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 : D-day (5)
서현 님은 교수님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선생님이 계신 줄은 몰랐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유 선생님이 특유의 인자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오랜만이네요. 서현 양.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선생님. 정말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한국 들어왔다는 이야기는 들었어요? 지금은 그럼 공부를 계속하나요?”
“아니요. 지금 할아버지 옆에서 일을 도와드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둘이서 이야기를 나눈다.
어떻게 아는 사이지?
나는 김창회에 팔에 계속 매달린 상태로 그 모습을 보고 있었다.
아니, 나뿐만 아니라, 주점에 있는 모든 사람, 스태프, 손님 할 것 없이 모두 서현 님이 있는 테이블을 바라보고 있었다.
“유 선생님. 이분은 누구신가요? 우리 학생인가요?”
유 선생님 옆에 앉아 계시던 다른 교수님이 서현 님에 대해 물었다.
“아. 네. 이분은 제 지인의 손녀입니다. 강민철 씨. 손녀.”
“강민철? 아. 그 강민철? 중앙의?”
강 회장님의 이름이 나오자 서현 님이 그 교수님에게 고개 숙여 정중하게 인사했다.
“처음 뵙겠습니다. 강서현입니다.”
아까 가로등 밑에 서 있을 때는 영락없는 여대생 같더니, 또 저렇게 교수님을 상대로 깍듯이 인사하는 걸 보니, 전문직, 미녀 변호사 같다.
“오. 그래요? 여기는 어쩐 일로. 아니지. 우선 앉아요.”
서현 님의 인사를 받은 교수님은 반갑게 맞이하면서 재빠르게 유 선생님과 그 사이에 재빨리 한 자리를 만들었다.
“어머. 제가 앉아도 될까요?”
그런 권유에 서현 님은 잠시 머뭇거렸다.
하긴, 교수님과 선배들, 그것도 졸업한 선배들 사이에 앉으라 그러면 나라도 못 앉겠다.
“괜찮으면 잠시 앉았다 가면 어떨까요?”
유 선생님이 말했다.
저건 반칙이지. 유 선생님이 저런 미소로 앉으라 그러면 누가 거절해…….
“그럼 잠시만 실례하겠습니다.”
서현 님이 그렇게 말하면서 살짝 수줍은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살포시 앉는데, 그 모습이 얼마나 우아한지, 마치 발레리나의 춤처럼 느껴진다.
안 되는데, 서현 님이 저기 앉으면 안 되는데.
나랑 데이트……는 아니고, 아무튼, 축제 구경해야 하는데. 축제 구경하면서 같이 맛있는 것도 사 먹고, 물론 하루 종일 기름에 전과 함께 지져진 나는 뭔가를 먹고 싶은 생각은 없지만. 맛있는 것도 사 주고, 하하 호호 웃으면서 구경도 하고, 으슥한 곳도 가 보고 해야 하는데.
그런 생각은 나만 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나 보다.
서현 님이 교수님들 자리에, 속칭 VIP 테이블에 착석하자 주점에 있던 모두의 눈에 실망이 스쳐 지나갔다.
저 자리에 앉은 이상, 그녀와 대화하기란 불가능하지.
단순한 놈들. 욕망이 보인다. 말 걸고 싶은 욕망이, 알고 싶은 욕망이 눈에서 이글이글 타고 있다. 이 자식들아!
“자. 우리는 잠시 이야기 좀 할까?”
서현 님이 착석을 완료하자, 몇몇의 눈이 나에게로 향했다.
지금 저 두꺼운 팔뚝으로 나를 구속하고 있는 김창회.
다크나이트가 연상되는 웃음을 짓고 있는 박승환.
그리고 어제처럼 부엌칼을 집어 드는 박찬희.
이 자식아! 그건 아니지. 그걸 왜 집어 들어!
나는 그 악귀들에 의해 주점 뒤 으슥한 곳, 술을 쌓아 두던 곳으로 끌려갔다.
“자. 설명해 봐.”
김창회가 팔을 풀자 박찬희가 손가락으로 칼등을 쓰윽 문지르며 말했다.
“뭐…… 뭐를?”
“잘 알 텐데?”
