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 있다가 없으면 더 서럽다 (6)
금요일이 됐다.
고향에 다녀오고, 능력을 잃고, 심하게 앓고 나서 며칠이 지나갔다.
그동안 내가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능력을 잃었다고 한들, 능력을 내가 막 남발하고 다닌 것도 아니고, 아니, 남발은커녕 몇 번 쓰지도 않았다.
생각해보면 처음 능력이 생긴 것을 알고 돌아올 때 버스에서 와이퍼 멈추고, 그 시끄럽던 여자 재우고, 시간 멈추고…. 이건 크긴 크지.
아무튼, 그다음에 사물함 열고, 그다음이 진철이 형 아버지 치료한다고 시간 한번 멈추고, 치료하고.
근데 치료는 된 건가? 이거 물어볼 수도 없고. 참나.
형. 내가 신력이 있는데, 그걸로 형 아버님 치료했거든요. 요즘 어떠신가요?
이렇게 물어봐?
미친놈 소리 듣기 딱 좋지.
아니. 미친놈이 아니라 사기꾼, 딱 사기꾼이잖아.
아무튼, 난 뭐 능력이 있다가 없어졌다고 해도 크게 변한 것도 없고 아쉽거나 그런 것도 없다.
아 있다. 김민우. 며칠 전 그 자식을 만났을 때, 능력이 있었으면 기냥!
기냥? 음…. 뭘 했을까?
뭐 그래도 내가 이 시대의 지성인이라는 대학생인데, 아닌가? 요즘 대학생 하도 많아서 지성인 소리 못 듣나?
아무튼, 아무리 김민우라고 해도, 이성적인 내가 뭐 심하게 해코지를 했겠어?
기껏해야 발기부전이나 걸었겠지. 한 20년짜리로.
아! 이제야 그런 생각이 떠오르다니!
안타깝다. 어차피 혼날 거, 능력 있을 때 걸어놓을 것을!
아무튼. 뭐 내 생활에는 별로 변화가 없다.
평상시처럼 수업 듣고, 평상시처럼 사람들 만나고, 평상시처럼 집에 가서, 평상시처럼 서현 님과 캐모마일 차를 마시고 가벼운 대화를 나누다 잠드는 그런 아주아주 행복한 일상을 보내고 있다.
그리고 지금도 평상시처럼 내가 항상 앉아 있는 그 벤치에 앉아 있다.
봄과 초여름에는 그래도 햇살이 괜찮았는데, 여름으로 다가가면서 점점 햇살이 뜨거워진다.
당분간 여기는 못 앉겠군. 가을이 올 때까지 당분간 여기는 안녕인가?
생각해보면 참 이곳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다.
과방에 들어가기 어색해서, 무언가 생각을 하고 싶을 때, 가끔씩 찾아오는 분노를 식히려고. 뭐 이런저런 용도로 참, 여길 많이 찾았는데, 당분간은 더워서 있을래도 못 있겠구나.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조금은 강한 가시광선과 자외선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타는 것도 그렇고, 피부 손상도 걱정되지만 능력만 찾으면 그까이 것 쯤은 그냥.
“한수야. 여기 있었구나.”
능력을 되찾은 다음 박피로 돈을 벌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어? 형. 오랜만이네요.”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더니, 진철이 형 생각을 했더니 이 양반이 오는군.
“마실래?”
진철이 형이 캔 커피를 내민다. 편의점 정가 600원, 마트 할인가 200원 하는 달디단 캔 커피.
“네.”
나는 형이 주는 캔 커피를 건네받았다.
뭐. 너무 달기는 하지만 그래도 가끔 먹으면 또 특유의 쌈마이한 맛이 나름 괜찮다.
형은 나에게 캔 커피를 건네주고 가방에서 또 캔 커피를 꺼내 뚜껑을 딴다.
이 양반은 가방에 캔 커피를 몇 개나 넣고 다니는 거야. 저거 은근 무거울 텐데.
아니, 무게도 무게지만, 정말 내가 본 것만 해도 개수가 어마어마하다.
빈 캔 모아서 팔면 침수차는 살 수 있지 않을까?
“형.”
캔을 따서 마시는 형에게 내가 말을 건넸다.
“응?”
“형. 혈당 같은 거, 재고 있어요?”
“혈당?”
“네. 당뇨병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싶은데요.”
내 말에 형이 웃는다.
“나도 궁금해서 찾아봤는데, 설탕 같은 당분이 당뇨병 원인이라는 거 확실하지 않다고 하더라.”
“그래요?”
