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 : 능력은 쓰라고 있는 거지 (4)
진철이 형은 산책로를 따라 천천히 걷고 있었다.
물론 혼자는 아니었다.
진철이 형의 손에는 휠체어의 손잡이가 잡혀 있었고, 휠체어에는 어르신 한 분이 앉아 계셨다.
마르신, 멀리서 보기에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로 아주 많이 마르신 어르신이었다.
휠체어 옆으로는 아직 소녀티를 채 벗지 못한 젊은 여자가 보조를 맞춰 같이 걸어가고 있었다.
그 세 사람을 보는 순간, 영화처럼 진철이 형이 나에게 말하던 장면이 떠올랐다.
아버지의 투병, 그리고 힘들어하는 가족들을 위해 실업계로 진로를 택했다던 여동생. 졸업하자마자 취직하고, 야간에 또 아르바이트를 하고, 주말에는 편의점에서 일한다는 여동생의 이야기를 하던 진철이 형의 얼굴이 영화 속 장면처럼 떠올랐다.
“맞네요. 진철이 형.”
나는 서현 님에게 양해를 구하고 진철이 형에게 인사를 하기 위해 그쪽으로 발을 옮겼다.
조금씩 거리가 좁혀졌고, 세 사람의 모습이 조금 더 자세하게 눈에 들어왔다.
휠체어를 밀고 있는 진철이 형의 모습은 평소에 학교에서 보던, 무겁고 진중한 얼굴이 아니었다. 애써 밝은 척이라도 하는지, 평소보다 한 톤 높은 목소리로 휠체어에 앉아 있는 어르신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아버지로 보이는 분. 아마 노인이라고 불릴 나이는 아니시겠지만, 오랜 투병 생활 때문인지 고향에 계신 할아버지보다 더 나이 들어 보이는 진철이 형 아버님은 얼굴에 미소를 띠고 진철이 형의 이야기를 들으며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빠 그거 뻥이지?”
여동생으로 보이는 여자가 진철이 형의 팔을 때리면서 말했다.
남매.
그 단어가 딱 어울린다는 느낌이 드는 두 사람이었다.
“아니야, 넌 이 오빠를 뭘로 보고!”
한 톤 높은 진철이 형의 목소리. 거기에 더해지는 여동생의 장난스런 응대. 그리고 그 대화를 흐뭇하게 듣고 있는 진철이 형 아버지의 미소에서 난 왠지 모를 어떤 슬픔이 어렴풋이 느껴졌다.
“형! 진철이 형.”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진철이 형을 불렀다.
“어? 어? 한수야.”
내가 부른 소리에 잠시 두리번거리던 형은 나를 보더니 놀란 눈으로 날 바라본다.
“형. 안녕하세요. 여기서 보네요.”
내가 다가가며 인사하자 아버님과 여동생의 시선이 나에게로 향했다.
진철이 형은 나를 아버님에게 날 소개시켜 주었다.
“아버지. 학교 후배예요. 한수야. 우리 아버지야.”
형의 말을 들은 아버님은 조금 전 남매에게 보여주었던 인자한 미소를 나에게 지어 주면서 말씀하셨다.
“반가워요. 진철이 학교 후배군요.”
“안녕하세요. 아버님. 처음 뵙겠습니다. 진철이 형 후배 한수라고 합니다.”
나는 아버님에게 다가가 고개를 꾸벅 숙여 인사했다.
“그래요. 진철이가 학교에서 잘해주나요?”
“네. 진철이 형은…. 의지할 수 있는 형입니다. 제가 가장 따르는 선배이기도 하고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아버님의 얼굴에 미소가 조금 더 짙어졌다.
“그렇군요. 다 컸는데도 자식 칭찬을 들으니 기분 좋은 게 애비의 마음인가 봅니다.”
그렇게 말씀하시곤 작게 고개를 끄덕이신다.
아버님의 그 얼굴 표정에서, 그 작은 끄덕임에, 어딘가 모르게 선비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생각해보니 진철이 형도 좀 어두워서 그렇지 약간 선비 같은 분위기가 있기는 했지.
“그나저나. 어쩐 일이야. 여긴?”
진철이 형이 그렇게 말하면서 내 뒤에 서 있는 서현 님을 바라본다.
“그냥 잠깐 병문안. 병문안이라고 해야 하나, 잠시 뭐 아는 분 좀 만나려고요.”
나도 그렇게 이야기하면서 형 뒤에 서 있는 여자분을 보았다.
“안녕하세요. 진철 오빠 하나뿐인 여동생입니다.”
내 눈빛을 받은 그녀가 센스 있게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한수 씨 친구예요. 강서현입니다.”
서현 님도 마찬가지로 진철이 형과 아버님에게 인사를 드렸다.
얼마 전에 지연이에게 센스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이렇게 타이밍 좋게 치고 들어오는 두 사람을 보니 내가 센스가 없기는 없나 보다.
형. 형도 마찬가지입니다. 어버버한 표정 짓지 마요.
“형도…. 문안 온 거예요?”
