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 능력은 쓰라고 있는 거지 (1)
한복, 아니, 지금의 한복과는 조금 다른 복식, 하지만 전통적인 이미지의 복식을 입은 여인이 나를 내려다보고 있다.
아니, 아직 여인이라는 단어보다 소녀라는 단어가 더 적합한 그녀를 내가 올려다보고 있다.
소녀는 슬픈 눈을 하고 있다.
입가에는 살짝 미소가 떠올라 있지만, 눈에는 깊은 슬픔이 일렁이고 있다.
그 슬픔이 나의 마음속으로 흘러들어 오고 있다.
슬퍼하지 말라고 위로하며 안아주고 싶은데, 그리하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아름다운 슬픔,
슬픔이 배어든 얼굴, 풍기는 분위기가 너무나도 아름다워, 어쭙잖은 위로로 그 완벽한 아름다움을 깨면 안 될 것 같은 얼굴로.
그녀가 나를 보고 있다.
그녀의 눈이 나를 보고 있다.
반달 모양으로 웃음을 머금은 눈에 눈물이 고여 있다.
웃음을 참으려 울려 하는 것일까.
울음을 참으려 웃으려 하는 것일까.
나는 그저 그렇게 서서 그녀를 올려다보고 있다.
다가온다.
그 소녀의 얼굴이 천천히 다가온다.
내 앞까지 다가온 소녀는 두 손으로 천천히 치맛단을 여미며 무릎을 굽힌다.
그리고 나와 눈을 맞춘다.
반달 모양의 웃음을 머금은 눈.
그리고 그 반달 모양을 따라 흘러 방울져 내리는 눈물.
천천히 내려온 얼굴은 이제 나와 같은 눈높이에 이르렀다.
그녀의 입이 열린다.
10대 후반 소녀의 건강한 혈색을 가진 입술이 천천히 열린다.
물기 머금은 목소리가 나에게 전달된다.
“소녀는…. 끝나고…. 하여도…. 그러니….”
소녀가 말을 하고 있지만, 무엇이라고 말하고 있는지, 잘 들리지 않는다.
그저, 뜨문뜨문 들리는 소녀의 목소리가 맑고, 그 맑은 목소리에 물기가 배어들어 있다는 느낌만이 전달될 뿐이었다.
***
잠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천장이 보였다.
언제 봐도 적응 안 되는 천장이구만. 아침에 일어날 때마다 놀라네. 이씨.
뭐. 신의 후계자라고 하는데 아직도 적응 안 되는 거 보면 우리 할아버지 무슨 빈곤의 신 아닐까?
“참나…….”
나는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고 핸드폰을 들어 시간을 확인했다.
6시 2분이라….
평소보다 일찍 일어났다. 아니지. 이건 일찍 일어났다라고 말할 수준이 아니지.
왜 이렇게 일찍 깬 거지?
꿈?
꿈 때문인가? 꿈을 꿨나?
뭔가…… 슬픈 듯한 꿈이었는데. 그런 느낌인데.
나는 한 손에 핸드폰을 든 그 자세 그대로 기억나지 않는 꿈을 기억해 내려 생각을 집중해 보았다.
음… 뭔가 안개가 잔뜩 낀 거리 한가운데 있는 느낌이다.
뭔가 형상이 보일 듯 말 듯 한데, 보이질 않는 느낌이랄까?
저 희뿌연 안개 너머로 무언가 분명히 있는데, 있다는 사실은 아는데, 거기에서 멈춰 있는 느낌이랄까.
답답하네.
에이. 모르겠다. 뭐, 꿈꾼 거 하나하나 신경 쓰면 머리 빠진다.
아니지. 난 신이니까 탈모 걱정은 안 해도 되는 거 아닐까?
할아버지도 머리숱 많잖아.
흐음.
아무튼, 넘어가자.
지금 시간이 6시 조금 넘었으니까.
그러면 우리 서현 님이 슬슬 일어나서 출근 준비를 하실 테고.
그러면 그사이에 나는 서현 님이 드실 토스트나 만들어 볼까?
자고로 사랑받는 남편이란 아내의 욕구를 미리 알아내고 말하기 전에 움직여 준비하는 그런 능동적인 남편이지.
음… 뭔가 에로틱하군.
좋아! 준비하자.
우리 서현 님 드실 아침을 만들자!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거울 앞에 섰을 때, 볼을 타고 흘러내린 눈물 자국을 볼 수 있었다.
***
“입원이요?”
나는 예의 없게도 입안에 샐러드를 가득 머금은 채로, 서현 님에게 물었다.