“응. 뭐 당류를 많이 먹어서 좋을 것은 없지만, 아무튼 설탕 많이 먹어서 당뇨병 걸리는 건 아니라더라.”
헐. 그건 또 몰랐네. 나는 여태까지 그런 줄만 알았는데. 흠. 한번 알아봐야겠다.
“뭐. 그렇다고 해도, 내가 좀 많이 마시긴 하지.”
“그쵸. 좀 과해요.”
“과한가?”
“궁금해서 물어보는데, 혹시 가방 안에 커피 또 있어요?”
“어.”
“커피값도 만만치 않겠는데요?”
“뭐…. 싸다고 해도, 전체 소비가 올라가면 비용이 증가할 수밖에 없지. 네 말마따나 좀 줄이기는 해야겠다.”
그렇게 말하면서 또 한 모금.
중독이야. 안 돼. 이 양반은. 이미 글렀어. 중독 상태야. 쯧쯧.
그러면서 나도 한 모금.
확실히 이 쌈마이한 맛은 진짜 중독성이 있다니까.
“덥구나. 여기도 이제.”
형이 말했다.
“그러게요. 당분간은 여긴 못 오겠어요.”
“그러네. 저번에 뵈었던 친척 어르신은 건강하시고?”
아. 맞다. 그때 우리 강 회장님 보셨지?
“네. 아마도? 저도 자주 뵙는 것은 아니니까.”
“그렇구나.”
“네. 그나저나 아버님은 좀 어떠세요? 그때 퇴원하신다고 그랬었는데….”
“응. 안 그래도 그 이야기를 좀 할까 하고.”
“이야기요? 어떤?”
“아버지…. 많이 괜찮아지셨어. 퇴원 안 하고 계속 치료받기로 했다.”
“오! 잘됐네요!”
역시!
능력은 의지에 반하지 않는군.
좋은 거 배웠다.
뭐 능력을 잃은 지금의 나에게는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그래도 나중에 능력을 찾게 된다면 쓸모가 있겠지.
예를 들어 발기부전의 저주를 내린다거나.
“그래서 말인데 너한테 뭣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네. 뭔데요?”
“그날. 우리 아버지 만난 날. 너희 친척 어르신 말이지.”
“…네.”
이거 느낌 싸한데.
“중앙그룹 회장님 맞으시지?”
빙고…가 아니라 역시….
“네?”
“중앙그룹, 강민철 회장님.”
그렇게 질문을 던지고, 형은 커피를 또 한 모금 마신다.
“흠….”
나는 뭐라고 답할까 잠시 고민하다가, 그냥 있는 그대로 말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뭐…. 네. 그분이 그분 맞아요.”
진철이 형은 내 대답을 예상했는지, 평상시와 같은 표정으로 하늘을 보고 있다.
왜 이래. 이 양반이 무섭게.
“나중에 아버지가 그러시더라고. 어디서 본 것 같다고. 나는 별생각 없이 그냥 뭐. 누굴 닮으셨다 보다 그러고 말았는데. 나중에 병원에 있다가 원내 방송을 보게 됐어.”
“원내 방송이요?”
“음. 뭐 병실 텔레비전에서 틀어주는 원내 방송. 병원 소식 같은 거 전해주는 방송. 그걸 보는데, 어딘가 모르게 익숙한 사람이 나오더라. 그때 같이 인사드렸던 원장님.”
아…. 원내 방송에서 원장님을 봤구나.
“내가 중앙 서울 의료원 원장님 얼굴을 어떻게 알고 있지? 그런 생각을 하다가. 그날 기억이 떠오른 거지. 원장님. 그리고 너의 친척 어르신. 안 그래도 아버지가 그 친척 어르신 얼굴이 익숙하다고 했는데, 나도 그런 느낌이 있었거든. 그래서 곰곰이 생각해보니, 금방 나오더라. 중앙그룹 강민철 회장님.”
빼박이네. 이건. 이거 뭐라고 이야길 하면 될까? 뭐라고 변명을 하면 될까?
“중앙복지재단이라고 들어봤니?”
응? 그건 또 뭐야?
“…아니요. 처음 들어보는데요.”
“그렇구나. 중앙그룹 계열 복지재단인데, 중앙의료원과도 관련이 있고. 아무튼, 그 중앙복지재단이라는 곳에서 아버지 병원비를 지원해주겠다고 하면서 연락이 왔었어. 병원비도 지원하고, 그전에 낸 병원비도 일부 보전해주고. 그리고 상급 병실도 지원해주고.”
아…. 그렇게 하셨구나. 원장님이 처리해주겠다고 하셨는데, 그런 방식으로 진행하셨구만.
