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70화 (70/271)

70 : 시나리오 (4)

“야. 저 자식 깨워봐 봐.”

이중훈이 테이블에 머리를 박고 있는 박찬희를 가리키자, 박찬희 옆에 앉아 반쯤 졸고 있던 김창회가 박찬희를 흔들었다.

강하게 몸을 몇 번 흔들자 박찬희가 머리를 들며 입이 찢어져라 하품을 해댔다.

병원에서 나온 네 사람, 김창회, 박승환, 박찬희, 이중훈은 병원에서 그리 멀리 떨어지지 않은 카페에 있었다.

한수에게는 집에 간다고 말하고 나왔지만, 네 사람은 말을 맞춘 것처럼 이 카페 안에 자리를 잡은 것이다.

“야. 진짜 뻥 안치고, 졸려 죽겠다. 후딱 이야기하고 가자.”

그렇게 말한 박찬희는 자신의 앞에 놓인 아이스아메리카노를 들어 벌컥벌컥 마셨다.

박찬희를 비롯해 다들 정신을 좀 차린 듯하자 이중훈이 말을 시작했다.

“일단 정리 좀 해보자. 우선 지연이부터. 당장 월요일부터 순번을 정해야 하니까. 누가 먼저 할래?”

“내가 먼저 할게.”

박찬희가 손을 든다.

“그러면 화요일은 내가.”

이어서 박승환.

“그럼 수요일에는 내가 하고, 목요일에는 창회가 담당하고. 그럼 금요일에는 다시 찬희. 이 순번으로 돌자고. 혹시 일 생기면 미리 이야기하고. 오케이?”

세 명의 머리가 끄덕인다.

“일단 다음 주는 그렇게 정리하고, 내일은 어떻게 하지?”

이중훈이 그렇게 말하자, 다른 친구들은 자연스럽게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평상시에는 친구들에게 미친놈 취급을 받는 박승환이었지만, 이런 상황이 되자 자연스럽게 박승환에게 시선이 모였다.

시선을 받은 박승환은 평상시와는 달리 진지한 얼굴로 말을 시작했다.

“내 생각에도 한수가 이야기했던 것처럼 그 미친놈이 당장 날뛰지는 않을 것 같기는 한데. 그렇다고 희망적으로만 생각할 수는 없겠지. 일단 내일은 1학년 중에 지연이 친구 하나 포섭해서 지연이랑 밥 같이 먹자고 이야기해놨어. 오후 2시쯤 만나기로 했으니까 대충 시간 때우다 저녁먹이고 집에 데려다주면 되겠지.”

“언제?”

박찬희가 놀란 눈으로 박승환을 바라보며 물었다.

“아까. 경찰서 갔을 때. 혹시나 싶어서.”

경찰서에 같이 갔었던 김창회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계속 함께 있었는데, 같이 있는 동안 자신은 그저 분노만 하고 있었는데, 그때 박승환은 한수를 습격한 범인이 도촬범일 가능성을 떠올렸고, 유지연과의 연관성을 끌어낸 다음에 대비책을 마련해놓은 것이었다.

그저 가벼운 놈은 아니라는 것은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가끔 보면 무서울 때가 있어. 아무튼, 내일은 승환이 말대로 그렇게 하면 되겠네. 승환이 네가 고생 좀 해주고. 다음으로 넘어가자. 다음 주부터 지연이 집에 데려다줄 때, 어떻게 핑계를 댈 것인가 하는 부분인데.”

이중훈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박승환을 바라보았다.

박승환은 그 부분도 생각해놓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일단. 한수 말처럼 지연이에게 지금 상황을 전부 다 알려주는 것은 안 되겠지. 그렇다고 아예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할 수도 없어. 우리가 매일 집에 데려다주는 데 이유가 있어야 하니까. 지연이 집이 교대였던가?”

“맞아. 교대. 정확히 교대역에서 강남역 방향으로 300미터 정도.”

이중훈이 말했다.

“찬희는 집이 천호동이니까 대충 둘러대면 될 테고. 나도 뭐 대충 그쪽이니까 같이 가자고 하면 될 테고. 창회가 면목동, 중훈이 네가 일산. 너네 둘은 핑계를 만들어야 되겠네. 목요일이 누구였지?”

“나.”

김창회가 손을 들었다.

