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62화 (62/271)

62 : 교수님 친구 제자 (2)

평화롭다.

나는 매장 안을 바라보면서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매장의 상황은 내가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인 모습을 하고 있다.

마감까지 남은 시간은 30분, 매장 안에는 세 팀의 손님. 서로에게 방해가 되지 않도록 나직하게 속삭이는 손님들의 대화가 늦은 밤에 어울리는 카페 음악과 조화를 이룬다.

단지, 마감 시간이 가까워서 그런 것만은 아니었다.

오늘은 전체적으로 손님이 적었다. 손님도 적었고, 다들 젠틀했다.

가끔 이런 날이 있다.

카페에서 주인마님 대접을 받으려는, 알바를 지들이 부리는 머슴쯤으로 생각하는 진상들을 향한 미움이 마음 한편에서 차곡차곡 쌓이고, 딱딱해져 갈 때, 그런 응어리를 부드럽게 풀어주는 선물 같은 날들이 있다.

나중에 카페나 차려볼까?

유동인구 많지 않은 데, 물론 사람 아예 안 다니는 곳은 안 되고, 적당한 그런 곳에 적당히 인테리어 해서 카페를 차리는 거지. 그리고 착하고 예쁜 알바생을 고용하는 거다.

착하고 예쁜 알바생이라고 하니, 머릿속에 유지연이 뿅 하고 떠오른다.

뭐, 당연한 이야기다. 예쁘고, 착하지. 그 녀석.

아니지. 지연이 같은 알바는 피해야 한다.

예쁘고 착한 우리 지연이가 앞치마 예쁘게 차려입고, 안녕하세요. 고객님.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며 싱긋하고 웃으면, 반경 5km 이내의 미친놈 전부가 알바생 어떻게 한번 꼬셔보겠다고 다 몰려들 거다.

그러면 창회 같은?

그 자식에게 바리스타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그 녀석에게 어울리는 단오는 ‘기도’지, 이태원이나 강남 클럽 말로, 쩌어기 어디 지방 도시 역전 성인나이트 기도가 딱이지.

그런 망상을 하고 있는데, 같이 알바하는 병진이 형이 말을 걸어온다.

“오늘 개꿀 빨았다. 항상 오늘 같으면 좋겠다.”

병진이 형도 나와 같은 생각인가 보다.

내가 막 고개를 끄덕이려는데!

내 시야에 웃으며 다가오는 점장 누나가 보인다.

다른 사람들은 모를 테지만, 나는 잘 알고 있다.

절대로 저 예쁜 미소에 방심하면 안 된다. 조곤조곤 말로써 사람을 난자할 때 보여주는 웃음이니까.

“나도 항상 이렇게 조용했으면 참 좋겠당.”

점장 누나가 말한다.

좋겠당.

애교 있는 말투지? 하지만 진짜로 그 말에 애교가 담겨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물론 병진이 형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고, 등 뒤에서 들려온 점장 누나의 ~당을 듣는 순간 흠칫한다.

“나야 이렇게 조용하고 아늑한 분위기에서 우리 병진이와 한수와 이렇게 여유 있게 하하 호호 웃으면서 오랫동안 함께 일하고 싶은데, 그렇게 안 될까 봐 걱정이당. 손님이 줄어들면 매출도 줄어들고, 매출이 줄어들면 본사에는 점장인 나를 호출하겠지?”

다행이라면 점장 누나의 시선이 병진이 형을 향해있다는 거다.

역시. 사람은 말조심을 해야 해.

“본사에서는 나에게 뭐라고 막 그럴 거야. 매출 안 나온다고. 그러면 나는 울면서 돌아와 생각해볼 거야. 어떻게 하지? 손님을 억지로 끌어올 수는 없고, 어떻게 손해를 줄이지? 건물주님에게 월세를 깎아달라고 해볼까? 아니면 본사에 재료비를 할인해달라고 해볼까? 안 될 텐데. 안 될 거야. 그러면 남은 방법은 결국 인건비뿐인 걸까?”

