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 : 시간을 돌려서
“얼마나 조금 전에요?”
내가 물었다.
“아주 조금 전에요.”
우리 뻔뻔한 서현 님, 아주 입술에 침도 안 바르고 거짓말하시네.
입술, 저 붉은 입술. 입술에 침을 바르려면 혀가 날름 나와야 하고.
혀. 붉은 혀….
침착해. 일단 침착해!
“오셨으면 깨우시지. 아니. 근데 어쩐 일로?”
“보고 싶어서요. 한수 씨는 제가 오는 게 싫으신가 봐요.”
서현 님이 묻는다.
얼굴에 담긴 미소를 보면 분명 장난을 치는 건데, 그 사실을 아는데, 나는 또 그걸 그렇게 받아들일 수가 없다.
“싫다뇨. 절대! 저얼대! 서현 씨가 원하신다면 언제 어느 곳이든 오실 수 있죠! 아니. 그건 그렇고, 진짜 이 시간에 어쩐 일로 오셨어요?”
“사실은 오늘 할아버지의 예정된 일정이 있었는데, 갑자기 제가 같이 가게 되어서요. 그래서 가기 전에 한수 씨 얼굴 보고 싶어서 몰래 얼굴만 보러 가려고 했어요.”
뭐라고요? 잘 안 들리는데요? 너무 멀어서 그런가 잘 안 들려요. 이리 가까이 와서 말해주세요. 여기 침대 위로. 이 위로.
잠깐만. 오늘 토요일인데?
“오늘 토요일인데요.”
“그러니까요. 토요일인데. 가지 말까요?”
가지 말아요. 가지 말고 나랑 놀아요. 여기서. 아니지. 여기는 안 되고, 외출합시다. 무단 외출. 어디 사람 없고, 으슥하고 둘만 있을 수 있는 그런 곳으로 갑시다.
무단 외출했다고 혼나려나? 설마 혼나겠어? 나 병원장님 빽인데. 아니, 그리고 혼내면 혼나고 말지. 퇴원하라면 퇴원하지 뭐! 우리 서현 님과 함께인데 병원이 문제야!
물론 그렇게 말할 수는 없었다.
나를 위해 서현 님의 생활을 소홀히 하지 말아 달라고, 강서현으로서의 삶을 살았으면 좋겠다고 말한 장본인이 바로 나 아니던가.
“어디 가셔야 하는데요?”
“베이징이요.”
“베이징? 베이징덕 할 때 그 베이징이요? 북경이요?”
“네. 베이징덕 할 때, 한자로 북경이라고 쓰는 그 베이징이요. 오늘 그곳에서 아시아태평양 국가 경영자 포럼이 있는데, 할아버지가 참석하셔야 해서요. 원래 다른 사람이 할아버지 모시고 가기로 되어있었는데, 이번 포럼의 호스트 중 한 명인 상무부 부부장이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은사님 중 한 분이셨거든요. 그래서 꼭 와달라는 초청을 받았어요. 죄송해요. 갑자기 일이 이렇게 되어서.”
“아니에요. 당연히 가셔야죠.”
“당연히요?”
“아니. 저기. 그. 당연히는 아니고요.”
뭐랄까. 안 보낼 수 있는 방법이 있을까? 뭐, 그 결혼 같은 거 하면 합법적으로 안 보내도 되지 않을까? 가고 싶은데 남편의 병간호를 해야 해서. 그런 핑계 대면서.
아닌가? 평민 출신 남편보다는 우리나라 차관급인 중국 상무부 부부장이 훨씬 더 중요한 거 아닐까?
“그럼 언제 오시는 거예요?”
말을 돌릴 겸 해서 물었다.
베이징이라. 거리는 가까워도, 그래도 국제 행사인데, 최소 이틀은 걸리겠지?
주말에는 혼자 있어야겠네.
