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 축제가 끝난 후 (2)
우리는 일제히 소리가 난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의자에서 떨어졌는지, 머리를 늘어트린 채 쓰러진 진철이 형의 모습이 보였다.
다른 선배 형이 진철이 형의 한쪽 팔을 잡아챘는지, 다행히 머리를 땅에 박지는 않은 것 같았다.
“진철아! 야, 임마!”
준호 형이 진철이 형의 이름을 부르며 재빨리 상체를 부축했다. 그 모습을 본 우리는 그쪽으로 달려갔다.
서현 님에게 살갑게 말을 걸어 주던 수정 누나가 빠르게 뛰어가서 진철이 형 동기들에게 물었다.
“오빠. 무슨 일이에요? 진철 오빠 왜 이래?”
“진철이가, 의자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쓰러졌어.”
“갑자기? 아무런 이유 없이?”
“아니. 좀 많이 마시기는 했어. 그래서 아까 전부터 테이블에 머리 박고 자고 있었는데, 갑자기 중심을 잃고.”
“진철 오빠가? 진철 오빠가 정신을 잃을 정도로 술을 마셨다고?”
그러면서 수정 누나는 진철이 형 쪽으로 다가가 말을 걸었다.
“오빠. 진철 오빠. 내 말 들려요? 오빠.”
수정 누나가 말을 건네자, 정신을 잃고 축 늘어져 있던 형의 얼굴이 살짝 움직인다.
“오빠. 정신 좀 차려 봐.”
그런 선배 누나의 말에 진철이 형은 의식을 전부 놓지는 않았는지, 약한 신음 소리를 내면서 조금씩 움직이기는 하는데, 완전하게 정신을 차리지는 못하고 있었다.
“우선 좀 눕힐까요? 지금 불편해 보이는데.”
내가 가서 말했다.
“그러자. 과방에 누울 만한 자리 있니?”
수정 누나가 물었다.
“아마. 힘들 것 같아요. 거기 지금 난장판이라서….”
이중훈이 대답했다.
그럴 것이다. 주점이 끝나고 본격적인 술자리가 시작되기 전에 필요 없는 집기는 전부 과방에 처박아 놨으니.
“우선 박스라도 좀 가지고 와서 깔고 눕혀 두자고. 춥지 않게 옷 같은 거 좀 모아서 덮어 주고. 한 1시간 정도 있으면 괜찮아질 거야.”
준호 형이 말했다. 그 말에 우리 모두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바닥에 박스 몇 장을 겹쳐서 깔고, 그 위에 진철이 형을 눕혔다. 그리고 덮을 수 있을 만한 것은 전부 모아서 아직 쌀쌀함이 묻어나는 5월 밤공기로부터 형을 보호했다.
어느 정도 정리가 끝난 후, 진철이 형과 같은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준호 형이 이야기해 준 전후 상황은 이러했다.
같은 고시반인 준호 형이 진철이 형에게 주점에 가서 술이나 한잔하자고 권유를 했다고 한다.
진철이 형은 마음이 내키질 않는다며, 그냥 공부하겠다고 했는데, 준호 형이 공부도 쉬어가면서 해야지, 기계가 아니고 사람인데, 살짝만 마시고 오늘은 쉬자, 이렇게 말하면서 데리고 왔다는 이야기다.
그리고 교수님들의 눈을 피해, 구석진 곳에서 둘이서 술을 마시기 시작했는데, 다른 동기 형들이 하나둘씩 합석하면서 자리가 좀 커졌고,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진철이 형이 말도 없이 계속 술을 마시는 것을 아무도 인지하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미 알았을 때는 그 녀석 앞에만 소주병이 세 개나 있더라고. 설마 저걸 혼자 다 먹었겠어, 그렇게 생각했는데….”
“생각했는데요?”
“…생각해 보니, 우리는 막 이런저런 이야기도 하고, 안주도 먹고 그러면서 있었는데, 그 사이에 저 녀석은 그냥 안주도 없이 계속 들이부은 것 같아.”
“오빠들 너무하네. 데리고 왔으면 같이 먹어 주든가. 진철이 오빠 술도 잘 안 먹는 거 알면서.”
수정 선배는 누워 있는 진철이 형의 얼굴을 물수건으로 닦으면서 복학생 선배들을 혼냈다.
“미안하다. 우리도 너무 오랜만에 술자리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다.”
“그나저나 진철 오빠는 왜 이런 거예요? 요즘 무슨 일 있어요?”