병문안이라고 할까 하다 병이라는 단어는 뺐다.
이 정도 센스는 있어야지.
“어. 뭐. 그냥. 오랜만에. 아버지도 뵙고. 겸사겸사.”
형의 말에서 뭔가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단순한 병문안은 아니구나.
“오빠. 아까부터 담배 피우고 싶어서 안절부절못하더니 잘됐네. 가서 한 대 피우고 와. 아빠랑은 내가 있을게.”
여동생이 진철이 형의 팔을 지긋이 떠밀며 그렇게 말했다.
“그래요. 한수 씨도 다녀오세요. 저는 아버님과 잠시 이야기하고 있을게요. 안녕하세요. 아버님. 진철 씨가 다녀오는 동안 저랑 같이 산책하셔도 괜찮으시죠?”
그러면서 진철이 형 대신 휠체어 손잡이를 잡는다.
진철이 형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서현 님에게 손잡이를 내줬다.
“어머. 언니. 제가 밀게요. 오빠는 빨리 갔다 와.”
그러면서 또 손잡이를 잡는다.
갑작스러운 손잡이 쟁탈전.
“다녀오너라. 밖에서 후배를 만났는데, 인사만 하고 보내는 것은 예의가 아니지.”
아버님이 그렇게까지 말하자 진철이 형이 알겠다는 의미로 고개를 끄덕인 후 나에게 눈을 돌렸다.
“잠시… 다녀올까?”
나도 그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일순간 이렇게 합의가 이루어지자, 아버님과 두 젊은 여성은 천천히 휠체어를 밀면서 산책로를 따라 멀어져갔다.
놀랍다. 여자들이 친화력이란.
저 봐봐. 저 여동생이라는 사람 벌써 우리 서현 님 팔 때리고 있네.
감히 우리 서현 님을! 하고 기분 나빠야 하지만, 서현 님에게 지어 주는 웃음이 너무 좋아서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담배나 한 대 피우고 오자.”
그 모습을 지켜보던 진철이 형은 어느새 익숙한 표정과 톤으로 나에게 말하고 몸을 돌렸다.
학교에서 보았단 약간 우울한 표정, 그리고 한 톤 낮은 목소리로.
***
“퇴원이요?”
“음.”
진철이 형은 오늘 퇴원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병원에 들렀다고 했다.
정원과 산책로가 유명한 중앙 서울 의료원에서 아버지와 마지막 산책을 즐기기 위해서. 그래서 여동생도 오늘 편의점 알바를 가는 날인데 양해를 구하고 왔다고 이야기했다.
“퇴원…하시는 건가요?”
“음. 뭐. 그렇게 됐어.”
진철이 형은 그렇게 말하며 두 번째 담배를 꺼내 불을 붙였다. 그리고는 깊게 빨아들인 다음 가슴 속에 답답함을 풀어내려는 듯 길게 연기를 뱉어냈다.
“한의학에서 그러더라. 마음이 아프면 폐가 제일 먼저 상한다고. 그래서 스트레스 많이 받는 직종에 폐암이 많다고. 마음을 달래기 위해 담배를 피우고, 담배를 피우면 폐가 상하고. 참 아이러니하다.”
“….”
“병원에서 제안을 받았어. 호스피스 병동으로 옮기는 것이 어떻겠냐고.”
호스피스 병동.
말기 환자에게, 더 이상 가망이 없는 환자에게 육체적 고통을 덜어주는 완화치료를 제공해주는 시설.
“뭐. 그렇지. 바보가 아닌 이상. 어떤 의미인 줄 다 알지. 아버지는 집으로 가시겠다고. 이제 편히 쉬고 싶다고.”
“그렇군요,”
나도 담배를 꺼냈다.
담배가 필요한 이야기였다.
“그것도 그렇고. 병원에서도 더 이상 미룰 수 없다고. 그런 이야기도 하고.”
진철이 형이 나에게 불을 붙여주었다.
“…병원비요?”
“응. 조금 조금씩 중간 정산하면서 버티기는 했는데. 이제는 힘들다고 병원에서도 생각했는지. 담당 교수님을 얼마 전 만났는데….”
다시 깊게 빨아들인다. 담배 끝에 피어오르는 환형의 불꽃이 진하게 빛을 발한다.
“가망이 있다면 끝까지 치료해보겠는데, 남은 가족들이 그런 부담을 안고서까지 치료해야 한다고 말할 수가 없다고. 그렇게 이야기하더라.”
“…그랬군요.”
“좋은 분이야. 그런 말. 쉽게 할 수 없는데, 그래도 그렇게 이야기해줘서.”
“….”
“그래서. 이번 주 일요일에 다 같이 모여서 병원 산책하고, 아버지랑 하루종일 시간 같이 보내려고, 뭐. 그런 거지. 평상시엔 엄마가 계속 병원에 있으니까, 엄마도 좀 쉬게 해 드릴 겸.”
