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45화 (45/271)

45 : 한수는 모르는 이야기

***

120 데시벨을 훌쩍 뛰어넘는 커다란 음악소리가 쿵쿵하고 울려 퍼지는 강남의 클럽은 금요일에서 토요일로 넘어가는 피크라는 것을 증명하듯, 발 디딜 틈 없을 정도로 수많은 사람들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그 클럽 안쪽, 2백만 원이 넘어가는 5바틀 테이블 한쪽에 한 여자가 앉아 있었다.

한수의 전 여자친구, 신지수였다.

신지수의 눈에는 아무런 감정이 담겨 있지 않았다.

신지수는 그렇게 감정 없는 눈으로, 번쩍번쩍 빛나는 사이키 조명 아래로 마치, 무언가를 쏟아 내려는 듯, 음악에 맞춰 정신없이 몸을 흔드는 사람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지수의 시선은 클럽 안의 사람들을 향해 있었지만, 그녀의 생각은 다른 곳을 향해 있었다.

지금쯤이면 끝났겠네.

그녀도 알고 있었다.

오늘 학교에서 축제가 있다는 것을, 과에서 주점을 열었다는 것을, 교수님과 선배들이 찾아갔다는 것을, 유주원 선생님의 전통의 건배사를 시작으로 즐거운 술자리가 시작되었으리라는 것을, 교수님들과 졸업한 선배들이 돌아간 후부터 진짜 축제의 시작이라는 것을. 남아 있는 재료를 전부 다 요리하고 지금쯤이면 분위기가 최고조로 올라가 있으리라는 것을.

신지수는 잘 알고 있었다.

1년 전, 그녀가 그 곳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그녀는 그곳에 있지 않았다. 아니, 있지 못했다.

강남에서 가장 화려한 클럽, 금요일 밤에 2백만 원이 넘어가는 5바틀 테이블에 앉아서 1년 전 기억을 대입하고 있었다.

신지수의 사고가 다시 1년 전 오늘 같은 시간으로 돌아가려던 찰나, 그녀의 머리에 무언가가 닿았다.

“요! 우리 지수! 뭐 하고 있어? 왜 그래? 어디 아파?”

지금의 남자친구, 김민우가 신지수의 머리에 입을 맞추며 말했다.

신지수는 살짝 고개를 돌려 지금의 남자친구를 바라보았다.

샴페인에, 욕망에 취해 번들거리는 눈을 가진 남자친구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니. 그저 조금 피곤해서.”

김민우가 신지수 귀에 얼굴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뭐라고? 잘 안 들려!”

말을 끝내고, 장난처럼 귀에 바람을 ‘후’ 하고 불어넣었다.

“하지 마!”

김민우에 장난에 소름끼치는 기분을 느낀 신지수는 날카롭게 소리치면서 남자친구를 밀어 버렸다.

신지수의 거친 반응에 잠시 당황한 표정을 지었던 김민우의 얼굴이 굳어졌다.

신지수는 알고 있었다. 화가 났을 때, 보여 주는 표정이었다.

신지수는 그런 남자친구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작게 말했다.

“미안해. 오빠. 나 너무 피곤한데, 먼저 들어갈게.”

신지수의 말을 들은 김민우는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하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이면서 말했다.

“데려다줄까?”

“아니야. 택시 타고 갈게. 오빠는 친구들하고 놀아.”

신지수는 그렇게 말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김민우는 가방을 집어 들고 나가는 신지수의 뒷모습을 짜증 난다는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고분고분 말 잘 듣는 평소 모습과는 달리, 오늘 여자친구의 모습이 어딘가 이상했다.

그런 김민우의 어깨에 누군가가 팔을 둘렀다.

김민우는 여자친구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돌렸다.

그의 친구였다. 김민우와 마찬가지로 술과 욕망에 취한 눈을 하고 있었다.

“뭐야? 쟤 어디가?”

친구가 말했다.

“몰라. 집에 간대. 아픈가 봐.”

“크하하. 생리 터졌나 본데.”

친구의 상스러운 농담에 김민우는 작게 인상을 썼다.

하지만 친구는 그런 김민우의 어깨에 두른 팔에 힘을 주며 말했다.

“좋아. 잘되었네. 오늘 최고의 밤이 되겠군.”

“뭔 소리야?”

“여자친구가 갔다. 그 말은? 새 여자를 만날 수 있다는 이야기지.”

친구는 그렇게 말하고는 테이블에 놓인 술잔을 들어 입에 털어 넣고는 김민우에게 소리쳤다.

“오늘 환상적인 밤을 만들어 주지! 브로! 이 제이슨만 따라오라고!”

***

“다녀왔습니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온 유지연은 거실에 불이 켜져 있는 것을 확인하고는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생각보다 일찍 왔구나.”

거실에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신발을 벗고 거실로 간 유지연은 소파에 앉아 책을 보는 아빠를 보고, 그 다음에 거실에 있는 시계를 보았다.

새벽 2시가 가까워진 시간.

“일찍은 아닌데….”

“새벽에나 들어올 줄 알았는데.”

유지연은 아빠의 말에 살짝 삐진 표정을 지었다.

