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68화 (68/271)

68 : 시나리오 (2)

지연이라는 말을 들은 녀석들의 눈이 커진다.

“니들이 할 일이 있어. 일단 앉아봐.”

내가 말했다.

그러자 이글이글 불타는 눈을 하고 있던 녀석들이 잠시 생각하더니 자리에 앉았다.

기본적으로 머리가 나쁜 놈들은 아니니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바로 이해한 것 같았다.

“누가 지연이한테 깨톡 좀 해봐. 지금 어딘지.”

내가 말했다.

“내가 해볼게.”

이중훈이 그렇게 말하며 핸드폰을 꺼낸다.

나는 이중훈이 깨톡 보내는 것을 잠시 지켜본 다음 녀석들을 보며 말했다.

“주목해봐. 일단 날 습격한 놈들은 한 놈이 아니라 여러 명이었어. 도촬범 그 개자식을 빼고도 적어도 서넛, 아니, 느낌상으로는 네다섯? 그리고 그중에 한 명은 그놈들을 통솔하는 것처럼 보였어. 목소리로 판단했을 때, 40대 정도. 그런 느낌이었달까?”

“조폭일까?”

김창회가 말했다.

“모르겠다. 그런 놈들인지 어떤지는. 아무튼, 위계질서가 있고, 조직되었다는 느낌을 받았어. 지휘체계가 살아있다고 할까? 그리고 무엇보다 주목해야 할 부분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자수를 하는 놈들이 나왔다는 거지.”

“미리 계획했다?”

박찬희가 말했다.

“시나리오가 있다는 이야기네.”

박승환이 그 말을 받았다.

“그래. 시나리오가 있을 가능성이 있어.”

내가 녀석들을 보며 말했다.

깨톡!

이중훈의 핸드폰에서 깨톡 소리가 울렸다.

“지연이는…. 집이란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는데.”

이중훈이 핸드폰을 보며 말한다.

“일단 다행이네.”

내 말에 모두 고개를 끄덕인다.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데, 혹시라도 그 미친놈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미친놈이라고 한다면 지연이에게 해코지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이게 내 생각이고. 그래서 당분간은 지연이를 옆에서 지켜야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드는데.”

내가 말했다.

“경찰에 이야기하는 게 좋지 않을까?”

박찬희가 말했다.

“그게 가장 좋기는 한데, 상황이 좀 어렵다는 생각이 드네. 우선, 그놈들이 철저하게 계획을 세워 전혀 관계없는 사람을 자수시킨 거라면 도촬범 그 자식과 나와의 직접적인 연관을 입증할 수가 없고, 그런 상황에서 지연이가 위험에 처해있다는 상황을 연결시키기도 어려울 거고.”

“한수 네가 경찰에 가서 직접 이야기하는 건? 범인은 도촬범이다. 그렇게.”

김창회가 물었다.

그 질문에 대답한 것은 박승환이었다.

“함정.”

모두의 시선이 박승환을 향했다.

“함정일 가능성도 생각해 둬야 해.”

박승환이 말했다.

역시 박승환이. 눈치가 빠르구나.

“나도 동의해.”

내가 말했다.

“어떻게 함정이 된다는 거지?”

이중훈이 물었다.

나는 천천히 내가 생각한 것들을 설명했다

“아까 말했던 것처럼, 시나리오가 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는 거지. 술집에서 전화를 했을 때, 안 들린다고 밖으로 유인한 것도, 골목에 들어가 사람들의 시선에서 차단되자마자 명치를 때려 무력화시킨 다음 다구리를 치는 것도, 아. 생각하니까 또 열 받네. 아무튼, 그놈들이 준비를 했다. 뭐 술 먹으러 간 것은 우연이었겠지만…. 잠깐만. 이거 혹시 큰 그림의 일부였던 거 아냐? 누가 술 먹자고 그랬지?”

모두의 시선이 이중훈에게 모인다.

“이중훈…. 너. 이 자식….”

박찬희가 말한다.

으이구, 단순한 자식. 제일 먼저 걸려드네.

“아니야! 나 아니야! 임마! 나 아니야!”

갑작스러운 분위기 전환에 이중훈이 필사적으로 손을 흔들며 말한다.

“지연이 때문에 한수 저 자식 죽여 버리고 싶다는 생각을 안 한 것은 아니지만, 죽여도 내 손으로 죽이지, 설마 내가 그 도촬범과 손을 잡을 이유가 없어. 맹세코 본적도 없는데!”

그렇게 열심히 손까지 흔들며 말하는데, 목소리와 몸짓에서 진심이 느껴진다.

그런데, 자기 손으로 죽인다는 것도 진심인 거지?

