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 : 교수님 친구 제자 (1)
시간은 어찌 이리도 빨리 흘러가는가.
또 한 주가 후딱 지나 목요일이 찾아왔다.
목요일. 나무의 날, 토르의 날, 유피테르의 날.
월요일을 기준으로 한 주에 네 번째 되는 날.
나는 목요일이 제일 싫다.
왜냐고?
목요일에 수업이 잔뜩 몰려 있으니까.
연강, 그냥 연강도 아니고 밥 먹을 시간도 없을 정도로 지독한 폭풍연강.
뭐 누구 탓할 수도 없다. 이게 다 내 잘못이다. 수강신청을 거지같이 한 내 잘못이다.
뭐, 핑계를 대자면 학기 초에 신지수랑 깨지고, 멘탈 제대로 나간 상태에서, 씨바 인생 뭐 그까이 꺼 다 부질없어. 될 대로 되라는 식으로 수강신청을 대충 했더니 목요일에 지옥의 연강 퍼레이드가 펼쳐져 버린 것이다.
아니, 단순히 목요일에 연강으로만 끝나면 다행인데, 문제는 목요일이 또 알바하는 날이다. 한마디로 정신적으로 체력적으로 아주 죽어난다는 말이다.
뭐 한때는 이 고통스러운 일정에 위로를 받던 시기도 있었다. 다른 생각할 필요 없이 몸을 괴롭혀 정신적으로 덜 고통스럽다고 할까?
지금은 괜찮은데, 나 요즘 행복하고 좋은데, 육체적으로 고통받을 필요 없는데.
알바 이야기가 나와서 말인데, 나는 일주일에 두 번, 화요일과 목요일 오후에 커피집에서 알바를 한다. 처음에는 화, 목, 토 이렇게 주 3일 했었는데, 신지수랑 사귀게 되면서 주말에 데이트한다고 토요일은 또 빼버렸지.
용돈의 3분의 1이 날아갔지만, 그때야 뭐 토요일에 여자 친구와 함께 있는 게 중요했지, 그깟 돈이야.
그랬는데 신지수랑 헤어지면서 토요일에는 아무런 할 일 없는 잉여가 되었고, 용돈은 그대로 줄어든 상태고. 내가 그만두자마자 새로 뽑은 주말 알바는 하필 또 겁나 잘생긴 놈이어서 그놈 보겠다고 손님이 늘어나고, 덩달아 매출도 늘어나서 내가 끼어들 틈이 없네.
아니, 사실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닌데. 내 입으로 할 말은 아니지만, 내가 그래도 일도 성실하게 하고, 성격도 좋아서, 점장 누나가 날 예쁘게 본다 이거지.
점장 누님. 토요일에도 일하고 싶어요. 요즘 생활이 어려워서 흑흑.
그렇게 말하면, 우리 예쁜 점장 누님이 어떻게든 스케줄을 만들어 주기는 할 것도 같은데.
하지만, 뭐랄까. 쪽팔리잖아. 가오가 안 살잖아.
펑크가 나서 ‘한수야! 도와줘!’ 그러면 모를까,
그리고 사실 이건 뭐 남들에게 할 이야기는 아니지만, 솔직히 나 토요일까지 알바 안 해도 괜찮잖아.
지갑에는 한도 3천만 원짜리 신용카드가 꼽혀있다. 뭐 물론 아직까지 사용해본 적은 없지만.
그리고 생활비라는 것도 들어갈 돈이 없잖아. 내가 뭐 월세를 내나, 관리비를 내나.
서현 님이 밥 먹여주시지, 옷도 사다 주시지, 밖에서 밥 사 먹고 가끔 커피 마시고, 애들이랑 맥주 한잔하고 그러는 거면, 일주일에 두 번 알바하는 것만으로도 내 용돈 정도는 충당이 된다.
사실 내가 딱 얼굴에 철판 깔고, 중앙그룹은 내 거니까, 그 돈도 내 것이렷다. 그러면서 응? 막 돈도 막 쓰고, 카드도 막 긁고 그러면, 그 이틀 알바도 할 필요가 없겠지만. 사실 그렇게까지는 하고 싶지 않다.
