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3 :복수를 할 때는 무덤 두 개를 파 놓아라 (3)
나는 한심하다는 눈으로 친구 놈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놈들은 마치, 여기가 병원이라는 사실도 까먹은 듯, 지들끼리 난상토론을 벌이고 있다.
토론의 주제는 크게 세 가지였다. 김민우가 관계자인지 아닌지, 관계자임을 어떻게 확인할 것인지, 관계자임이 확인되면 어떠한 형벌을 내릴 것인지에 관해 지들끼리 떠들고 있었다.
나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주변에 던질만한 것이 없을까 두리번거렸다.
“오빠. 뭐 찾아요? 필요한 거 있어요?”
눈치 빠른 지연이가 두리번거리는 내 모습을 보고 물어본다.
“어. 뭐, 칼 같은 거 있으면 좀 가져다줄래?”
내 말의 숨은 의미를 이해한 지연이는 칼 대신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본다.
그래. 너라도 있어서 다행이다. 너마저 없었다면 난 아마 내 팔에 꽂힌 수액 주삿바늘을 뽑아버렸을 거야.
“야! 이 자식들아. 그만 좀 해!”
내가 소리를 버럭 질렀다. 그제야 친구 놈들이 날 돌아보았다.
“정신 사나워 죽겠네. 이 자식들아. 지연이 좀 봐라. 얘, 놀란 거 안 보여?”
내가 지연이 이름을 꺼내자, 그제야 친구 놈들이 지연이를 바라본다.
그 짧은 시간에 눈치 빠른 우리 지연이는 재빨리 겁먹은 표정을 장착한다.
이 녀석을 누가 데려갈지 모르겠다만, 분명 곱게 죽지는 못할 거다. 수많은 남자들의 저주가 내릴 테니.
“일단 다들 앉아봐.”
내 말에 녀석들이 고분고분 자리에 앉는다. 내 말 때문은 아니겠지.
“자. 봐봐. 일단 김민우 그 자식은 일단 넘어가자고.”
“그냥 넘어가자고?”
내 말에 박찬희가 발끈해서 나선다.
“아니면 어쩔 건데? 니들 말마따나 잡아다가 코렁탕이라도 먹일 거야? 아니, 애초에 그럴 수 있으면 김민우가 아니라, 도촬범 그 자식을 잡았지. 좀 말이 되는 이야기를 해라.”
논리적이고 합리적인 지적에 녀석들이 입을 다문다. 하지만 얼굴에는 불만이 가득하다.
“키핑. 패스 아니고 키핑. 일단 살생부에 올려는 두자고. 야. 솔직히 말해서 김민우 그 자식에게 가장 원한 큰 사람을 뽑으라면 나잖아.”
내가 그렇게 말하자,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한 놈만 빼고.
“혹시, 너 신지수 때문에 그러는 건 아니지?”
이중훈이 물었다.
***
신지수는 자신의 방에 있었다.
금요일 저녁, 평소였다면 아직 집에 들어올 시간이 아니었지만, 그녀는 침대 위에서 두 무릎을 끌어안은 자세로 앉아 있었다.
신지수의 시선은 침대 위에 놓인 핸드폰을 향해 있었다.
푹신한 이불 위에 놓인 핸드폰은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기 위해 힘차게 진동했고, 그렇게 진동하는 핸드폰 액정에는 전화번호가 떠 있었다.
얼마 전까지 ‘민우 오빠’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던 번호였다.
무릎을 감싼 신지수의 두 팔은 미동조차 없었고, 그녀의 시선도 그저 무심한 듯 전화기를 바라만 보고 있었다.
그렇게 이십여 초가 흐른 후, 힘차게 울어대던 전화는 침묵했다.
신지수는 물끄러미 핸드폰을 바라보다가 손을 뻗어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무음모드로 바꾸어버렸다.
그리고는 화면이 보이지 않게 뒤집어 내려놓았다.
전화기를 내려놓은 신지수는 무감정한 시선으로 침대에 시선을 주었다.
무언가를 보기 위한 시선이 아니었다. 생각을 하기 위한 시선이었다.
그녀의 머릿속에 몇 주 전의 그날이 떠올랐다.
김민우, 그리고 김민우의 친구들과 함께 클럽을 갔던 그날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학교 축제의 마지막 날이었었다.
심장박동을 끌어올리는 빠른 비트의 음악과 화려한 조명 아래 신지수는 유일하게 이방인이었다.
