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 : 시나리오 (1)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아니, 그 표현은 틀렸다. 의식을 되찾았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의식을 되찾은 나는 천천히 눈을 떴다.
내 눈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천장이었다.
아니, 천장 같았다. 초점이 맞지 않아 흐릿한 내 시선에 천장이라고 생각되는 백색의 면(面)이 가장 먼저 보였다.
나는 초점이 맞기를 기다리는 대신 천천히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흐릿한 내 시야에 무언가의, 아니, 누군가의 형체가 보였다.
그리 짧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나서야, 나는 그 누군가를 확인할 수 있었다.
사실, 초점이 맞기 전부터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내 손을 꼭 잡고 있을 사람은 한 명뿐이었으니까.
서현 님이었다.
초점이 맞으면서 서현 님의 얼굴이 보였다.
화장기 없는 얼굴, 굳은 표정, 물기 젖은 눈, 그럼에도 여전히 아름다운 서현 님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미소 지었다.
미소 지을 수밖에 없다.
눈을 뜨고 가장 먼저 본 얼굴이 서현 님의 얼굴이기에.
“…괜찮아요?”
서현 님이 조심스러운 말투로 물었다.
“…네.”
내 오른손에 느껴지는 압력이 높아졌다.
나는 시선을 돌려 내 오른손을 바라보았다.
수액 주사 바늘이 꽂혀 있는 내 오른손이 서현 님의 두 손에 감싸여 있다.
“네, 괜찮아요.”
내 말에 서현 님도 살짝 미소 짓는다.
괜찮다.
내가 정신을 잃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겠지만, 나를 바라봐주는 서현 님의 얼굴을 볼 수 있다면.
우선은 괜찮다.
나는 오른손에 조금 더 힘을 주었다.
내 손을 감싸고 있는 서현 님의 양손에도 살짝 힘이 들어갔다.
그때 반대편에서 들려오는 한숨 소리.
“에휴…….”
뭐야. 갑자기 한숨 소리가 왜 들려?
어떤 자식이야? 어느 정신 나간 놈이 지금 이 분위기를 깨는 건데?
나는 한숨 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서현 님 맞은편, 정확히 내가 누워있는 침대 왼편에 박찬희 놈이 나라 잃은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고 있다.
“…너 여기 왜 있냐?”
내가 물었다.
“야. 나가자.”
이중훈이 박찬희의 어깨에 손을 얹더니 말했다.
어? 이중훈도 있었네?
박찬희는 고개를 절레절레 젓고는 이중훈과 밖으로 나갔다.
저 자식들은 여기 왜 있는 거야?
아니. 그건 그렇고 여기는 어디야?
***
“…그런 상황입니다. 당분간은 집중치료가 필요합니다.”
피곤해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는 젊은 의사 선생님이 지금 내 상태에 대해서 설명해 주었다.
의국장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의사샘의 말을 간단히 요약하면 내가 여기저기 많이 다쳤고, 그중에서 팔이 심각해서 일단 수술을 했다고 한다. 일단 최소 3주는 입원이고, 퇴원을 해도 이 2주는 통원치료를 받아야 하며, 깁스를 푸는 것도 최소 한 달은 넘게 걸릴 테니까 너무 조바심내지 말라. 뭐 그런 이야기다.
코뼈도 부러졌는데, 급한 거는 아니기에 월요일에 이비인후과 교수님 오시면 그때 보고 수술할지 말지를 결정하기로 하셨다나 뭐라나.
뭐 내가 뭘 아나. 일단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알겠습… 으으.”
나는 고개를 끄덕이다 가슴을 찌르는 고통에 말을 끝내지 못했다.
“숨 쉴 때마다 아플 겁니다. 당분간은 최대한 움직이지 마세요. 숨도 살살 쉬고. 갈비뼈는 방법이 없습니다. 다다음주 정도면 좀 덜할 겁니다.”
차가운 맥주를 먹고 싶으면 얼음을 넣어 먹으면 된다는 듯한 말투로 의사샘이 말했다.