“목요일쯤 되면 지연이 그 녀석도 어느 정도 눈치를 챌 거야. 한수도 학교에 안 나오고, 우리가 데려다주고 하니 지연이도 뭔가 이상하다 생각하겠지. 그날은 창회 네가 이야기를 해줘. 금요일에 병원 가자고. 그리고 중훈이 너는. 뭐. 수요일에 약속 하나 만들어둬라. 강남 쪽으로. 그러면 되겠지.”

“오케이.”

“상황 바뀌면 그때그때 유동적으로 조정하자고. 다음 주 금요일에 한수랑 만나서 이야기해 주면 그때부터는 뭐, 이런 핑계 만들 필요도 없겠지. 지연이는 이 정도로 마무리하고. 이제 본격적으로 그 미친놈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박승환이 주제를 바꾸었다. 친구들의 얼굴에 비장함이 드러났다.

그러나 이어진 박승환의 말에 비장함은 바로 침통함으로 바뀌어버렸다.

“일단 한수가 말한 대로, 지금 도촬범을 경찰에 신고할 수는 없어. 그렇게 대비를 했다면 오히려 미리 파놓은 함정에 기어들어 가는 꼴밖에 안 되지.”

“결국 초법적인 방법뿐인가.”

박찬희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뭐 마음 같아서야 그게 최선이지만,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지. 자연법이 지배하는 시대도 아니고, 그 자식 지옥 보내겠다고 우리도 같이 지옥 갈 수는 없으니까.”

“까놓고 말해서 지금 당장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 말이네.”

이중훈이 말했다.

그 말을 끝으로 잠시 동안 침묵이 이어졌다.

침묵을 깬 것은 박승환이었다.

“방법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야….”

친구들의 시선이 다시 박승환에게 모였다. 그러나 박승환은 그 방법을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다.

“방법이 있다고 해도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야. 아니, 오히려 지금 뭔가를 하겠다고 하다가는 오히려 타초경사의 우를 범할 수도 있고. 아무튼, 방법이 있다는 정도만 알아두고, 오늘은 이만 마무리하자.”

박승환이 그렇게 말하자 친구들은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지만, 이내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

박승환은 서초동의 한 건물 앞에 서 있었다.

친구들과 헤어진 후, 집으로 향하지 않고, 바로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법원에서 2km 정도 떨어진 주택가에 자리 잡고 있는 4층 건물. 별다른 특색 없는 그 건물을 박승환은 10여 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서서 바라보고 있었다.

정확히는 노려보고 있었다.

주택가에 흔히 있을 만한 건물이었다.

건물 입구에 붙어 있는 ‘법무법인 鐵柱(철주)’라는 현판, 그리고 토요일 저녁임에도 건물 앞을 지키고 서 있는 검은 양복의 보안요원이 없었다면, 아마 주변의 다른 건물들처럼 그다지 시선을 끌지는 않았을 것이다.

박승환은 잠시 동안 그 현판을 노려보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몸에 힘을 주고는 건물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박승환이 건물로 다가가자 날카로운 인상의 보안요원이 그를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보안요원이 물었다.

정중한 어투였지만, 표정이나 눈빛에는 경계심이 가득했다.

당연했다.

토요일 저녁, 평상복을 입은 청년이 찾아올 이유가 없는 장소였다.

“장 이사님에게 전해주세요. 박승환이라고.”

장 이사님이라는 말에 보안요원의 눈에 담긴 무심함이 놀라움으로 바뀌었다가 바로 경계심으로 변모했다.

눈앞에 이 젊은 청년이 몇 살이든, 어떤 옷을 입었든 ‘장 이사’라는 말을 했다는 사실이 중요했다, 장경석 이사. 이 건물과 법무법인 철주의 보안을 총괄하는 최고 책임자이니까.

젊은 경비는 재빨리 손목에 달린 무전기를 통해 보안실에 소식을 전했고, 몇 초도 안 되어 안으로 정중하게 모시라는 지시를 받았다.

경비는 재빨리 현관의 보안을 해제하고 문을 열었다.

박승환은 무표정한 얼굴로 건물 안으로 걸어 들어가며 속으로 중얼거렸다.

젠장. 여기는 오고 싶지 않았는데.

***

3층, 가장 깊은 곳.

‘대표 변호사 박기준’이라는 명패가 붙어 있는 문 앞에서 박승환은 다시 한번 가볍게 한숨을 내쉬었다.

현관을 지나 계단을 통해 3층, 이 문 앞까지 걸어오면서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계속 그를 괴롭히고 있었다.