서현 님 보기 부끄럽잖아.
항상 이렇게 뭐랄까. 중심을 딱 잡고 변함없는 모습을 보여야 우리 서현 님이 ‘역시 한수 씨는 갑자기 부자 됐다고 막 변하는 그런 사람 아니었군요’ 하면서 나에게 반할 거 아니냐 이거지.
아닌가? 아무리 그래도 우리 서현 님 재벌 3세인데, 찌질하다고 생각하려나? 남자답게 막 쓰는 그런 모습을 보여줘야 하나?
아니지. 우리 서현 님은 그 뭐냐, TV에 나오는 쓰레기 같은 재벌 3세랑은 다르잖아. 얌전하고, 현명하고, 검소하고. 예쁘기는 뭐, TV에 나오는 재벌 3세보다 더 예쁘지만 말이지.
그리고 서현 님은 둘째 치고 돈 생겼다고 막 쓰고 그러는 거, 내 미학에 안 맞아. 내 스타일이 아니야.
뭐, 그리고 알바하는 거, 솔직히 싫지 않다.
우리 점장 누나 예쁜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게 성격은 또 칼이라서, 가끔 말로 여기저기 푹푹 찔러댈 때가 있지만, 그래도 기본적으로 뭐 좋은 사람이다. 20대 아가씨답지 않게 마음이 넓고 현명하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는 알바 끝나고 같이 치킨에 맥주도 한 잔씩 하고는 했는데, 요즘은 내가 알바 끝나면 서현 님한테 쪼르르 달려간다고 한 번을 안 했네.
점장 누나 서운해하겠다. 한번 날 잡고 재롱 한번 떨어줘야 하는데.
같이 알바하는 병진이 형도 뭐 괜찮지. 그 형이 점장 누나 좋아해서, 가끔 점장 누나 관련된 일이라면 눈이 돌아가니까 그게 좀 문제긴 하지만, 뭐 기본적으로 좋은 사람이다.
아무튼 뭐. 그 두 사람이랑 같이 노는 거 나름 재미있다.
그리고 커피집 특유의 그 분위기도 난 좋아한다.
물론 손님이 미어터질 때, 특히 미어터지는 손님 중 진상의 비율이 높을 때는 진짜 앞치마를 확 벗어버리고 싶기도 하지만, 그래도 대부분의 시간들, 객장에 흐르는 부드러운 음악과 손님들아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의 틈 사이를 은은한 커피 향기가 스며드는 그 시간을 좋아한다.
여유롭고 평화롭다는 느낌을 받는다.
촌놈이라 그런가?
아무튼. 뭐. 알바 뭐, 특별한 일 없으면 계속해야지.
아무튼 지옥의 연강도 끝났겠다. 후딱 도서관 가서 책 빌리고 알바나 가야 되겠다.
***
유 선생님 수업 참고도서를 대출하기 위해 도서관을 가던 내 눈에 사람들이 몰려 있는 모습이 들어왔다.
단순히 몰려 있는 게 아니라, 모여 있는 군중에 여자의 비율이 높다.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었지만, 나는 거기에 왜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여 있는지 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학교에 저 정도로 사람이 모였다는 것은 둘 중에 하나를 의미한다.
싸움이 났거나, 아니면 촬영을 하고 있거나.
근데, 저 정도로 사람이 모였는데, 여자의 비율이 높다는 것은?
아마도 촬영이겠지.
은근히 우리 학교에는 방송국 카메라가 많이 찾아온다.
뭐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
뭐 일단, 대한민국에서 가장 공부 잘한다는 놈들이 모이는 학교라는 타이틀도 있고, 서울에 있는 학교 중에서 캠퍼스도 크고, 그 커다란 캠퍼스 내에 연구소를 비롯해 이런저런 시설들도 있으니까.