“알아. 농담한 거야. 농담.”

내가 말했다.

당연히 농담이지. 농담일까?

“금요일 밤을 노렸겠지. 보통 불금에 한잔들 하니까. 그리고 우리가 어디서 술을 마시는지 미행했을 테고, 마침 골목도 있으니 그 자리에서 재빨리 그림을 그렸을 거야. 우연이지. 우연. 아무튼, 중요한 건 시나리오를 썼다 이거지. 그리고 사건이 끝나자마자 바로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애들을 시켜 자수해버리는 것도 미리 쓰여진 시나리오일 거고. 하지만, 시나리오가 거기서 끝이 아니라면?”

“한수 네가 범인으로 도촬범 그 새끼를 지목하는 데까지 대비한 시나리오를 준비했다?”

김창회가 말한다.

이제야 이 자식들도 큰 그림이 보이나 보다.

“그렇지. 가출 청소년이 범인이라는 소식을 들은 내가 열 받아서 경찰서 달려가가지고, 가출청소년 아니에요. 도촬범 그 자식이 그랬어요! 그렇게 경찰에 신고를 하고, 아니, 형사 고발이 되려나? 아무튼, 그렇게 주장해. 자, 일이 커져. 근데, 자수한 놈들은 지가 그랬다고 그러고, 도촬범 그 새끼의 알리바이를 입증할 누군가가 등장해. 그러면?”

“도촬범이 범인이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한수 너뿐이네.”

박찬희가 말한다.

“무고로 걸 수도 있겠지.”

이중훈이 덧붙인다.

“그렇지. 물론 우리나라 경찰이 제대로 수사만 한다면 그런 어설픈 시나리오는 바로 밝혀내겠지만, 솔직히 말해서 그런 가능성에 도박을 걸고 싶지는 않다 이거지.”

내 말에 녀석들이 생각에 빠진다.

“골치가…. 아프겠네.”

이중훈이 말했다.

“그래. 골치 아플 거야.”

내가 말했다.

“그러면 어떻게 해? 이대로 그냥 넘어가?”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고, 일단 지연이 이야기부터 해보자.”

내 말에 녀석들이 다시 나에게 집중한다.

“도촬범 그 새끼가 아예 드러내놓고 날 노렸어. 나는 그게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이 드는 게, 지연이에게 뭔가 헛짓거리를 할 것 같지는 않아. 그 멍청한 놈이 시나리오를 쓰지는 않았겠지만, 시나리오를 쓴 놈이 나름의 논리를 가지고 시나리오를 썼다면 나와 지연이를 동시에 습격하는 멍청한 시나리오는 쓰지 않았을 거야.”

길게 이야기했더니 다시 갈비뼈가 욱신거린다. 하지만 멈출 수는 없지.

“그렇다고, 그냥 별일 없을 거야. 별일 없게 해주세요 하면서 기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어. 그리고 아까 말했던 것처럼 경찰에 신변 보호를 요청할 수도 없고. 그러니 당분간은 너희들이 좀 돌아가면서 지연이를 지켜봤으면 싶다, 그런 얘기야. 뭐 학교에서야 별일 없겠지만, 학교 오고 가고 할 때, 특히 집에 갈 때, 밤늦게 집에 가고 그럴 때는 옆에서 좀 지킬 필요가 있지 않을까?”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나 빼고 4명, 돌아가면서 지연이를 귀가시키면 크게 부담되지는 않겠지. 아니, 이중훈이 저 자식은 지가 혼자 다 하겠다고 난리 치려나?

그렇게 생각하며 이중훈이를 슬쩍 보니, 차분한 눈빛으로 말한다.

“어떻게 납득을 시키는지가 문제네.”

이중훈은 냉철하게 상황을 분석하고 있다. 적어도 지금은 짝사랑에 눈먼 스토커 모드는 아니었다.

“납득?”

박찬희가 물었다.

“우리가 돌아가면서 지연이를 집에 데려다주려면 납득을 시켜야 하지. 그 녀석이 바보도 아니고, 그냥 집에 같이 가자고 하면 그냥 같이 가는갑다 하겠어? 결국 지금 상황에 대해서 설명을 해야 하고, 그러면 한수의 지금 상황을 이야기하지 않을 수가 없잖아.”

이중훈이 말했다.

“채무감을 느끼겠군.”

이건 김창회의 말.

“한수가 다친 것이 자기 때문이라는 채무감.”

이건 박찬희의 말.

뭐야. 갑자기 이놈들 머리가 왜 이렇게 팽팽 돌아가?

암기 위주 입시교육의 승자들이라 응용능력이 엄청 떨어지는 놈들 아니었던가?

