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71화 (71/271)

71 : 복수를 할 때는 무덤 두 개를 파 놓아라 (1)

병원에 입원하고 며칠이라는 시간이 순식간에 흘러가 버렸다.

그저 자다 깨어나 밥 먹고, 약 먹고, 다시 자다가 일어나 또 밥 먹고 약 먹고 하다 보니 어느새 목요일이 되어버렸다.

사람이 참 웃긴 게, 입원 첫날만 해도 숨만 쉬어도 가슴이 뻐근하고, 얼굴은 계속 욱신욱신거리고, 코뼈가 부러져 숨 쉬는 것도 불편하고 그래서 아, 이 지옥 같은 2주를 어떻게 버티나 하고 막막해했었는데, 며칠 지나니 적응이 되더라.

아니, 적응이 되었다기보다는 정확히 말하면 아픈 게 덜해졌다.

수술하니 마니 그랬던 코뼈는 불과 이틀 사이에 원 상태로 돌아왔다.

월요일에 이비인후과 교수님이 찾아와서 내 코 한번 보고, 손에든 엑스레이 사진 한번 보고, 다시 내 코 한번 보고, 또 사진 보더니 ‘논문을 써야 하나?’ 그렇게 중얼거리며 가버렸다.

갈비뼈도 한 이틀 아프더니, 월요일 밤이 되자 무슨 마약성 진통제를 과다복용한 것처럼 갑자기 통증이 약해지더니. 화요일부터는 진짜 뼈가 부러진 것이 맞나 하는 생각까지 들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다.

팔은 여전히 부러져있는 상태라고 하는데 부기도 점점 가라앉고, 아픈 것도 덜한 것 같다.

불과 며칠 사이에 일어난 일이다. 뭐, 이유는 짐작이 간다.

아무튼, 그렇게 통증이 하나씩 하나씩 사라져버리니, 입원이 아니라 휴가처럼 느껴진다.

그냥 휴가도 아니고 호캉스. 호텔 바캉스.

사실. 뭐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생각해봐라.

병실이라고 해도, 내가 입원한 병실은 여기저기서 신음소리가 들려오는 다인실이 아니라, 호텔 뺨치는 VVVIP 특실이다 이거다. 베리베리베리 임폴턴트 퍼슨!

병실은 내가 살았던 하숙집은 둘째치고, 지금 내가 머무는 성수동의 내 방보다도 크다.

단지 크기만 크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밥도 겁나게 잘 나온다.

내가 알고 있던 병원 밥이라는 것은 영양공급이라는 주목적에 특화되어서 맛이라는 중요한 요소가 희생해야 정상인데, 이 병원이 유별난 건지, 아니면 특실이라서 그런 건지, 어어어어엄청나게 잘 나온다.

특실이라 그렇겠지? 어젯밤에 일반 병실에도 찹스테이크가 나왔으려나? 아니겠지?

단순히 밥만 잘 나오나 하면 그것도 아니다. 강 회장님이 간식거리를 한 트럭, 말 그대로 편의점을 통째로 가져온 것처럼 간식거리를 보내셨다.

이거 몰래 가져다 팔면 등록금까지는 모자라도, 내 두어 달 알바비는 짤로 넘을 것 같은데?

그리고 병실이고, 밥이고, 간식이고 돈이고 다 둘째치고, 입원해서 가장 좋은 점이 뭐냐 하면, 바로 우리 서현 님.

우리 서현 님과 시간을 오래 보낼 수 있다는 게 가장 좋다.

얼마 전 자신이 책임을 지겠다며, 떠나겠다던 서현 님을 내가 현란한 말솜씨로 붙잡았다.

-작은 어르신을 모시는 서현 님이 아닌,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고, 차를 마시며 하루의 일상을 공유하는 서현 씨로 있어 줄 수 있다면. 그래 줄 수 있다면, 계속 내 옆에 있어 주세요.

진짜 가끔 나도 내가 대단하다 싶은 것이, 아니, 그 상황에서 어떻게 그런 멋진 말을 했을까?

아. 물론 친구 놈들이 들었다면 바로 내 얼굴에 주먹을 날렸겠지만, 뭐 그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든 그건 중요한 것이 아니지.

서현 님이 나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는 사실이 중요하다.

아무튼, 그날 이후로 서현 님은 회사에 출근하는 대신 매일 병원으로 찾아오고 계신다.

내가 매일 이렇게 찾아올 필요는 없다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했는데, 서현 님이 무서운 표정으로 그 부분만은 절대 양보할 수 없다고 말했지.

본인 생각에는 엄청 무서운 표정을 지었다고 생각할지 모르겠지만, 내가 보기에는 그냥 귀엽고 예쁘기만 하다.