수정 누나의 질문에 형들은 그저 서로를 바라볼 뿐 대답이 없다.
“얼마 전에도 도서관 근처에서 엄청 심각하게 전화 받고 있던데, 진철 오빠 뭔 일 있어요?”
누나도 그걸 봤구나.
내가 승환이랑 식당가다가 본 모습을 봤을까? 아니면 다른 날 비슷한 상황을 본 것일까.
“자. 자. 여기는 우리가 챙길 테니까, 다른 사람들은 모두 술 먹어. 여기 신경 쓰지 말고.”
준호 형이 걱정스럽게 바라보는 우리들에게 말했다.
“그래. 다들 가서 놀아. 여기는 선배들이 챙길 테니까.”
수정이 누나도 우리에게 편하게 술 먹으라고 권유했다.
“네. 그럼….”
수정이 누나도 계속 진철이 형 옆에 있을 건가 보다. 저렇게 말하는 것을 보니.
우리는 적당히 인사를 하고 다시 본래 자리로 돌아왔다.
술 먹고 쓰러지는 일이야, 자주는 아니어도 가끔씩 있는 일이고, 진철이 형이 걱정 안 되는 것은 아니지만 동기들이 있으니 잘들 챙겨 주겠지.
(괜찮으신 건가요?)
다시 자리로 돌아온 내게 서현 님이 귓속말로 말했다.
(네. 아마도요. 선배들도 계시고. 놀라셨죠?)
(아니요. 전 괜찮아요. 다만 걱정이 돼서….)
참 자상하시기도 하시지. 우리 서현 님은.
“이쯤에서 한번 정리할까?”
이중훈이 나에게 다가와서 말했다.
“그게 좋겠다. 집에 간다는 사람은 모아서 택시 태워 보내고, 더 마실 사람은 적당히 정리하고 테이블 새로 만들고.”
내가 말했다.
이 정도에서 정리하는 게 괜찮겠군. 서현 님도 모시고 들어가야 하니, 나는 1학년 대표를 불러 말했다.
“지금 한번 정리할 거니까, 1학년들 모아서 집에 간다는 사람 있으면 같은 방향끼리 묶어 봐. 모아서 택시 태워 보내게.”
내 말을 들은 1학년 대표는 고개를 끄덕이고 1학년들을 모으러 갔다.
“우리도 이제 들어갈까요?”
나는 서현 님을 돌아보며 말했다.
“그래도 괜찮아요? 한수 씨 자리 비워도?”
“괜찮아요. 그리고 이건 양보 못 해요. 서현 씨랑 같이 갈 거예요.”
내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러자 서현 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그리고 나에게 조그맣게 속삭였다.
(고마워요.)
***
나는 서현 님과 택시를 타고 집으로 가고 있었다. 아니, 정확히는 교대역, 지연이의 집이 있는 방향으로 가고 있었다.
집에 갈 사람을 모아 보니, 지연이만 같이 갈 사람이 애매했다. 설사 같이 갈 사람이 있었다고 해도, 오늘 총학 누나에게 이야기를 들었던 것도 있고, 내가 지연이를 데려다주고 싶었다.
물론 이중훈이 자기가 데려다주겠다고 난리를 쳤지만, 김창회와 박찬희에게 끌려가면서 울부짖을 수밖에 없었지.
그리고 애초에 그 자식 집은 일산이잖아!
밤새 퍼마시고 숙취에 괴로워하면서 지하철이나 타고 가라, 이 자식아. 후후후.
“죄송해요. 괜히 저 때문에 돌아가셔야 해서.”
뒷자리에 앉은 지연이가 말했다.
“괜찮아요. 어차피 지금 새벽이라 차도 없어서 시간 차이도 크게 안 나는데.”
역시 뒷자리에 앉은 서현 님이 말했다.
우리 서현 님. 자상도 하셔라.
“그나저나 고생 많았어요. 많이 힘들었어요?”
서현 님이 지연이에게 말했다.
저 봐. 저 봐. 혹시라도 어색할까 봐 말 걸어 주는 거 봐 봐. 얼마나 착해?
“아니에요. 저는 그저 심부름만 하고…. 고생은 한수 오빠가 다 했죠. 축제 준비하고, 요리하고. 선배들 챙기고 한다고.”
후후후. 우리 지연이도 참 사려가 깊구나. 아직 어린데, 참 시야도 넓고.
“한수 씨도 수고하셨어요.”
“아니에요. 지연이 같은 훌륭한 후배들 덕이죠.”
