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7 : 있다가 없으면 더 서럽다 (3)
나는 내 앞에 놓인 그릇을 바라보고 있다.
그릇 안에는 서현 님이 손수 끓여주신 전복죽이 담겨 있다.
냉장고에 전복도 있었어?
대단하다. 업소용 냉장고. 별 게 다 들어있구나.
아니지. 전복죽을 끓일 수 있는 이 여자가 더 대단해. 20대 초반의 서현 님은 전복죽 끓이는 법을 어디서 배웠을까?
나도 배워야겠다. 배워서 다음에 우리 서현 님 아프면 끓여줘야지.
서현 님 아프실 때 겁나 매운 물만두 튀김 토핑의 카레라이스를 해 드릴 수는 없잖아.
‘서현 님 많이 아프시죠? 이거 드시고 힘내세요.’ 하면 그 카레 그릇을 나에게 던져버리실 거야.
아무튼, 전복죽을 먹고 있는 내 맞은편에는 서현 님이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나는 서현 님이 왜 저런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잘 안다.
화가 난 거다.
자고 올 거라고 말해놓고 당일 날 바로 올라왔는데 올라왔다는 이야기를 안 해줘서, 또, 밤새도록 아프다고 끙끙 앓은 것도 이야기 안 해줘서.
나는 경험을 통해서 여자가 화났을 때는 최대한 빨리 풀어주는 것이 상책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그 사실을 알기에, 나는 서현 님이 만들어 주신 전복죽을 천천히 먹으면서, 어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밤 버스를 타고 올라와 샤워하고 누웠는데, 슬슬 몸이 아파 오더란 이야기. 그래서 자면 괜찮아지겠거니 했는데 밤새도록 아프다가 거실로 나가 약을 먹었다는 이야기.
아 물론 거실까지 기어서 갔다는 이야기는 빼고, 서현 님이 붙여놓으신 포스트잇을 읽다가 땀이 다 식어서 더 아팠다는 이야기도 빼고. 난 바보가 아니니까.
“뭐…. 그렇게 된 거죠.”
내 이야기를 다 들은 서현 님은 여전히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하고 있다.
아니, 조금 더 분노 수위가 늘어난 것 같은데?
“왜 연락 안 했어요?”
“네?”
“왜 아픈데 바로 연락 안 했어요. 연락했으면 바로 왔을 텐데.”
“아니…. 그게 그…. 뭐랄까. 너무 아픈 시간은 저기…. 그 새벽…. 이어서?”
“새벽이든, 아침이든 연락했었어야죠.”
“…아무리 그래도….”
“네?”
“아무리 그래도 새벽 4시 반인데 어떻게 아프다고, 나 병간호해달라고 이야기…. 못하죠. 뭐 그냥 감기몸살인데.”
사실 그렇잖아. 친남매라도 못 해주겠다.
아…. 친남매는 원래 안 해주던가?
“사실…. 처음 아파보는 거라 몰랐어요. 잠들면 괜찮을 줄 알았고, 좀 지나면 괜찮을 줄 알았고. 뭐. 그랬던 거죠. 그리고 그래 봤자 고작 감긴데, 감기 몸살인데, 아프다고 4시 반에 연락하는 건 좀 그렇죠. 상식에 안 맞죠.”
내가 그렇게 말했다.
사실 내 말이 맞지.
“흐음….”
서현 님은 잠시 생각하는 듯했다. 어딜 봐도 내 말이 일리가 있지.
“그래도…. 알았어요. 대신 다음에 아프시면 꼭 저에게 먼저 이야기해 주세요. 한수 씨는 제가 아프면 걱정 안 할 건가요? 간호 안 해줄 건가요?”
“걱정하죠. 간호해야죠.”
식은땀을 흘리며 흠뻑 젖어 있는 서현 님의 모습을 상상한다.
열꽃이 펴서 붉어진 얼굴. 괴로워하는 표정.
나는 천천히 그녀를 들어 욕실로 향한다.
그리고 그녀의 파자마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내가 씻겨줄게. 젖은 옷을 입고 있으면 안 돼.