“…죄송합니다. 제가 생각이 짧았습니다.”

병진이 형이 재빨리 납작 엎드린다.

그래. 잘했어. 자고로 불리할 때는 재빨리 엎드리는 게 최고야.

자. 이렇게 상황이 마무리되어가는구나… 싶었는데, 점장 누나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한다.

응? 왜지?

나 고개 안 끄덕였는데, 조용히 입 다물고 있었는데? 잘못한 거 없는데?

그렇게 생각하는데, 점장 누나가 말한다.

“우리 한수는 일할 때는 참 성실한데에.”

아. 뭔지 알겠다.

오늘 늦었지.

한국대 프린스 촬영하는 거 구경하다가 악마들에게 둘러싸이고, 그 악마들하고 쓰잘데기 없는 이야기를 하다가 결국 알바 시간에 늦어버렸지.

마침 내가 도착했을 때, 점장 누나가 손님을 상대하느라 타이밍 좋게 넘어가나 했는데, 그 이야기가 지금 나오는구나.

“그런데 한수는 가끔 보면….”

그렇게 누나의 공격이 막 시작되려는데, 타이밍 좋게 손님이 들어온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성심성의를 다해 모시겠습니다.

나는 재빨리 계산대로 향했다.

전투의 기본 1장. 유리한 고지를 점령해 지리적 이점을 선점하라!

“주문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손님을 쳐다봤는데!

아는 사람이다.

정확히 말하면 내 쪽에서만 아는 사람이다.

어? 이 사람이 여긴 왜 왔지?

몇 시간 전, 학교에서 보았던 한국대의 얼굴 천재 심리학 박사이시며. 베스트셀러 작가님이시자 한국대에서 가장 유명한 슈퍼스타 포닥.

한국대 프린스 정지수가 내 앞에 서 있었다.

***

“안녕하세요. 아이스라테, 벤티 사이즈에 샷 추가 부탁드립니다.”

한국대 프린스가 상큼한 미소와 함께 그렇게 주문한다.

참나. 이 양반, 가까이서 보니까 진짜 잘생겼네. 얼굴에서 빛이 나네.

“여기에 부탁드립니다.”

그러면서 텀블러를 턱 하니 올려놓고는 다시 상큼한 미소로 말한다.

“아. 세척할 필요는 없습니다.”

부처님이다. 등 뒤에 광배가 빛난다.

환경보호 한다면서 텀블러를 들고 다니는 손님들이 계신다.

뭐 좋다 이거야. 환경보호 나도 찬성. 찬성인데, 아니 왜 텀블러를 커피집에서 세척해 달라고 하는 건데.

바쁠 때, 손님 많을 때, 계산하면서 커피 내리고, 테이블 청소하면서 동시에 싱크대에 컵이 차곡차곡 쌓이는 설거지옥이 열릴 때.

텀블러 세척해 달라고 하면 뭔가 모르게 서글픈 마음이 든다, 내가 그래도 할아버지에게는 귀한 손자인데…. 귀한 손자일까?

아무튼, 내가 무슨 소공녀도 아니고, 그렇게 남들 텀블러까지 닦아줘야 하냐는 서러움이 폭발한다.

근데, 눈앞에 있는 이 한국대 프린스는 그런 알바의 서러움을 알고 있기라도 하다는 듯, 깨끗하게 세척된 텀블러를 턱 하니 꺼내놓는다.

“저기 죄송합니다. 저희 영업이 30분 후에 끝이 나는데, 괜찮으신지요?”

어느새 계산대로 접근한 병진이 형이 프린스에게 묻는다.

이 양반도 점장 누나의 갈굼을 피해 여기로, 손님의 그늘로 도망쳐온 것이겠지.

“네. 가지고 나갈 겁니다.”

프린스의 명쾌한 해답.

깔끔한 주문, 깨끗한 텀블러, 그리고 테이크어웨이.

완벽한 손님이다.

역시 인기 있는 사람은 다 이유가 있는 법이다.

“감사합니다. 금방 준비해드리겠습니다.”