“만찬 끝나고 비행기 타면 늦어도 12시에는 인천에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좀 더 늦어질 수도 있고요.”
“오늘… 밤 12시요?”
“네. 사실 포럼 끝나고 바로 출발하면 늦어도 밤 9시에는 도착할 수 있을 것 같은데, 만찬에서 제가 할아버지의 파트너 역할을 해야 해서 빠져나올 수가 없을 것 같아요.”
처음으로 강 회장님에게 참을 수 없는 분노가 느껴진다.
아무리 강 회장님이라고 해도, 아무리 서현 님의 할아버님이라고 해도 말이지. 우리 서현 님을 이렇게 힘들게 하다니!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서현 님이 말씀하신다.
“말씀해주실래요?”
“네? 뭐를요?”
“할아버지에게 전화해서, ‘당신 손녀는 내가 데리고 있으니 북경에는 혼자 쓸쓸히 다녀오너라!’ 이렇게 말해주시면 할아버지는 ‘이 노복은 작은 어르신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이렇게 말씀하시고 혼자 비행기를 타실 텐데. 그러면 나도 한수 씨랑 하루 종일 같이 있을 수 있고.”
“그. 그럴까요?”
“그래 주세요.”
서현 님이 미소와 함께 말씀하신다.
서현 님 말처럼 내가 무슨 유괴범처럼 낮은 목소리로 ‘내가 당신 손녀를…’ 그렇게 말하면 강 회장님은 분명 서현 님이 말한 것처럼 그렇게 대답하실 것이다.
결정했다. 무단 외출이다! 사람 없고. 으슥하고. 둘만이 있을 수 있는 그런 데로 간다!
핸드폰이 어디 있더라?
“몇 시 비행기에요?”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아무리 내가 본능에 지배당하는 짐승 모드 초입에 서 있다고 해도 그럴 수는 없지.
서현 님은 내 질문에 살짝 토라진 표정을 짓더니, 다시 미소를 보여주며 말씀하신다.
“여섯 시 반이요.”
여섯 시 반?
“저…녁?”
“아침이요.”
나는 시계를 봤다.
다섯 시 오 분이다.
다섯 시 오 분? 근데 아침 여섯 시 반 비행기?
내가 아무리 촌놈이라고 해도 비행기를 한 번도 안 타본 건 아니다. 아니, 비행기를 안 타봤어도, 무슨 버스나 기차 타는 것도 아니고, 출발 10분 전에 가면 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쯤은 상식으로 다 알고 있다.
국내선 최소 한 시간 전 도착, 국제선 두 시간 전 공항 도착.
근데 지금 다섯 시 오 분? 아니, 육 분 되었네?
여기서 공항까지. 이른 아침이니까 길이 안 막힌다고 해도, 진짜 미친 듯 달려가면 30분, 체크인하고 발권하고, 짐 부치고, 출국장 통과하고 그러면?
물리적으로 불가능한 시간인데?
“헉! 지금 여기 있으면 안 되는 거 아니에요? 빨리 공항 가야 하는 거 아니에요?”
내 말에 서현 님은 아무렇지도 않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인다.
아니! 이 언니야! 지금 고개 끄덕일 때가 아니야! 가야지! 언능 가야지!
“잠깐 얼굴만 보고 가려고 했는데, 막상 와서 한수 씨 잠들어 있는 얼굴을 보니까.”
어? 그렇게 말하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하면서 그렇게 보고 있다 보니까, 더 못 가겠더라고요.”
그렇게 말씀하시면 나도 못 보내겠잖아요!
“그렇게 가라고만 하시니 좀 섭섭해요.”
그러면서 슬픈 표정을 한다.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고요! 저도 당연히 서현 씨 안 보내고 싶죠!”
내가 그렇게 말하자, 슬픈 표정을 하던 서현 님의 얼굴이 확 바뀐다.
마치 걸렸어요! 하는 듯한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다.
이 아가씨가 날 놀렸구나.
