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9 : 시나리오 (3)
친구 녀석들이 집으로 간 다음 나는 다시 잠이 들었다.
내 팔에 꽂혀 있는 수액 중에 무통 주사라고 부르는 강력한 진통제가 있다고 했는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아프면 누르라고 해서 연속으로 두 번 눌렀더니, 그냥 순식간에 의식을 잃어버렸다.
그렇게 얼마나 잤을까?
잠에서 깨어났는데, 날 보는 시선이 느껴진다.
시선을 향해 고개를 돌리니, 처음 깨어났을 때처럼, 서현 님이 날 보고 계신다.
“…언제 왔어요?”
내가 서현 님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
“조금 전에요.”
서현 님이 내 얼굴을 보며 그렇게 거짓말을 했다.
오늘 처음 의식을 되찾았을 그때처럼 서현 님은 내 손을 잡고 있다. 정확히는 살포시 얹어놓고 있었다.
마치, 조금이라도 힘주어 잡으면 내가 깨어날까 싶어, 그렇게 살포시 손을 얹은 것이겠지.
나는 조금 힘을 주어, 내 손 위에 살포시 덮인 서현 님의 부드러운 손을 잡았다.
그렇게 손을 잡고서, 떠나기 전 박승환이 해준 말을 떠올렸다.
서현 님이 울었다고, 펑펑 울었다고.
지금 내 눈을 바라보는 서현 님의 차분한 눈을 바라보고 있으면, 격양된 감정으로 눈물을 흘리는 서현 님의 모습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한참 동안 말없이 내 눈을 바라보던 서현 님의 입술이 천천히 열렸다.
“좀 어떠세요?”
“아. 이제 괜찮아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거짓말은 아니었다. 무통 주사 덕분인지 통증은 확실히 덜했으니까.
서현 님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 말을 믿는 눈치는 아니었다.
뭐 그렇겠지. 일단 내 얼굴에 커다랗게 붙어 있는 이 코 보호대만 해도 믿을 수 없을 테니.
말없이 한참 동안 날 바라보던 서현 님이 말했다.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나는 아무 말 못 하고 그저 서현 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어르신이 원망스럽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어요.”
“…….”
“어르신께서 힘을… 거두시지 않았으면……. 이렇게까지 다치지는 않았을 텐데.”
서현 님이 차분한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자꾸 그런 생각이 계속 들어요. 그래서 어르신이 원망스러워요.”
“서현 씨….”
“친구분들도 원망스러워요. 한수 씨가 그렇게 다치는 동안, 그렇게 심하게 다치는 것도 모르고 안에서 술을 마시고 있었다는 사실이 원망스러워요.”
“….”
“그리고 범인들도, 거기 있던 세상 사람들 전부 다 원망스러워요. 그리고 그 누구보다….”
서현 님의 눈가가 촉촉해졌다.
“그 누구보다 제가 가장 원망스러워요. 이렇게 다칠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 그런 내가 가장 원망스러워요.”
결국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서현 님은 팔을 들어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닦아내고는 다시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띄웠다.
“작은 어르신을 가장 가까이서 모시는 제가 이번 일에 책임을 져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습니다.”
옅은 미소와 함께 그렇게 말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한수 씨가 아닌 작은 어르신으로 불렀다는 사실도, 그녀의 말투가 예전으로 돌아갔다는 사실도 잊은 채, 그녀가 한 말을 곱씹고 있었다.
“그러하기에, 저는 작은 어르신 곁에서 이만 물러날까 합니다.”
그렇게 말했다.
***
한남동.
포춘지 선정 세계 10대 기업집단의 총수이자, 전 세계 40만 중앙그룹 직원의 수장인 강민철 회장은 한남동 자신의 집 서재에 앉아 있었다.
토요일 늦은 오후의 여유로운 햇살이 서재 안을 비추고 있었지만, 그런 서재 분위기와는 달리 강 회장의 표정은 무거웠다.
무거운 표정의 강 회장에 맞은편에는 딱딱한 표정의 젊은 남자가 서 있었다.
젊은 남자는 딱딱한 표정만큼 감정 없는 목소리로 말을 하고 있었다.
“일단 작은 어르신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사람이 없었던 것이 원인입니다. 서현이가 고모를 통해서 병원에 연락했고 입원 절차를 밟았지만, 고모는 단순히 서현이의 지인 정도로 판단했던 것 같습니다.”
“…그랬겠지. 지윤이는 작은 어르신에 대해 알지 못하니까.”
“맞습니다. 고모는 작은 어르신의 존재를 모르고, 공교롭게도 고모부는 해외 출장 중이었기에, 병원에서 작은 어르신의 신분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서현이에게 작은 어르신의 소식을 알린 양 변호사도 작은 어르신이 무언가 중요한 존재라는 사실은 인지했지만, 자세한 내막은 알지 못합니다. 그렇기에, 소식을 알리기에 너무 늦은 밤이라고 판단했고, 오늘에서야 알려온 것입니다.”