그렇게 결제가 끝나자, 병진이 형이 재빨리 커피를 만들러 간다.

그래요. 열심히 삽시다.

그렇게 잠시 카운터를 사이에 두고, 어색하게 서 있는데, 갑자기 프린스가 물어온다.

“혹시, 우리 학교 학생 아닌가요?”

응?

“네?”

“혹시 우리 학교에서 보지 않았나요?”

프린스가 다시 물어온다.

이거 뭐지? 작업인가? 이렇게 작업을 걸어오는 건가?

“네. 맞습니다. 저도 한국대….”

그렇게 대답하면서 빠르게 기억을 뒤집어본다.

내가 이 사람을 만난 적 있었나?

물론 나는 상대방을 알고 있다. 한국대 프린스 아니던가.

하지만 프린스가 날 어떻게 알고 있지? 내가 강의를 들어 본 적도 없는데.

프린스는 아직 교수 임용을 받지는 못했지만, 강의는 하고 있다. 심리학 전공과목이야 내가 들을 일이 없지만, 교양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하지만 프린스가 강의하는 교양 강좌는 수강신청과 동시에 마감되는 초 인기수업 아니던가.

애초에 나는 시도해본 적도 없는데.

“우리가 어디서 만난 적 있나요?”

프린스가 물어본다.

“저는 딱히 기억이….”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이 프린스와 발생한 이벤트가 없다.

길 가다 우연히 마주쳤는데, 그때 본 얼굴을 기억한다?

말도 안 된다. 우리 학교에 학생이 몇 명인데, 학생 말고 관계자와 외부인까지 감안하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그런가요? 아무튼, 반갑네요.”

필살기.

프린스가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저 얼굴에 저 미소를 띠고 저 목소리로 저렇게 말하면 넘어가지 않을 사람이 없겠다.

프린스 님께서 필살기를 시전 하셨습니다!

설마, 내 안에 꼭꼭 감추어져 있던… 성 정체성이?

아니다.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나는 다양성을 존중하고, 그런 관점에서 동성애도 하나의 사랑이라고 생각은 하지만, 나는 아니야! 여자가 좋아!

아무튼 프린스는 그 이후 별말 없이 준비된 커피를 받아서 다시 그 멋진 미소로 인사를 하고는 매장 밖으로 나가버렸다.

“야. 한수야. 저 사람, 그 사람 아냐? 니네 학교 그 프린스?”

병진이 형이 내 옆에 다가와 묻는데, 나는 성의 없이 고개만 끄덕거리며 그가 사라진 문을 바라만 보고 있을 뿐이었다.

***

나는 서현 님과 차를 마시고 있다.

마감에 청소까지 끝낸 나는 치맥이나 하자는 점장 누나의 권유를 뿌리치고 집으로 와버렸다.

미안하기는 하지만 서현 님이랑 차 마시는 게 더 좋거든. 그리고 사실 병진이 형이 얼른 꺼지라고 눈빛으로 막 쐈다니까요.

아무튼 그렇게 서현 님과 차 한 잔을 앞에 두고, 오늘 하루 있었던 서로의 일상을 이야기하다 한국대 프린스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그분, 저도 알아요. 한동안 인터넷에서 떠들썩했으니까요. 잘생겼다고.”

캐모마일 차가 담긴 찻잔을 들고 있는 서현 님이 말씀하신다.

“뭐, 가까이서 보니까, 잘생기긴 했더라고요. 어디서 만난 적 없냐고 그렇게 말하면서 웃는데, 필살기다. 웬만한 사람이면 넘어가겠다. 그런 생각 들더라고요.”

내 말에 서현 님의 눈이 반달 모양으로 변한다.

“한수 씨, 혹시, 그런 쪽에도 관심이….”

아니. 오늘 왜 이러지? 오늘 무슨 날이야? 서현 님까지 왜 이러시는지.

“아니. 아니요. 무슨 그런 말씀을!”

“미안해요. 농담이었어요.”

