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 금요일 밤의 광기 (1)
좋아. 오늘 수업 다 끝났쓰!
단순한 수업 끝이 아니다. 금요일 마지막 수업이 끝난 것이다.
그렇다.
오늘은 바로 금요일. 불타는 금요일! aka 불! 금!
나는 가방을 챙겼다.
불금 저녁에는?
집으로 가야지.
금요일 밤만 되면, 약 기운 떨어진 약쟁이처럼 안절부절못하던 시기가 있었더랬다. 금요일은 놀아야 한다. 밖에서 놀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하던 시기가 있었더랬다.
찌개에 소주, 치킨에 소주, 떡볶이에 소주, 탕수육에 소주. 그렇게 자정까지 4차를 달리고, 노래방에서 두어 시간 땀 빼준 다음, 겜방에서 해 뜰 때까지 달리던 시기가 있었다.
으. 그때 생각하니 몸서리쳐진다. 뇌가 알코올에 잠길때까지 술 쳐먹고 FPS라니….
뭐 아무튼 그러다가 여자 친구, 지수 만나고 나서부터는 금요일 밤에는 데이트를 했지.
참 여기저기 많이 쏘다니고 다녔다. 남산, 이태원, 홍대, 을지로, 동대문시장, 건대입구, 강남역, 잠실, 석촌호수….
젠장. 망할놈의 석촌호수.
밤 11시에 석촌호수는 특별했다. 가로등이 수면에 반사되어 만들어지는 빛기둥을 바라보며 지수 손을 잡고 걸었다.
그렇게 힘든 줄도 모르고 호숫가를 걷고 또 걸으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었다.
가족 이야기, 살아온 이야기, 친구 이야기, 취미 이야기.
별 이야기도 아닌데, 그게 뭐가 그리 재미있는 이야기라고, 지치는 줄도 모르고, 그렇게 돌아다녔을까?
그 녀석이랑 헤어진 후 석촌호수는 한 번도 안 갔었더랬다. 석촌호수는커녕 송파 쪽으로는 한 번도 안 갔다. TV 보다가 롯데월드나 석촌호수 나오면 막 가슴 아프고 그랬는데.
진짜 찌질했구나. 나도.
잠깐만. 생각해보니, 석촌호수 얼마 전에 다녀왔네?
서현 님이랑 가서 밥 먹고 커피 마셨네? 그때 지수 생각 하나도 안 했네? 하나도 안 괴로웠네?
역시 사랑은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 것인가.
아무튼, 그렇게 타락한 삶을 살던 내가 요즘은 금요일만 되면 바로 집으로 향한다.
우리 서현 님과 함께 불금을 보내기 위해서.
금요일 스케줄이 어떻게 되냐 하면.
수업이 끝나고 바로 집으로 간다. 그러면 서현 님이 퇴근해서 집에 오는 시간과 딱 맞아떨어진다.
그렇게 만난 우리는 금요일 밤의 만찬을 즐기고, 서울숲을 산책한 다음, 따뜻한 캐모마일 차를 마시며 견과류와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금요일 되시겠다.
지난주에도 그렇게 새벽 2시까지 행복한 시간을 보내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각자의 방으로 돌아가야 했지.
아쉬웠다. 나만 아쉬운 게 아니다. 서현 님도 아쉬워하는 듯 보였다.
방을 합치면 더 오랜 시간 이런저런 이야기를 할 수 있지 않을까?
방을 합치면?
후후후. 우선 좀 앉아야겠군. 걸을 수가 없군. 조금만 쉬면서 마음을 진정시켜야겠군.
생활의 소소한 팁 중에 발…. 미니미가 존재감을 드러내면 팔뚝을 문지르라고 하더라. 팔뚝을 문지르면 그쪽으로 피가 몰려서 발… 미니미가 다시 잠든다고 하던데. 나는 팔뚝을 아무리 문질러도 소용이 없네.
대단하다. 내 부교감신경. 장하다! 내 미니미!