그러면서 단추를 하나씩 하나씩….
놀랍구나. 부교감신경이여. 너는 이 상황에서도 절대 굴하지 않는구나.
장하다. 내 분신아. 하지만 지금은 서지 마!
파자마가 실크라 바로 티 난단 말이다!
“저도 마찬가지죠. 한수 씨가 아프면 저도 걱정되는 거 당연하죠. 음…. 생각해보니 한수 씨 말이 맞기는 맞아요. 그래도 다음부터는 몸이 안 좋으면 저에게도 이야기해 주세요. 아시겠죠?”
서현 님이 그렇게 말하며 작게 미소 짓는다.
다행이다.
저 미소는 화가 풀리셨다는 살아 있는 증거 아니겠는가?
나는 조금 더 편한 마음으로 숟가락을 들어 죽을 입으로 가져갔다.
서현 님의 고마운 마음이 죽의 온기를 타고 내 몸 안으로 전해지는 느낌이었다.
아. 그리고 또 할 말이 있었지.
“그래서 말인데요.”
“네.”
“저. 그. 능력을 잃어버린 것 같아요.”
내가 말했다.
***
전복죽을 다 먹은 나는 거실에 앉아 있다.
이미 진통제 4알을 먹었으니, 오늘 밤에는 한 알만 먹으라는 서현 님의 투약 지시에 따라 진통제를 먹고, 오늘의 마지막 코스인 서현 님께서 직접 타주신 캐모마일 차를 홀짝이며 마시고 있다.
처음에는 이거, 캐모마일 무슨 맛으로 먹나 했는데, 먹다 보니 또 은근 중독되네. 우리 서현 님 핸드메이드라 그런 것이겠지?
뭐 서현 님이 만들어 주시면 캐모마일 뿐만 아니라, 사약이라도 원샷이지.
그런 생각 하면서 내 맞은편에 조신하게 앉아 있는 서현 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서현 님, 아직 퇴근할 때 입은 복장, 딱 봐도 불편해 보이는, 불편해 보이는 만큼 또 관능적인 느낌을 주는 여성용 투피스를 그대로 입고 계시네.
나 때문에 옷도 못 갈아입으시고 이 시간까지 고생하셨구나. 그런 미안한 마음이 들어야 하는데, 왜 내 시선은 자꾸 서현 님 다리를 향하는 것일까?
한수야! 이놈 한수야! 사람은 못되어도 짐승은 되지 말아야 할 것 아니냐!
나는 속으로 그렇게 소리치면서 자꾸 서현 님의 다리로 향하는 시선을 억지로 끌어올렸다.
이런 내 저열한 욕망을 아는지 모르는지, 서현 님은 언제나와 같은 차분한 얼굴로 찻잔을 그 아름다운 입술로 가져가신다.
그나저나, 서현 님은 조금 전 내 이야기를, 능력을 잃어버렸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도 지금과 같은 차분한 얼굴을 하고 계셨다.
뭐, 서현 님이 막 ‘어머머 어떻게 해요?’ 그런 식으로 경망스럽게 반응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경망이라니. 그런 단어는 우리 서현 님에게 너무 안 어울리지.
하지만, 조금이라도 놀라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서현 님은 마치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차분한 표정을 유지하셨다.
사실 이야기를 할까 말까 엄청나게 고민을 했다.
왜냐고? 무섭잖아.
능력을 잃으셨다고요? 그러면 제가 작은 어르신, 아니, 이제 작은 어르신 아니네요. 제가 더 이상 한수 씨를 옆에서 보필할 이유가 없네요.
그런 이야기 들으면 어떻게 해.
아. 물론 우리 착한 서현 님이 그렇게 매정한 사람이 아니라는 것은 내가 익히 알고 있지만, 그래도 또 모르는 거잖아.
아무튼 서현 님은 내가 능력을 잃었다는 이야기를 들었음에도 뭐 딱히 아무런 반응이 없다.
서현 님은 무슨 생각을 하고 계시는 거지?