진철이 형은 담배를 비벼 껐다. 그리고 주머니에서 담뱃갑을 꺼내 세 번째 담배를 꺼냈다가 잠시 생각하더니 다시 집어넣었다.
“가야 되겠다. 너무 오래 있으면 좀 그렇지. 서현 씨에게도 미안하고.”
나도 담배를 비벼 껐다.
“서현 씨는 신경 쓰지 마세요. 어색해하지 않을 거예요.”
“저번에 준호한테 이야기는 듣기는 했는데. 정말 예쁜 분이구나. 주점에서도 잠깐 스쳐 지나가면서 보기는 했는데.”
“이야기 들었어요? 서현 씨에 대해서?”
“응. 널 죽여버려야 한다면서. 그때는 준호가 오바한다고 생각했는데, 오늘 직접 보니 준호 말이 맞는 것 같다.”
형. 심각한 얼굴로 그런 말 하지 마요.
“뭐. 미모도 미모지만, 너랑 나랑 둘이 있게 해주려고, 자리 비켜주는 거 보면. 마음씨도 참 좋은 사람이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불편할 텐데.”
그렇죠. 저도. 그런 부분을 좋아합니다.
하지만 그런 말을 하지는 않았다.
***
흡연 구역을 빠져나온 나와 진철이 형은 천천히 몸에 묻은 담배 냄새를 털어내기 위해 옷을 털어가면서 아버님이 계실만한 쪽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우리가 처음 만난 장소에서 대략 한 50미터쯤 떨어진 공간에서 우리는 진철이 형 아버님을 찾았다.
해어질 때는 아버님, 여동생, 서현 님 세 명이었는데, 그 사이에 몇 명이 더 늘었다.
그중 한 명은 서현 님의 할아버지인 강민철 회장, 다른 한 사람은 오늘 인사를 한 서현 님의 고모부. 이름이 뭐더라. 아무튼 원장님이 그곳에 서 계셨다.
“어? 누구시지?”
새로운 손님을 본 진철이 형은 서둘러 그쪽으로 향했다.
모르는 사람에게 둘러싸여 있으니 트러블이라도 생긴 건 아닌지 걱정이 됐겠지.
“오빠!”
다가가는 진철이 형을 제일 먼저 눈치챈 여동생이 손을 들어 오빠를 불렀다.
모두의 시선이 다가가는 우리를 향했다.
진철이 형의 아버님은 편안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보고 그제야 안심을 했는지 진철이 형의 발걸음이 조금 느려졌다.
“오빠. 인사해. 서현 언니 할아버님이시래. 오늘 서현 언니랑 오빠 후배분은 할아버님 뵈러 온 거였대.”
그 짧은 시간에 벌써 언니 동생 된 건가?
무섭다. 여자들의 친화력.
“안녕하세요. 박진철입니다.”
진철이 형이 강 회장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회장님도 가볍게 묵례하며 그 인사를 받았다.
“그래요. 한수 학교 선배라고.”
“네. 한수 학교 선배입니다.”
“그렇군요. 한수의 먼 친척뻘 되는 사람입니다. 서울에서 제가 돌보고 있어요. 우리 한수 잘 부탁합니다.”
회장님도 센스 있네. 이거. 나만 센스 없는 거 아냐? 나만 똥센스인가?
“아닙니다. 한수가…. 후배답지 않게 워낙 속이 깊어서. 친구처럼 의지 할 수 있는 후배입니다.”
“그리 말해주니 고맙네요. 두 사람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고 해서 아버님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어요.”
강 회장님이 그렇게 말하며 진철이 형 아버지를 돌아보며 살짝 미소 지었다.
“짧게나마 만나서 반가웠습니다.”
역시. 선비 같은 진철이 형 아버님이 앉은 자세 그대로 강 회장님에게 고개를 숙였다.
“저도 반가웠습니다. 쾌차하셔서 퇴원하시길 기원하겠습니다.”
회장님이 그렇게 말하며 자세를 살짝 숙이고 진철이 형 아버님의 손을 잡고 악수했다.
퇴원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순간적으로 아버님의 얼굴에 살짝 쓴웃음이 스쳐 가는 것이 보였다.
아마 진철이 형도, 진철이 형 여동생도, 그 단어가 나왔을 때, 같은 기분이었겠지.
누구에게는 투병의 끝을 의미하는 퇴원이라는 단어가, 누군가에게는 포기와 같은 의미로 받아들여진다는 것이 어쩐지 서글프다.
“이만 저희는 자릴 비켜드릴까요.”
강 회장님 뒤에 서 있던 고모부 원장님이 말했다.
이제 헤어질 시간이다.
뭔가를 눈치챈듯한 서현 님은 여동생의 손을 한번 꼭 잡아준 다음 천천히 강 회장님 쪽으로 이동했다.
나는 잠시 생각한 후 진철이 형 아버님에게 다가갔다.
아버님에게 다가가 무릎을 굽혀 아버님과 눈높이를 맞춘 다음 두 손으로 아버님이 악수하려 내민 오른손을 잡았다.
그리고 속으로 생각했다.
멈춰라. 시간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