강 회장은 무거운 표정으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바로 전달되어야 했을 중요한 소식이 마치 누가 일부러 숨기기라도 한 듯 하룻밤이나 지체되어 버렸다.
“잘못을 찾는다면 서현이가 가장 큰 잘못을 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변명의 여지가 없는 것은 아니지만, 어찌 됐든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작은 어르신을 모시는 임무를 맡은 당사자가 서현이었으니까 말이죠.”
강 회장은 그렇게 말하는 젊은 남자를 착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서현이를 어찌해야 한다는 말이냐.”
“책임을 져야 할 것입니다. 일단 이곳으로 불러들여 근신시키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젊은 남자가 말했다.
“그리할 수 있겠느냐.”
“그렇게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강 회장은 젊은 남자를 잠시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음을 지었다.
“우현아.”
강 회장이 젊은 남자의 이름을 불렀다.
“네.”
“어르신은 이미 다 알고 계신다. 누구의 짓인지, 왜 그런 일을 벌였는지, 이미 다 알고 계시지. 하긴, 모르시는 것이 더 이상하겠지. 그분께서 알려 하시면 아실 터이고, 하고자 하시면 하실 터이니.”
***
두 시간 전.
강 회장은 전화기를 얼굴에 가져다 대고 있었다.
당혹스러운 표정으로 전화기를 타고 들려오는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놔두게.
“하지만, 어찌 종 된 몸으로서….”
강 회장의 말은 전화기 너머에서 들려오는 혀 차는 소리에 막혀버렸다.
-쯧쯧쯧. 자네는 그 나이를 먹고도 여전히 말귀를 못 알아먹는구만. 놔두게. 자네가 신경 쓸 일이 아니야.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어르신의 목소리는 평상시와 같았다. 그 목소리에서 분노와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런 어르신의 목소리가 강 회장을 혼란스럽게 했다.
신경 쓸 일이 아니라는 말도 강 회장을 혼란스럽게 하기는 마찬가지였다.
말 그대로 그냥 놔두라는 의미인지, 아니면 어르신께서 직접 해결하시겠다는 의미인지 확실히 파악할 수가 없었다.
강 회장이 의중을 채 파악하기도 전에 어르신의 말이 계속 이어졌다.
-얼마 전 한수 그 녀석이 이곳에 내려왔던 것은 알고 있겠지? 그때 그 녀석이 재미있는 말을 했었네.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스물한 해를 사람으로 살았으니까, 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고 싶다고. 그런 말을 하더군.
강 회장은 그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았다.
그날, 강 회장이 건강검진을 받기 위해 병원을 찾았던 그날, 작은 어르신은 능력을 사용했다. 학교 선배 부친에게 능력을 사용했다. 그때 이야기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날 내가 능력을 거두었네.
능력을 거두었다. 작은 어르신에게 깃들어있는 신력을 제한했다는 의미였다.
“…어찌하여 그런 결정을 내리셨는지, 감히 여쭈어도 되겠습니까?”
-자네는 어떻게 생각하나?
오히려 어르신의 질문을 받은 강 회장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질문을 듣고도 바로 답하지 않는 것은 불경이었지만, 질문에 생각 없이 대답하는 것이 더욱 큰 불경이었다.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고심한 강 회장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가 어찌 어르신의 생각을 헤아릴 수 있겠습니까마는, 감히 저의 짧은 소견을 말씀드리자면…. 어르신께서 작은 어르신의 능력을 거두신 것은 벌을 내리기 위함이라기보다 문제를 내신 것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자네는 이해하는군.
전화기 너머에서 어르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 녀석이 갑자기 생긴 능력에 취해 천둥벌거숭이처럼 날뛰지 않은 것이나, 능력을 사용함에 있어서 깊게 고민했다는 부분에서 낙제는 피했다고 할 수 있지.
“감히 제가 한 말씀 올리자면, 변하실 분이 아니시라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경제적으로 윤택해지셨지만, 작은 어르신께서는 그 전과 다름없는 검소한 생활을 유지하고 계시는 부분도 역시 어르신의 뒤를 이을 재목에 부족하지 않은 모습이라 생각됩니다.”
-뭐, 돈도 써 보는 사람이 쓰는 거지. 아무튼, 그 녀석이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겠다고 했는데, 궁금하지 않은가? 과연 그 녀석이 능력이 있다가 없어도 계속 그렇게 생각하는지 말일세.
그 말을 들은 강 회장의 머릿속에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어르신의 안배이십니까?
한수가 당한 공격에 어르신의 의지가 담겨있는지를 묻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질문을 꺼낼 정도로 그는 어리석지 않았다.
물론 어르신은 그런 강 회장의 생각을 알고 있었다.