“알아요. 한수 씨가 왜 그런 말을 하는지, 나를 위해서 그렇게 말해주는 거.”
그녀의 손이 내 손을 잡는다.
“그 마음이 고맙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 섭섭하기도 하고 그래요. 다녀올게요. 최대한 빨리 돌아올게요.”
서현 님이 내 손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가방을 들었다. 나는 서현 님을 배웅하기 위해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 내 미니미는 딱딱하게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지만, 그걸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침대에 누워서 그럼 다녀와~ 이렇게 말할 수는 없잖아. 결혼하고 한 10년 지나면 모를까. 지금은 아니지.
하지만 서현 님 생각은 나와 다르셨나 보다.
“아니에요. 누워 계세요.”
서현 님이 내 두 어깨를 지긋이 눌러 나를 다시 침대에 눕힌다.
“깨워서 미안해요. 조금 더 주무세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그 아름다운 손으로 내 가슴을 두어 번 토닥거려 준다.
아니. 이러면 내가 어떻게 보낼 수가 있냐고요!
***
잔인하게 날 버리고 떠나가신 서현 님, 아니, 그렇게 말하면 안 되겠지. 아무튼 서현 님은 다행스럽게도 비행시간에 늦지 않으셨다.
이륙 직전에 비행기에 탑승한 인증 사진을 깨톡으로 보내오셨다.
그 인증 사진을 보고 처음 든 생각이, 내심 걱정하고 있었는데, 다행이다 하는 거였고, 두 번째 든 생각이, ‘걱정할 필요 없었네!’였다.
나는 6시 반 비행기라고 해서 일반 항공사 비행기 타고 가시는 줄 알았는데, 사진 보니 일반 여객기 아니고 중앙그룹 전용기였네.
괜히 걱정했어. 서현 님 늦을까 봐 나 혼자 막 전전긍긍하고 있었는데, 나만 손해 봤어.
장난꾸러기 같으니!
아무튼, 서현 님은 그렇게 전용기를 타고 베이징덕의 본고장으로 떠나셨고, 나는 침대 위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었다.
서현 님에게서 조금 더 자라는 말을 들었지만, 한번 깨어버리니 다시 잠이 오질 않았다.
그렇게 침대 위에서 뒤척거리다 보니 어느새 아침 먹을 시간이 되었고, 병원 밥이라기보다 호텔 조식에 가까운 아침을 먹고, 약을 먹고 나니, 할 일이 없어서 빈둥거리고 있다.
평소 같았으면, 이 시간에는 서현 님이 와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하하 호호 웃고 있었을 텐데, 유난히 그 빈자리가 크게 느껴지네.
마치 잃어버린 능력과도 같다.
애초에 없었으면 모르겠는데, 있다가 없으니 더 서러운 그런 기분이랄까?
뭐 아무튼 어쩔 거야? 서현 님은 그렇게 떠나가시고, 나는 이 커다란 병실에서 뒹굴거리고 있을 수밖에.
답답한 마음에 산책이라도 나갈까, 그런 고민을 하고 있는데, 병실 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의사 선생님인가? 아니 오늘은 토요일이라 회진은 없을 텐데? 간호사 선생님인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문이 열린다. 그리고 누군가가 모습을 보인다.
지연이였다.
***
“안녕하세요. 오빠. 들어가도 되나요?”
열린 문틈 사이로 지연이가 머리를 빼꼼 내밀고 물어본다.
“어. 들어와. 들어와.”
나는 한 손을 들어 지연이를 불러들였다.
지연이는 귀엽게 웃으며 병실로 들어온다.
그나저나 이 녀석, 어젯밤에도 늦게 갔는데, 오전부터 어쩐 일이지?
“어쩐 일이야?”
“그냥. 병문안이요. 다른 선배들은 안 왔나 보네요.”
“온다는 이야기 없었는데? 오늘 오기로 했어?”