내 격렬한 반응에 서현 님이 작게 미소를 짓는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서현 님은 그런 농담 하지 마세요. 참나. 사람 섭섭하게.

아무튼 그건 그거고, 농담의 내용은 불쾌했지만, 서현 님이 농담을 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기분 나쁘지 않았다.

왜냐고? 그만큼 우리 사이가 더 가까워졌다는 증거 아니겠는가?

사실, 서현 님과 내가 꾸준하게 사이를 좁혀오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서현 님에게는 작은 어르신인 나를 ‘모신다’는 기조가 저변에 깔려있었고, 그런 기조는 일종의 거리감을 형성하고 있었다.

뭐, 그렇잖아. 가까운 사람일수록 서로에게 편하게 다가와야 하는데, 어떤 관계의 특수성 때문에 거리가 유지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잖아?

그런데 요 며칠 사이에 서현 님이 한 발 더 가까워진 느낌이 든다.

생각해보건대, 그날, 내가 할아버지에게 능력을 회수당하고 와서 몸살 걸려 엄청 아플 때, 서현 님이 간호해주시던 그날이 변곡점이 된 것이다.

그날, 서현 님은 할아버지에게 섭섭함을 느낀다고 했다.

뭐랄까, 저기 저 위쪽에, 백두혈통을 맹목적으로 충성하는 인민들처럼 할아버지에게 충성, 충성, 충성하는 강 회장님이라면 그런 말씀을 안 하셨겠지?

하지만 서현 님은 할아버지에게 섭섭한 마음을 드러냈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그런 서현 님의 마음에서, 나는 서현 님이 내 곁에 있는 것이 단순한 의무 때문이 아니라, 정말 본인이 원해서 그러는 것이 아닐까 하는 그런 희망을 갖게 되었다.

할아버지가 진짜 그렇게 말했는지 모르겠지만, 강 회장님이 서현 님에게 말한 것처럼 할아버지가 우리 가문을 보필하는 사람들이 생각 없이 따르는 대신 생각하고 고민하는 존재가 되길 원한다면, 그런 관점에서 본다면, 서현 님이 그날 나에게 드러낸 생각은 할아버지의 말에 부합하는 것이 아닐까?

뭐, 아무튼 농담의 내용은 아주 별로였지만, 서현 님께서 농담을 건넸다는 사실이 중요하지. 그렇지.

“근데, 그분이 한수 씨를 어떻게 알고 있을까요?”

서현 님이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며 물어보신다.

“아니, 근데 뭐 절 알고 있다기보다는 그냥 어디선가 봤다는 정도의 느낌이랄까요? 뭐, 누군가랑 혼동했겠죠. 그분 수업에 학생들 항상 꽉꽉 차는데, 그때 저랑 비슷하게 생긴 학생이 있지 않았을까요? 아니면 저의 잘생긴 얼굴을 보고서 라이벌로서의 경계심이 생겼을지도 모르죠. 후후후.”

내가 그렇게 농담으로 말을 마무리했다.

농담은 중요하지. 우리 사이에 농담이 쌓일수록, 우리는 점점 더 가까워질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지만, 후회가 들었다. 너무 나갔어. 너무 개드립이야.

하지만 개드립에 대한 서현 님의 반응은 내 예상과는 달랐다.

“그럴 수도 있겠네요. 그분이 본능적으로 경계를 했을지도.”

진지한 얼굴로 그렇게 말씀하신다.

응? 뒤에는 개드립이었는데요? 받아쳐야 하는 타이밍인데요?

그런 진지한 표정으로 받으시면 민망해지는데요?

내 마음을 읽었는지, 서현 님이 말씀하신다.

“개인적으로 저는 사람의 외모를 평가하는 것을 그리 좋아하지는 않아요. 솔직히 말씀드리면, 외모를 평가하고, 거기에 가치를 두는 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저는 누군가에게 잘생겼다거나 예쁘다는 말을 거의 해본 적 없어요.”

서현 님께서 내 눈을 똑바로 바라보면서.

“하지만 한수 씨는 잘생겼어요.”

그렇게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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