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49화 (49/271)

49 : 능력은 쓰라고 있는 거지 (2)

“빙고.”

박승환의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지만, 과방 안에 모든 사람들은 아무도 박승환을 바라보지 않았다.

모두의 시선이 지연이를 향해 있었다.

그렇게 모여 있던 시선이 천천히 나에게로 집중된다.

“…왜?”

이중훈이 나를 보며 말한다.

나에게 물은 건가? 아니면 지연이에게?

나도 궁금한데?

“오. 지연이. 대단한데. 공개 고백이라니.”

요리 팀에서 같이 일했던 내 동기 최유라가 지연이의 어깨를 툭 치면서 말했다.

“너도 알았어?”

찬희가 유라에게 물었다.

“아니. 난 몰랐어. 근데 지연이랑 한수랑 같이 있을 때 보면 좀 뭐랄까. 묘한 분위기는 있었지. 안 그래?”

여자 동기가 요리 팀 남자 1에게 물었다.

저 자식 이름 뭐더라…. 남자 이름은 진짜 기억 못 하겠다니까.

아무튼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고.

이름 기억 안 나는 저 자식뿐만 아니라 상당수의 1학년들도 날 살기 어린 시선으로 노려보고 있다.

니들도냐? 니들도 유지연을 믿는 신도들이었냐.

그나저나 이 분위기 어쩌지?

“지연아. 한수가 왜 좋아?”

최유라가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담아 지연이에게 물었다.

질문을 받은 지연이의 볼이 살짝 붉게 물든다.

동시에 그 모습을 본 사람들의 살기가 더욱 강해진다.

“음… 뭐랄까. 그 부분은 저희 둘만의 비밀로 하면 안 될까요? 여러 사람 앞에서 이야기하기에 좀 부끄러운….”

이제는 피부로 느껴질 정도로 살기가 더욱 강해진다.

“하긴. 그건 그렇지. 두 사람이 이야기 할 부분이지. 아무튼, 우리 지연이 대단하네. 역시 여자는 배짱이지.”

동기 최유라가 그렇게 말하면서 지연이 엉덩이를 툭툭 쳐준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내 목에 다시 무언가가 감긴다.

돌 같은 단단함을 가진 무언가, 김창회의 두꺼운 팔 근육이다.

“잠깐 이야기 좀 할까?”

박찬희가 말한다. 눈에 살기가 가득 담겨 있다.

“축제로구나! 피로 강을 이룰지니!”

박승환이 외친다!

이중훈이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선다.

죽는다. 진짜 죽는다. 무조건 죽는다!

아마도. 중세시대 마녀재판처럼 이런저런 고문을 당한 후 십자가에 매달려 화형당하겠지?

안 돼! 벗어나야 해! 지금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해!

어떻게 하지? 생각해! 생각을 멈추지 마! 살길을 찾아야 해!

그렇게 내가 필사적으로 살길을 모색하고 있을 때, 지연이의 목소리가 과방에 울렸다.

“…부탁이 있는데요.”

사람들의 시선이 지연이에게로 향했다.

그래. 지연아. 너 뿐이다.

저 광신도들에게서 내 목숨을 구해 줄 수 있는 사람은 오직 저들의 여신인 유지연 너뿐이다!

“우선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분위기 이상해져서. 근데. 기왕 이야기가 나왔으니 마저 말하는 게 맞는 것 같아서요.”

지연이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헛기침을 가볍게 크흠. 하고서 말을 이었다.

“철없는 이야기처럼 들릴지도 모르는데, 제 솔직한 마음은 당분간 지금 같은 상황이 바뀌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물론 한수 오빠가… 그… 특별하게 좋기는 한데, 지금 당장 사귀고 싶다거나, 남자친구가 되어서 나만 바라봐 줬으면 좋겠다거나, 이런 마음은 아닌 것 같아요. 그저 조금 더 알고 싶고, 조금 더 말하고 싶고, 조금 더 자주 집에 같이 가고 싶고….”

그러면서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창회 팔에 힘도 살짝 들어간다.

그리고 내 얼굴도 살짝 붉어진다.

숨! 이 자식아! 숨!

“그리고 한수 오빠도 좋아하지만 다른 선배… 오빠, 언니들도 좋아요. 유라 언니는 원래 좋아하는 언니였지만, 이번에 같이 요리 팀 하면서 속정 깊은 사람이라는 것도 알게 됐고, 중훈… 오빠는 저 신경 써 주시는 거, 항상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고요.”

중훈이의 얼굴이 펴지질 않는다. 평소라면 얼굴 활짝 미소를 지었어야 했을 녀석이.

