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58화 (58/271)

58 : 있다가 없으면 더 서럽다 (4)

아이고…. 오늘따라 학교 올라가는 길이 왜 이렇게 험난하냐.

그냥 버스 타고 올라갈 것을, 괜히 평소 버릇처럼 걸어 올라가겠다는 바보 같은 결정을 내린 나를 원망한다.

그래도 근처까지는 편하게 왔다. 서현 님이 태워주셨으니까 후후.

밤새도록 서현 님에게 쫓겨나는 악몽에 시달렸는데, 다행스럽게도 서현 님은 아침에 화가 풀리셨는지, 평소처럼 나를 깨워주셨다.

아니. 완전히 평소와 똑같은 것은 아니었다.

나는 서현 님의 눈치를 보면서, 또 그 삽입식 체온계라는 음란한 이름의 물질을 삽입(?) 당했다.

삑 소리가 나고 체온을 확인하신 서현 님은 약간 불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체온계를 바라보고 계셨다.

“며… 몇 도예요?”

“…37.1도요.”

아슬아슬 세이프!

“…그 정도면 괘. 괜찮지 않을까요?”

나는 성에 차지 않는 눈으로 체온계를 바라보는 서현 님의 눈치를 보면서 말했다.

“아무래도 오늘까지 쉬면 좋을 것 같은데….”

“오늘은 학교 가면 안 될까요? 유 선생님 수업도 있는데….”

내가 최대한 불쌍한 표정으로 항변하자 서현 님은 고민하는 유치원 선생님 같은 얼굴로 날 바라보신다.

혼낼까 말까 고민하는 표정인데.

“그럼 병원 가서 주사라도….”

“아니! 괜찮습니다! 진짜 괜찮아요! 정말로요! 진짜로! 레알!”

내가 말했다.

솔직히 아무리 나이를 먹어도 주사는 싫다.

“그러면 오늘은 집에서 휴식을 취하시죠.”

서현 님이 혼내기로 결정한 유치원 선생님 얼굴로 말하신다.

“…주사 맞으러 가겠습니다.”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결국 나를 병원으로 데려가 내 순결한 애플힙에 주삿바늘이 꽂히는 것을 확인한 서현 님은 나를 학교까지 태워다 주셨다.

괜찮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그럴 수가 없었다.

지금은 조용히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할 때다. 나도 그 정도 눈치는 있지.

하지만 꼬리 말은 개처럼 완전히 굴복한 것은 아니었다.

강의동까지 데려다주시겠다는 서현 님에게 최대한 예의 바르게 반항해서 지하철역 앞에서 내리는 것으로 합의를 이끌어 냈다.

아니. 데려다주시면 편하긴 한데. 뭐랄까. 좀 그렇다.

예전부터 난 좀 그랬다. 뭐, 여자애도 아니고, 남자 놈들이 부모님 차 타고 학교 오는 거. 난 이상하게 그거 싫더라니까.

아무튼, 셔틀버스 타고 가겠다고 거짓말을 한 다음 평소처럼 걸어서 학교를 향해 걸어가는데…. 이거 힘드네. 어제 몸살기가 남아 있어서 그런가?

아무튼, 지하철 대신 차 타고 오니까 편하긴 하다.

아니야! 정신 차려 한수!

너 임마 시골에서 흙 파먹고 놀던 한수야 임마!

정신 못 차리고 헬렐레하면 뽀대가 안 나잖아!

부와 명예가 쌓일수록 말이야. 응? 아무렇지도 않게 지하철 타고 말이지. 응? 그래야 멋있지. 후후후.

아니. 아니지.

오히려 차 타고오는 동안 힘들었다.

운전석에 앉아있는 서현 님의 미끈한 다리와 자꾸 위를 향해 말려 올라가는 스커트라인이 자꾸 눈에 들어왔고, 본능적으로 세상 밖으로를 외치며 존재감을 뿜어내려고 하는 미니미를 가방으로 눌러대느라 힘들었다.

아우. 배가 묵직하네.

아무튼, 나는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며 학교를 올라가 결국 과방 앞에까지 다다랐다.

사물함 가서 책부터 꺼내야 하는데, 힘들다. 좀 쉬었다 가야지.

문을 열고 들어가니 애들 몇 명이 놀고 있는 게 보인다.

