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50화 (50/271)

50 : 능력은 쓰라고 있는 거지 (3)

중앙 서울 의료원. 통칭 중앙병원.

나는 중앙병원의 정원을 서현 님과 거닐고 있었다.

오늘 건강검진 차 입원한 강민철 회장님에게 안부 인사도 드릴 겸, 감사 인사도 드릴 겸, 겸사겸사 서현 님과 함께 병원에 온 것이다.

예상 못 한 게 있다면 엉겁결에 원장실까지 가서 원장님과 인사를 나눴다는 거?

회장님은 VIP 병실이 아닌 원장실에 계셨고, 나는 회장님께 인사를 드리기 위해 원장실에 가 겸사겸사 중앙병원 원장님께도 인사를 드렸다는 이야기다.

원장님 안녕하십니까? 서현 씨와 같은 집에서 살고 있는 한수라고 합니다.

반갑네. 나 원장일세. 자네가 우리 서현이 보살피는 솔거노비인가?

물론 이런 인사는 아니었다.

원장님께서 두 손을 앞으로 모으고 90도로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처음 뵙겠습니다. 원장직을 맡고 있는 최재철입니다’라고 말씀하셨지.

에휴. 적응 안 되는구만.

원장님도 아시는 거다. 내가 그 작은 어르신인지 뭔지라는 것을.

어떻게 아시는 거지?

당연히 우리 현명하고 또 현명하신 서현 님이 내 의문을 풀어주셨다.

“고모부세요.”

“고모부요? 고모님의 남편? ”

“네. 고모부. 우리 아빠 여동생의 남편.”

고모부, 즉, 강 회장님에게는 사위라는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사위라고 해도 강 회장님이 그 앞에서 ‘작은 어르신께서 귀한 걸음을 해주셔서 이 노복이 몸 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같은 말을 하셔도 괜찮은 건가?

“마음에 걸리는 게 있으세요?”

내 의문을 알아채기라도 했는지, 서현 님은 빨대를 물고 있는 그 작고, 귀여운 입술을 열어 나에게 물어보신다.

작고, 귀여운, 하지만 붉은. 입술.

아니. 아니야!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서지 마! 서지 마! 이 자식아!

“크흠. 아니. 저기. 제가 그…. 뭐냐. 작은 어르신, 그거. 다른 가족분들도 다 아시는 건가 싶어서요. 원장님…. 아니. 고모부님이 아셔도 되는 건가요?”

“아. 그거요? 가족들이 전부 다 아는 건 아니에요.”

전부 다 아는 건 아니다?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의 기준이 있다?

“가족들 중에서 그룹 운영에 직접 뛰어들었거나, 아니면 가족이 아니더라도, 경영과 관계되어 있으면 할아버지께서 말씀하셨을 거예요. 가족은 아니지만 박 대표님도 알고 계시니까요.”

박 대표? 중앙투자금융 박민주 대표이사. 일명 중앙그룹의 곳간 지킴이 그 양반?

기억난다. 그 언제냐, 서현 님을 처음 만난 날 호텔에서 밥 먹을 때, 찾아오셔서 나 보고 흠칫하고 놀라셨더랬지.

가족이어도 그룹 경영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으면 나에 대해서 모른다. 가족이 아니어도 경영과 관계있으면 나에 대해 이야기를 하셨다. 그렇게 정리가 되는구만.

그러면 여기서 의문점 하나 더.

왜 그런 이야기를 하셨을까?

“진실을 말씀하신 거죠. 우리 것이 아니다. 어르신과 작은 어르신의 것이다.”

서현 님이 내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이야기한다.

무서운 여자.

“…수긍할 수 있을까요?”

“수긍이요?”

“네. 수긍이요. 사실 이 모든 재산이 우리 것이 아니고, 쩌어기 시골에 살고 있는 성격 괴팍한 노인네와 잘생긴 손자의 것이다. 이런 말을 들었을 때.”

