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 : 능력은 쓰라고 있는 거지 (6)
한가서고(韓家書庫).
나는 그렇게 쓰여 있는 간판을 바라보고 있다.
빛바랜 간판, 서점만큼 세월의 풍파를 맞은 간판은 언제나처럼 변함없이 이곳이 할아버지가 당신의 집이자, 정원이자, 무덤이 될 곳이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오전 9시가 조금 지난 시간, 나는 고향집 익숙한 거리에 서서 그 간판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냐고?
첫차를 타고 내려왔으니까.
일요일, 그러니까 어제 나는 진철이 형 아버님에게 신력을 사용했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내가 할아버지에게 직접 해야 한다고 결정을 내렸다.
아마 할아버지는 이미 알고 있을 것이다. 내가 어제 신력을 사용했다는 것을.
하지만 할아버지에게서는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할아버지의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지 밤새도록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다. 할아버지는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내가 말해주기를.
뭐, 설사 할아버지가 몰랐다고 해도, 내가 이야기를 하긴 해야지.
무서워서 그런 게 아니다. 숨겼다가 나중에 들켰을 때, 감당 못 할 분노가 내 오토바이를 날려버렸던 번개처럼 내려치는 것이 무서워서 미리 넙죽 엎드리겠다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이야기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한 행동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뭐, 책임진다고 해도, 내가 책임질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어? 할아버지 만나서 있는 그대로 말씀드리고 내리는 벌 받는 거지. 설마 하나뿐인 손자의 목숨을 거두시기야 하겠어?
음…. 자신하지 못하겠는데. 아직 정정한 저 양반, 손자는 새로 만들면 되지! 그러면서 내 머리에 하이킥을 날리지 않는다고 자신을 못 하겠어.
설마…. 아니겠지.
나는 등골을 스치는 한기를 느끼며 다시 ‘한가서고’라고 쓰여 있는 간판을 바라보았다.
간판을 바라보며 나는 다시 한번 생각했다. 어제 내가 한 행동에 단 하나의 후회도 없다고.
다시 어제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시간을 멈추고, 진철이 형 아버님의 눈을 바라본 후, 신력을 사용했을 것이다.
그리고, 할아버지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가자. 가서 당당하게 책임을 지자.
나는 그렇게 속으로 다짐하고, 서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
서점은 언제나의 모습 그대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유치원 시절, 유치원 선생님 손을 잡고 하원 했을 때에도, 초등학교 시절, 온몸이 흙투성이가 되어서 하교했을 때에도, 중학생 시절, 애들과 한바탕 치고받고, 코피를 질질 흘리며 돌아왔을 때에도, 고등학교 시절, 야자 끝나고 늦은 밤의 차가운 공기를 가르며 집에 왔을 때에도, 할아버지의 책방은 언제나 변함없이,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자리를 지키고 있는 것은 서점만이 아니다.
문을 열고 들어가면 언제나처럼 할아버지도 당신이 애용하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책을 보고 계실 것이다.
아니. 아침이니까 조간신문을 보고 계실 수도 있겠군.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다음, 서점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들어가자.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지.
아니지. 잡아먹히는 건가….
내가 문을 열자, 문에 달린 작은 종이 땡그랑 소리를 내며 내가 왔음을 알려주었다.
할아버지는 예상한 그대로, 언제나 그 자리에 앉아 언제나 애용하는 돋보기안경을 쓰고, 언제나처럼 조간신문을 읽고 계셨다.
“왔느냐.”
할아버지가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했다. 마치 내가 내려올 것을 알기라도 하셨다는 듯.
“…다녀왔습니다.”
다녀왔습니다. 언제나 이 문을 열며 하는 인사.
“그래.”
할아버지의 시선은 여전히 신문을 향하고 있다.
나는 높은 곳에 있는 책을 꺼낼 때 주로 사용하는 보조 의자를 끌어다가 할아버지 맞은편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할아버지는 한참 동안 신문을 바라보다, 다음 면으로 넘기고 나서야 말씀하셨다.
“어쩐 일이냐?”
나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힘을 썼습니다.”