어디 보자. 저기서 열심히 지도를 꺼내놓고 분석하고 있는 놈은 박승환이.

지도? 무신 지도?

저거 게임에서 사용하는 지도 아냐?

난 진짜 저놈이 우리 학교 어떻게 들어왔는지 이해를 못 하겠어. 뭐 공부하는 꼴을 본 적이 없으니. 근데 또 학점은 잘 받아.

소파에 누워서 덤벨 들고 있는 놈은 김창회.

이해 안 가는 건 저 자식도 마찬가지야. 박승환만큼은 아니지만 저놈도 학점 좋잖아.

구석탱이에 앉아서 핸드폰으로 너튜브 보며 키득거리는 저 자식은 박찬희, 다행히도 저 녀석은 인간이다. 공부 안 하고, 학점 안 나오고. 넌 임마 그러다 졸업 못 해.

“어. 오빠 왔어요?”

열심히 노트북으로 뭔가를 쓰고 있던 유지연이 날 보며 반갑게 맞는다.

그리고 그 옆에 앉아서 그녀를 보고 있던 중훈이 녀석은 날 째려보고.

“어. 그래. 뭐 하냐?”

“리포트 쓰고 있어요. 옆에서 중훈 선배가 도와주고 있고.”

포기해라 임마. 넌 안 된다.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과방으로 들어갔다.

“어서 와.”

각도기에 자까지 가져다 놓고 지도를 분석하고 있는 박승환이가 내 얼굴은 보지도 않고 무성의하게 인사했다.

저 자식. 내가 항상 말하지만, 저 자식은 뭔가를 이루긴 할 거야.

그게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분명 뉴스에 나올 거야.

아마도 나쁜 쪽이라는데 내 모든 재산과 왼 손모가지를 건다.

잠깐만. 나 재산 많은 거 아냐? 그럼 지금 체크카드에 있는 돈과 왼 손모가지를 건다.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창회 발을 밀어내면서 소파에 앉았다.

아이고 피곤타. 그거 올라왔다고 힘드네.

“오빠. 무슨 일 있어요? 피곤해 보이는데?”

역시. 항상 말하지만, 세상을 지배하는 윤리는 배려윤리여야 한다. 공감과 배려!

“응? 아니. 그냥 감기.”

“감기요? 많이 아파요?”

“오뉴월 감기는 개도 안 걸린다는데.”

유지연의 걱정스러운 말과 너튜브를 보고 있던 박찬희의 더러운 비난이 뒤따른다.

고오맙다. 걱정해줘서.

아니나 다를까, 여전히 시선을 지도에 박고 있던 박승환이 한마디 거든다.

“찬희야. 그렇게 말하면 섭섭하지. 우리 귀여운 댕댕이들이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한수 저 녀석이랑 비교당해야 하는데.”

그래. 그래야 박승환이지.

“운동을 안 해서 그래. 운동을 안 해서 감기 같은 하찮은 병에 걸린 거야.”

덤벨을 내려놓은 창회 놈이 과방 구석으로 가서 32kg짜리 케틀벨을 집어 들며 말한다.

“운동해서 기초체력을 늘리고, 저항성을 높이면 감기 들 이유가 없지.”

괴물 같은 놈. 바이러스도 저놈은 못 뚫고 들어갈 거다. 설사 근성 있는 바이러스가 근육질로 비대해진 창회 놈의 점막을 어찌저찌 침투했다고 하더라도, 얼마 버텨내지 못 할 거다.

나는 울퉁불퉁한 근육을 가진 백혈구 떼거리가 불쌍한 바이러스를 다구리 놓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창회 놈이 비워놓은 소파에 누웠다.

아 좋구나.

과방 소파는 마약 같은 뭔가가 있어. 한번 누우면 일어나기가 싫다니까.

“근데 오빠.”

누운 상태로 소파가 주는 엑스터시를 만끽하고 있는 나에게 지연이가 말을 건넸다.

“응?”

“오빠 근데 진짜 감기뿐이에요?”

“뭐가?”

“음…. 평소와는 조금 다른 느낌? 무언가 일이 있었다는 그런 느낌적인 느낌…?”

헐…. 뭐야 이 녀석. 뭐지? 어떻게 알았지?