그렇게 생각하며 서현 님을 힐끗 훔쳐보는데, 그 타이밍에 서현 님께서 말씀하셨다.
“여쭈어보고 싶은 것이 있어요.”
“네?”
어이쿠야. 그 말도 안 되는 타이밍에 나도 모르게 또 바보 모드 터져 나왔다.
“혹시…. 이유를 말씀해주실 수 있으신가요?”
이유? 이유라.
“이유라 하심은….”
“어르신께서 작은 어르신의 능력을 거두어 가신 이유. 혹시 말씀해 주실 수 있나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다시 찻잔을 입으로 가져간다.
평소와 같은 표정, 같은 목소리인데, 어딘가 모르게 화가 나셨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벌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어요.”
“…작은 어르신이 잘못하신 것에 대한 벌이라는 말씀이신가요?”
한수 씨라고 안 하고 작은 어르신이라고 하셨네. 하지만 그걸 지적할 타이밍은 아니지.
“네.”
내 대답에 서현 님은 잠시 말없이 거실 바닥을 바라보고 계신다.
갑자기 한기가 느껴지는 것 같지?
“무슨 잘못 때문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서현 님이 다시 물으셨다.
“능력을 함부로 사용한 것. 그것에 대한 벌이라고.”
내 대답에 서현 님의 얼굴이 굳는다.
뭐랄까. 원망? 섭섭함? 조금 쎄게 말하면 분노? 그렇게 해석될 수 있는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서현 님의 굳은 얼굴에 묻어있다.
서현 님은 손에 들고 있던 찻잔을 바닥에 내려 놓았다. 그리고 바닥에 놓인 찻잔을 잠시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
“할아버지가 예전에 하신 말씀이 있었어요.”
나는 자세를 바로 하고 계속 이어질 서현 님의 말을 기다렸다.
“예전에는 가업이 강요되던 때가 있었다고. 어르신이 원하시는 모든 것을, 재산이나, 명예, 심지어 사랑하는 가족까지 모든 것을 내어놓던 시기가 있었다고.”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강렬한 혐오감이 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재산, 명예. 그런 것은 둘째 치고서라도, 가족까지?
“하지만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라고, 어르신께서 더 이상 그런 것을 원치 않으신다고, 종복들이 생각하지 않는 노예나 하인이 아닌, 생각하고, 고민하는 존재가 되길 원하신다고. 그렇게 들었어요.”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이 땅의 수호신이라는 어르신에 대해서 많은 것을 아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내가 아는 할아버지는 절대로 생각 없이 따르는 노예나 하인을 원하는 사람은 아니다. 인정하기는 싫지만, 우리 할아버지는 이성적인 사람이니까.
찻잔을 향해있던 서현 님의 시선이 천천히 나를 향해 움직였다. 서현 님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을 때, 서현 님이 다시 말했다.
“생각할 수 있고, 고민할 수 있는 존재로서 저의 생각을 말씀드리면, 저는 어르신의 이번 처사가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나를 바라보는 서현 님의 흑진주 같은 눈동자에는 아주 작은 미동조차 없었다.
“우리 할아버지가 들으신다면 분명 경을 치시겠지만, 저의 짧은 생각으로 어르신의 생각을 헤아리려 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으시겠지만, 저는 작은 어르신에게 이 말을 꼭 드리고 싶어요.”
내 시선은 서현 님의 흑진주 같은 눈동자에 고정되어 있지만, 시야 외곽에서는 서현 님의 손이 움직이는 것이 보였다.
그렇게 움직인 서현 님의 손이 내 손에 닿은 그 순간, 서현 님이 말했다.
“작은 어르신께서는, 한수 씨는 올바른 결정을 했다고. 그리고 올바른 결정을 한 한수 씨가 저는 자랑스럽다고.”
그리고 말이 끝나는 것과 동시에, 내 손을 가볍게 잡았다.
순간적으로 그 손을 통해 무언가가 흘러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이성에 손이 닿았을 때 느껴지는 전류 같은 자극적인 무언가는 아니었다.