뭐 듣기로는 학교 측에서 드라마 같은 거는 촬영허가를 잘 안 내준다고 하던데, 가끔 예능 같은 거는 또 촬영을 하더란 말이지. 또 시사 교양 프로그램 촬영은 종종 볼 수 있기도 하고.
아무튼 방송이고 뭐고, 얼른 도서관이나 가자.
뭐 내가 어린애도 아니고, 유치하게 방송국 카메라가 있다고 구경 가겠어?
참나. 내가 서울 생활이 1년이 넘었어요. 1년 하고도 2개월이 넘었어요. 이 정도면 서울 사람이라고 봐야지.
그러니까 쿨하게 지나쳐야지, 라고 잠깐 생각했지만, 그래도 궁금하잖아.
혹시 알아? 여자 아이돌이라도 있을지?
살짝, 사아아알짝 누가 있는지만 보고 갈까? 잠깐만, 아주 잠깐만.
그렇게 생각하면서 사람들이 모인 곳을 향해 걸어가 보았다.
역시 방송이었군.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여자 아이돌은 없었다. 물론 남자 아이돌도 없었다.
심야 토론프로그램에서 오랜 기간 사회를 맡아온 시사평론가가 있었다.
뭐지? 저 아저씨, 뭐 그래도 나름 유명한 분이긴 하지만. 그래도 저 아저씨 보겠다고, 여학생들이 이렇게 많이 모였다고?
시사평론가 옆에서 걷고 있는 사람을 보니 바로 내 의문이 풀렸다.
정지수, 심리학 전공 박사후연구원(博士後硏究員), 일명 포닥(Postdoctoral researcher), 물론 그냥 포닥이라면 이렇게 사람이 모일 리가 없지. 저 아저씨는 그냥 포닥이 아니라 유명한, 그것도 아아아아아아주 유명한 포닥이다.
저 사람이 박사과정 때, 심심풀이 삼아서 쓴 심리학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그냥 베스트셀러도 아니고, 그해 비문학 부문에서 가장 많은 판매 부수를 기록한 베스트셀러.
단지 베스트셀러 작가라서 유명한 것이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잘생겼다. 솔직히 나는 뭐 남자의 잘생김에 대해서 전혀 관심이 없으니 모르겠는데, 사람들의 평가로는 말도 안 되게 잘생겼단다.
뭐 원래부터 유명하기는 했다더라. 학부생 때부터 한국대의 얼굴 천재라고 불렸다더만.
아무튼. 뭐, 저 포닥 아저씨가 베스트셀러 작가가 되고, 어찌저찌해서 주말 예능에 한 번 나갔는데…. 난리가 난 거지.
도대체 저 잘생긴 남자는 누구냐 하면서 10대 소녀부터 60대 할머니까지 난리가 나버린 거지. 검색 사이트에 실시간 검색어가 ‘한국대 프린스’, ‘얼굴 천재 심리학자’ 뭐 이런 걸로 도배가 되어버렸고, 하루아침에 스타가 되어버린 것이다.
난리 난 건 여자들뿐만이 아니라더라. 방송가에서도 난리가 났다더만.
방송 섭외전화가 하루 종일 울려대 학교 행정업무에 차질을 빚었다느니, 대형 기획사에서 영입을 하려고 직원을 상주시켰다느니, 백지수표를 제시했다느니, 그런 믿기 힘든 소문들이 한동안 학교를 떠다녔다.
그리고 이건 누구한테 들었는지 기억 안 나는데, 저 잘생긴 포닥 님께서는 연구실적도 아주 훌륭하셔서, 공대였다면 진작에 교수 임용되고도 남았을 거라더만. 근대 심리학 전공이라 그 미묘한 서열 문제 때문에 지금 포닥에 머물고 있는 거라고.
다른 학교에서 지금 당장 임기가 보장되는 종신 교수직을 마련해드리겠나이다 하는 오퍼가 없었던 것도 아닌데, 교수님들이 놔주지 않는다고 하더만. 다음 교수 임용 1순위에 이름을 올려놓고, 즐거운 포닥 생활을 즐기고 있다나.