“찬희 오빠도, 창회 오빠도 항상 무서운 표정 짓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1학년들 만나면 캔 커피라도 하나 챙겨 주려고 마음 써 주는 것도 잘 알고 있고요. 그런 부분들에서 선배들도 좋아해요.”

창회의 팔 힘이 살짝 풀렸다.

살았다. 당장 교살은 피했다.

“나는?”

박승환이 엄지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한다.

“승환 선배는 만담?”

“만담?”

“네. 한수 오빠랑 하는 만담이 좋아요.”

“끝?”

“아니요. 생각해 볼게요. 찾아볼게요.”

“…고맙다.”

승환이가 풀이 죽는다.

“기침과 좋아하는 것은 숨길 수 없다고 하니까. 한수 오빠도 좋아하지만, 한수 오빠보다, 지금 선배들과 함께 이렇게 피자 먹는 게 더 좋아요. 그래서. 그냥…. 제가 한수 오빠를 좋아하는 건 사실이지만.”

그리고선 자신들의 동기들을 둘러본다.

“지금 우리 동기들과 선배들, 이렇게 지내는 게 저는 참 좋은 것 같아요. 그래서. 뭐. 좀. 이상한 이야기인데, 당분간은 이렇게 지냈으면 하는 게 솔직한 마음이에요. 그냥. 이 이야기도 드리고 싶어요.”

지연이 그 말을 하고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지연이 동기 여자애가 지연이에게 다가가 살포시 안아주면서 등을 토닥거려 주었다.

참… 힘들었겠구나. 그런 생각이 든다.

지연이는 나를 좋아한다. 나를 좋아하지만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거절당할까 봐? 지연이와 나의 관계가 어색해질까 봐?

아니다.

지연이는 이번 축제를 계기로 더욱 돈독해진 과 분위기를 해칠까 봐 그것을 우려한 것이다.

“괜찮아. 뭐. 사람이 사람을 좋아하는 게 나쁜 게 아닌데.”

말없이 듣고만 있던 이중훈이 말했다.

“그래도 그렇게 말해 주니 선배로서 솔직히 고맙다는 생각이 드네. 뭐. 한수랑 둘 사이가 어떻게 바뀔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지연이는 우리 후배라는 사실이, 우리가 지연이 선배라는 사실은 바뀔 일이 없지. 아무튼 그렇게 말해 주니 고맙다.”

이중훈.

어쩌면 가장 속이 쓰릴 녀석인데, 그래도 선배답게 지금 분위기를 잘 정리한다.

안다.

가지지 못한 사랑에 대한 아픔이 얼마나 쓰린지.

그럼에도.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속은 깊은 녀석인가 보다.

“죄송해요…. 중훈… 오빠.”

지연이도 알고 있겠지. 저 녀석이 자신을 얼마나 좋아하는지.

“음… 뭐. 그래.”

중훈이는 괜찮다는 말은 안 한다. 그저 살짝 씁쓸한 미소만 머금을 뿐.

“그나저나. 한수 데리고 나갈 거 아니었어?”

최유라가 내 목을 잡고 있던 창회를 보며 말했다.

어? 뭐?

지금… 지금 분위기 좋아진 거 아니야?

수습된 것 아니야?

“아. 죄송해요. 제가 분위기 끊어서. 한수 오빠 데리고 가셔도 돼요.”

지연이가 그렇게 말했다.

유지연!

너 나 좋아한다며?

나 끌려 나가면 죽는데?

죽을 텐데?

내 목을 감싼 창회 팔에 힘이 더욱 들어간다.

그리고 그 힘에 나는 무기력하게 문 쪽으로 끌려 나갔다.

악마에 빙의된 눈을 하고 있는 이중훈, 박찬희, 박승환이가 따라오는 것을 보면서.

유라가 한마디 더 보탰다.

“1학년들도 갔다 와도 괜찮아. 니들도 하고 싶은 거 많을 텐데.”

안 괜찮아!

***

지하철을 타고 가는 상황이 어색하다.

지연이와 같이 지하철을 타고 돌아가는 길.

얼마 전만 해도 그냥 편한 마음으로 농담 따먹으면서 집에 갔는데, 오늘은 어색하다.

“음… 저기… 유지연 씨?”

“네. 오빠.”

지연이는 내가 말을 걸자 평소와 같은 얼굴로 나를 보면서 말한다.

화장도 살짝 한 것 같은데도 도자기처럼 매끈한 피부, 그리고 조화를 이루는 이목구비. 그중에서도 마치 흑수정 같은 눈동자가 나를 보고 있다.

“…음, …아니야.”

“뭐예요. 그게. 신뢰 관계란 서로가 서로에게 마음을 열었을 때 형성될 수 있어요.”

“…아니. 그냥. 왜 그런가 싶어서.”

“왜라뇨? 오빠 좋아하는 거?”