그렇게 열심히 팔뚝을 문지르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날카로운 외침 소리.
“너 이 자식아! 왜 전화 안 받아!”
내가 고개를 돌리기도 전에 박찬희가 내 옆에 턱 하니 앉는다.
“그래, 이 자식아. 이렇게 직접 체포하러 와야겠냐.”
반대편에는 이중훈이.
“팔뚝은 왜 문지르고 있냐?”
이건 등 뒤에서 나타난 이중훈이.
전화?
맞다. 수업 듣는다고 무음으로 해놨지?
나는 그제야 전화기를 꺼내 확인해보았다.
부재중 전화 22통.
스물두 통?
박찬희, 이중훈, 김창회, 김창회, 이중훈, 박승환, 이중훈, 박찬희, 김창회, 김창회, 김창회, 김창회, 김창회…….
그렇게 통화목록을 확인하는데 갑자기 그림자가 진다.
고개를 드니, 팔짱을 낀 김창회가 날 내려다보고 있다.
볼 때마다 신기하단 말이지. 저 두꺼운 팔뚝으로 어떻게 팔짱을 낄 수 있는지.
아무튼, 신기한 건 신기한 거고, 일단 중요한 것은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자. 당황하지 말고.
나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김창회의 어깨를 작게 두어 번 두드려 준 다음 내가 낼 수 있는 가장 평온한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하다. 수업 듣는다고 무음으로 해놔서. 암튼 나중에 통화하자. 내가 전화할….”
나는 말을 끝낼 수 없었다. 김창회의 팔이 내 목을 감았으니까.
숨! 숨! 이 자식아! 수움!
“어허. 어딜 가시려고. 약속 있으신가, 친구?”
박찬희가 비열한 미소를 띠며 다가온다.
숨! 말을 하려면 적어도 호흡은 하게 만들어줘야지!
나는 혼신의 힘을 다해서 김창회의 팔과 목 사이에 틈을 만들어냈다.
“야… 약속… 있, 커헙.”
그리고 겨우 기어 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허허. 이 친구 보게. 전화도 안 받더니, 이제 우리랑 말도 하기 싫다 이건가. 이거 너무 섭섭한데. 너무 섭섭해서 화가 날 정도야.”
박찬희가 목을 좌우로 뚝뚝 소리가 나게 꺾으면서 다가온다.
이 자식아! 말을 하기 싫은 게 아니고, 말을 못 하는 거잖아!
나는 두 손으로 내 목을 감고 있는 창회의 팔을 떼어냈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떼어낸 것이 아니라 창회 녀석이 풀어준 거다.
“하아. 하아. 하아.”
나는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숨을 진정시킨 후에 녀석들을 노려보며 말했다.
“원하는 게 뭐냐.”
“술.”
박찬희가 말했다.
술?
“뭐?”
“술 먹어야지. 금요일인데.”
박찬희가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표정으로 말한다.
“오늘 이중훈이가 우울하단다. 그러니 친구 된 도리로서 술 한잔 먹어줘야 하지 않겠냐. 특히 너는 오늘 술값도 내야 하고.”
“내가 왜!”
술을 같이 먹는 건 둘째치고, 왜 내가 술값을 내줘야 하는데.
내 항변에 모두의 눈빛이 바뀐다.
뭐… 뭐야. 갑자기 무섭게 왜… 왜 그래.
“네놈이… 정녕 죄를 모른단 말이냐,”
바뀐다. 분위기가 다시 사또 모드로 바뀌려 한다.
안 돼. 그것만은 막아야 한다. 사또 모드로, 또는 재판장 모드로 분위기가 바뀌면 그때는 흐름을 막을 수 없다.
“…지연이?”
내가 말했다.
이중훈의 눈빛이 바뀐다. 눈동자에 분노가 서린다.
“너… 이 자식. 정말 피도 눈물도 없는 놈이었구나.”
박찬희가 날 노려보며 씹어 삼키듯 말한다.
박승환은 이중훈에게 다가가 등을 토닥토닥 두드려 준다.