“걱정 안 돼요? 금지옥엽 막내딸이 밤늦게까지 술 마시고 왔는데?”

유지연의 말에, 아빠는 작게 미소 짓고는 다시 시선을 손에 들린 책으로 돌렸다.

유지연도 알고 있었다.

특별한 일이 없으면 일찍 잠자리에 드는 아빠가, 이 늦은 시간까지 거실에서 책을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엄마는?”

“잠들었지. 누가 데려다 주었니?”

“한수 오빠요.”

한수라는 이름에 유지연 아빠의 시선이 다시 막내딸에게로 향했다.

“둘이서만?”

“아니. 그 예쁜 언니도 같이.”

유지연의 말에, 아빠는 무언가를 생각하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아빠의 모습을 보면서, 유지연은 ‘그 예쁜 언니’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그 마음을 접었다.

“피곤하다. 나 잘게요.”

“그래. 쉬어라.”

“아빠도 빨리 주무세요. 밤늦게까지 책 본다고 나중에 엄마한테 혼나지 말고.”

막내딸의 잔소리에 작게 미소 짓는 아빠를 뒤로하고, 유지연은 자신의 방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방에 들어온 유지연은 겉옷도 벗지 않고, 가방만 내려놓고는 침대에 몸을 던졌다.

그리고는 천장을 바라보며 무언가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그녀의 생각을 ‘깨톡’ 하는 소리가 방해했다.

재빨리 몸을 일으킨 유지연은 재빨리 가방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에는 동기 여자친구의 이름이 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실망감을 눈빛에 담은 채로, 유지연은 핸드폰에 손가락을 가져갔다.

***

-지여닝~ 집에 잘 도착했어?

‘응. 방금 왔어. 너는?’

-나도 좀 전에 와서 막 씻었어. 개 피곤하다.

‘그러게 나도 좀 피곤하네. 암튼 고생했다.’

- 고생했지. 축제다 주점이다 해서 재밌을 줄 알았는데 이케 힘들 줄이야. 창회 오빠가 그러는데 역대 최고 매출이래.

‘사람이 엄청 많았지.’

-다 지여닝 덕분이지.

‘……죄송합니다.’

-아니지. 우리 지여닝이 왜 죄송해~ 사과하지 마. 그런 거 나 싫어.

‘그렇게 말해 주면 고맙고.’

-아니 사실 잘못한 건 그 도촬범이 잘못한 거지. 잡았대?

‘누군지는 찾았대. 근데 연락이 안 된대.’

-그런 놈은 신고해야 돼. 그런 놈들이 예비 성범죄자야. 잡아서 콩밥 먹여야 돼.

‘선배라던데? 다른 과.’

-우리 학교? 세상에. 그런 놈은 신고할 것도 없어. 그냥 십자가에 매달아 놓고 그 앞에다 돌 엄청 쌓아 놓고 지나가는 여학생들이 돌 한 번씩 던져서.

‘괜찮은데?’

-괜찮지? 본보기를 삼아야 해.

‘나쁘지는 않은데, 그러려면 십자가랑 돌 엄청 많이 필요한데. 나 그렇게 찍힌 사진 많아서.’

-지금 지여닝 예쁘다는 이야기 하는 거지?

‘그건 맞지.’

-지여닝 재수 없어. 내가 두 번째로 싫어하는 타입이야. 이쁘고 지 이쁜 거 알고.

‘첫 번째는?’

-이쁘고 지가 이쁜 거 알고 안 이쁜 척하는 것들. 제일 재수 없어.

‘두 번째라 그나마 다행이다.’

-니가 그나마 여우 짓 안 하니까 친구 하는 거지. 여우 짓까지 했어 봐.

‘조… 조심하겠습니다. 언니.’

-그래. 항상 언니들 말 잘 듣고. 그건 그렇고 별일 없었어?

‘무슨 별일?’

-‘니네’ 한수 오빠랑 같이 택시 타고 갔잖아.

‘…한수 오빠랑‘만’은 아니었지.’

-누구래? 한수 오빠 여자친구래?

‘여자친구는 아닌 것 같은데….’

-같은데?

‘우리 한수 씨라고 하더라. 우리 한수 씨 잘 부탁한다나 어쩐다나.’

-어머어머어머어머 대박. 한수 오빠 있는데 그래? 우리 한수 씨라고? 그거는 게임 끝난 거 아냐?

‘게임 끝인가?’

-ㅇㅇ. 당연하지. 한수 오빠는? 그 이야기 듣고 가만히 있어?

‘한수 오빠는 앞에 앉아 있어서 얼굴은 못 봤는데… 별말 없더라고.’

-너도 하지 그랬어. 우리 한수 오빠.

‘하려고 틈을 봤는데, 잘 안 만들어지더라고. 상황이.’

-그래서 그냥 듣고만 있었다?

‘아니. ‘우리’는 못 썼지만, 공격을 안 한 건 아닌데.’

-아닌데?

‘아… 모르겠다. 아무튼 오늘은 졌어.’

-아무튼 빼박 같은데. 여자친구 맞는 거 같은데.

‘음… 여자친구는 아닌 것 같아. 아직 썸? 그런 느낌?’