“어? 그…. 뭔가 달라? 나?”

내가 순간 어리벙벙하면서 말을 더듬었다.

설마. 신력을 잃은 것을 저 녀석이 알게 된 건가? 에이 설마. 설마아~

“응? 뭐 별다른 것 없는데?”

중훈이가 말했다.

“여전히 무기력하고.”

찬희가 말했고.

“여전히 비실비실하고.”

창회가 말했고.

“여전히 재수 없고.”

박승환이 말했다.

넌 임마 내가 방에 들어와서 나 한 번도 안 쳐다봤잖아.

“여전히 죽여 버리고 싶고.”

그리고 이중훈의 마지막 한 방.

“아하하하.”

지연이가 또 빵 터졌다.

유지연 씨. 당신의 개그 코드는 알 수가 없어요.

지연이가 웃자 선배 놈들이 배시시 웃는다.

지들끼리 합작해서 지연이를 웃겼다는 것에 대한 만족감 같은 것들이 녀석들의 얼굴에 떠오른다.

으이구 인간들아. 이 호구 놈들아.

니들은 여자 조심해라. 분명 한번 크게 당할 것이야.

“진짜 오빠들은…. 너무. 재미있어요. 시트콤 같아요.”

지연이는 한참을 웃더니 눈물을 훔치며 말한다.

“어허! 어디서 선배 무서운 줄 모르고!”

“시트콤? 시트코옴?”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튀어나온다.

이 자식들아. 그렇게 말하려면 얼굴에 미소나 지우고들 말해라. 아주 좋아 죽으려고 하네.

아이고 모르겠다. 나는 수업 전까지 여기서 쉬었다 가련다.

그렇게 생각하고 눈을 감고 있는데 그림자가 얼굴을 가리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살며시 눈을 떴다. 그 순간 나를 위에서 빤히 바라보고 있는 유지연의 얼굴이 보였다.

헉!

심장 멎는 줄 알았네.

“으따! 깜짝이야!”

“어머? 왜요? 왜 깜짝 놀라요?”

“그렇게 위에서 보고 있으면 놀라지….”

예뻐서.

뭐야. 이 녀석 갑자기 왜 이렇게 예뻐?

“왜…. 왜? 뭐…. 할 말 있어?”

내가 말을 재빨리 돌렸다. 이 녀석 위험해. 위험한 녀석이야.

“네. 저 할 말 있는데.”

“뭔데?”

“그게…. 뭐 여기서 말해도 되려나?”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주위를 둘러보았다.

살기. 저 살기. 만약 내가 지연이 손을 잡고 과방을 나가면 그 순간 나에게는 현상금이 걸릴 것이다.

Dead or Alive가 아니라 그냥 Dead 조건으로. 목만 떼어 오면 현상금 두 배!

“뭐…. 나가서 이야기할까?”

그렇다고 두려워할 내가 아니지. 미인을 얻는데 그 정도쯤이야. 감수해야지.

얻는 건 아닌 건가? 아무튼, 내 한목숨 살리겠다고, 나 좋다고 이야기한 후배에게 무안을 줄 수는 없지.

“뭐. 상관없겠죠. 선배들이 들어도 괜찮은 이야기고.”

그러더니 내 다리를 밀어내고 내 옆에 털썩 앉는다.

나는 슬그머니 일어나 앉았다. 계속 누워있다가는 애들에게 맞아 죽을 것 같다. 눈치는 봐야지.

“무슨 이야긴데?”

내가 물었다.

“그사람이요.”

“그 사람?”

“그 축제때 그 사람. 제 사진 몰래 찍은….”

“도촬범?”

도촬범, 학교 축제 때 유지연의 사진을 무단으로 촬영해서 지 별스타그램에 올렸다가 물의를 일으킨 멍청이. 그리고 잠수 탔다가 나중에 변호사를 데리고 와서 제대로 병신 인증을 한 쓰레기. 그 자식이 뭐?

“학생회에서 그 사람을 고발하겠다고 그랬잖아요.”

“그랬지.”

그 멍청한 놈이 자신의 무덤을 팠었더랬지.

“그저께 총학 선배 언니에게 전화 왔었는데요.”

그저께? 그저께라면 내가 고향 갔을 때구나.

“잠깐 와 줄 수 있냐고 해서 총학방 갔더니.”

