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 교수님 친구 제자 (3)
지옥 같은 목요일이 끝나고 신나는 금요일이 찾아왔다.
물론 금요일이라고 해도 수업이 엄청 널널한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공강도 있고, 공강에 밥도 먹을 수 있고, 밥 먹고 커피 마실 수 있는 시간도 있으니, 지옥 같은 목요일에 비하면 금요일은 반 공휴일 같은 느낌이다.
직장인들 월요병을 이겨내려면 일요일에 잔업하라는 개소리를 어디선가 들었는데, 금요일에 이 여유로움을 생각하면 아주 틀린 말은 아닐는지도.
아니지. 그렇게 합리화하면서 자본주의의 노예가 되어가는 거지.
애초에 지옥 같은 목요일을 만든 건 나 아니던가.
아무튼, 나는 그렇게 공강 시간에 밥 먹으러 학생식당으로 가는데, 뒤에서 누군가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린다.
“한수야!”
아, 진짜 이놈의 인기란. 잠시도 쉬지를 못하게 하는구만.
네. 한수입니다. 서현 님 공인 잘생긴 한수입니다. 사인을 원하십니까?
그렇게 생각하며 뒤를 돌아보니 조교 형이었다.
“한수야. 혹시, 잠깐 시간 좀 있니?”
왜 이러지? 왜 자꾸 남자가 꼬이지?
남자에게 할애할 시간 같은 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싶지만, 일단은 무슨 일인지 들어보까?
“네. 공강이긴 한데….”
“그래? 미안한데. 이거 혹시 유 선생님 연구실에 좀 가져다줄 수 있을까?”
조교 형이 그렇게 말하며 들고 있던 무언가를 보여준다.
책, 논문, 서류철, 우편물이다.
“갑자기 학생지원과에서 연락이 와서, 행정관에 가봐야 되거든.”
유 선생님 연구실 갔다가 행정관 가려면 동선이 꼬이기는 하지.
“네. 제가 전달해 드릴께요. 저 주세요.”
“야. 고맙다. 내가 나중에 밥 한 번 살게. 진짜 고맙다.”
그러면서 형이 나에게 전달할 물건을 넘기고는 재빨리 몸을 돌린다.
그 뒷모습을 보니 알겠다. 저 양반 뭔가 사고쳤구만.
***
나는 조교 형에게 받은 물건을 팔에 끼고 유 선생님 연구실로 갔다.
선생님 이름이 붙어 있는 문 앞에서 잠시 복장 점검을 하고, 가볍게 노크했다.
안에서 들어오라고 유 선생님의 댄디한 목소리가 들려왔고, 나는 조심스럽게 문을 열었다.
그리 크지 않은 연구실, 연구실 크기에 비해 너무나도 많은 장서, 교수 연구실이라기보다는 오래된 고서점이 더 어울릴 것 같은 유 선생님 연구실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유 선생님. 존경해 마지않는 나의 스승 유 선생님이 소파에 앉아 나를 보고 계셨다.
어? 근데 혼자 계신 것이 아니시네?
“한수 군. 어쩐 일인가요?”
유 선생님이 말씀하셨다.
“네? 아. 저기. 이거. 조교 형이 갑자기 행정관에 갈 일이 생겼다고 하면서 저에게 가져다드리라고 하셔서요.”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유 선생님 앞에 앉은 사람을 힐끗 바라보았다.
얼굴 천재 심리학자, 한국대 프린스. 서울대에서 가장 유명한 포닥이자, 심리학과 교수 임용 1순위의 그가 유 선생님 앞에 앉아 있었다.
“아. 그래요? 수고를 끼쳤군요. 고마워요.”
유 선생님은 그렇게 내 노고를 치하하며 물건을 받아 드신다.
오랜만에 연구실 온 김에 차나 한잔 얻어 마실까 했는데, 손님도 계시고 안 되겠다.
재빨리 인사하고 밥이나 먹으러 가려는데, 소파에 앉아 있던 한국대 프린스가 나에게 말을 건넨다.
“안녕하세요. 오늘 또 보네요.”
어제처럼 사람 홀리는 미소로 나에게 인사를 건넨다.
“서로 아는 사이인가요?”
유 선생님이 물으신다.
“아. 어제 제가 신세를 좀 졌습니다.”
프린스가 말한다.
‘어제 커피를 사러 갔는데 카운터에 저 친구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가볍게 인사를 나누었죠.’의 내용을 저렇게 표현한다고?
“그래요? 나는 정 선생이 한수 군하고 아는 사이인 줄은 또 몰랐네요.”
유 선생님이 놀랍다는 얼굴로 우리 둘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본다.
