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 : 있다가 없으면 더 서럽다 (2)
끝이 무딘 나무젓가락으로 콕콕 지르는 것 같던 아픔은, 빨랫방망이로 온몸을 두드리는 아픔으로, 그리고 그 빨랫방망이에 바늘을 박아 놓은 것 같은 아픔으로 점점 바뀌었다.
아파서 몸을 뒤척이면 더 아프다. 더 아픈데 또 그렇게 가만히 있을 수 없어 또 몸을 뒤척이면 더더더 아프다.
한 번도 못 본 엄마가 보고싶을 정도로 아프다.
나는 천 근 같은 팔을 움직여 핸드폰을 잡았다.
지금 몇 시지?
새벽 4시 반.
침대에 누운 시간이 대략 11시.
그때부터 슬슬 아파왔으니, 거의 7시간 정도를 계속 아팠구나.
자면 괜찮아지겠지. 괜찮아질 거야. 이런 생각으로 버텼는데, 정말 잠 한숨 못 자고 밤새도록 끙끙 앓았다.
나는 천천히 몸을 움직였다.
약이 있을까? 타이레놀이 있을까?
아세트아미노펜으로 만들어진 것이라면 뭐든지 하나 정도는 있지 않을까? 이부프로펜도 좋고.
왜 공대 개그 중에 그런 거 있잖아. 화학자가 약국 가서 ‘아세트아미노펜 주세요.’ 하니까 약사가 ‘타이레놀이요?’ 하고 묻고. ‘아. 그거요. 정말 안 외워지는 이름이죠….’ 뭐 그런 개그.
그게 개그냐! 어디가 웃기냐!
나는 만 근 같은 몸을 움직여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온몸이 비명을 지르는 것 같다.
움직이지 마! 이 주인 놈아! 그대로 버티고 있어! 그렇게.
하필 또 오늘 서현 님은 내가 올라오는 것을 몰랐으니 본가에 갔다. 그 말은 이 넓은 집에 나 혼자 있다는 이야기다.
뭔 놈의 침대가 이리도 넓을까. 뭔 놈의 방이 이리도 큰 것일까. 뭔 놈의 집이 이리도 거대한 것일까. 도와줄 이 하나 없는 이 넓은 집이 오늘따라 너무 서글프구나. 팔만 뻗으면 내가 원하는 것을 손에 넣을 수 있었던 내 하숙집이 그립구나.
망할 할배!
나중에 힘없고 아플 때 얼마나 괄시를 당하려고.
두고 보자. 손자는 잊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거의 기다시피 거실로 향했다.
거실로 가서 서랍을 뒤졌다.
제발. 타이레놀 한 알만. 게보린도, 파나돌도, 뭐든지 진통제 한 알만 있었으면 좋겠다는 심정으로 나는 서랍을 뒤적거렸다.
있다! 하얀색 바탕에 빨간색 십자가가 붙어있는 약상자가.
나는 있는 힘껏 뚜껑을 열었다. 약들이 눈이 들어왔다.
아니. 약뿐만이 아니다. 가지런히 놓여 있는 약상자에 붙어있는 포스트잇들.
나는 그중에 하나를 꺼내 들었다.
(해열진통제 : 열이 있을 때 드세요. 기본은 한 알이지만 많이 아프면 두 알까지도 괜찮아요. 한 알에 진통제 성분 500mg이 들어있는데, 절대로! 절대로! 하루에 8알 이상 드시면 안 돼요! 절대로!!! 술 먹은 날에는 이 약 드시면 안 되고, 이 약 드시면 절대 술 마시면 안 돼요!)
노란색 포스트잇에 깨알 같은 글씨가 적혀 있었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웃음을 지었다.
펜을 손에 들고 ‘절대로’에 느낌표를 3개씩 적고 있는 서현 님의 모습이 떠올라 온몸이 아픈 와중에도 웃음이 나왔다.
상자를 빼곡히 채운 모든 약에는 포스트잇이 다 붙어있었다.