토스트를 한 입 베어 문 서현 님은 입안에 있는 음식을 천천히, 확실하게 오물오물 다 씹고 나서야 나에게 답했다.
“네. 이번 주말에요.”
“갑자기 왜요? 회장님 어디 편찮으세요?”
아침을 먹기 위해 서현 님과 식탁에 마주 앉았는데, 서현 님께서 이번 주말에 강 회장님이 입원하신다는 이야기를 해 주셨다.
강 회장님이 갑자기 왜?
연세는 좀 있으시지만 그래도 건강해 보이셨는데?
“아니에요. 어디 불편하신 건 아니고, 그냥 정기 건강검진일 뿐이에요. 그래서 말인데요, 이번 주 일요일 오후에는 저도 할아버지를 모시러 가 볼까 해서 한수 씨와 점심을 같이 못 할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
“그렇군요. 깜짝 놀랐네요. 혹시 어디 안 좋으신가 해서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현 님이 살짝 웃으며 말한다.
“설마요. 할아버지가 얼마나 건강을 챙기시는데요.”
“그래요?”
“아니. 사실 할아버지는 좀 귀찮다고 하시는데, 비서실에서 더 난리예요. 아무래도 그룹 회장님쯤 되시면 건강 상태도 주가에 영향을 미치니까.”
“하… 하하… 참…… 피곤하시겠어요.”
“뭐 할아버지는 이제 슬슬 뒷선으로 물러나시고 싶어 하시는데, 주주단에서 조금만 더, 조금만 더 이렇게 만류하니, 쉬시지도 못하시고…….”
“참 고생이 많으시네요. 회장님도.”
“어머? 그렇게 남 얘기처럼 말씀하세요?”
“네?”
그렇지. 처조부님이시니까. 남은 아니지. 남은 아니시게 되는 거지.
“중앙그룹이 한수 씨 건데… 할아버지가 그거 관리하신다고 그렇게 고생하시는 거예요. 남 일 이야기하듯 하시면 할아버지 섭섭하죠. 저도 섭섭하고.”
“…그리 말씀하셔도….”
사실. 그렇지.
갑자기 그 중앙그룹이 내 거라고 하면 내가 아이구 감사합니다. 그동안 잘 관리해 주시느라 고생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대한민국 재계 1위, 글로벌 매출 순위 7위의 중앙그룹 회장 자리에 올라 40만 사원들을 진두지휘하겠습니다.
그럴 수 있겠냐고요!
“아무튼, 꼭 잊지 마세요. 할아버지와 제가 얼마나 고생하고 있, 는, 지!”
“죄… 죄송합니다…라고 하고 싶어도.”
“싶어도요?”
“많은 부분이 그렇지만, 사실 중앙그룹이 당신 겁니다. 이런 말이 제일 실감 안 나죠. 아 제일은 아니에요. 두 번째. 그리고 전 아직 신도 아닌데, 어르신도 아닌데, 꼭 따지자면 아직 할아버지 거네요.”
그렇게 말하니 느낌이 이상하다.
시골 책방에서 신문이나 보고 있는 우리 할아버지가 중앙그룹의 진짜 주인이라니.
“그리고 할아버지, 제가 아는 한, 그래, 고생했다. 내 것이니까 다 내놓아라. 그럴 사람은 아니라고 생각이…….”
그럴 사람 아닐까? 우리 할아버지? 확신이 안 드네……. 확신이 안 들어….
내 말에 서현 님이 싱긋 웃는다.
“한수 씨는 어르신 이야기만 나오면 표정이 바뀌어요.”
“네?”
“말로는 매일 포악하다, 난폭하다, 그럴 사람이 아니다. 그러면서도 그 표정에 애정이 뚝뚝 묻어나요.”
보자 보자 하니까 이 아가씨가 못 하는 소리가 없네.
아니, 얼굴 좀 이쁘고, 아니 좀 아주 이쁘고, 몸매 좋고, 현명하고 자상하고 막 사랑스럽고 그러면 그런 막말해도 되는 건가요?
“그래서 전 한수 씨가 할아버지, 어르신 이야기할 때 그 표정이 참 좋아요.”
하셔도 됩니다. 아무렴요. 어떤 말씀이든 하셔도 됩니다.
“커험… 크흠. 음… 저… 거기 일요일에 병원 가실 때 저도 같이 갈까요?”
나는 말을 돌렸다. 말 돌릴 때는 임팩트 있는 내용으로 빠르게.
“어머? 시간 괜찮으시겠어요?”
