될 것 같다.
호텔 같은 VIP 병실에, 호텔 룸서비스 같은 음식에, 병실 한쪽에 산더미처럼 쌓여있는 간식을 비교하면 말이다.
간식도 저렇게 산더미처럼 쌓여있으면 오히려 손이 안 간다.
물질적 풍요가 정신적인 빈곤을 채워주지 않는다는 이야기를 듣기는 했지만, 돈 걱정 없는 사람들이 우울하다고 병원 가는 이유를 조금은 알겠네.
아무튼, 나는 일요일 밤 예능을 보면서 간식 창고를 좀 뒤적거리다, 그냥 참기로 했다.
뭐 막 땡기는 것이 없기도 했지만, 외로움과 우울함을 설탕 범벅된 탄수화물 덩어리로 위로받다가는 버릇될 것 같아서.
간식 대신 담배나 한 대 피우자는 생각으로 겉옷을 챙겨 입었다.
원래도 나는 담배를 그렇게 많이 피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병원에 입원하고 나서는 거의 피우질 않았다. 한 세 대 폈나?
처음 입원했을 때야, 당연히 아프니까 담배 피우러 나가고 싶은 마음은 들지 않았고, 좀 괜찮아진 다음에도 항상 서현 님이 곁에 계셨으니 담배 피우러 가기가 뭐했다.
‘담배 한 대 피우고 올게요.’ 그러면 서현 님은 다녀오라고 하겠지만, 자기 시간 빼서 옆에서 보살펴주는 서현 님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는 건 미안하잖아.
뭐 또 사실 귀찮기도 했다.
병원 건물은 당연히 다 금연이었고, 담배를 피우려면 1층으로 내려가서 다음 병원 밖 흡연구역까지 걸어가야 하는데, 이게 또 은근히 귀찮다.
하지만 이렇게 마음이 허전할 때는 또 담배만 한 것이 없지.
내려가기 귀찮지만, 운동한다는 핑계를 만들어 나는 결국 흡연구역으로 향했다.
산책길 으슥한 곳에 마련되어 있는 흡연구역에는 몇몇 환자복을 입은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애초부터 아는 사이인지, 아니면 같이 담배를 피우다가 친해졌는지, 서로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나는 당연히 흡연구역 구석탱이에 엉거주춤 서서 담배에 불을 붙였다.
그렇게 담배를 몇 모금 빨았을 때, 누군가가 흡연구역으로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데, 그 사람의 방향성이, 시선이 나를 향하고 있다.
불을 빌리려는 사람일까? 그런 생각을 하며 다가오는 남자를 바라보니….
어? 내가 아는 사람이네?
교수님 친구 제자, 일명 교친제, 베스트셀러 작가, 한국대 심리학과 교수 임용 1순위 포닥, 예능 PD 섭외 1순위, 한국대 프린스, 그런 타이틀을 보유하고 계신 정지수 선생님이 나를 항해 다가오고 있었다.
저 양반이 왜 여기서 나와?
“혹시나 싶었는데, 역시 맞네요.”
한국대 프린스가 남자마저 홀려버릴 것 같은 상콤한 미소로 말을 건넨다.
“…선생님? 안녕하세요?”
내가 재빨리 담배를 뒤로 감추며 인사를 건넸다.
“아. 괜찮아요. 편하게 피워요.”
한국대 프린스가 그렇게 말했지만, 그의 얼굴에 드러난 표정을 보니 이 양반 흡연자 아니라는 게 딱 드러난다. 혐오감까지는 아니어도, 거리감 같은 것이 보이네.
나는 재빨리 재떨이에 담배를 비벼 껐다.
비흡연자와 흡연자의 권리가 충돌하면 흡연자가 한발 물러서는 것이 상식 아니겠는가.
“괜찮은데. 그냥 피워도.”
말은 그렇게 하지만, 내심 고마워하는 표정을 짓는다.
“아닙니다. 일단 자리를 옮기실까요?”
눈치 빠른 내가 권유했고, 우리는 담배 연기가 몽울몽울 피어오르는 흡연구역을 빠져나왔다.
***
흡연구역의 담배 연기가 닿지 않는 산책로 벤치.
나는 그곳에서 한국대 프린스, 아니 정지수 선생님이 어떻게 나에게 다가왔는지를 듣게 되었다.
중앙의료원에는 다른 종합병원과 마찬가지로 심리치료 및 상담센터를 운영하고 있고, 이 병원 상담센터의 센터장이 바로 정지수 선생님 학부, 대학원 선배였고, 선배인 센터장에게 부탁을 받아 프로젝트를 하나 진행하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오늘 마침 업무협의를 위해서 왔고, 회의를 마치고 집에 가기 위해 버스 정류장으로 걸어가다가 흡연구역에 있는 나를 우연히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나저나 의외네.
한국대 프린스 정도면 당연히 뚜껑 열리는 문 두 개짜리 컨버터블 쿠페 같은 거 타고 다닐 것 같은데, 버스 타고 다닌다고? 저 정도 유명인이면 대중교통수단 이용하기 쉽지 않은 거 아냐?
“그러셨군요. 갑자기 선생님을 뵈어서 조금 놀랐습니다.”
내가 예의 바르게 말했다.
“놀라게 하려는 것은 아니었는데. 미안하네요.”
프린스가 상콤한 미소로 말한다.
저 상콤한 미소는 스킬 아니고 종특일 거야. 태어날 때부터 저런 미소를 패시브로 장착하고 태어났을 거야.
“그나저나 지금 입원을 해 있는 건가요?”
프린스가 내 팔에 깁스와 환자복을 바라보며 묻는다.
“아. 네. 하하.”
“어쩌다가. 많이 다쳤나요?”