나는 몸이 아픈 것도 잊고, 약을 하나씩 꺼내서 포스트잇에 쓰여 있는 글들을 다 읽어 보았다.
***
결국, 나는 다음날도 학교도 못 가고 온종일 집에서 누워있었다.
그나마 해열진통제를 먹고서야 조금이나마 잠들 수 있었다. 그렇게 잠깐 잠들었다가, 다시 깨어나 냉장고 뒤져서 대충 챙겨 먹고, 다시 약 먹고, 자다가 일어나 또 약 먹고, 온종일 잤더니,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왔다.
고향 집에 있을 때는 아파도 할아버지가 뭐 간호해주고, 신경 써주고 그랬던 기억은 없다.
보통 하나뿐인 손자가 아프고 그러면 뭐 찬 물수건도 이마에 올려주고 그러는 거 아냐? 피고 눈물도 없는 냥반 같으니!
다시 생각해보니…. 아픈 적이 없구나. 감기 한번 걸려본 적 없구나.
이게 내 첫 감기구나! 첫 몸살이구나!
후후후. 첫 경험을 했으니, 나도 이제 어른인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린다.
어? 뭐지? 서현 님이 벌써 오셨나?
“한수 씨? 한수 씨 오셨어요? 들어가도 될까요?”
서현 님이 오셨구나.
너무 비몽사몽간이라 알림 소리도, 문 여는 소리도 듣지 못했나 보다.
“네. 들어오세요.”
이런. 목소리가 갈라졌다. 오늘 처음 말해서 그런갑다.
내 대답에 문이 살짝 열리고 서현 님이 조심스럽게 들어온다.
회사에서 퇴근했는지 정장 차림이다.
조심스럽게 들어와 나를 바라보는 서현 님의 눈이 커진다.
“괜찮아요? 한수 씨? 어디 아파요? 어머?”
나에게 다가오다 침대에 손을 대고 깜짝 놀란다.
하루 종일 흘린 땀에 침대 시트가 축축해져 있는데, 거기에 손을 댔나 보다.
서현 님은 잠시 나와 침대를 번갈아 보더니 축축한 시트 따위 상관없다는 듯 내 침대로 올라온다.
“한수 씨. 잠시만요.”
그러더니 손을 들어 내 이마를 짚었다.
나는 미처 그녀를 막지도 못하고 이마를 내주고 말았다.
그녀는 그렇게 내 이마에 손을 대고 잠시 있었다.
차가운 서현 님의 손이 내 이마에 닿자 기분 좋은 서늘함이 내 이마를 타고 들어왔다.
“언제부터 아팠어요?”
그녀는 내 이마에 그대로 손을 대고 말했다.
“아…. 그…. 좀 전부터?”
나는 거짓말을 했다.
밤새 아팠다 그러면 혼날 것 같아서.
“언제부터. 아팠어요?”
서현 님이 다시 물었다.
“어제…. 밤?”
“어제 올라왔어요?”
그녀가 손을 뗐다. 그리고는 두 손으로 내 얼굴에 흘린 땀을 닦아주면서 물었다.
“…네.”
“근데 왜 연락을…. 일단 알겠어요. 우선 그 이야기는 나중에 하기로 하고. 약은요? 약은 먹었어요?”
“그 포스트잇 붙어있는 해열진통제 먹었어요.”
“몇 알?”
“4알이요.”
“한 번에?”
“아뇨. 두 번에. 나눠서.”
내가 그렇게 말하자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녁은 아직 안 먹었죠?”
“네. 근데 딱히 생각은 없는데….”
그러자 그녀가 무서운 표정을 짓는다.
“없는데…. 뭔가 먹고 싶네요.”
빠른 태세 전환.
사람은 자고로 눈치가 빨라야 하는 법.
내 말에 그녀가 살짝 웃는다. 하지만 금세 단호한 표정으로 돌아가며 말한다.
“우선은 옷부터 갈아입어야겠어요.”