“저야, 뭐, 남는 게 시간이죠. 안 그래도 이사하고 회장님께 한 번도 제대로 감사 인사 못 드렸는데, 겸사겸사. 문병 가는 것도 아니고 그러니……. 뭐. 그리고. 또….”
“또?”
“아닙니다. 아무튼, 저도 가도 되나요?”
“네. 저는 감사하죠. 할아버지도 좋아하실 거예요.”
그렇게 말하면서 생긋 웃는다.
나는 차마 주말에 조금이라도 같이 있고 싶어서요, 라는 말은 하지 못하고 애꿎은 토스트만 우걱우걱 씹어 먹었다.
***
“저기. 지연아. 궁금한 게 있는데.”
이중훈이 갑자기 물었다.
“네?”
지연이가 입 안에 든 피자를 우물우물하면서 말했다.
오늘 과방에서는 지난 축제 때 고생한 1, 2학년이 모여 피자를 먹고 있었다.
4학년 선배들이 고생했다고 거의 1인당 한 판씩 피자를 배달시켜 준 것이다.
“음… 그게 다른 것이 아니라.”
이중훈은 뜸을 들였다.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없지만. 표정이 진지한 것이, 뭔가 비장한 각오까지 느껴졌다.
“네. 뭔데요?”
비장한 각오를 느꼈는지, 지연이는 입안에 든 피자를 꿀꺽 삼키고 먹던 피자를 두 손에 그대로 든 채로 이중훈을 긴장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게 뭐 대단한 건 아니고. 뭐, 혹시라도 기분 나빠할 수도 있는 이야긴데.”
“네…….”
지연이가 침을 꼴깍 삼킨다.
덩달아 과방 분위기가 천천히 식어 간다.
피자를 든 사람들의 움직임이 천천히 멈추었고, 모두의 시선이 이중훈에게 모였다.
“정말 궁금해서 그런 거는 아니고. 뭐랄까. 꼭 대답할 필요는 없는데.”
“그냥 좀 물어봐! 이 자식아!”
박찬희가 이중훈에게 소리를 질렀다.
아, 그 자식 겁나 뜸 들이네.
“그래. 너 지금 분위기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서, 질문 별것도 아닌 거면 죽어.”
내가 말했다.
뭐, 이해는 한다. 뭐, 암튼 저 자식 유지연만 걸려 있으면 아주 사람이 등신이 돼요.
“말해라. 빨리. 피자 먹게.”
김창회도 매서운 눈으로 이중훈에게 말했다.
와… 이 분위기 어쩔 거야? 진짜 별거 아니면 넌 이제 죽었다. 이중훈.
“…지연아.”
“네.”
“왜….”
“네?”
“왜… 한수만.”
“네.”
“왜… 한수만 오빠…라고 불러?”
“네?”
“그냥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왜 다른 사람은 다 선배고, 한수만 오빠야?”
헐……. 미친놈.
나는 손에 든 피자를 내려놓았다.
지금 분위기를 이따위로 만들어 놓고 고작 한다는 질문이 그거야?
지금 이 분위기 어쩔 거야. 넌 이제 죽었다.
피자가 네놈이 살아생전에 먹는 마지막 음식이고, 내년 네놈 제사상에 올라갈 음식이다.
“야, 임마. 지금 그걸 말이라…….”
“좋은 질문 했다. 중훈아.”
내가 그를 떠나보내는 마지막 조문을 막, 낭송하려는 찰나, 다른 의견이 내 조문을 가로막았다.
“나도 항상 궁금했어.”
박찬희가 고개를 끄덕이며 말한다.
“필요한 질문이지.”
김창회는 아예 피자를 내려놓고 팔짱을 낀다.
저 두꺼운 팔이 어떻게 끼워지는지 신기하네.
그리고 박승환. 이놈이 빠지면 안 되지.
“불길한 예감이 드는군. 하지만 우리는 때로는 잔인한 진실을 받아들여야 할 때가 있지.”
사람들의 시선이 모두 박승환에게 모였다.
“잔인한 진실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인정할 때, 인류는 한 발자국 더 진보해 왔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배워 왔지.”
“야. 뭔 또 개소….”
어느새 다가온 김창회가 내 목을 팔로 감았다.
야! 목! 목! 숨! 호흡!
“모두가 알고 싶어 했지만, 또한 모두가 알고 싶지 않으려 했던 잔인한 진실. 모두 그것을 받아들이자. 유지연 씨.”
“네? 넵!”
“귀하는 어찌하여 한수라는 물체에게만 ‘오빠’라는 명칭을 사용하는 것입니까?”