서현 님의 마음이, 나를 믿어주는 서현 님의 그 진심이 손과 손을 타고, 내 영혼으로 흘러들어오는 그런 느낌이었다.
행복하다. 내 영혼에 스며드는 서현 님의 마음이 행복하다.
“이런 말 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지만…. 섭섭해요. 한수 씨의 마음을 몰라주시는 어르신의 결정이.”
서현 님이 말했다.
나는 아무런 말 없이 서현 님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현 님을 보면서 안아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를 저렇게 생각해주는 저 사람을 두 팔로 가볍게 안고, 등을 토닥여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 그렇게 해야겠다고 결정을 내렸다.
그리고 결정에 따라, 팔을 막 들어 올리려던 찰나.
갑자기 그 생각이 들었다.
어라? 서현 님 지금 뭔가 잘못 알고 계신데?
“저기. 서. 서현 씨?”
“…네.”
“그게. 저기. 할아버지가 벌을 내린 게, 그 뭐냐. 진철이 형 아버님 때문이 아닌데….”
“…네?”
“아니. 그거. 진철이 형 아버님 아프신 거 고쳐드린 건 할아버지도 오케이 하셨어요. 괜찮다고.”
내 말에 서현 님의 눈이 커진다.
“그러시면. 어르신께서는 어찌하여….”
나는 그래서 다시 조금 전 설명에서 빼놓았던 부분들을 서현 님께 설명 드렸다.
진철이 형 아버님 병 고쳐드린 건 할아버지도 오케이. 식권값이랑 뭐 그 가족들 간절함 추가하면 적당하다. 그렇게 말씀하셨다.
근데, 문제는 그게 아니고, 예전에 지연이가 내 사물함을 잠가버렸고, 그걸 내가 능력으로 또각 하고 열어버렸는데, 할아버지가 그걸 문제 삼았다고….
아마 할아버지가 마지막에 그 신문 보면서 어서 가라 해놓고, 막상 간다고 하니까 그때서야 이놈 벌 받아라 한 걸 보면, 이게 막 큰 벌을 내렸다기 보다는 뭐랄까, 약간 그 할아버지 특유의 고약한 심술 같은 그런 종류 같고, 내가 그동안의 경험을 바탕으로 예상하건대, 시간이 지나면 그 노인네 뭐 아무 일 없다는 듯 그냥 부드럽게 넘어갈 것 같다.
그렇게 설명해주었다.
내 말을 들은 서현 님은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보다가 나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러니까. 한수 씨의 말을 정리하면, 결국 어르신께서 선배분 아버님 일 때문에 화가 나신 것이 아니시라는 거네요?”
서현 님의 말투가 뭔가 날카롭다는 느낌을 받는 것은 나 혼자인가요?
“그리고 그 사물함 사건은 저번에 축제 때 봤던 그 후배, 한수 씨 음식 만들 때 옆에서 거들던 ‘예 쁜 후 배’가 곤란할까 봐 한수 씨가 직접 능력을 사용하신 거고요.”
“아니. 뭐. 완전히 트… 틀린 말은 아닌데. 그게 저기. 지연이를 위해서라기보다는….”
내 대답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서현 님은 내 손을 잡고 있던 손을 슬그머니 빼신다.
어? 빼시면 안 되는데? 아직 나는 서현 님의 손이, 온기가, 마음이, 진심이 필요한데요?
“그렇군요. 제가 착각을 하고 있었네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더니, 바닥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단순히 본인의 찻잔만을 집어 든 것도 아니다. 내 찻잔까지 집어 드셨다.
“밤이 많이 늦었네요. 이제 그만 주무셔야 겠어요.”
그렇게 말하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킨다.
명백한 축객령이다.
아니. 이대로 물러설 수는 없지.
분위기 좋았는데. 진짜 좋았는데. 오늘 진도 빼는 날이었는데!
“아니. 저기. 서. 서현 님.”
“밤이 늦었습니다. 다음에 이야기하시죠.”
그렇게 말하고는 양손에 찻잔을 들고 주방으로 걸어가는 서현 님의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내가 가진 모든 의지를 담아 내 멍청함을 저주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