“뭐, 그렇게 생각 안 할 수도 있지. 내가 다친 거랑 상관없이, 어머, 나 위험해. 큰일 났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할 수도 있고.”

“그런 애는 아니지.”

김창회가 유지연을 변호하고 나선다.

“맞아. 그런 녀석이 아니야.”

박찬희도 동의했다.

“뭐.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해. 그래서 하는 말인데, 일단 지연이에게 대충이라도 지금 상황이 어떤지 이야기를 해주긴 해줘야지. 하지만 내 이야기는 당장은 빼자고. 일단 이거라도 좀 떼고.”

나는 내 코를 감싸고 있는 보호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요거 떼고, 얼굴 부은 것 좀 가라앉으면, 그때 불러서 자세히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다음 주 금요일이나 토요일쯤? 기왕이면 금요일이 좋겠다. 아무것도 모르고 토요일에 놀러 나갔다가 나쁜 놈들 만나면 안 되잖아. 그러니 금요일 저녁? 일주일이면 괜찮아지겠지.”

내가 그렇게 정리하자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좋아. 일단 지연이는 그렇게 정리하고. 이제 도촬범 그 개자식 이야기를 해보자.”

내가 주제를 바꾸었다.

그러자 이중훈이 이빨을 꽉 깨무는 게 보인다.

어? 임마. 너 그런 캐릭터 아니잖아. 그렇게 날 위해주는 캐릭터 아닌데.

“혹시나 싶어서. 다시 한번 물어보자. 그 도촬범이 확실해?”

“확실해. 그 자식이 각목으로 내 팔을 부러트렸어. 뭐, 팔로 안 막았으면 두개골이 나갔겠지. 아무튼 절대로 그 자식이야.”

내 말에 친구 놈들이 주먹에 힘을 주는 게 보인다.

허. 참말로. 이 자식들, 이상한 데서 사람 뭉클하게 만드네.

“그 자식이 나한테 침도 뱉었는데, 내 머리카락에 그 새끼 DNA가 남아있을 거야. 머리 감기 전에 미리 뽑아둬야 하나? 아무튼 아까 말했던 것처럼, 만약에 그 자식이 함정을 파놓았다면, 거기에 걸려드는 건 사양하고 싶다. 하지만 지금 상황에서 확실히 이거다 하는 방법도 없어.”

“방법이 없다고 그냥 이렇게 넘어갈 수는 없잖아.”

박찬희가 말하고, 다른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거린다.

“당연하지. 방법이 없다고 그냥 다 내 업보다, 다 내 탓이오. 하면서 넘어갈 수 없지. 그렇게 넘어갔다간 할아버지가 날 가만두지 않을 거야. 물론 그 전에 나부터 그렇고.”

“사형은 어때?”

박승환이 말한다.

모두의 시선이 박승환을 향한다.

박승환이 이 자식, 미친놈인 줄 알았지만, 이렇게 막 나간다고?

“사형(私刑). 사적 제재. 죽여 버리는 사형(死刑) 말고 개인적 차원의 형벌, 사형(私刑).”

박승환이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한다. 분명, 저 자식의 이름이 언젠가 검색어 1위에 오를 거다.

“음. 난 마음에 드는데.”

김창회가 말했다.

“나도. 괜찮은 것 같아.”

이중훈도 찬성했다.

“걸리면?”

박찬희가 물었다.

“안 걸리면 되지.”

박승환의 대답.

참 간단히도 말한다.

“솔직히 나도 마음에 든다. 사적 제재.”

내가 찬성하자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하지만 솔직히 지금 당장은 어렵지. 마음 같아서는 저기 어디 부두 창고로 납치해서 장도리로 발가락 하나씩 찍고 싶지만, 지금은 그쪽도 신경을 잔뜩 날카롭게 세우고 있을 테니까. 일단은 기다려보자고.”

내 말에 친구 녀석들이 다시 고개를 끄덕인다.

“자. 정리해보자. 우선 내가 퇴원할 때까지, 지연이만 지켜보고 있자고. 도촬범 개자식도, 아무리 계획적이었다고 해도 사고를 쳤으니까, 지금 쫄리긴 할 거야. 시나리오 써준 놈도 지금은 몸 사리고 있으라고 할 테고. 솔직히 우리가 방법이 없기는 하지만, 불리하지는 않다는 게 내 생각이다. 조바심낼 필요 없어.”

참 놀랍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그 새끼 잡아 와! 내가 직접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조곤조곤 박살을 내주겠어!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데, 이렇게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내가 좀 멋있다.

“하지만, 복수는 할 꺼야. 그리고. 도와줄 거지?”

녀석들이 고개를 끄덕인다. 불타는 눈으로.

훗. 고마운 녀석들 같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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