나는 재빨리 오른손으로 창회의 돌 같은 근육을 벌려 숨을 쉴 틈을 만들었다. 그리고 주위를 둘러보니 모두의 눈이 유지연을 향해 있다.
그랬나? 지연이가 나에게만 오빠라고 했나? 왜 그랬지?
나도 궁금함을 담은 눈으로 지연이를 바라보았다.
“음…….”
생각에 잠겼다. 생각에 잠겼어.
“아마도 발음?”
“발음?”
“네. 한수 선배는 시옷이 두 번 나오니까 뭔가 부자연스럽지 않아요?”
그러자 애들이 다들 한수 선배, 한수 선배, 하고 말해 본다.
무슨 주문처럼 들리는데?
“근데 한수 오빠는 자연스럽잖아요.”
“나… 나는?”
이중훈이 다급하게 물어본다.
“음… 중훈 오빠는 중후노빠 이렇게 되니까… 좀. 근데 중훈 선배는 딱딱 끊어지는 게 좋지 않나요?”
“어! 나도 좋아!”
문맥과 상관없이, 의미와 상관없이 그 안에 들어 있는 ‘좋다’라는 단어에 반응했겠지. 저 멍청이.
“창회 선배도, ‘회’ 발음 자체가 좀 뭐랄까 힘이 들어가는데, 창회 오빠에서처럼 두 번 강세를 주는 것보다 창회 선배가 더 부드럽고, 찬희 선배도 비슷하고. 그래서요.”
다들 고개를 끄덕인다.
저 멍청이들. 아주 지연이 말이라면 그냥 다들 정신 나가서 모이 먹는 닭처럼 고개 끄덕이는 거 봐라.
“그래서요. 뭐, 딱히 이유는…… 없는 것으로 할까요?”
그러면서 활짝 웃는다.
“그래. 맞네. 일리가 있네.”
찬희가 제일 먼저 유지연에 대한 전폭적인 지지를 선언하고 나섰다.
저 자식 저거 위급하면 제일 먼저 나라 팔아먹을 놈이야.
“음. 쓸데없는 질문이었군.”
내 목에 감긴 팔을 풀며 창회가 말했다.
“미안해. 내가 쓸데없는 이야기 했네. 기냥. 으이구.”
이중훈은 그러면서 지 머리를 쥐어박는다.
그래. 계속 쥐어박아라. 머리가 터질 때까지.
모두 하하 호호 웃으며 다시 피자를 집어 드는데, 여기 수긍하지 못하는 한 사람이 남았다.
“없는 것으로 할까요라…. 없는 것으로 할까요가 좀 걸리는데?”
박승환이 아직 의문이 남아 있는 시선으로 지연이를 보며 말한다.
집요한 자식.
“에이. 그런 거 없어요. 그러 이제부터 한수 선배라고 부를게요. 그러면 선배들도 불만 없는 거죠? 그냥 뭐 불편한 거 참죠. 뭐. 시옷 두 번 연속되니까 뭔가 좀 불편하긴 하지만 제가 편해지자고 선배들 마음 불편하게 할 수는 없으니까요.”
그러면서 더 활짝 웃는다.
“아니야. 지연아. 그냥 너 편할 대로 불러. 박승환 이 자식. 넌 또 왜 쓸데없는 이야기를 해서 괜히 지연이 불편하게 만들고 그래!”
그러면서 이중훈 이 자식 또 뭐라고 한다.
“그래. 호칭이 뭐가 중요해. 오빠건 아빠건.”
찬희가 말했다.
“아빠는 안 되지!”
이중훈이 외쳤다.
잘들 놀고 있다.
“난 뭐 선배건 오빠건 상관없으니 편하게 불러라. 암튼 니들은 쓸데없는 것 가지고 괜히 지연이 불편하게 말이야.”
내가 다시 피자를 집어 들며 말했다.
피자는 식으면 맛없어. 빨리빨리 먹어야지. 치즈 늘어날 때 말이야.
“음… 불편…. 불편…. 역시 그렇죠?”
유지연은 내 말을 듣더니 갑자기 이상한 소릴 한다.
“맞아요. 역시 불편할 것 같아요. 한수 선배는.”
그러더니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에이. 그냥 말할래요. 저 한수 오빠 좋아해서 한수 오빠만 오빠라고 부르고 싶더라고요. 그래서 한수 오빠만 오빠라고 불렀는데. 그래도 괜찮죠?”
사람들의 손이 다들 멈췄다.
나도 멈췄다. 피자를 가져가던 손도, 반쯤 벌린 입도.
그리고 오직 박승환만이 손가락을 튕기며 말했다.
“빙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