“생각을 해봤어. 우연히 너를 만났고. 우연 맞지?”
“네. 우연이죠. 100%”
우연이지. 만남은.
“그날 우연히 너를 만났고, 중앙그룹 강 회장님과 원장님을 만났고, 아버지와 인사를 나눴고, 그리고 얼마 안 가서 복지재단을 통해서 지원을 받았고, 치료를 계속할 수 있게 됐고. 우연히 말이지.”
꼴깍.
나도 모르게 침이 넘어간다.
“생각을 해봤어. 우연. 과연 우연일까? 그런 말도 안 되는 행운 같은 우연이 그렇게 찾아와도 괜찮은 것일까. 그런 생각.”
나는 말 없이 커피 캔을 손에서 빙글빙글 돌렸다.
“모르겠다. 자꾸 이상한 생각이 들더라. 뭔가 있는 게 아닐까. 혹시 그 뭔가에 네가 있는 게 아닐까. 그런 생각이 말이다.”
이 양반 감 좋네.
아니지. 저 정도 단서면 뭐 이 양반 아니라도 다 알 수 있으려나.
“동정심이었니?”
진철이 형이 물었다.
하늘을 바라보던 눈은 어느새 나를 보고 있었다.
갑자기 훅 들어오시네요!
“뭐가요?”
“중앙그룹 강 회장님, 아니면 원장님을 움직인 이유가.”
동정심이라…. 동정심도 공감의 일부라고 배웠는데, 어째선지 동정심이라는 단어가 부정적으로 받아들여지기 시작했다.
형은 그런 의미로 나에게 물은 것일까?
“형이 말하는 동정심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그 동정심을 의미한다면 아니라고 답하겠습니다.”
내가 말했다.
“일반적 의미?”
“뭐. 요즘 동정심이라는 단어가 내포하고 있는 부정적인 관점에서의 의미 말이죠. 불쌍하다거나. 뭐 그런 의미.”
“…”
형은 말없이 다시 하늘을 보고 있다.
“뭐. 꼭 어떤 이유를 대자면.”
“…대자면?”
“형 여동생분.”
“내…여동생?”
“네. 형이 그랬잖아요. 형 여동생, 대학 포기하고 특성화고 가서 취업했다고. 알바도 많이 하고. 그날 형 여동생 잠깐 봤지만…. 그렇게 힘들어하는 사람처럼 안 보였다고 할까. 분명히 힘들 텐데, 분명히 괴로울 텐데, 그렇게 형이랑 투닥투닥 하는 모습을 보고 있으니까. 또 형도 그렇고.”
“나도 그렇다는 건….”
“형도 그렇게 힘든데, 열심히 살잖아요. 나도 뭐 유심히는 아니지만, 옆에서 봤고. 그러니까 그런 생각은 했죠. 참 남매 두 사람이 멋있네. 아버님이 두 남매 잘 키우셨네. 그런 생각. 그러니 기적이나 행운이라는 게 있다면 이런 사람들에게 찾아와야 하는 거 아닐까 그런 생각. 뭐 그런 생각.”
“…….”
형은 여전히 말이 없다.
“그런 마음을 일반적인 의미에 동정심이라고 하면 그건 좀 안 맞죠. 공감이라고 하면 맞을라나? 근데 아마 이건 다 공감할걸요. 일반적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라면. 아. 그리고 제가 뭐한 거 없어요.”
“…한 게 없다고?”
“그럼요. 형. 저 그냥 대학생이에요. 제가 뭘 어떻게 해요. 강 회장님. 뭐. 이야기 나왔으니까 하는 말인데, 그냥 저희 할아버지하고 아시는 사이고, 그래서 어찌어찌하다 보니 신세를 좀 지고 있을 뿐이에요.”
이건 틀린 말 아니지. 그치.
“그래서 그날 인사도 드릴 겸 문병 겸해서 갔다가 우연히 형 본 거고. 아니 생각해보세요. 내가 뭐 얼마나 대단한 인물이라고 회장님이나 원장님에게 무슨 힘을 쓸 수 있겠어요? 제가 해주세요 그러면 해줄 수 있는 그런 일인가요?”
찔끔. 이건 좀 찔리네.
하얀 거짓말. 하얀 거짓말.
“…뭐. 그건 그렇겠지.”
“그리고 뭐 착한 사람은 복 받는다고 한다면 뭐. 형은 복 좀 받아도 괜찮죠. 안 그래요?”
좋아. 탄력 붙었어. 이대로 밀어붙이는 거야!