“잘됐네요. 이미 아는 사이라고 하니, 한수 군. 차나 한잔하고 가는 건 어떤가요?”
유 선생님이 그렇게 나에게 앉을 것을 권유했다.
차 얻어 마시는 것은 좋지만…. 좀 부담스러운데.
하지만 당연하게도 나는 거절하지 못하고 소파로 향했다.
***
나는 어색한 미소를 얼굴에 띤 채로 유 선생님이 내려주신 차를 마시고 있다.
프린스 바로 옆에 앉아서.
차를 마시면서 전공이 다른 프린스와 유 선생님이 어떻게 아는 사이인지도 듣게 되었다.
간단히 요약하면 프린스는 학부생일 때부터 전공 교수님들에게 사랑을 듬뿍 받았고, 그래서 전공 교수님들이 내 제자가 어어어어엄청나게 똑똑해요 하고 자랑을 하고 다녔고, 그렇게 자랑을 하던 교수님들 중 한 분이 유 선생님과 오랜 친구였다 이거지.
엄마 친구 아들이 아니라 교수님 친구 제자라고 농담처럼 말했는데, 진짜 교수님 친구 제자였네.
엄친아 아니고 교친제. 뭐 이상하네.
아무튼,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성격도 좋은 프린스가 우리 학교에서 석사에 박사까지 하면서 유 선생님하고 이렇게 저렇게 가까워졌고, 그래서 가끔 식사를 하거나, 가끔 이렇게 차를 마시면서 담소를 나눈다는 그런 이야기를 들었다.
아무튼, 프린스 이 마성의 남자, 우리 유 선생님까지 홀려 버렸구나.
“아무래도 제가 착각을 했나 봅니다. 제 수업 들었던 학생하고.”
어제 나와 있었던 일을 유 선생님에게 설명하던 프린스가 그렇게 정리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아무리 생각해도 프린스와 나 사이에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거든.
“그래도, 오늘 이렇게 선생님 연구실에서 만나게 되니 반갑네요.”
그렇게 말하고는 나를 보며 다시 그 미소를 보여준다.
“한수 후배님하고는 뭔가 인연이 있나 봅니다.”
아다치 선생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셨다.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라고.
어제까지 서로의 존재도 모르던, 아니, 정확히 말하면 나라는 존재에 대해 전혀 알지 못했던 프린스가 오늘은 내 이름까지 알게 되었으니 인연의 시작으로는 딱이다 싶지만….
남자와의 인연이 뭐가 의미가 있단 말인가.
나는 그렇게 생각하며 어색하고 가식적인 미소를 보여줄 뿐이었다.
유 선생님은 흥미롭다는 미소로 우리 두 사람을 보며 말씀하신다.
“여섯 단계만 거치면 지구상 대부분의 사람들은 연결된다는 6단계 법칙이 있지요, 가끔 이런 일을 겪을 때마다 틀린 이론도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이런 작은 우연과 인연이 어찌 보면 살아가는 재미 중 하나겠지요. 아무튼, 이렇게 서로 안면을 익혔으니, 한수 군에게 좋은 길을 열어줄 수 있으면 좋겠군요. 정 선생만큼은 아니겠지만, 미래가 전도유망한 청년입니다.”
“선생님의 제자인데 어련하겠습니까?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후배님.”
프린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나를 바라본다.
“아. 네. 저도 잘 부탁드립니다.”
어색해. 분명 내 얼굴에도 어색함이 드러나 있을 거야.
아. 씨. 대학원 가야 하나? 유 선생님과 한국대 프린스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 나도 나중에 교수가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정치적인 생각을 하면서 나는 찻잔을 들어 어색한 미소를 가려버렸다.
***
“프린스?”
박찬희가 말했다.
나는 대답 대신 맞은편에 앉아 있는 그 자식을 노려보았다.
“다 씹고 말해라.”
내가 말했다.
박찬희는 그제야 입안에 있는 음식을 열심히 씹는다.
나는 학생식당에 있었다.
유 선생님 방에서 어색한 미소를 지은 채 프린스와 티타임을 가지는 데 생각 외로 많은 시간이 소요되었고, 다음 수업까지 그리 많은 시간이 남아있지 않았다.
그래서 재빨리 학생식당으로 달려왔는데, 운 없게도 식당 입구에서 박찬희를 비롯한 한국대 악마 놈들을 만나버린 것이다. 정확히 말하면 박찬희, 이중훈, 김창회 그리고 악마에게 사로잡힌 불쌍한 영혼 지연이.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국대 네 악마 중 대악마인 박승환이 없다는 거.