나는 안다. 박승환의 저 토닥임은 진정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라 부추기기 위한 것이다.
내 생각을 증명하듯 박승환의 입이 열린다.
“간악하고 음란한 너 한수, 줄여서 간음 한수는 아직 꽃다운 청춘의 스무 살 소녀의 마음을 유린했다.”
안 했어! 그런 거!
“그걸로도 모자라 친구라고 부르던 한 남자의 순정을 짓밟았다. 그리고 그 위에 침을 뱉었다!”
나는 아무런 대답하지 않았다. 분위기가 여기까지 흘렀다면 이제 더 이상 평화적인 해결방법은 없다고 봐야 한다.
평화적인 해결방법이 없을 때는? 강행돌파가 유일한 방법이다.
자. 눈앞에 세 명, 등 뒤에 괴물 하나.
일단 뒷발 차기로 김창회의 허벅지를 찬다.
물론 알고 있다. 돌을 넘어 쇠 같은 김창회 놈의 허벅지를 어설프게 차봤자 대미지는 들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하지만 내가 원하는 것은 김창회의 무력화가 아니다. 애초에, 김창회 저 자식은 무력화가 불가능하다.
원하는 것은 추진력이다. 내가 창회의 허벅지를 차려는 건 추진력을 얻기 위함이다.
뒷발로 창회의 허벅지를 차고 그 반탄력을 추진력 삼아 몸을 앞으로 날린다.
우선 박찬희부터. 너 오늘 좀 거슬려.
왼 주먹으로 박찬희의 명치에 한 방을 먹이고, 거의 동시에 오른 주먹을 박승환에게 날린다.
박승환은 피할 것이다. 은근히 운동신경이 좋은 자식이니까.
하지만 주먹은 페이크.
그저 시선을 끌기 위한 방편일 뿐. 박승환이 내 오른손에 집중하고 있을 때, 사각에서 나의 오른발이 날아갈 것이다.
어떻게? 발끝을 세워서.
이중훈은?
냅둔다. 이중훈까지 제압하려 했다가는 등 뒤에 괴물에게 잡아먹히고 말 것이다.
작은 구멍, 작전상 후퇴할 수 있는 작은 틈만 만들면 된다.
그 틈으로 전력 질주, 이놈들은 나를 따라잡지 못할 것이다.
이 자식들은 그저 술이 먹고 싶을 뿐이다. 그래서 핑계를 찾은 거고. 마침 이중훈이 건도 있겠다. 나를 제물로 삼아 오늘 횃불을 올리고 이교도의 피비린내 가득한 축제를 열고 싶은 것이다.
후후후.
이 자식들아. 서현 님에게 나아가는 나를 막으려는 잡몹들 같구나.
그렇게 결심한 나는 재빨리 뒷발을 날렸다.
그리고 반탄력으로…. 어? 어?
분명 창회의 허벅지에 닿았어야 할 내 발이 허공을 갈랐다.
그리고 그 반동으로 내 몸이 앞으로 쏠렸다.
시간이 느려진다. 내가 능력을 쓴 것도 아닌데, 쓸 능력도 없는데, 시간이 느려진다.
이건 말로만 듣던 위기상황에서의 신경 가속?
내 몸은 천천히 앞으로 고꾸라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그대로 바닥에 얼굴을 갈 수밖에 없…는데.
탁.
누군가 내 몸을 잡아주었다. 넘어져 가는 상체를 누군가가 지탱해 주었다.
“아, 고마….”
그 순간 창회의 팔이 내 목을 감쌌다.
넘어지는 나를 지탱한 창회의 팔이 그대로 들어와 내 목을 감쌌다.
선 상태에서 걸리는 리어 네이키드 초크. 제대로 걸렸다.
이건 절대로 못 푼다.
의식이 점점 멀어졌다.
박찬희의 혀 차는 소리가 점점 멀어져 가는 의식을 파고들었다.
“쯧쯧쯧. 어찌 예상과 한 치도 어긋나질 않는구나.”