“네…. 으흡…. 알겠……습니다.”
말하는 것도 힘들다.
“그럼 쉬세요. 필요한 것 있으시면 호출 버튼 누르시고요. 다시 말씀드리지만 당분간은 움직이지 마세요. 숨도 살살 쉬고.”
의사샘은 그렇게 당부하고는 병실을 나갔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면서 한숨을 쉬다 다시 가슴을 찌르는 고통에 괴로워했다.
젠장.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일까.
마치 온몸이 두들겨 맞은 듯 아프다.
아니지. 온몸을 두들겨 맞았잖아? 그러니 맞은 듯 아프다는 표현은 적절치 않군.
아무튼, 아프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 아팠다.
나는 몸을 살짝 움직였다. 아주 살짝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비명을 질렀다.
특히 가슴이 너무 아프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두 팔로 머리는 잘 막아서 딱히 이 잘생긴 얼굴이 많이 상하지는 않았다는 것.
아니지. 코가 부러졌으니, 이건 큰가?
무릎 찍기 한발을 허용한 것이 크다. 그것만 안 맞았으면 얼굴은 세이프였는데…. 하필 코라니.
뭐 그건 불가항력이었지. 명치 맞으면 숨이 안 쉬어지는데, 그 상황에서 머리카락이 잡히면 방법이 없다. 내가 싸움을 못해서 그런 게 아니라는 이야기다.
일대일로 붙었으면….
“…많이 아프세요?”
그런 생각을 하는데, 서현님이 물어보신다. 옆을 돌아보니, 서현 님이 걱정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아니요. 괜찮아…으으요오…….”
갈비뼈는 참 소중한 거였구나.
숨 쉴 때마다 이렇게 아프다니. 이렇게 고통스럽다니.
그러나 참아야지. 서현 님을 걱정시킬 수는 없지.
아무튼, 나는 기억과 친구들의 이야기를 종합해 머릿속에 조각나 있던 퍼즐을 하나하나 다 맞춰보았다.
우선, 나는 정체불명의 놈들에게 두들겨 맞았고, 그리고 정신을 잃었고, 119와 가까운 병원을 거쳐 서울중앙의료원으로 온 다음, 부러진 팔을 핀으로 고정하는 수술과 함께 응급처치를 받았다는 것이다.
그 와중에서 친구 놈들이 어찌저찌 서현 님에게 연락을 했고, 보아하니 우리 서현 님은 집에 있다가 갑작스러운 호출에 새벽에 병원으로 오게 된 것이고.
그래서 서현 님이 수면 바지를 입고 계시는 거다.
내가 언제 정신을 차릴지, 또 깨어나면 어떻게 된 것인지 설명할 겸 남아있던 박찬희, 이중훈 두 녀석은 내가 서현 님 손을 잡고 꼬물꼬물대고 있는 걸 보고 차마 아픈 나를 때리지 못하고, 나가서 병원 벽을 치다 온 것이고.
몰랐지, 난. 그 자식들이 거기 있는 줄은.
그리고 왜 박찬희와 이중훈 둘만 있나 했더니, 내가 수술받고 회복하는 동안 날 폭행했다고 주장하는 ‘범인(?)’이 경찰서 가서 자수를 했다는 연락을 받았고, 김창회와 박승환이 범인 놈을 확인하기 위해 경찰서로 갔다는 이야기다.
제이슨 임. 그 자식일까? 그 자식이 자수를 했을까?
아니지. 그럴 놈이 아니다. 내가 가진 모든 재산을 걸어도 좋다.
그럼 누굴까? 그 중년 남자? 아닐 것 같은데?
뭐, 그런 거 고민해봤자 지금은 소용없지. 일단 승환이랑 창회가 올 때까지 기다려보자.
아무튼, 다시 한번. 정리해보자.
전화를 받고 나갔다. 그리고 명치를 얻어맞고.
아, 생각하니 또 열 받네.
명치만 안 맞았어도 어떻게 반격하든, 도망치든 방법이 있었을 텐데.