그 말에 뒤에서 침묵이 들려온다.
어어? 지연아. 넌 아니에요. 다 선배 덕이죠, 해야지. 서현 씨도 후배들이 참 착하네요, 해야죠!
와, 아무 말 안 해요? 분위기 이상해지는데? 이러면?
“그나저나, 우리 한수 씨는 어때요? 잘해 줘요?”
서현 님이 말했다.
들었어? 기사님도 들으셨죠?
‘우리’ 한수 씨라고. 우후후후.
“한수 오빠요? 네. 잘해 줘요.”
역시. 유지연. 넌 현명한 녀석이구나.
자고로 친분이 별로 없는 사람들 사이에서 중간에 공통 주제를 찾아서 이야기할 때 기본적으로 칭찬을 깔고 가는 거야.
아주 훌륭해. 우리 후배 아주 칭찬해!
“이번에 축제 준비하면서도 오빠가 많이 도와줬어요. 어제도 집까지 데려다주고.”
“어제요? 그랬어요?”
“네. 늦게 끝나니까 위험하다고.”
뭐…. 그렇긴 했지. 틀린 말은 아니지.
“그랬군요. 한수 씨 참 착하죠?”
“맞아요. 한수 오빠 진짜 착해요. 오늘도 좀 안 좋은 일이 있었는데, 한수 오빠가 도와준다고, 자기만 믿으라고. ‘사랑하는’ 후배를 위해서 도와준다고 했거든요.”
그… 그런 말도 했지.
“어머. 그랬어요? 한수 씨 참 자상하네요.”
“네. 제가 정말 믿고 따르는 오빠예요.”
뭐지? 이 분위기 뭐지?
지금 내 칭찬 같기는 한데, 왜 등골이 서늘하지?
기사님. 에어컨이 너무 센 거 아닌가요?
아닌데, 에어컨 안 돌아가는데?
“앞으로도 우리 한수 씨 잘 부탁드려요.”
“…네.”
뭐야. 갑자기 왜 이래. 이 대화의 마무리는 뭐야!
그렇게 대화가 끝난 후 택시가 교대역에 도착할 때까지, 어색한 침묵이 택시 안에 감돌았다.
그 어색한 침묵이 끝난 것은 교대역 인근, 지연이가 사는 아파트 단지 앞에 택시가 멈추고 나서였다.
혹시 모르니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내 제안을 어딘가 서글픈 미소로 거절한 지연이는.
“괜찮아요. 바로 집 앞인데. 감사했습니다.”
그렇게 말하고 고개를 꾸벅 숙이고 아파트 단지로 들어갔다.
녀석 뒷모습이 피곤해 보이는군.
지연이를 내려 준 택시는 성수동 우리 집, 우리 집이란다, 우후후후. 서현 님과 나의 보금자리로 다시 출발했다.
“예쁘네요.”
택시가 출발하자 서현 님이 말했다.
“네?”
“방금 내린 한수 씨 후배요. 지연이라고 했던가요? 이름이.”
“아. 네. 저 녀석이 올해 입학한 신입생 중에서 가장 예쁘다고 하더라구요.”
“신입생 중에서요?”
“네. 이야기 들어 보니까 학교에서 좀 잘생겼다 하는 놈들은 다 한 번씩 들이댔나 보더라구요. 또 학교에 상주하는 연예기획사 스카우터들도 말 걸었다는 소문도 있고.”
“그래요? 인기 많겠네요.”
“뭐. 좋아하는 녀석들은 좀 있는 것 같더라구요. 왜 아까 막 지가 데려다준다고 했다가 질질 끌려가는 놈 있었죠? 그 자식이 진짜 좋아해요.”
“그렇군요. 혹시… 한수 씨도?”
“저요? 에이. 아니에요. 저는. 별로 이야기도 많이 못 해 봤고.”
“그럼 반대는 어때요?”
“네? 반대요?”
“한수 씨에 대한 지연이라는 저 후배의 마음.”
응? 이거, 대화가 이상하게 흘러가는데.
“…설마요. 저 녀석이랑 이 정도로 이야기한 건 며칠 되지도 않았어요. 이번 축제 하면서 좀 이야기했지, 그전에는 일주일에 한 번 얼굴도 볼까 말까….”
나는 그렇게 말하면서 오늘 지연이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 오빠 목소리 듣고 시작하려고요.
흠…… 혹시?
에이, 설마.