아무튼 사기캐릭터다 이거지. 엄마 친구 아들 같은 사기 캐릭터.
정확히 말하면 엄마 친구 아들은 아니고, 교수님 친구 제자? 교친제 되시겠다.
뭐 사기캐고 나발이고, 나는 솔직히 관심 없다.
아무리 잘생기고 똑똑하고 돈 많아도 남자에게 줄 관심 따위는 없지.
도서관이나 가자. 알바 늦으면 점장 누나에게 개갈굼 당한다.
그렇게 관심 끄고 떠나려 하는데, 갑자기 내 귀를 타고 들려오는 속삭임.
“한수는 한국대 프린스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으았따! 깜짝이야!
하고 옆을 바라보니 박승환이 서 있다.
“시선은 얼굴을 향해있지만, 마음은 한국대 프린스의 긴 다리를 향해있었다.”
이건 반대쪽에서 속삭이는 소리.
박찬희다.
찬희 이놈이 키가 콤플렉스다. 지는 항상 171이라고 주장하지만, 나는 168 본다.
아무튼 은근히 콤플렉스가 있는지 키 이야길 하는군.
찬희야 포기하지 마라. 방법은 있다.
다시 태어나면 된다.
아무튼 이놈들은 언제 여기 나타난 거야.
“아무리 한국대 왕자님이 좋아도, 까치발까지 들고. 우리 한수의 그 마음이 애달프다.”
박승환이 느끼한 말투로 말한다.
“한수야. 괜찮아. 그래도 우리는 친구다. 우리에게 고백만 안 한다면.”
이건 박찬희의 말.
무슨 개소리야. 이건.
“난 이해해. 한수가 지수 때문에 많이 힘들었으니까.”
이건 뒤에서 들려오는 김창회 목소리.
“난 찬성. 응원한다. 한수야. 괜찮아. 부끄러운 거 아니야.”
이건 이중훈의 목소리.
“…저는 많이 혼란스럽지만. 그래도 응원할께요. 오빠.”
뭐야. 지연이도 있었어?
나도 모르는 사이에 한국대 네 악마와 악마에게 현혹당한 불쌍한 영혼 하나가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뭔 개소리야. 그게.”
내가 말했다. 아 물론 지연아. 넌 빼고. 너에게 한 이야기 아니야.
“실연의 충격, 그리고 마음속 한구석에 꾹꾹 숨겨놓았던 진짜 성 정체성의 재발견.”
박승환이 말한다.
그래. 이걸 줄 알았다.
“사랑은… 컥!”
나는 계속 헛소리를 이어가려는 박찬희의 복부에 재빨리 주먹을 찔러 넣었다.
매가 약이다. 일단 패고 봐야지.
“말에는 책임이 따른다. 알고 있겠지?”
내 협박에 창회가 피식하고 웃는다.
그래. 이 괴물아. 너는 겁 안 난다 이거지?
“내가 널 이기지는 못하겠지만 최소한 쉽게 지지는 않을 거야.”
그러면서 내가 창회의 다리 사이를 바라보았다.
뼈를 주고 고환을 취한다.
그렇게 눈으로 말했다.
“그리고 유지연 씨.”
“넵!”
“순자 님께서 백사재열 여지구흑(白沙在涅 與之俱黑)이라고 하셨어요. 아무리 흰 모래도 진흙탕에 던져지면 검게 물들 수밖에 없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유지연이 고개를 좌우로 젓는다.
“근묵자흑, 근주자적.”
박승환이 추가적으로 설명하자, 유지연은 그제야 아항, 하면서 고개를 끄덕인다.
“지연 씨는 사람을 가려 사귈 필요가 있어요.”
나는 그렇게 말하며 한국대의 네 악마를 둘러보았다.
지연이를 위해서라면 이놈들을 처리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씨. 능력만 있다면, 그놈의 능력만 있었다면 지연의 순수한 영혼을 구해낼 수 있을 텐데.
아. 능력 마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