금요일 저녁 강남의 클럽, 2백만 원이 넘어가는 5바틀 테이블에서 그녀는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런 그녀에게 남자친구인 김민우가 다가와 언제나 그래왔던 것처럼 가벼운 장난을 걸었을 때, 신지수는 온몸에 끼쳐오는 소름에 남자친구를 밀쳐버렸다.
그리고 굳은 얼굴의 남자친구를 바라보면서 자신이 잘못된 선택을 했다고 확신했다.
처음에는 그저 작은 우쭐거림이었다.
김민우의 적극적인 애정 공세는 단지 그 정도의 의미였었다.
신지수는 남자친구가 있었고, 남자친구를 좋아했고, 헤어질 생각 같은 것은 없었다.
그저, 다른 누군가가 자신에게 이렇게 적극적인 관심을 보인다는 것에, 그 누군가가 잘생긴 얼굴의 재미교포라는 사실에, 독일제 스포츠카를 타고 다닌다는 사실이 그 나이의 여자아이들이 그러한 것처럼 그녀를 우쭐하게 만들었다.
그런 우쭐거림에 작은 호기심이 더해졌다.
화려한 상류층의 생활에 대한 동경 같은 것은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모르는 세계에 대한 아주 작은 호기심, 그녀가 알지 못했던 화려한 세계에 대한 작은 호기심이 그녀의 마음에 작은 틈을 만들었다.
그 작은 틈으로 수백만 원이 넘어가는 클럽 테이블, 심박 수를 올리는 빠른 비트, 달콤한 샴페인이 스며들었고, 그렇게 스며든 화려함이 그녀의 눈을 가려 버렸다.
결국 남자친구가 바뀌었고, 그녀 주변의 사람들도 바뀌었다.
물론 마냥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잘못된 선택이 아니었을까 하는 불안감을 그녀도 어느 정도는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돌아갈 수 없다고, 돌이킬 수 없다고, 스스로에게 그렇게 변명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날.
그녀의 남자친구, 그리고 남자친구의 돈 많은 친구들과 함께 클럽에서 2백만 원이 넘어가는 5바틀 테이블에 앉아 있던 그날.
남자친구의 장난이 소름 끼치게 느껴졌던 그날.
그녀의 동기들이, 교수님과 선배, 후배들과 함께 축제 주점의 피날레를 장식하는 건배를 하고 있었을 그날.
신지수는 더 이상 변명이 통하지 않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날 이후 신지수는 남자친구에게 먼저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이 와도 제대로 대응하지 않았고, 그마저도 점점 피하게 되었다.
그 둘 사이는 점점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아니, 신지수에게는 이미 끝나버린 관계였다.
***
청담동의 한 카페.
김민우는 잔뜩 굳은 얼굴로 전화기를 바라보고 있었다.
“뭐야? 전화 또 안 받아?”
맞은편에 앉은 친구가 물었다.
김민우는 앞에 있는 친구를 슬쩍 바라보고는 살짝 인상을 쓴 채로 전화기를 테이블 위에 툭 하고 던져버렸다.
일종의 경고였지만, 앞에 앉은 친구는 그런 김민우의 경고를 읽어내지 못했다.
“뭐야? 까인 거야? 응? 천하의 앤디 킴이 여자에게 까인 거야? 이야. 우리 앤디가 진짜 별 경험을 다 해보네. LA도 아니고 한국에서 여자에게 까여도 보고.”
그렇게 말한 친구는 자신의 말이 재미있다는 듯 큭큭하고 웃어댔다.
김민우는 그런 친구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친구의 얼굴이, 뺨이 눈에 들어왔다.
마치 때려달라는 듯, 그렇게 보였다.
한 대 칠까? 쳐버릴까?
김민우는 잠시 그렇게 고민하다 주먹 대신 말을 건넸다.
금요일 저녁의 카페에는 사람이 너무 많았다. 그들 앞에서 난폭한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았다.
금요일 밤은 길었고, 시간도, 기회도 많이 남아 있었다.
“제이슨.”
“응?”
“요즘 기분 좋은가 봐.”
“아. 요즘 좋지. 아주 좋아. 뭐랄까, 한국말로 뭐라고 하지? 그 소화 안 되는 거. 그거. 그게 쑥 내려간 느낌이야.”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낄낄 웃었다.
“잠시 나가 있는다고 안 했냐?”
김민우가 물었다.
그러자 제이슨은 자세를 낮추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원래는 그 자식 밟아주고 바로 나갈 생각이었는데, 상황 돌아가는 걸 보니 그럴 필요까지는 없을 것 같더라 이거지.”
“…상황이 어떤데.”