나는 의식이 끊겼다.
***
“형님! 여기 모둠 하나 추가요!”
박찬희가 호기롭게 외치자, 주방에서 우렁찬 오케이~ 소리가 들려온다.
나는 결국 이 악마 같은 놈들에 의해서 한때 우리의 아지트이자, 나의 단골이었던 정육식당에 끌려온 것이다.
“어쩐 일들이야. 오랜만에 와서 소고기로만 달리고 있고. 뭐 좋은 일 있나 봐.”
정육식당 사장 형님이 붉은 고기가 든 쟁반을 들고나오면서 껄껄껄 하고 웃는다.
매출 올라가니 행복하십니까, 형님!
“형님. 우둔살도 두 근 주세요.”
단백질 중독자 김창회는 특별 주문하고 있네.
“그럼. 우둔살이 소고기의 정수지. 오늘 서비스 팍팍 해주지. 뭐 해줄까? 특제 찌개 끓여줄까?”
“형님. 찌개 필요 없어요. 저희 밥도 필요 없어요.”
박승환이 말했다.
“아니. 왜?”
“그런 거 집어넣을 공간 있으면 거기에 고기를 넣겠습니다.”
박승환이 그렇게 말하자 사장 형님이 또 껄껄껄 웃으며 박승환 이놈의 등을 팡팡 내려친다.
“누가 복권이라도 당첨된 거냐? 좋아. 내가 특등품을 마련해주지.”
“형님. 지금 모둠 하나 더 주세요.”
이중훈이 말한다.
이 자식아! 고기 방금 왔어!
나는 그렇게 소리칠까 하다가 한숨을 내쉬고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래. 먹어라. 아주 배 터지도록 먹어라. 먹고 다들 배 터져 죽어버려라.
아니지. 그런 생각하고 있을 때가 아니다. 나도 빨리 먹어야지. 소고긴데. 먹어야지.
근데 설마 이 자식들이 나보고 다 내라고는 안 하겠지? 벌써 모둠이 3개짼데….
그렇게 생각하면서 열심히 젓가락을 놀리고 있는데 주머니에 들어있던 전화기가 요동친다.
부르르르, 부르르르.
응? 뭐지? 모르는 번혼데.
스팸인가? 그냥 수신 거부할까? 지금 고기 먹을 시간도 없는데.
나는 속으로 그렇게 투덜거리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한수 씨 전화 맞나요?
“네. 한수입니다.”
-안녕하세요. 여기는…인데…. 그래서….
뭐야. 잘 안 들리는데?
“야. 조용히들 좀 해봐. 시끄러워서 전화를 못 받겠네.”
내가 고기를 두고 사투를 벌이고 있는 야만인들에게 말했다.
“나가. 나가서 받아. 나가서.”
야만인들은 그렇게 말하고 또 야만의 싸움을 벌이기 시작했다.
-죄송…. 너무 시끄러…. 혹시… 조용한 데로….
“네? 잠시만요, 잠시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경고했다.
“기다려. 다 먹지 마!”
“더 시켜. 한 판, 아니 두 판 더 시켜! 우하하하.”
내 경고를 무시하듯 야만인들은 우가우가 소리를 질러댔다.
전화 받으러 나간 김에 그냥… 튀어버릴까?
나는 그런 강렬한 유혹을 느끼며 식당 밖으로 나갔다.
밖에도 소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금요일 밤의 번화가는 식당 안과 다를 바 없었다.
나는 전화를 받기 위해 식당을 나왔다.
밖에도 소란스럽긴 마찬가지였다. 불타는 금요일 밤의 신림동은 소돔과 고모라를 연상케 하네.
나는 잠시 두리번 거리다가 건물과 건물 사이, 후미진 작은 골목으로 들어갔다.
어디 별 것 아닌 전화기만 해봐라. 능력만 찾으면 복수해 줄 테다.
“아. 여보세요.”
그렇게 말한 그 순간.
명치에 큰 충격이 내리꽂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