군더더기는 필요 없다. 그저 있는 사실 그대로 말씀드릴 뿐이다.
“그래? 어떻게 썼느냐?”
할아버지의 시선은 여전히 신문에 고정되어 있다. 말투도 평상시와 다름없이 느긋하다.
그런 할아버지의 모습과 말투에서 나는 이유 모를 편안함을 느꼈다. 마치 ‘아낌없이 주는 나무’처럼 할아버지라는 거목이 드리운 가지가 만들어 준 그늘 아래에서 잠시 다리쉼을 하는 듯한 그런 편안함이었다.
나는 할아버지에게 진철이 형과 있었던 일들을 이야기해 주었다.
갑작스러운 이사, 진철이 형의 격려와 식권, 진철이 형 아버님 이야기, 축제 때 있었던 일, 그리고 어제 병원에서 진철이 형 가족들을 만났고, 신력을 사용한 이야기를.
할아버지는 여전히 신문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아무런 말 없이 내 이야기를 듣고만 있었다.
“….그래서. 뭐. 그렇게… 할아버지 허락 없이 신력을 썼습니다.”
나는 모든 말을 마치고 숨을 크게 한번 내쉬었다.
할아버지에게 이야기를 하면서 진철이 형 아버님에게 능력을 사용한 것이 옳은 일인지 다시 생각해보았다.
다시 한번, 같은 상황을 맞이한다 해도 진철이 형 아버님에게 신력을 썼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함부로 능력을 사용한 것과 관련해, 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더라도, 틀리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이야기를 다 끝내자 응어리졌던 마음 한켠이 풀어지는 듯한 시원함이 느껴졌다.
내 이야기가 다 끝나고 나서야 할아버지는 나를 바라보았다.
“하나 물어보자꾸나.”
할아버지가 손에든 신문을 접으면서 말씀하셨다.
“앞으로 살면서 그러한 일들이 많을 것이다. 어려운 사람들을 많이 만나게 될 것이고, 기적을 바라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듣게 될 것이다. 그때는 어찌하겠느냐.”
할아버지의 질문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을 준비해두었다.
정말 많이 생각하고 고민해 본 화두였으니까.
“모르겠습니다.”
내 대답이었다.
“모르겠다?”
“네.”
“그건 적절치 않은 대답이구나.”
“…많이 생각해봤습니다. 과연 이러한 경우가 이번 한 번뿐일까? 아니라고…. 그건 아닐 것이라고…. 아니겠죠.”
내 말에 할아버지는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보고만 계신다.
“그런데 어제의 제 행동이 어디서 나왔는지 생각해봤습니다. 동정이었을까? 진철이 형이 불쌍해서, 진철이 형 아버님이 하시는 마지막 인사가 가슴 아파서? 쾌차라는 단어가 아픔으로 다가가는 그 가족을 동정해서?”
할아버지는 손에든 신문을 내려놓으시고는 담뱃갑을 집어 드신다.
“피겠느냐.”
“아닙니다.”
내가 고개를 젓자, 당신께서는 담뱃갑을 들고, 문을 열고 나가서 담배에 불을 붙이신다.
나도 따라 나가 그 옆에 섰다.
“아닌 것 같아요. 동정이 아닌 것 같아요. 동정을 싸구려 감정이라고 생각하진 않아요. 동정은 공감의 다른 이름이니까. 하지만 전 동정이나 공감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다만…”
“다만?”
“타고난 재능은 저의 것이 아니라는 말이 떠올랐어요. 제가 할아버지의 말처럼 신체(神體)를 타고났고, 신력을 가지고 있는 상황에서 도움받을 자격이 있는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롤스의 말이구나.”
“네. 저는 신의 예비 후보자라고 하지만 아직은 사람이니까. 신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스물한 해를 사람으로 살았고, 그래서 아직은 사람으로서 생각하니까요.”
“사람으로서.”