얘는 부끄럽지도 않나. 이 사람 많은 지하철에서 그렇게 크게 말하고.

“…어.”

“흐음. 오빠. 오빠 예전에 여자친구들 있었죠?”

“이… 있었지.”

“혹시 그 사람들이 오빠한테 센스 없다는 이야기 안 했어요?”

“센스? 그런 말 들은 적… 있었나?”

있었다.

“아무튼, 여자에게 먼저 고백하게 만들고, 그리고 왜 고백했는지 물어보다니… 오빠 센스 꽝이에요. 실망. 대실망.”

“…죄송합니다.”

“흠. 뭐… 그렇게 센스 없는 게 좀 귀엽기도 하지만. 그래도 말 안 해 줄래요. 나중에 봐서 말해 줄 수도 있고요.”

그러면서 웃는다.

참 웃는 것도 예쁘구나. 예쁜데.

“근데. 저 궁금한 게 있는데.”

“응? 뭐가?”

“혹시 오빠 아는 사람 중에 한슬기라고 있어요?”

“한슬기? 어. 한슬기라고 있는데…. 지연이 니가 슬기를 어떻게 알아?”

“누구예요? 한슬기라는 이름을 가진 분?”

“어? 동네 친구, 초등학교, 중학교 같이 다녔고, 어렸을 때부터 많이 놀러 다녔고….”

“오빠, 전 여자친구?”

“아니야. 나 말고, 내 동네 친구 중 한 놈이랑 사귀고 있어. 중학교 때부터 둘이 사귀었으니, 5년 넘었네.”

“그렇구나.”

“근데, 니가 슬기를 어떻게 알아?”

내 질문에 유지연이 작게 웃는다. 그러더니 굵직한 남자 목소리를 흉내 내며 말한다.

“야. 한슬기. 너 엄마가 오늘 보일러 끄고 나가라는 거 켜 놓고 왔지? 샤워하고 그대로 나왔지? 넌 이제 죽었다. 엄마 퇴근하고 집에 들어오니까 집이 사우나 돼 있다고 하더라. 이 자식아.”

나는 순간적으로 어벙한 표정을 지었다.

이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으니까.

무슨 맥락도 없이….

어?

잠깐만.

뭔가 익숙한데?

지연이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말한다.

“한슬기.”

“응?”

“저예요. 그때 그 한슬기. 보일러 틀어 놓고 나가서 오빠에게 혼나던 그 한슬기.”

생각났다!

언제더라, 3월? 4월?

아무튼 학기 초에, 미친놈 하나가 여자에게 껄떡대는 거 막아 주면서 한슬기 이름을 이용해 시나리오를 하나 급하게 썼었지.

근데, 그때 한슬기가 유지연이었다고?

…세상에!

“진짜로?”

“네. 흐음. 오빠는 나인 줄도 모르고 그랬구나.”

“…와… 대박. 진짜로? 난 넌 줄 몰랐지. 거기가 좀 어둡기도 하고.”

“그랬구나. 난 줄 몰랐구나.”

“어. 몰랐지. 지금 알았지. 그게 언제야? 3월? 4월?”

“3월 말이요. 뭔가 기분이 좀 복잡한데요.”

“복잡해? 뭐가? 어떻게?”

“음…. 우선 좀 섭섭함?”

“섭섭해? 왜?”

“나인 줄 알고 구해 줬으면 어쩌면 인연의 시작으로 삼기 딱 좋은 스토리텔링인데, 오빠는 뭐 나인지도 모르고 그냥 아무 사람이나 구해 줬구나… 싶은 섭섭함?”

“그, 그런가… 아니지. 너인 줄 알았으면, 우리 후배 지연인 줄 알았으면 그 자식을 아주 박살냈겠지. 그랬지. 그랬을 거야! 분명!”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감히 우리 후배를….

“그랬을까요? 뭐, 아무튼.”

“…그럼 다른 기분은?”

“음. 여태껏 나한테 그런 식으로 접근하는 사람들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는데, 한수 오빠는 적어도 그런 나쁜 의도는 아니었구나 하는 그런 안도감?”

“…좋은 거지? 그거?”

“뭐… 내가 오빠를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죠.”

그렇게 말하고 살짝 고개를 숙인다.

“아. 나 오늘 너무 비참한 기분이에요. 여자는 배짱과 자존심인데. 오늘 너무 자존심 상하는 그런 날이에요.”

그렇게 말하더니 다시 고개를 든다.

“아니지. 이 말 하려는 거 아니고, 내가 말하고 싶은 거는요.”

그리고 내 눈을 보면서 말했다.

“고마워요. 그때 구해 줘서.”

그리고는 내 손을 살포시 잡는다.

“항상 이 말이 하고 싶었어요.”

그렇게 말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