명치. 명치는 참 소중하구나. 기억해둬야지.
아무튼 명치를 얻어맞았어. 그다음에 니킥. 그리고 넘어진 다음 다구리.
아오, 씹새들. 비겁한 놈들. 다구리라니.
진짜 다구리엔 장사 없다고, 정신없이 맞았네. 온몸이 다 아픈 이유가 그것 때문이겠지.
얼마 전에 내가 김민우 같은 놈들은 한 트럭이 덤벼도 걱정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 했다고 벌 받은 건가?
입조심, 생각 조심해야지.
아무튼, 한참을 그렇게 두드려 맞다가 도촬범 그 자식이 나타났고.
각목. 그 형태나 나중에 소리 같은 거 봐도 철제는 아니고 목재겠지. 아마도 각목.
그걸로 맞고, 팔이 부러졌고.
풀 스윙이었어. 팔로 안 막았으면 두개골이 함몰되었을 거야. 그랬으면 지금 침 질질 흘리면서 서현 님도 못 알아보고 있었겠지.
진짜 죽이려고 했던 건가? 그 개자식.
그리고 중년 남자가 말렸고. 그 중년 남자는 대체 누굴까. 그 개자식의 조력자? 부하?
말하는 것으로 봐서는 부하는 아닌 것 같고, 뭐 깡패 놈들을 동원했겠지.
어쨌든 일단 그 중년 남자도 살생부에 추가하고.
그리고 마지막에는……. 기억이 날락 말락 한데……. 흐음.
맞다.
잠자라 그랬나? 잠들라 그랬나.
아무튼 그 도촬범을 말린 중년 남자가 내 턱을 후려갈기고, 나는 정신을 잃고. 그리고 깨어나니 지금 여기고.
좋아. 우선은 살았군.
우선은 살았어.
그렇다면…. 보답을 해줘야지.
제대로 말이지.
***
서현 님은 내가 정신을 차리고 나서도 한참 시간이 지난 후에야 집으로 갔다.
기념할 만한 날이다. 처음에는 아침 일찍부터 정장을 차려입고 계시던 서현 님이 그 수면 바지를 계속 입고 계셨다 이거지.
뭐 평소에 서현 님을 봤을 때, 서현 님에게는 놀라움, 당황 이런 단어가 어울리는 사람이 아닌데. 많이 놀라셨나 보다.
나중에 놀려먹고 싶지만, 내가 잘못한 거니 놀려먹을 수도 없겠네. 하지만 기회가 있겠지. 일단 키핑.
아무튼, 내가 막 침 흘리고, 헛소리하고 그러지는 않아서 안심했는지, 서현 님이 필요한 물건을 챙겨 오겠다며 집으로 가셨고.
박찬희와 이중훈은 경찰서에 간 창회랑 박승환이가 오면 그때 같이 가겠다고 병실 소파에서 꾸벅꾸벅 졸고 있다.
뭐 이야기 들어보니 밤샌 것 같은데, 그냥 가지. 자식들.
뭐. 그래도 친구라고 걱정해주는 모습 보고 있으니 고맙기도 하네. 뭐 내 입으로는 절대 말 안 하겠지만.
근데 잠깐만.
생각해보면 밖에서 나 다구리 당하는 동안, 저 자식들은 나 들어오기 전에 내 몫까지 먹겠다고 고기를 향한 만인의 투쟁을 벌이고 있었을 거 아냐.
야, 한수 없다. 이때다, 하면서.
생각하니 열 받네.
어? 진짜 열 받는데?
점점 분노의 수위가 높아지는데, 병실 문이 열리며 누군가가 들어왔다.
“어? 일어났네.”
경찰서에 갔다던 박승환과 김창회가 돌아왔다.
“으아아아아. 피곤하다. 여기서 관악경찰서까지 왕복했더니.”
김창회는 그렇게 소리치더니 소파에 기대자고 있는 녀석들을 아랑곳하지 않고 그 위로 몸을 던졌다.
“괜찮아? 정신 차린 거야? 이거 몇 개야?”