“저는 그냥 알겠습니다. 그렇게 말했는데요?”

“그냥 알겠다고 하셨다고요?”

“네.”

서현 님이 그렇게 말하며 싱글생글 웃는다.

나는 그런 서현 님의 얼굴을 바라보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사람이…. 그럴 수 있을까?

반대로 생각해서 내가 만약 서현 님 입장이라면 절대로 수긍 못 할 것 같은데.

나 재벌 3세야! 이제 막 나갈 거야! 그렇게 마음먹고 있는데, 사실 저기 스무 살짜리 시골 촌뜨기가 우리 집안 모든 재산의 진짜 주인이시다. 이러면….

자고로 없다가 있으면 살아도, 있다가 없으면 못사는 법이다.

저놈이 내가 물려받을 재산을 가져가려 한다 이거지? 안 되지. 저기 어디 남미에서 카를로스라는 이름의 시카리오를 데려와서 기냥 쓱싹.

얼마나 좋아.

“…저라면 그렇게 생각 못 할 것 같은데요.”

“한수 씨는 어떻게 하실 건데요?”

“어떤 놈팽이가 내가 물려받을 재산을 노려! 그러면서 어디서 사람 구해다가 그냥 몰래 쓱싹! 이렇게.”

내가 손으로 목을 긋는 제스처를 보이며 말했다.

내 이야기를 들은 서현 님의 눈에 웃음이 담긴다.

“그거 좋은 생각 같아요. 몰래 쓱싹. 한수 씨 본인이 그렇게 말했으니 조금 죄책감을 덜 수도 있고.”

이 여자. 지금 무슨 생각하는 거야. 아니. 난 무슨 말을 한 거야.

“좋은 생각이긴 하지만, 지금은 안 할래요. 지금은 한수 씨랑 같이 지내는 게 좋으니까.”

그러면서 웃는다.

빨대를 입으로 가져가고, 입술을 모으고 빨대로 커피를 빨아들이며 장난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재벌이라는 시스템은 이상하게 가족의 범주가 넓어요. 아무래도 돈이 많아서 그런 것이겠지만, 아무튼 할아버지께서는 그런 부분을 신경 쓰셔서 기준을 정하셨을 거예요. 꼭 우리뿐만 아니라, 다른 기둥들도 그들만의 기준을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그러면서 다시 빨대를 입으로, 입술로, 아름다운 입술로, 붉은 입술로…가 아니라.

지금 뭔가 처음 듣는 단어가 나온 것 같은데?

“…다른 기둥이요?”

“어머. 한수 씨는 아직 모르셨나 보네요.”

“네. 저는 처음 들어보는데요.”

분위기를 보아하니, 뭐, 청룡, 백호, 현무, 주작처럼 할아버지를 보필하는 세력 같은 게 있나 보다. 그걸 기둥이라고 하고, 강 회장님과 중앙그룹이 그 기둥 중 하나인가 보다.

“죄송해요. 제가 쓸데없는 말을 했네요. 어차피 다 아시게 되겠지만. 제가 미리 말씀드리는 게 맞는지 모르겠어요.”

그러면서 곤란한 표정을 짓는다.

그런 표정을 지으시면 제가 할 말은 하나뿐입니다!

“괜찮아요. 아마 할아버지가 이유가 있어서 아직 안 알려 줬겠죠. 괜찮아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현 님이 내 눈을 바라본다.

그 흑진주 같은 예쁜 눈동자로 내 눈을 바라보며 잠시 생각하더니 빙긋 웃는다.

“음… 그래도 기왕 이야기도 나왔고, 또 궁금하실 텐데… 말해 드릴까요.”

“괜찮아요. 나중에 할아버지에게 따로 물어보죠.”

내가 말렸다.

“어르신께서 한수 씨에게 알려주지 않으신 것은 이유가 있어서 아닐까 싶지만….”