뭐 최근 사물함 사건이랑 축제 전까지 딱히 접점이 있던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내가 막 여자들이 한눈에 뿅 갈 정도로 잘생긴….
내가 내 입으로 말하자니 좀 기분이 그렇네.
뭐, 사실은 사실이니까.
꽃미남도 아니고….
아무튼 그 녀석이 날 좋아한다고 착각할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아니에요. 뭐. 딱히 접점이 없어요. 그 녀석이랑.”
“그래요? 그런 것치고 엄청 친해 보이던데요?”
“제가요? 그 녀석이랑?”
“네. 아까 전 부칠 때 보니까 둘이서 한 팀 같더라구요. 반죽도 그 후배가 담당하고, 필요한 거 있으면 그 친구가 가져다주고, 중간중간에 먹을 것도 가져와서 한수 씨에게 먹여 주고, 한수 씨도 계속 웃어 주고. 말도 많이 하고 그러던데요?”
“…그랬어요? 제가?”
기억이 안 난다.
기억나는 것이라고는 그저 기름 두르고, 반죽 올리고, 적당히 펴서 한쪽 다 익으면 뒤집은 것밖에.
서현 님은 웃고 계신다. 하지만 입가에 걸린 미소가 어딘가 평소와는 다르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이럴 때 필요한 것은 변명, 빠르고 그럴싸한 변명.
“아니. 그냥. 같은 팀이라서. 요리 팀이거든요. 저 녀석이랑 나랑. 내가 팀장이니까. 또 1학년들이 당연히 선배 잔심부름하는 건 당연하죠. 뭐 이상할 것 없는데요?”
“전 이상하다고 안 했는데요?”
“네?”
“그냥 사이가 좋아 보인다고. 사이가 나빠요?”
“아니. 뭐 나쁜 건 아닌데….”
“그럼 좋아요?”
“아니. 또 막 그렇게 좋은 것도 아니고.”
그렇게 내가 당황해서 횡설수설하자 서현 님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한수 씨. 그거 알아요?”
“네? 뭐… 뭘요?”
“제가 아는 한수 씨랑, 아까 학교에서 선후배들 사이에 있던 한수 씨랑 좀 다른 사람 같아요.”
“어… 어떻게요?”
“아까 학교에서 친구들이나 선후배들과 같이 있을 때 한수 씨는 좀 뭐랄까… 남자답고 멋있었어요.”
“…그런가요?”
“네. 막 넉살 좋게 말도 하고, 후배들에게 지시도 내리고, 친구들에게 발차기도 하고. 그런 모습이 참 유쾌하고 즐거워 보였어요.”
“…그런데 서현 씨가 아는 저는요?”
“물론 저랑 있을 때도 한수 씨는 멋있어요. 보통 때는 멋있는데, 가끔씩 막 당황하고, 이렇게 당황하는 모습을 보일 때가 있어요.”
서현 님이 무엇을 이야기하는지 알겠다.
이 사람 앞에만 서면 왠지 긴장해서 못난 모습을 보였던 내 바보 같고 찌질한 모습들을.
“그래서 저는 좋아요.”
응? 뭐라고요?
“네?”
“다른 사람들은 모르는 한수 씨의 모습을 저만 알고 있는 게 좋아요. 그렇게 당황해서 말 살짝씩 더듬는 그런 모습이 귀여워요. 그 모습. 저는 좋아해요.”
“…….”
“놀려서 죄송해요. 하지만 한수 씨 당황해하는 모습이 귀여워서.”
아, 진짜.
이 사람 못 쓰겠구만.
어디 사내대장부에게 귀엽다고 그런 말을 하고 그래.
안 되겠어.
택시에서 내리면 남자다운, 수컷다운 모습을 보여 줘야겠어!
손목을 잡아채고, 집으로 올라가서, 문이 열리면 그대로 벽으로 밀어붙여서…….
음… 그만하자.
“그나저나 한수 씨는 여자 마음을 잘 모르네요.”
갑자기 이건 또 무슨 주제 전환?
“여자 마음이요?”
“네. 뭐, 앞으로도 몰랐으면 좋겠지만….”
“네? 그게 무슨 말이에요.”
그러자 그녀가 살짝 미소를 짓고는 말한다.
“안 가 르 쳐 줄 래 요.”
“서현 씨?”
“아. 다 왔다. 기사님 저기 정문 앞에 세워 주세요.”
서현 님은 내 말을 끊고 기사님에게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웃어 보이며 속삭였다.
(안 가르쳐 줄 거예요. 절 대 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