“갔더니?”

나 없는 사이에 또 뭔가 한 건가?

“할머님이 오셨더라고요…. 그 사람의.”

“할머니?”

“네….”

할머니라고? 할머니이?

“네. 할머니라고…. 손자를 잘못 키운 당신 잘못이라면서. 한 번만 봐주면 안 되겠냐고…. 그러시면서….”

“우셨어?”

“네….”

헐….

이거 냄새가 나는데.

“그래서?”

“뭐 총학 선배들이 막 할머니 달래고 울지 마시라고 그러고….”

“너도 그랬고?”

“…네.”

그랬겠지. 거기서 손자 잘못 키운 당신 잘못입니다. 이런다고 바뀔 것은 없어요. 손자한테 경찰서에 갈 준비하라고 하세요. 그럴 사람이 누가 있겠어?

“흐음….”

나는 팔짱을 꼈다.

할머니라. 냄새가 나는데.

“죄송해요. 오빠에게 물어볼까 하다가 시골 가셨다는 이야기 들어서….”

그러더니 고개를 꾸벅 숙인다.

그런 모습이 아직 순수해 보여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왔다.

나는 손을 들어 그 녀석의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쓰다듬었다.

“아니야. 잘했어. 할머니가 오셨는데. 거기서 막 대하면 그건 사람이 아니지.”

내가 그렇게 말하며 머리를 쓰다듬어줬다.

“손 내려라.”

창회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들렸다.

나는 손을 내렸다.

거 짜식들. 분위기 파악 좀 하지…. 커 흠.

“아무튼, 그렇게 우시면서, 다시는 이런 일 없도록 하겠다고, 빨간 줄만 안 가게 해 달라고 하셔서…. 또 제가 당사자니까. 그렇게 하겠다고. 그런 일이 있었어요.”

“그랬구나.”

“네. 어제 오빠 오면 말씀드릴까 했는데 어제 안 오셔서, 아직 시골에서 안 오셨나보다 하고….”

“응. 알았어. 괜찮아. 유지연 씨가 당사자인데, 유지연 씨가 현명하게 판단하셨는데 저에게 보고하실 필요는 없어요.”

내가 그렇게 말했다.

“퉤”

찬희가 바닥에 침을 뱉는다.

꽈당.

창회가 캐틀벨을 거칠게 내려놓는다.

이중훈은 감기라도 걸렸는지 부들부들 떨고 있다.

하 그 자식들.

질투에 눈먼 남자는 추해요.

뭐…. 어쩔 거야.

“아무튼. 그랬다고요.”

그렇게 말하고 귀엽게 살짝 웃은 다음 일어선 지연이는 핸드폰을 보더니 갑자기 울상이 된다.

“왜?”

내가 물었다.

“악! 수업이요. 수업! 이거 프린트도 해가야 하는데! 늦었어요!”

그러더니 전원도 끄지 않고 노트북을 탁 덮은 다음 팔에 끼고 가방을 챙긴다.

잠깐만. 이 분위기에서 그냥 나가면 안 되는데. 나 죽는데. 여기서 종교재판 열릴 텐데?

“선배들. 저 수업 다녀올게요. 있다가 밥 같이 먹어요!”

그러더니 문을 열고 나가려고 한다.

나도 재빨리 가방을 들었다.

“나… 나도 수… 수업 가야….”

그런 나를 무형의 힘이 막았다.

내 가방 한쪽이 잡혀 있다.

여전히 지도를 보고 있는 박승환의 다른 한 손에.

“너. 나랑 같은 수업.”

그렇게 말하면서 내 가방을 잡고 있다.

“오빠. 저 먼저 갈게요!”

지연이는 그렇게 말하고 매정하게 문을 닫는다.

어?

안 되는데.

저 문이 닫히면 안 되는데?

나 죽는데!

그런 내 간절한 내 마음을 하늘이 알았는지, 다시 문이 열렸다.

그리고 열린 문틈 사이로 지연이의 머리가 빼꼼 나온다.

“한수 오빠. 고마워요. 역시 오빠가 있어서 마음이 놓여요.”

그렇게 말하고는 문이 닫힌다.

능력! 능력을 써야 해.

멈춰라.

멈춰줘 시간아!

제에에바아아아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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