“싶지만?”

“그래도 한수 씨에게 숨기고 싶지 않다고 할까? 비밀 같은 거 만들고 싶지 않다고 할까요?”

에이. 그렇게 말하면 안 되죠.

그렇게 말하면 내 심장이 남아나질 못한단 말입니다!

“그리고 어르신께서 진노하셔도 한수 씨가 막아 주시지 않을까요?”

화 안 내십니다.

아무리 할아버지가 말보다 손이 더 빠르고, 폭력을 친육 간의 스킨십이라고 주장하는 마교 교주 같은 노인네라고 해도, 어디 손주 며느리에게 화를 내시겠습니까?

설사 화를 내신다고 해도 제가 막겠습니다. 어떤 방법을 동원해서라도 제가 막아내겠습니다.

우리 할아버지는 유교 탈레반 사상을 가지고 계신지라, 대를 잇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신답니다. 많이 아프기는 하겠지만, 죽지는 않을 겁니다.

“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까요? 뭐 저도 할아버지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라. 우선 어르신, 그러니까 수호신을 모시는 4개의 가문이 있어요. 이 4개의 가문을 4개의 기둥이라고 해서 4주(柱)라고 호칭하고, 각각의 역할을 부여했어요. 예를 들어 저희 같은 경우는 어르신을 모시는 데 불편함이 없도록 재력을 담당하도록 되어 있어요.”

근데 불편함이 없도록 이라고 하기에 중앙그룹은 너무 과한데요?

“그럼 할아버지가 중앙그룹의 성장에 관여를 하신 건가요?”

“아마 그 부분은 할아버지, 아. 저희 할아버지요. 저희 할아버지에게 여쭈어봐야 하지 않을까 싶은데, 어떠한 방식으로든 도움을 받지 않았을까요?”

그랬을까? 아마 귀찮은 거 싫다고 몸소 움직일 양반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럼 다른 3개의 기둥에 대해서도 서현 씨는 알고 계세요?”

“자세히는 몰라요. 그저 어딘가에 있다. 그 정도만. 조선시대까지 각 가문은 재력, 무력, 지력, 그리고 권력이라는 4개의 영역을 담당했었대요. 그래서, 각각 거상, 장군, 대학자, 그리고 임금으로서 역할을 담당해 왔는데요.”

잠깐. 지금 이상한 단어가 하나 섞여 있는데?

임금? 이임그음?

“임금이요? 왕이요? 주상전하요?”

“네. 꼭 조선 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부터 있던 왕조는 모두 어르신의 허락 없이는 왕조를 이룰 수 없었다고 들었어요.”

나는 그저 투명 인간이 되어서 정의를 지키고, 시간 정지로 평화를 지키고, 투시로 세상의 안녕을 도모하겠다는 생각뿐인데….

와…. 이거 스케일 너무 커지는데. 이러면 너무 부담되는데.

“항상 생각하지만…. 너무 비현실적인 이야기네요.”

“그런가요? 전 어릴 적부터 듣던 이야기라서 그런가. 그냥 그럴 수도 있겠다 싶었는데.”

“어릴 적부터 들으셨다고요? 수호신 이야기를?”

“네. 제가 막 걸어 다니고, 막 말을 알아듣기 듣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할아버지가 어르신 이야기를 해주셨어요. 자기 전에 동화책 읽어 주시는 대신에.”

“…잘하신 행동이신지는 모르겠습니다.”

내 말에 서현 님이 작게 웃으신다.

“저는 너무 재미있어서 할아버지만 만나면 어르신 이야기 해달라고 막 조르고 그랬는데요? 나중에 해 드릴게요. 진짜 재미있어요.”

“…뭔가 그, 역사의 어두운 면을 듣게 될 것 같아 두려운 데요.”