“아니요. 혹시 왠지 다른 선배들도 와있을 것 같아서요. 오늘 안 와요?”
“글쎄다. 오려나? 온다고 해도 오후에나 오겠지.”
“그렇군요.”
그러면서 뭔가 주춤거린다.
“왜? 애들 왔으면 좋겠어?”
“아니요. 오늘은 안 왔으면 좋겠어요.”
“왜?”
“그냥 오늘은 오빠랑 둘이 있고 싶어서요.”
그러면서 웃는다.
어머. 이 녀석 봐라. 여자애가 부끄러움도 없이. 괜히 내가 더 부끄럽잖아.
그렇게 웃던 지연이가 잠시 망설이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연다.
“오빠.”
“응?”
“어제 말하려고 했는데, 결국 말 못 했어요.”
“무슨 말.”
“미안하다는 말. 미안해요.”
슬픈 눈동자로 그렇게 말한다.
“미안해? 뭐가 미안해?”
“오빠 다친 거. 저 때문에… 시작된 거니까.”
그렇게 말하고는 고개를 푹 숙인다.
어제, 친구 놈들과 같이 있을 때 보여주었던 의연한 얼굴이 아니었다. 지금은 지연이 나이대의 여자애들이 보여주는 소녀의 얼굴을 하고 있었다.
나는 그런 지연이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이 녀석 우는 거 아니겠지? 저번처럼 이러다가 주머니에서 장도리 같은 거 꺼내서, 제가 지금 도촬범 뚝배기를 깨고 올게요, 그러는 건 아니겠지?
“지연아.”
내가 이름을 부르자, 지연이가 고개를 든다.
내 예상과는 다르게 눈에 눈물이 맺혀 있다. 그렇게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또로록 흘러내린다.
자신의 눈물이 부끄러웠는지, 지연이는 손을 들어 눈물을 스윽 닦아내고는 다시 고개를 숙인다.
“넌 잘못한 거 하나도 없어.”
나는 그런 지연이의 정수리를 보면서 말했다.
“너는 언제나처럼 너의 삶을 살고 있었을 뿐이야. 그 삶에 그 도촬범이 허락도 없이 끼어들어 피해를 입힌 거야. 너는 잘못한 것 하나도 없어.”
내 말에 지연이는 말없이 눈물만 흘리고 있다.
“그리고 그 미친놈이 다시 나에게 피해를 입힌 거야. 너와는 별개로, 그 미친놈이 계획하고, 실행해서. 거기에도 너의 잘못은 하나도 없어.”
나는 그렇게 말하며 손을 뻗었다. 그리고 이유 없는 미안함에 한없이 떨궈진 그 녀석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입원해 있는 동안 내가 생각해봤다.”
나의 그 말에 지연이가 고개를 든다.
“만약, 그 도촬범과 처음 마주했던 그때로, 과거로 다시 돌아간다면, 그랬다면 어떻게 했을까? 생각하는 것보다 더 미친놈이라는 것을 알았으니 조금 더 부드럽게 말을 했을까? 아니면 아예 처음부터 내 일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모른 체했을까?”
지연이가 처음보다 더 많은 눈물이 맺혀 있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아니. 똑같이 할 거야. 아니. 더 심하게 할 거야. 아예 허튼 생각하지 못하도록, 애초에 지연이 너만 보면 흠칫 놀라 도망갈 정도로.”
지연이가 작게 머리를 끄덕인다.
“시간을 돌려서, 다시 그때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절대로 너를 그 방에, 그 미친놈과 변호사가 너를 괴롭히던 그곳에 너를 혼자서 보내지 않을 거야. 절대로.”
지연이의 눈이 다시 눈물에 잠긴다.
“솔직히 기쁘다. 그때 내가 너를 도울 수 있어서, 너의 옆에 있을 수 있어서, 나는 기쁘다. 솔직히.”
그 눈에서 다시 눈물이 방울져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