그렇게 후회를 하면서도 결국에는 발걸음을 되돌리지 못한 채, 결국 이 문 앞에 서고야 만 것이다.

박승환은 명패에 붙어 있는 이름을 잠시 바라보다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고는 몸에 힘을 불어넣었다.

그리고는 노크도 없이 손잡이를 잡고 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자 커다란 사무실의 모습이 박승환의 시야에 들어왔다.

창문을 제외하고는 온통 책과 서류로 둘러싸인 공간, 그 공간 한가운데 놓여있는 검붉은 루비색의 마호가니 책상. 그 거대한 마호가니 책상에 앉아 있는 한 남자.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는 문이 열렸음에도 박승환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분명히 박승환이 왔다는 소식을 전해 들었음에도,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남자의 시선은 손에든 서류를 향해있었다.

젠장.

박승환은 다시 속으로 그렇게 중얼거리며 방 한쪽에 놓여있는 소파로 걸어가 앉았다.

풀 아닐린(Full Ailine) 등급의 가죽 소파가 부드럽게 박승환의 몸을 감싸주었다.

그러나 박승환은 전혀 편안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저 오랜만에 맡는 이 사무실의 공기처럼 불쾌감이 들 뿐이었다.

“어쩐 일이냐.”

책상에 앉아 있는 남자가 말했다.

하지만 남자의 시선은 여전히 손에든 서류를 향해있었다.

박승환은 그런 남자를 매서운 눈빛으로 잠시 동안 노려보다가 결심한 듯 입을 열었다.

“아버지도 관련되어 있습니까?”

박기준 변호사는 박승환이 하는 말을 들었지만, 그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은커녕 그의 시선은 여전히 손에 들려있는 서류에 고정되어 있었다.

박승환은 대답을 채근하지 않았다.

그저 서류를 바라보는 아버지의 모습을 노려볼 뿐이었다.

몇 분이 흐르고, 서류를 전부 다 읽은 박기준 변호사가 책상에 서류를 내려놓고서야 부자간의 침묵이 끝이 났다.

“무슨 말이냐.”

박기준 변호사가 말했다. 그러나 그의 손은 다른 서류를 집어 들었고, 시선 또한 새로운 서류를 향하고 있었다.

박승환은 그런 아버지의 모습을 보면서, 자리를 박차고 나가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어젯밤. 신림동. 거기서 내가 누굴 봤는지 압니까?”

박승환이 말했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아버지의 시선을 끌 수는 없었다.

“장영호. 아버지가 사육하던 사냥개들 중 하나였죠.”

박승환이 ‘장영호’라는 이름을 꺼낸 후에야 박기준 변호사의 시선이 자신을 노려보는 아들에게 향했다.

“장영호가 어제 신림동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내 친구가 심하게 다쳤고. 관련되어 있습니까?”

박승환은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는 자신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눈을 바라보았다. 거짓말을 한다면 바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아니라고 한다면. 믿겠느냐?”

박기준 변호사가 말했다.

그리고 박승환은 그런 아버지의 눈에서 어떠한 거짓의 징후도 발견하지 못했다.

“아닙니까?”

박승환이 다시 물었다.

‘아니라고 한다면.’ 그렇게 말했다. 아니라고 말한 것이 아니었다.

박기준 변호사는 그런 박승환의 눈을 잠시 바라보다 다시 손에 들고 있는 서류로 시선을 돌렸다.

“아니다.”

박기준 변호사가 말했다.

박승환은 그렇게 짧은 대답을 하고 다시 서류를 읽어 내려가는 아버지를 잠시 바라보다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는 거짓말을 하는 사람은 아니었다.

-너는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이다.

아들에게 그러한 말을 대놓고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거짓말을 할 이유는 없었다.

박승환은 그런 박기준 변호사를 잠시 바라보다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문을 닫고 사무실 밖으로 나가버렸다.

아들이 그렇게 나가는 것에 아무런 관심도 없다는 듯, 서류에 집중하고 있던 박기준 변호사는 서류를 다 읽고 난 뒤에야 전화기로 손을 가져갔다.

짧은 통화연결음 뒤에 바로 중년 남자의 중저음 목소리가 들려왔다.

-말씀하십시오.

“어제저녁. 신림동에서 장영호가 무엇을 했는지 알아봐.”

-알겠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박기준 변호사는 마치, 아무 일 없다는 듯, 다음 서류를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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