“네. 사람으로서 생각하고, 사람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진철이 형은… 고3 때 독서실을 나와 울면서 중국집에 들어가 배달을 시켜달라고 했던 진철이 형은, 대학을 포기하고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든 진철이 형 여동생은, 그런 남매를 키워낸 진철이 형 아버님은 도움받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어요. 저는 도움을 줄 능력이 있고, 단순히 운으로 타고난 능력은 온전히 제 것이 아니라 공유함으로써 그 가치가 있다고 배웠으니까요.”
바로 할아버지로부터.
“흠…”
“만약 앞으로도 비슷한 상황이 발생했을 때, 어떻게 할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그런데 그때 동정으로 누군가에게 능력을 남발하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아니면 그때그때 상황에 맞춰 이 사람에게는 기적을, 저 사람에게는 절망을 주는 것이 옳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솔직히 모르겠어요. 그것이 제가 내린 결론입니다.”
할아버지는 여전히 하늘을 바라보고 계신다.
그렇게 잠시 말없이 하늘을 보다가 다시 담뱃갑을 꺼냈다. 그리고 한 개비를 꺼내 나에게 내미셨다.
“받아라.”
“아닙니다.”
“받아. 너 고등학교 때부터 내 담배 훔쳐 피는 거 다 알고 있었다.”
할아버지가 그렇게 말했다.
“….”
“예의나 마음이라는 것은 담배를 숨어서 피고, 술잔을 돌려서 마시고 하는 데 있는 게 아니다. 그런 것은 그저 보여지는 모습일 뿐, 본질은 마음 깊은 곳에 있으니.”
나는 할아버지에게서 담배를 받았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나에게 담뱃불을 붙여주셨다.
“앞으로 많은 고민이 있을 것이다. 고민 끝에 내리는 많은 결정이 있을 것이고, 결정에 대한 많은 걱정과 우려가 있을 것이다. 내가 해왔고, 네 아비가 했었고, 네가 해야 할 업이다.”
할아버지는 그러면서 담배 연기를 길게 내뿜었다.
“능력은 득이자 독이다. 어디에, 누구에게 어떻게 왜 사용하느냐에 따라 득이 되기도, 독이 되기도, 기적이 되기도, 저주가 되기도 한다. 나는 네가 그것을 알았으면 싶다.”
“….”
“아직 멀었다. 더 오랜 시간, 더 많은 고민을 한 후에야. 그래. 사람으로서 스물한 해를 살았으니, 이제 사람이 아닌 그 이상의 존재로서 더 오랜 삶을 살아야 하겠지. 그러나 그런 사람으로서의 고민이 없으면 그저 흉신(凶神), 악신(惡神)에 불과할 뿐이다.”
“…네.”
“식권을 받았다고?”
“…네.”
“얼마이더냐. 식권값이.”
“4천 원입니다.”
할아버지는 담배를 휴대용 재떨이에 비벼 끄고 나에게 건넸다. 나도 재빨리 담배를 껐다.
“능력은 쓰라고 있는 것이다.”
할아버지는 어딘가 모를 하늘 저 멀리에 시선을 준 채로 말했다,
“그러나 아무렇게나 쓰라는 말은 아니다. 올바른 장소에, 올바른 목적으로, 올바른 대상에게 쓰라고 있는 것이다.”
나도 할아버지의 시선을 따라, 아침 햇살을 머금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4,000원이라. 거기에 너에게 보여준 그 청년의 마음을 더하고, 그 가족의 간절함을 더하면, 네가 사용한 능력 값으로 적당한 듯하구나.”
그렇게 말하고 할아버지는 내 어깨에 손을 얹었다.
“능력은 쓰라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온전히 너의 몫이다. 그러나 네가 말한 대로 고민과 결정에 대한 책임 또한 온전히 너만의 것이다.”
나는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할아버지의 말. 손자에게 예의범절을 가르침에 있어서 노력을 다하지 않은 적이 없다는 말이 떠올랐다.
“내려온 김에 책 정리를 좀 하자꾸나. 밥은 먹었느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집에 가면 된장찌개 끓여 놓은 것이 있으니 먹고 다시 오너라. 에이 못난 놈. 끼니는 제때 챙겨 먹어야 몸이 안 상하는 법이다.”
할아버지는 그렇게 말하고, 내 어깨를 두드려 주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