박승환은 나에게 중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어제 그렇게 다구리를 당할 때도 신력이 있었으면 하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신력이 필요하다.
저 뻐큐 손가락을 꺾어버리려면!
“안 보여. 이리 가까이 와봐.”
내가 말했다.
“음. 정상이군.”
눈치 빠른 박승환 저 자식은 그렇게 말하고는 소파로 가 몸을 기댔다.
지금 시간이 오후 2시가 넘었는데 그때 술 마시다 병원 달려와서 지금까지 잠도 한숨 못 잤을 터이니 피곤하긴 하겠지.
그건 그거고!
“야. 자지 마. 거기서 자빠져 있지 말고 집에를 가 자식들아! 크허허헙.”
아……. 소리 질렀더니 또 가슴이……. 가슴이 아프다.
갈비뼈……. 이렇게 소중한 거였구나. 몰랐다.
내 말에 뭔 개가 짖느냐는 식으로 반응들이 없다.
아오! 저 자식들 그냥. 도움이 안 돼. 도움이.
“가출 청소년이더라.”
김창회가 눈 감고 누운 상태로 말했다.
“뭐가?”
내가 물었다.
“너 때렸다고 자수한 놈.”
박승환이 말했다.
“술집 골목에서 몰래 담배 피는데, 네가 와서 뭐라고 해서 기분 나빠서 때렸다고 하더라. 각목도 들고 왔다데. 그걸로 때렸다고.”
“…….”
그렇군. 그래서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냈던 거구나.
“담당 경찰인지, 형사인지. 별것 아닌 것처럼 이야기하더라. 뭐 법적 보호자도 아니니까 이야기해 주는 데 한계가 있겠지만, 그냥 애들끼리 술 먹고 싸운 것 정도로 생각하더만. 아니, 그렇게 처리하려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고나 할까?”
시나리오, 아주 잘 짜인 시나리오가 있었군.
“경찰이 자수한 놈 집에 연락했는데, 내놓은 자식이라고 감옥을 보내든 말든 맘대로 하라고 그랬다더라. 아마 합의금 받기도 쉽지 않을 것 같다고 그러던데.”
박승환이 말했다.
“맞냐? 그 자식?”
어느새 깬 박찬희가 부스스한 눈을 비비며 물었다. 이중훈도 눈은 감고 있지만 자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어떻게 할까? 말을 할까?
보아하니 사람을 동원한 거나, 자수할 범인까지 만들어 놓은 것으로 봐서는 사전에 제대로 준비를 했다는 말일 것이다.
하긴, 그렇지 않고서야, 그렇게 당당하게 정체를 드러내고, 일사천리로 자수를 시켰을 리가 없지.
저 녀석들에게 말해야 할까?
괜한 걱정거리를, 분노 거리를 안겨주는 것은 아닐까? 그런 걱정이 들었다.
그러다 문득 누군가 떠올랐다.
말을 하긴 해야겠구나.
저 녀석들이 알아야 할 이유가 있다.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언제 다 깨어났는지, 네 녀석들이 나를 보고 있었다. 어울리지 않게 진지한 눈빛으로.
“아니야. 그 자식. 가출 청소년 아니야.”
내가 말했다.
“그래. 그럴 것 같았어. 누구냐.”
이중훈이 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촬범.”
내가 말했다.
“……확실해?”
박찬희가 물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군.”
김창회가 그렇게 말하고 몸을 일으켰고, 나머지 녀석들도 같이 소파에서 일어났다.
“우선 잘 치료하고 있어라. 우리가 뭔가 방법을 찾아볼 테니까.”
이중훈이 단호한 얼굴로 그렇게 말하며 문을 향해 몸을 돌렸다.
으이구. 저 무식한 놈들. 내 그럴 줄 알았다.
니들이 가서 어쩔 건데.
“기다려봐.”
녀석들의 눈이 나를 향한다.
나는 저 녀석들에게 도촬범의 정체를 밝힌 알려준 이유를 말해주었다.
“지연이.”
녀석들의 눈이 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