몸을 일으켜 방을 나가더니 잠시 후에 다시 돌아온 그녀의 손에는 파자마가 들려있었다.
이 집을 처음 준비할 때 구입해 놓은 내 파자마였다. 물론 나는 트레이닝복을 입거나 보통 팬티만 입고 자니까, 한 번도 입어본 적은 없지만.
파자마를 내방 욕실 입구에 내려놓더니 다시 내 방에 있는 옷장 서랍을 열었다.
어…. 거기는 그…. 내…. 속옷이 있는데요? 팬티 서랍장인데요?
그녀는 아무렇지도 않게 맨 위에 있는 팬티와 내의를 집어 파자마 위에 올려놓더니 나에게 말했다.
“한수 씨. 우선 옷부터 갈아입으세요. 욕실에 들어가서 미지근한 물수건으로 몸에 남아 있는 땀 전부 닦아 낸 다음에 이 옷으로 갈아입으세요. 샤워는 안 돼요. 체온이 급하게 올랐다 내려가는 건 별로 도움 안 되니까. 아니다. 제가 씻겨드릴게요.”
그러면서 그녀는 재킷을 벗는다.
아니! 이 아가씨가! 우…. 우리가 아무리 그…. 미…. 미…. 미래를 약속했다고 해도!
아니지. 약속한 적은 없지.
아무튼, 그래도 너무 진도 빠른데요? 남자에게는 시간이 필요한 법이에요!
아니지.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할 때가 아니군.
“괜찮아요! 저 혼자 할 수 있어요.”
나는 그러면서 재빨리 몸을 일으켜 욕실 문 앞에 놓인 파자마와 내 속옷을 집어 들었다.
“괜찮으시겠어요? 제가 도와드릴 수 있는….”
“괜찮습니다! 그럼 저 씨…. 씻고 올게요!”
나는 그렇게 말하고 재빨리 옷을 들고 욕실로 들어갔다.
휴우. 내 정조가 위협받는 순간이었다.
아직 결혼도 안 했는데! 훗. 함부로 알몸을 내보일 수는 없지.
내가 얼마나 어려운 남자인데. 쉽게 마음을 줄지언정 몸은 줄 수 없지…가 아니라.
헛소리 그만하고 빨리 씻고 나가자. 아…. 힘들다.
나는 수건을 꺼내 서현 님 말처럼 미지근한 물에 푹 담갔다가 꺼내 충분히 물을 짜낸 후 온몸을 닦아 냈다.
열이 좀 내려 통증이 덜 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맨살에 닿으니 아프긴 아프네.
참나. 감기나 몸살 이런 거 안 걸렸을 때는 이렇게 아픈 줄 몰랐지. 그래서 친구 놈들이 아프다고 하면 엄살 부린다고, 근성으로 다 이겨낼 수 있다고 그랬는데. 지금 생각해보니 내가 나쁜 놈이었다.
수건 두 개를 써서 온몸의 땀을 다 닦아 내고 마른 수건으로 물기마저 다 닦아 낸 다음 서현 님이 직접 간택해주신 팬티와 파자마를 입었다.
마음 같아서는 샤워를 하면 더 상쾌하지 않을까 싶었지만, 서현 님이 하지 말라니까. 하지 말아야지. 후후후. 말 잘 듣는 착한 한수입니다.
대충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 나오자 서현 님이 둘둘 만 내 침대 시트를 문 옆에 밀어 둔 다음 욕실로 들어가 갈아입은 내 옷을 들고 나왔다.
“금방 저녁 준비할 테니까 우선은 조금 더 쉬고 계세요.”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는 내가 벗어 놓은 옷과 침대 시트를 둘둘 말아 두 손으로 들고 나갔다.
회사에서 막 돌아와 옷도 갈아입지 못한 상태로 두 손 가득 빨랫감을 들고 나가는 뒷모습을 보면서 나는 알 수 없는 기분을 느꼈다.
미안함? 고마움? 뭐랄까. 그렇게 하나로 규정되지 않는 감정이 내 마음에 찾아왔다.