마음 같아서는 지연이만 빼고 쌩까버리고 싶었지만, 그래도 유교 탈레반 할아버지 밑에서 자란 내가 아무리 소인배들을 만났다고 소인배같이 굴 수는 없는 법 아니던가.
그래서 지금 마주 앉아 밥을 먹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소인배라도 품을 수 있는 하해와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는 나라고 해도, 입안에 음식이 있는 상태에서 음식을 튀기며 말하는 건 못 참지.
“너 집에서 입에 음식 있는 상태에서 말하지 말라. 그런 거 안 배웠냐?”
음식을 꿀떡 삼킨 다음에야 박찬희가 말한다.
“우리 집안은 항상 식사 시간에 대화를 나누는 화목한 가풍을 가지고 있지.”
웃기네. 식사 시간에 대화도 음식 다 씹고 하는 거지.
이놈을 고향으로 한번 끌고 가야 되겠어. 할아버지 앞에서 식사에는 화목한 대화가 필요하죠 하면서 저 짓을 하다가 싸커킥을 한 방 제대로 맞으면 바로 두 번 밥 먹을 때, 입을 열지 않겠지.
“아무튼, 그래서? 프린스가 유 선생님 방에 있었다고?”
“어. 선생님 친구분 제자라서 프린스가 학부생 때부터 알고 있었데.”
“집에서는 엄마 친구 아들, 학교에서는 교수님 친구 제자인가. 교친제, 교친제. 입에 안 붙는데.”
이중훈이 나랑 똑같은 소리를 했다. 저 자식이랑 같은 수준이라는 것이 어쩐지 수치스럽다.
“아무튼, 그래서 프린스를 알현하고, 티타임을 즐기고 왔다? 뭐라시디? 프린스께서?”
“뭐, 특별한 건 없었지. 아니, 사실 유 선생님이랑 두 사람이 이야기할 때, 난 옆에서 그냥 웃고만 있었지. 나에게 한 말은 이렇게 인연이 되었으니, 앞으로 잘 지내보자. 뭐 그런 이야기 정도.”
내 말에 박찬희가 뭔가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이 자식 또 어제 그 더러운 개드립을 이어가지 않을까 생각했는데, 갑자기 저런 표정을 하고 있다.
“빈말이군.”
김창회가 말했다.
“빈말이지. 그게 아니라면 나쁜 마음을 품었거나.”
이건 이중훈.
“나쁜 마음이요? 어떤 나쁜 마음이요?”
이건 지연이의 질문.
“프린스께서 한수같이 천한 것에게 호의를 보인다면, 그건 둘 중에 하나지. 먼저 마음을 빼앗고, 그다음에는 모든 것을 가져가시겠지.”
박찬희의 말에 지연이가 수긍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지연아. 네가 그러면 안 되지.
“아무튼, 한수 너 너무 기대하지 마라. 나도 프린스 옆에서 깔짝대면 계급이 올라갈 거야. 그런 생각하지 마라. 그럴수록 너만 비참해지는 거야. 경계해! 이유 없는 호의는 경계 하라고 초등학교 때 담임샘이 안 가르쳐줬냐?”
“친구를 가려 사귀라는 말은 들었지. 뭐 그냥 어쩌다 인사 한 번 한 거야, 내가 그 사람하고 몇 번이나 더 보겠어? 그리고 또 앞으로 몇 번 더 본다고 해서 뭐 별일 있겠냐? 그리고 조만간 한국대 교수님이 되실 분이 날 어떻게 이용해 드시는데? 뭐 보증을 서달라고 하겠어? 아니면 새로운 신개념 네트워크 마케팅을 소개해주겠어!”
내가 말했다.
사실 그렇지. 뭐, 우연히 초 유명인을 이틀 연속으로 만났지만, 내가 앞으로 저 양반을 볼 일이 얼마나 있겠어? TV에서나 보겠지.
무슨 싸구려 로맨스 소설의 여주인공도 아니고, 그렇게 두 번 만났다고, 우리 인연의 시작은 그날이었다. 그렇게 되겠냐고.
아니, 설사 또 본다고 해서 뭐 특별한 뭐가 있겠냐고. 기껏해야 선배-후배지. 아니. 내가 졸업하기 전에 프린스가 교수님이 되시면 선후배 관계라고 하기도 애매해지는구나.
아무튼 내가 뭐 뜯어 먹힐 게 있어야 경계를 하지.
아니, 그리고 뜯어 먹힐 게 있다고 하더라도, 프린세스라면 모를까, 프린스에게 내 재산도, 마음도 빼앗길 일이 없다. 절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