솔직히 말해서 나야 서현 님이 이렇게 와준다면 좋지. 즐겁고, 덜 심심하고, 또 그 뭐랄까. 그. 저기. 그 밀폐된 공간에, 남녀 둘이 함께 지내면, 그. 저기. 그 있잖아. 그거. 빨간색 19금 딱지가 붙을 그런 행복한 상상이 현실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그런 기대를 하게 된다 이거지.

아. 그 생각했더니 또 깨어났네. 미니미 저 녀석.

아무튼 그런 상상이 사람을 참 행복하게 만든다 이거지.

서현 님은 여기서 잠도 잘 생각이었는데, 내가 말렸다.

사실 말린 것도 마음에 없는 말이었는데, 서현 님이 그러시다면 어쩔 수 없네요.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한발 물러서 버렸다.

지금 생각하니 겁나 후회되네.

아니야. 기회는 있어. 최소 2주는 입원해야 한다고 하니 분명히 기회는 찾아온다. 자고로 남자는 포기하지 말아야 하는 법이다.

가능성, 모든 가능성을 열어둬야지.

아니, 근데 나 이렇게 빨리 좋아지는 거 보면 2주 못 버티는 거 아냐? 방 빼야 하는 거 아닐까?

아무튼, 종합해서 말하면, 아주 쾌적하고 안락한 거주공간, 맛있는 밥 세 끼가 꼬박꼬박 나오고, 비싼 간식은 편의점처럼 쌓여있고, 그런 와중에 서현 님이 내 옆을 지켜주는 아주 아름다운 시츄에이션이다 이거지.

아파서 입원했는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아주 큰 행복을 느끼고 있다 이 말입니다.

참으로 간사하도다. 인간이여. 어쩌면 이리도 간사한 것인가.

“한수 씨. 사과 드세요.”

서현 님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나에게 직접 깎은 사과를 접시에 담아 가지고 온다.

예쁘게 깎여있는 사과에는 작은 포크가 꽂혀 있다.

포크를 들어 사과를 입으로 가져가 살짝 베어 물으니 사각 소리와 함께 입안에서 상쾌한 과즙이 파파팡.

그런 내 모습을 미소로 바라보는 서현 님이 옆에 있으니 내 부교감신경도 파바방~

“할아버지가 보내셨어요. 맛이 어때요?”

서현 님이 물어보신다.

“진짜 맛있네요. 상큼함과 달콤함의 비율이 완벽해요. 서현 씨도 드셔보세요.”

그제야 서현 님도 포크를 집어 드신다.

그리고 들려오는 아사삭 소리.

어쩌면 저렇게도 고상하게 사과를 드시는지.

보고 있자니 웃음을 멈출 수가 없네.

행복하냐고?

물론 행복감을 느낀다. 그것이 사실이니까.

하지만 완벽한 행복감을 느끼냐는 질문이라면 나는 고개를 저을 테다.

행복이라는 감정이 마음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지만, 그런 행복감 뒤에는 나를 바라보며 자신이 존재한다는 것을 상기시키는 감정 하나가 있었다.

복수.

군자의 복수는 10년이 지나도 늦지 않는다는 말이 있는데 나는 군자가 아닌지라 10년은 못 기다리겠다.

복수는 해야지. 용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나는 확실하게 복수해 주는 거야.

***

행복한 시간은 어찌 이리도 빨리 지나가는지, 어느덧 저녁을 먹을 시간이 지나고, 서현 님께서 돌아가실 시간이 되었다.

서현 님의 눈빛이 안 가면 안 되냐고 말하고 있었지만, 서현 님이 가시는 것을 내 마음도, 내 미니미도, 그리고 나도 원치 않았지만, 나는 눈물을 머금고 서현 님을 돌려보내야 했다.

서현 님을 그렇게 돌려보내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 지금부터 할 이야기를 서현 님에게 알리고 싶지 않으니까.

음……. 기회가 있을 거야. 기회가.

“나 왔다.”

서현 님이 떠나시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박승환과 박찬희가 병실 문을 열고 들어왔다.

“왔냐? 지연이는?”

들어오는 녀석들에게 내가 물었다.

“오늘은 창회가.”

박찬희가 소파에 몸을 던지며 말했다. 이미 그 손에는 강 회장님이 사다 놓으신 간식이 들려있다.

재빠른 놈 같으니.

“그렇군. 고생들 한다.”

오늘은 창회가 지연이를 집까지 데려다주는 모양이다.

지연이 그 녀석 영문도 모를 텐데, 선배들이 하자는 대로 잘 따르는구만. 귀여운 녀석 같으니.

“뭐. 데려다주는 건 어렵지 않은데, 핑계 대는 게 어렵지.”

박찬희가 초콜릿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저 자식도 참 대단해. 그 짧은 순간에 제일 비싼 거는 또 어떻게 찾아냈는지.

“아무튼, 어제는 승환이가 데려다줬는데 물어봤다더라고. 뭔가 상황이 이상하다는 것을 본인도 느꼈겠지.”

“뭐라고 했다는데?”