***
서현 님이 깔아준 새 시트는 뽀송뽀송했다. 밤새 흘린 땀에 질척질척했던 시트에 왜 바보같이 누워있었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몸을 씻는 그 짧은 순간에 시트를 갈고, 이불도 교체하고 페브리즈까지 뿌렸는지 밤새 괴로워했던 그 공간과 과연 같은 공간일까 싶을 정도로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노크 소리가 또 들리더니 서현 님이 문을 살짝 열었다.
“괜찮으세요? 좀 어때요? 일어나지 마세요.”
나는 몸을 일으키려다 그 소리에 다시 몸에 힘을 풀었다.
“많이 괜찮아졌어요.”
내가 말하자 그녀가 웃었다. 마치 말 잘 듣는 유치원생을 본 유치원 선생님 같은 미소를 보니….
서지 마! 이 자식아!
“다행이네요. 병원 안 가봐도 될까요?”
“네. 괜찮아요. 오늘 자면 괜찮을 것 같아요.”
“흐음….”
내 말에 그녀는 다시 뭔가 불만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알 것 같다. 당장 병원에 끌고 가 볼기짝에 주삿바늘이 들어가는 것을 보고 싶어 하는 표정이다.
“진짜 괜찮아요. 어제와 비교하면 거의 완치나….”
“잠시만요.”
서현 님은 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내 옆으로 다가와 침대에 앉았다. 그리고 누워있는 내 얼굴 옆으로 무언가를 갖다 댔다.
무언가가 귓속으로 들어온다.
나는 나도 모르게 움찔했다.
아니. 그렇게 급하게 삽입하면. 주…. 준비 동작도 없이….
삑-
버저음 소리와 함께 내 귀에 들어가 있던 체온계가 빠져나온다.
서현 님은 내 귀에서 빠져나온 체온계를 손에 들고 미간을 찌푸리며 액정화면을 봤다.
“며…. 몇 도에요?”
내가 잘못하고 눈치 보는 유치원생처럼 물었다.
“38.2도요.”
“아…. 다행이네….”
“역시 병원에 가는 게 좋겠어요.”
“네?”
“주사 맞으면 바로 열 내려갈 거예요.”
“….”
“차 준비할게요.”
서현 님이 몸을 일으키려 했다.
“내일!”
“네?”
몸을 일으키던 서현 님이 내 다급한 외침에 몸을 돌렸다.
“내일! 내일 아침에도 열 안 떨어지면 바로! 바로! 아무런 군말 없이! 병원에 갈게요! 꼭! 진짜로!”
내가 말했다.
내일! 내일 꼭 간다. 갈게요! 그러니 오늘은 그냥.
“….”
서현 님은 뭔가 불만스러운 얼굴로 나를 보고 있다.
어떻게 혼을 낼까 하는 유치원 선생님의 표정이다.
“진짜요. 진짜. 근데. 저 진짜 괜찮아졌어요. 엄청 좋아졌어요. 그러니 하루만. 오늘 밤만. 내일도 아프면 서현 씨가 말려도 갈게요! 꼭 갈게요!”
그녀는 그렇게 말하는 내 얼굴을 보더니 작게 한숨을 짓는다.
“알겠어요. 그럼 내일은 꼭. 흐음. 죽 끓일까 하는데 괜찮죠?”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고 다시 살짝 웃어주었다.
참말로…. 저 미소를 보니 그냥 병원 가야 할 것 같다. 병원 가는 게 맞는 것 같다.
갈게요. 서현 님이 가라면 병원이든 지옥이든 가야죠.
서현 님이 방을 나가자 뭔가 묘한 기분이 또 들었다.
누군가가 나를 신경 써준다는 것. 물론 할아버지도, 친구들도 나를 신경 써줬었지만.
그래도 뭔가. 여자 사람이. 특별한 여자 사람이 특별하게 신경 써준다는 기분이 묘하다. 뭔가 묘한 기분이 든다.
까놓고 말해서 졸라 기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