“형. 그냥 뭐 복 받았다. 그렇게 생각하면 되겠네요. 행운이다. 뭐. 앞으로 열심히 살아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면 되죠. 난 또 무슨 이야길 이렇게 심각하게 하나 싶었네. 참나.”
좋아. 나이스 마무리. 잘 얼버무렸으!
“…너는.”
제가 뭐요?
“가끔 보면 형 같은 말을 하는구나. 후배인데도, 가끔 보면 형처럼 느껴질 때가 있어.”
우하하하. 넘어갔어! 잘 넘어갔어! 이 정도면 끝난 거지.
로스쿨. 역시 난 로스쿨을 가야겠어.
지연이에게 뒷바라지를 하라고 할까? 아니지. 그러면 군대를 다녀와야 할 테고.
서현 님에게? 좀 가오가 안 살긴 하는데.
“고맙다. 사실. 그 말이 하고 싶어서.”
그러면서 고개를 살짝 숙인다.
“아니. 뭐. 제가 한 것도 없는데 고맙긴요. 인사받을 이유가 없는데.”
“그래도 고맙다. 인사는 해야 할 것 같아서. 설사 동정심이었다고 해도. 그래도 고마운 것은 고마운 것이지. 아니. 다 필요 없고. 그저…. 고맙다. 그 말이 하고 싶었다.”
이 양반 또 왜 이래. 사람 쑥스럽게 말이야.
“뭐…. 제가 한 건 없지만, 그래도 고마우시다면 뭐 다음에 밥이나 한번 사시던가요. 맨날 이 캔 커피로 때우지 말고. 하하핫.”
아주 훌륭해. 마무리 아주 좋아. 역시 로스쿨 가야겠어.
“그래. 밥 한번 사야지. 뭐 한 번뿐이겠냐. 이 은혜는 평생 갚아나가도록 하자.”
“남자에게 평생 은혜 갚겠다는 이야기는 듣고 싶지 않습니다만….”
내 말에 형이 씨익 하고 웃는다.
“그건 그렇고 형. 저기 부탁이 하나 있는데요.”
“부탁? 뭔데?”
“그…. 뭐냐. 강 회장님이나, 원장님 이야기는, 저기 다른 사람들이 몰랐으면 싶달까? 별것도 아닌데 괜한 오해 사기 싫은…. 뭐…. 그런…?”
내가 말하자 형이 고개를 끄덕인다.
“아. 무슨 말인지 알겠다. 그래. 뭐. 떠벌릴 이야기도 아니지. 그런 이야기.”
역시. 배우신 분. 척하니 착!
“아무리 그대로 재벌그룹 손녀와의 이야기는 확실히 구설수에 오르기 쉬우니까.”
“네?”
뭐야. 갑자기 이 이야기는! 왜 또 훅 들어와!
“그, 그게… 무… 무슨…?”
나 왜 이렇게 더듬냐.
침착해. 한수. 침착해! 침착해!
“서현 씨라고 했지? 그때 같이 있던 분.”
“…네.”
뭐야. 서현 씨도 막 인터넷에 사진 나오고 그런 거야? 인터넷 검색하면 나오는 거야?
“그분이 축제 때도 오셨었지? 그때 교수님들 테이블에 앉아 계시고.”
“그. 그랬죠?”
“그때 거기 있던 선배 중 하나가 서현 씨 알아봤더라. 중앙그룹 다니는데, 비서실 근무하는 회장님 손녀라고 아는 사람은 다 안다고. 그러면서 나에게 전화해서 왜 중앙그룹 3세가 거기 있었는지 물어보더라.”
아뿔싸!
그 생각을 못 했다.
중앙그룹 비서실에 근무하는 초미녀 회장 손녀! 본사 사람이라면 당연히 알 수밖에 없겠지.
“그. 그래서요?”
뭐냐. 나 왜 말 더듬냐?
“뭐. 그냥 나도 잘 모르겠다. 교수님 지인인 것 같다 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생각해보니 이야기가 대충 맞아떨어지더라. 그리고 오늘 너의 이야기 들으니 마지막 퍼즐도 완성되고.”
마지막 퍼즐?
지금 이 양반. 뭔가 대단한 착각하는 것 같은데?
“정혼자라. 진짜 그런 게 있구나. 소설 속 이야긴 줄 알았는데.”
응?
“네?”
진철이 형은 그렇게 말하더니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내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미래의 중앙그룹 사위가 내 후배라니. 나중에 경영일선에 뛰어들게 되면 나 잊지 마라.”
그리고는 엄지손가락을 치켜들고는 도서관 쪽으로 올라간다.
뭐야!
형!
형도 똥촉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