-내가 그런 사소한 것까지 신경을 쓸 것 같은가?
“미욱한 종을 벌하여 주시옵소서.”
-되었네. 쓸데없는 이야기는 이쯤하고. 아무튼, 놔두게. 한수 그 녀석이 하고자 하는 대로, 자네는 관여하지 말고.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그리고 자네도 내려올 필요 없네. 괜히 죄를 고한다느니, 벌을 청한다느니 그러면서 귀찮게 하지 말고. 별것 아닌 일로 시끄럽게 할 필요 없네.
“그저 송구스러운 마음뿐입니다.”
-쯧쯧쯧. 자네는 그 나이를 먹고도 아직도 그렇게 마음이 가벼워서야.
***
강 회장의 말을 들은 젊은 남자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자신의 할아버지를 바라볼 뿐이었다.
강 회장도 눈앞에 젊은 남자, 자신의 장손자인 강우현을 바라보았다.
“우현아.”
“네.”
“우리는 이번 일에 관여하지 않는다. 그저 지켜볼 뿐. 그게 어르신의 뜻이다.”
대답 없이 잠시 동안 생각하던 강우현이 물었다.
“만약에…. 능력을 잃어버리신 작은 어르신께서 저희의 힘을 이용하려 하신다면, 그때는 어찌해야 할까요?”
“너의 생각은 어떠하냐. 그러하실 것 같으냐?”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나도 잘 모르겠구나. 만약 작은 어르신께서 우리의 힘을 필요로 하신다면, 우리가 움직이길 요청하신다면, 그때 생각해보도록 하자꾸나.”
“알겠습니다. 일단 언제든지 움직일 수 있도록 준비는 하고 있겠습니다.”
“그리고 서현이는 걱정할 필요 없다. 어르신께서는 서현이에게 책임을 물으실 생각이 없으시다.”
강 회장이 강서현의 이름을 꺼내자 강우현의 눈빛이 흔들렸다.
“…알겠습니다.”
강우현의 목소리는 여전히 건조했지만, 강 회장은 손자의 감정 없는 목소리 안에 감추어져 있는 안도감을 눈치챌 수 있었다.
강 회장은 무표정을 가장하는 손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어렸을 때부터 여동생을 끔찍하게 생각하는 녀석이었다.
그런 녀석이 직접 동생에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본가로 불러들여 근신을 시키자는 말을 꺼냈다.
그렇게 말한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혹시라도 어르신의 분노가 하나뿐인 여동생에게 향할까 봐 미리 손을 쓰겠다는 생각이었다.
“너무 생각이 짧아.”
강 회장이 말했다.
“…죄송합니다.”
강우현이 솔직하게 말했다.
“조금 더 멀리 보고, 조금 더 깊게 생각하거라. 언젠가 네가 나의 뒤를 이어 작은 어르신을 보필해야 할 테니.”
“명심하겠습니다.”
강우현은 그렇게 말하며 할아버지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
서울중앙의료원.
서현 님은 얼굴에 옅은 미소를 띤 채, 이번 일에 책임을 지기 위해 내 곁에서 물러나겠다고 말했다.
나는 그렇게 말한 서현 님의 슬픈 눈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호칭도, 말투도, 그리고 나를 바라보는 눈빛도 모든 것이 바뀌었다. 지금 당장은 그게 가장 아프게 다가왔다.
나는 그녀의 슬픈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렇게 하세요.”
“….”
“서현 씨가 원하시면 그렇게 하세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그녀의 손을 잡은 내 오른손에 조금 힘을 불어넣었다.
“하지만 서현 씨가 원하는 것이 아니라면 계속 있어 주세요.”
내 말에 서현 님의 얼굴에 미소가 천천히 사라졌다.
“아무런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
“내가 처음 눈을 떴을 때. 서현 씨 얼굴이 제일 먼저 보였을 때.”
그녀의 눈가가 다시 촉촉하게 젖어 든다.
“무슨 일이 있었든, 앞으로 어떠한 일이 있든, 이 아름다운 얼굴을 계속 볼 수 있다면 상관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렇게 맺힌 눈물이 다시 천천히 뺨을 타고 방울져 흘렀다.
“당신을 만나서, 당신을 알게 되어서, 당신과 함께 있어서, 당신이 곁에 있어 주어서, 그래서 이렇게 아픈데도, 행복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나는 오른손을 빼내어 그녀의 뺨을 향해 천천히 뻗었다.
“작은 어르신을 모시는 서현 님이 아닌, 같이 저녁을 만들어 먹고, 차를 마시며 하루의 일상을 공유하는 서현 씨로 있어 줄 수 있다면.”
내 엄지손가락이 그녀의 뺨에 닿았다.
“그래 줄 수 있다면, 계속 내 옆에 있어 주세요.”
그렇게 말하고,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럽게 그녀의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닦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