-썸? 우리 불쌍한 지여닝…. 사랑에 눈이 멀었구나. ‘우리’ 이거 나오면 게임 끝난 거야

‘사귀다가도 헤어지는데, 썸쯤이야.’

-지여닝. 희망이 크면 절망도 큰 법이야.

‘…고마워. 아주 좋은 말 해 줘서 고마워. 아주 고마워.’

-아니에요. 희망을 버리지 말자. 결혼했다고 헤어지는데. 그나저나 아무튼 이상하네.

‘뭐가?’

-아니. 그… 여자 엄청… 이뻤잖아.

‘그랬지….’

-아까 선배들 보니까, 다들 영혼이 빠져나가는 게 보이더라니까. 그 여자가 주점 들어올 때.

‘그 정도였어?’

-아주 장난 아니었어.

‘흠…….’

-솔직히 우리끼리 하는 이야기지만, 그렇게 예쁜 여자 처음 봤어. 웬만한 연예인보다 더 예쁘더라니까. 솔직히 처음 봤을 때 나도 두근거릴 정도로.

‘……너 설마.’

-지여닝, 지금 그런 농담 할 타이밍 아냐. 엄청 초 미인이 지금 니네 한수 오빠 옆에 나타났는데!

‘ㅠㅠ’

-그런 미인이 다른 사람도 아니고, 남자 하나를 보러 학교 축제에 왔다? 그것도 혼자. 혼자 와서 남자의 친구들에게 이끌려 술자리까지 참석했다. 그리고 같이 택시 타고 집에 갔다?

이러면 빼박이지. 빼! 박! 캔! 트!

‘…이 상황을 즐기는 기분이 드는 것은 나뿐인가요?’

-아니야. 아니야. 난 당연히 걱정 돼서 그러는 거지. 우리 지여닝의 슬픈 짝사랑. 그나저나. 난 진짜 모르겠다.

‘뭐가?’

-한수 오빠.

‘한수 오빠가 왜?’

-아니. 한수 오빠 작년에도 지수 언니랑 사귀었다며? 지수 언니 엄청 이쁘잖아. 어떻게?

그리고 너도. 너도 한수 오빠 좋아하고. 그 초초초초초 미녀도 그렇고.

‘…괜찮지 않아?’

-괜찮다고 해 줄까?

‘…어떻게 생각하는데? 너는?’

-솔직히?

‘솔직히.’

-음… 한수 오빠. 뭐. 그 정도면 막 못나고 그런 건 아닌데, 그렇다고 엄청 잘생긴 것도 아니잖아. 이야기를 많이 안 해 봐서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을 막 잘하는 것 같지도 않고. 오히려 생긴 건 중훈 오빠가 더 괜찮지.

‘동의 못 하겠는데….’

-지여닝 이거 바로 발끈하는 거 봐라.

‘…계속해 봐.’

-싫어. 안 할래. 솔직하게 지가 말해 달라고 해 놓고선.

‘미안해요. 언니.’

-좋아. 이 언니가 한 번 봐주도록 하지. 아무튼, 또 한수 오빠 처음에는 좀 뭐랄까? 우울하고… 그런 분위기? 그런 게 있었잖아.

‘우울하다기보다, 뭔가 좀 그 슬픔이 자연스럽게 배어 나오는 그런… 미안. 계속하세요.’

-이미 눈에 콩깍지가 제대로 쓰였구만. 아예 렌즈 삽입 했네.

‘…….’

-아무튼 알 수가 없어. 한수 오빠의 인기를.

‘앞으로도 계속 몰라 주세요.’

-니예니예 알게쭙니다. 암튼 우리 지여닝 망했네. 그 여자, 엄청 예쁘고. 학교도 하버드 나왔다며, 조기 졸업에 석사에.

‘진짤까?’

-설마 그런 걸 거짓말하겠어? 한수 오빠에게 뭐 뜯어먹을 게 있다고. 시골에서 서점 한다며?

‘그렇지. 한수 오빠가 뜯어먹기에는 좀 부족하지. 맞는 말인데 좀 기분 나쁜 건 왜일까?’

-어이구. 아주 열녀 나셨네. 아주. 아무튼 그렇게 완벽한 여자가 붙어 있는데, 우리 지여닝이 아무리 이뻐도 과연 이겨 낼 수 있을까?

‘분명 뭔가 약점이 있겠지. 세상에 완벽한 사람은 없어.’

-또 혹시 알아? 그렇게 예쁘고 공부도 잘했는데, 알고 보면 재벌 손녀라든가.

‘드라마 너무 많이 봤구나?’

-그치? 사실 드라마로도 못 쓰겠다. 방송국 망하지.

‘그 정도까지야…. 아무튼, 알았어. 오늘 너무 피곤하다. 나 씻지도 않았어, 아직.’

-어머 더러워. 그래서 한수 오빠가 좋아해 주겠어?

‘…….’

-죄송해여. 언니. 제가 선을 넘었어요.

‘우선 나 씻고 올게.’

-빡빡 깨끗하게 씻어. 한수 오빠가 언제 영통 걸어올지 모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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