“뭐, 간단하게 말하면 아~무 일도 없는 상황. 난 그 새끼가 경찰서 달려가서 졸라게 징징거릴 줄 알았는데, 쥐죽은 듯 병원에 처박혀 있더라고. 하긴 씨발, 좆도 없는 거지새끼가 뭘 할 수 있겠어? 지금 병원에서 졸라 덜덜 떨고 있겠지.”
제이슨은 그렇게 말하고 또 비열한 웃음을 보였다.
김민우는 그런 제이슨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제이슨이 말하는 그 새끼. 신지수의 전 남친, 한수.
김민우가 한수에 대해서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제이슨의 말처럼 병원에서 공포에 떨고 있는 모습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좀 아쉬워.”
“…뭐가?”
“그 새끼가 경찰서 달려가서 범인으로 날 지목하면 더 좋은데 말이지. 그런 경우까지 생각해서 준비를 다 해놨는데, 아, 그 배짱 없는 새끼가 그걸 안 해주네.”
“알리바이?”
“그래. 그거 만든다고 졸라 귀찮았는데 말이야.”
제이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정말 안타깝다는 듯, 인상을 썼다.
“뭐 아무튼, 일단 한번 밟아는 줬으니, 그 새끼도 이제 무서운 것 좀 알겠지. 어디 씨발 좆도 없는 새끼가. 아무튼, 이렇게 끝나는 건 아쉬우니, 나중에 또 기회 봐서 한 번 더 밟아줘야지.”
제이슨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특유의 낄낄거리는 웃음을 지었다.
김민우는 그런 제이슨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중얼거렸다.
‘이 새끼는 안 되겠군.’
알고는 있었다.
제이슨 이놈이 자기밖에 모른다는 사실을 알고는 있었다. 뭐, 사실 김민우 주변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금씩은 그런 경향이 있었지만, 제이슨은 유독 그런 경향이 심했다.
성인이 되었음에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지 못하면 떼를 쓰는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기준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판단했다.
이번 일도 그랬다.
애초에 일을 시작한 것도, 키운 것도 제이슨의 그 어린애 같은 성격 때문이었다. 적당히 멈추었으면 좋으련만, 결국에는 일을 이렇게까지 키운 것이다.
김민우가 자신을 그렇게 생각하는지 모르는 제이슨은 다시 쾌활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튼, 나에게 고마워하라고 친구. 내가 대신 복수해줬으니까.”
“복수?”
“그래. 너도 그 새끼 싫어했잖아.”
그런 제이슨의 말에, 불안감이 김민우의 등골이 스쳤다. 잘못하면 이 멍청한 놈과 엮일 수도 있겠다는 그런 불안감이었다.
“그리고 앤디 킴의 베스트 프렌드로서 충고를 더 하자면, 이번 기회에 그 여자도 정리해버려.”
한번 흥이 오른 제이슨이 말했다.
“…무슨 말이야.”
“얼마나 사귄 거지? 작년 겨울부터였으니까. 반년 넘지 않았나? 이야. 천하의 앤디 킴이 한 여자를 반년이나 만난다니, 신기록 아니야? 슬슬 바꿀 때도 되었지. 그리고 이제 와서 하는 이야기지만, 솔직히 나 걔 별로였어. 좀 예쁘장하게 생긴 것은 인정. 그래 봤자 Slit-eyed 아냐?”
김민우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Slit-eyed’, 째진 눈은 다른 인종이 동양인을 비하할 때 사용하는 인종차별적 비칭이었다.
제이슨 그도 동양인이면서도 미국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신지수에게 그런 표현을 사용한 것이었다.
“가끔 지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굴 때는. 아오 진짜. 앤디 니꺼니까 그냥 좋게좋게 넘어간 거지. 만약 그냥 단순히 아는 애였다면 진작에 한번 깠다.”
김민우는 어떻게 해야 저 입을 닫게 할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면서 제이슨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예쁘다고 해도 그 정도 수준은 널리고 널렸잖냐. 야. 오늘 내가 하나 해줄게. 저번에 번호 딴 연습생 하나 있는데, 내가 특별히 양보한다. 알지? 내가 딴 건 몰라도 여자는 양보 안 하는 거? 내가 특별히 나의 베스트 프렌드 앤디 킴을 위해 여자를 양보한다. 와 진짜. 씨발. 오늘 테이블은 내가 잡는다!”
김민우는 벌써부터 흥분했다는 듯 그렇게 떠들며 전화를 꺼내 드는 제이슨을 보면서, 최대한 빨리 눈앞의 이 자식을 잘라내는 것이 좋겠다고 마음을 먹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