“뭐. 우선 너 어디 있냐고. 그리고 선배들이 데려다준다는 거. 별말 없이 따르기는 하는데, 아무래도 뭔가 일이 벌어졌다는 것을 아는 눈치긴 하지.”

그렇겠지. 바보가 아닌 이상.

“뭐 아무튼 오늘은 창회 녀석이 데려다주면서 이야기할 거야. 내일 병원 가자고.”

찬희가 그렇게 말하며 두 번째 초콜릿의 포장을 벗겼다.

***

김창회는 교대역 인근의 카페에서 유지연과 마주 앉아 있었다.

이날 유지연을 데려다주는 임무를 맡은 김창회가 차나 한잔 마시자고 권유했고, 두 사람은 이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것이었다.

유지연은 자신의 앞에 놓인 커피잔을 바라보고 있었다.

김창회는 그런 유지연을 난감한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면, 한수 오빠는…. 고향이 아니라 병원에 입원해 있었다는 이야기네요.”

“어. 지난주 토요일부터.”

유지연은 고개를 작게 끄덕인 후 다시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미치겠네.

김창회는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렸다.

차라리 남자 후배 놈이었다면 바로 어깨를 팡팡 쳐주면서 남자가 그렇게 풀죽은 얼굴 하는 거 아니야. 기분도 꿀꿀한데, 우리 쇳덩이나 들러 가자. 기분 꿀꿀할 때는 쇠질만 한 게 없어. 그렇게 말해줄 텐데, 여자애가, 그것도 유지연이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데 어찌해야 할지 난감할 뿐이었다.

“한수 오빠는 어느 병원에 있어요?”

“응? 어. 저기. 서울 중앙의료원. 거기. 일원동 쪽, 수서 가는 데 거기.”

“면회…. 할 수 있을까요?”

“어. 안 그래도 너 혹시 시간 괜찮으면 내일 같이 가면 어떨까 싶어서. 그 이야기 하려고 하던 참인데. 그, 그래. 너 혹시 시간 되니? 내일 저기, 학교 끝나고.”

“네. 내일 괜찮아요.”

유지연은 그렇게 말하고는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일단 한고비 넘긴 김창회도 눈앞에 놓인 컵을 들어 올렸다.

“하나 물어봐도 될까요?”

막 한 모금 넘기려는 순간, 유지연이 다시 질문을 던졌다.

“어? 어. 뭐가 궁금한데?”

“선배들이 저 집에 데려다주는 거.”

김창회는 자신도 모르게 침을 꼴깍 삼켰다.

그 이야기는 지금 해줄 수 없는 이야기였다. 내일 한수를 만난 자리에서 해야 하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이어진 유지연의 질문은 창회의 예상과는 달랐다.

“그거. 일부러 저 수업 끝날 때까지 기다려 주셨던 건가요?”

“응? 어. 뭐. 어. 꼭 기다렸다고 말할 수 있는 건 아니긴 한데….”

김창회가 그렇게 얼버무렸지만, 유지연은 그런 김창회의 반응에서 자신의 생각이 맞다는 것을 눈치챌 수 있었다.

“앞으로도 저를 이렇게 데려다주실 건가요?”

유지연이 다시 물었다.

“어? 어. 저기. 많이 불편하지? 아마 그렇게 오래는 아닐 것 같은데. 많이 불편하면 저기. 어떻게 해야 하지?”

몰래 숨어서 뒤따라 다녀야 하나?

김창회가 그런 생각을 하는데 유지연이 또다시 김창회의 생각과는 다른 말을 했다.

“아니요. 불편하지 않아요. 아니. 오히려 선배들께 고맙다는 말도 제대로 못 했네요. 다음에 선배들 다 모이면 그때 제대로 감사 인사드릴게요. 그리고 내일부터는 제가 수업 끝나자마자 바로 선배들에게 연락드릴게요. 혹시 선배들 수업 있으시면 과방에서 기다리고 있고요. 그렇게 하면 선배들에게 폐를 조금 덜 끼칠 수 있을 것 같아요.”

“어, 그래? 그래 주면 고맙지. 고마운데.”

“일단 알겠습니다. 내일 한수 오빠 병원에 가면 이야기를 들을 수 있겠네요. 오늘 너무 고생 많으셨어요. 감사하고, 또 죄송해요.”

“아니야. 아니야.”

김창회는 그렇게 말하면서, 왜 친구 놈들이, 후배 놈들이 유지연에게 환장하는지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저 여기서 집까지 한 10분 정도밖에 안 걸리는데, 혼자 가도 되나요?”

“어? 어. 그래도 되지. 되는데. 내가 저기, 집까지 데려다줘도 괜찮을까?”

창회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별일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래도 집에 안전하게 들어가는 것을 확인하는 편이 안심이 되니까.

“네. 알겠습니다. 부탁드릴게요.”

유지연은 그렇게 말하며 창회에게 꾸벅하고 고개를 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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