“아니요. 그냥 좀…. 넘어져서.”
내가 머쓱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니. 그렇잖아.
사실은 후배 중에 유지연이라는 이쁜 후배가 있는데, 저번에 축제 기간 동안 도촬범 놈이 후배를 도촬하고, 어쩌구 하면서 ‘학부에서 제일 예쁜 여자 후배 도와주다가 팔 부러진 SSUL.txt’을 풀 수는 없는 거 아니겠는가.
내 그런 반응에 프린스는 뭔가 요상한 표정을 짓는다.
잠깐만. 이 양반 심리학 전공이지? 그거 미드 보면 심리학자들은 무슨 점쟁이처럼 막 거짓말을 단박에 눈치채고 그러던데. 이 양반도 그러는 거 아냐?
“그런가요. 깁스까지 한 걸 보니, 심하게 넘어졌나 보네요.”
“네. 하하. 네. 좀. 뭐.”
그렇게 얼버무리는 날 보면서 프린스가 가벼운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인다.
“이상하게 후배님은 인상이 남아요.”
“…네?”
“자랑하는 건 아닌데, 어쩌다 보니 절 찾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러 분야에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 보니, 가끔은 몇 번을 봤는데도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실례를 저지르기도 하지요.”
그렇겠지. 한국대 프린스는 단순한 포닥이 아니다. 학계에서는 물론 방송가에서도 탐내는 스타 중 한 명 아니던가.
“그런데, 후배 님 얼굴은 이상하게 기억에 남네요. 우리가 이번에 세 번째 만나는 거죠?”
“네. 세 번째입니다.”
“평소 같았으면 그냥 못 보고 지나칠 뻔했는데, 오늘은 어떻게 딱 눈에 보이더군요. 사실 혹시나 했어요. 그래서 말을 걸까 말까 고민했는데, 그렇잖아요. 아는 척했는데, 모르는 사람이라면 민망해지니까. 다행히도 후배님이었네요.”
거기까지 들었을 때, 나는 등골을 스치는 불안감을 느꼈다.
이 양반. 혹시. 혹시. 그…쪽인가?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프린스가 말한다.
“아. 오해할까 봐 미리 말해두면, 나는 남자에게 관심 없어요. 성적 취향의 다양성은 존중받아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네?”
“가끔 오해하는 경우가 있거든요.”
그렇겠지. 저 정도 얼굴에, 저 정도 말빨이면 여자는 물론이고 남자도 넘어가겠다. 물론 난 빼고.
“아니요. 오해 안 합니다.”
내 말에 프린스가 미소를 지었다.
“거짓말을 잘 못 하는 성격이네요.”
프린스가 말했다.
들켰나? 역시, 척 보면 거짓말을 눈치채는 천재 심리학자는 내 경계심을 눈치챈 건가?
“언제 퇴원하나요?”
“아마, 다음 주쯤에? 그렇게 들었는데 확실하지는 않습니다.”
“그렇군요. 퇴원하면 학교에서 보죠. 내가 퇴원 기념으로 밥 살게요.”
그러면서 또 상콤한 미소를 시전.
“시간 많이 뺏었네요. 이만 일어날까요?”
프린스는 그렇게 말하고 벤치에서 몸을 일으켰다.
***
그렇게 프린스와 짧은 이야기를 나눈 후, 병실로 돌아왔는데, 예상치 못한 손님이 와 계셨다.
오늘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던 서현 님이 병실에서 날 기다리고 계셨던 것이다.
“어? 언제 오셨어요?”
놀란 눈으로 내가 물었다.
“좀 전에요.”
서현 님이 말씀하신다.
“아니. 아니. 한국에 언제 들어오셨냐고요.”
내 질문에 서현 님은 손목에 있는 시계를 바라보며 말한다.
“57분 되었네요. 아니. 이제 58분.”
즉, 공항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병원으로 달려왔다는 이야기다.
아니. 이 답답한 아가씨야. 힘들게 일하고 왔으면 집에 가야지!
“출장 고생 많으셨어요. 근데, 왜 왔어요. 피곤한데 쉬시지 않고.”
내 말에 그녀가 미소로 답한다.
“피곤해서 쉬러 왔어요.”
그 말을 듣는데, 내 말문이 턱 하고 막힌다.
서현 님은 어쩌면 말을 이렇게 예쁘게 하는지, 참말로 우리 서현 님 누가 데려갈지 진짜 복 받은 거다.
복 받은 줄 알아라! 한수 이 자식아! 우히히히히.
“어디 다녀오셨어요?”
“아. 저기. 잠깐 밖에….”
내가 그렇게 얼버무렸다.
어쩐지, 담배 피우고 왔다고 하면 혼날 것 같달까? 아니, 혼나지는 않겠지. 근데, 뭔지 모를 미안한 마음에 그렇게 본능적으로 얼버무렸다.
서현 님은 내 말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를 살짝 보여주고는 말한다.
“알겠어요. 저 일단 씻고 옷 좀 갈아입고 올게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그리고는 옆에 놓인 캐리어를 집어 든다.
“아. 네. 피곤하신데 씻고… 네?”
“그냥 이 옷 계속 입고 있을까요?”
서현 님이 그렇게 패션모델처럼 몸을 옆으로 살짝 튼다.
그러지 마요! 심장이 버텨내질 못한단 말이에요!
너무 좋지. 서현 님의 오피스룩 너무 좋은데, 좋은데….
아니, 그건 그거고 씻고 옷을 갈아입으신다고?
서. 서. 설마. 주무시고 가신다는?
“주, 주, 주무시고 가신다는?”
“네. 자고 가려구요. 한수 씨만 괜찮으시다면.”
안 되겠다.
안 되겠네.
오늘 첫날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