“바로 그 부분이 포인트에요. 할아버지 품에 안겨서 두 주먹을 꼭 쥐고, 눈을 초롱초롱 빛내면서 들었다니까요. 예를 들어 어르신이 연산군을 내치신 이야기 같은 거.”

연산군? 연산군이라면 너무 19금인데요! 19금 빼고는 이야기 진행이 안 되는데요!

“…손녀에게 해줄 만한 이야기는 아닐 것 같아요.”

내 말에 그녀가 웃는다.

“이야기가 다른 데로 빠지네요. 아무튼, 계속 이어가면, 지금은 4개의 기둥이 조금씩 다른 역할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어요. 저희뿐만 아니라 각자가 다른 역할을 하는 것으로. 아마 조만간 어느 가문이 어떤 역할을 하는지 아시게 되지 않을까요?”

“그렇군요.”

“아니에요. 또 궁금하신 거 있으시면 언제든 물어보세요. 제가 아는 한 다 알려 드릴게요.”

그러면서 등을 쫙 편다. 마치 이 누나만 믿어 그런 분위기를 풍기며.

등이 쫙 펴지니…. 가슴도… 봉긋…. 커험.

“그, 그럼. 저기. 혹시. 이것도 여쭤봐도 될까요?”

“네. 뭔데요?”

“저번에 물어볼까 하다가 까먹었던 건데. 저희 과 유 선생님이랑은 어떻게 아시는 사이세요?”

“유주원 교수님이요? 음. 유 교수님이 저희 할아버지와 아시는 사이라서 저도 몇 번 인사드렸어요. 저 미국에서 공부할 때도 몇 번 뵀었고요.”

“유학하실 때요?”

“네. 저 보스턴에서 학교 다닐 때, 유 교수님도 안식년이시라 저희 학교에서 연구하셨거든요. 집도 가깝고 해서, 저녁 식사에 몇 번 초대해 주셨어요. 그전에도 교수님이 할아버지와 함께 정상회담 수행단으로 오셨을 때도 인사드리기도 했고요.”

하버드 연구교수는 그렇다고 쳐도, 정상회담 수행단은 정말 딴 세상 이야기네.

현실적인 이야기라 그런가? 조선시대 임금보다 더 멀게 느껴진다.

“그랬군요. 아무튼 깜짝 놀랐어요. 서현 씨가 유 선생님과 아시는 사이라는 게.”

“후후후. 제가 이렇게 발이 넓은 여자랍니다. 또 궁금하신 거. 뭐든지 물어보세요!”

그러면서 어깨를 쫙 편다.

어깨를 쫙 펴니 가슴도 쫙 펴지고.

가슴이 쫙 펴지니 봉긋한 두 개의….

위험해. 너무 위험해.

중앙그룹 손녀고, 하버드 출신이고 그런 거 다 상관없이.

저 미모에 저 몸매는 위험해. 너무 위험해.

경국지색(傾國之色).

국가와 평화를 위협할 수 있는 위험인물이야. 이 여자는.

달기처럼, 포사처럼. 한 나라의 안위가 위험해진다.

내가. 내가 희생해야 되겠다.

내가 희생해서, 저 위험을 봉인해야 되겠어.

안 되겠습니다. 강서현 씨. 당신은 이제 한 남자의 아내로 봉인되어야 되겠습니다!

내가 막 나라의 안녕과 평화를 위해서 어떻게 이 무섭기까지 한 아름다움을 봉인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있을 때. 다시 말해 미친 생각을 하고 있을 때, 서현 님이 내 어깨 너머로 누군가를 보았나 보다.

“어머. 한수 씨. 저분. 그때, 그분 아닌가요?”

나는 서현 님의 이야기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곳에는 병원 산책로를 천천히 걷고 있는 세 사람이 보였다.

정확히 한 사람은 휠체어에, 다른 두 사람은 그 뒤에서 천천히 걷고 있었고. 분명히 그중 한 명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한수 씨 선배님. 그 축제 때.”

진철이 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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