취조실. 그래. 경찰서 취조실. 딱 그 분위기다.
“뭘…… 안다는…….”
“모른 척하지 마!”
책상이 있으면 책상을 치면서 할 만한 대사를 이중훈이 외쳤다.
이중훈? 넌 또 언제 꼈냐.
“우선 누구지? 어떻게 아는 사이지?”
이중훈. 너는 대학 잘못 왔다. 경찰대를 갔었어야 했다. 저 눈빛 봐라.
“그…… 그걸…… 왜 내가 설명해야 되지?”
“이 자식 안 되겠구먼.”
이중훈이 고개를 절레절레 좌우로 흔들더니 손목의 시계를 풀었다.
미친놈아! 그걸 왜 풀어!
나는 재빨리 한때 혁명을 꿈꾸던 동지들을 돌아보았다.
동지들이여! 자본의 지배에 맞서 새로운 노동자의 낙원을 함께 꿈꾸던 동지들이여!
“말로 해선 안 되겠구만.”
창회가 소매를 어깨까지 걷고 주먹을 풀며 말했다.
“저 자식은 독종이라 그냥은 안 불 거야. 손가락부터 시작하자고.”
찬희는 앞치마로 식칼의 날을 천천히 문지르면서 이중훈에게 말했다.
드골에게 숙청당하던 레지스탕스들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마르쿠스 브루투스를 본 케사르의 마음이 이러했을까?
한때 같은 곳을 보며 같은 꿈을 꾸었던 동지들이 나를 치기 위해 공통의 적과 손을 잡았구나.
“잠깐만. 그러면 안 되지.”
박승환이 말했다.
그래. 승환아. 역시. 너뿐이구나.
우리는 8백만 원과 목숨을 공유하는 사이 아니었더냐. 내가 너를 위해 목숨을 걸고, 네가 나를 위해 죽어 줄 수 있는 그런 사이가 아니었더냐.
친구여! 나의 유일한 친구여!
“자고로 고문이란 상처는 적게, 고통은 크게 하는 것이 효율적이야. 예를 들어 손톱 밑이라든가.”
그러면서 송곳을 꺼낸다.
야, 이 미친놈아! 그걸 왜 들고 다녀!
***
나는 굴복하고 말았다. 전방위적으로 나를 덮쳐 오는 압박과 고통 속에서, 나는 그들에게 굴복하고야 말았다.
“그러니까. 정리해 보면.”
이 모든 고문 작업을 주재했던 박승환이 정리했다.
“저기 계신 저 미녀는 니 할아버지의 지인 되시는 분의 손녀이고, 그 할아버지의 지인 되시는 분이, 즉 저 미인의 할아버지가 니가 이번에 들어가서 살게 된 그분이라 이거지?”
“그, 그래.”
“흠. 그럼 뭐 별거 아니네.”
김창회가 어깨 위로 걷어 올린 소매를 내리면서 말했다.
“왜 별거 아닌데?”
“할아버지의 친구분의 손녀라는 관계는 내가 오늘 아침에 들른 편의점 점주 아줌마보다도 먼 관계야. 별거 아닌 사이구만.”
김창회의 말에 사람들의 고개가 끄덕인다.
별거 아닌 사이라니. 그런 분위기로 흘러가면 목숨은 건질 것 같기는 한데, 왜 기분이 나쁘지?
“아니야. 그건 너무 성급한 결론이지.”
역시 박승환. 또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우리가 간과한 것이 있다면 알려 주게. 동지.”
…동지?
“우선 첫 번째로. 여기 이 피의자의 말을 전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가부터 생각해 봐야지. 이 간악하고 음험한 피의자, 줄여서 간음 피의자는 거짓을 말했다.”
“거짓이라니! 나는 그런 적 없어!”
내가 항변했다.
“아니. 너는 우리에게 거짓을 말했다. 우선 니가 이사 간 곳이 친척 어르신 집이라고 했지?”
나는 여기서 할 말이 있다.
“치…… 친척 집이라고 한 적 없어. 친척 어르신의 집 비슷한 거라고 했지.”
“그래. 그렇다고 치자. 너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다고 이야기하지만, 친척 어르신 비슷한……이라는 뭉뚱그린 표현으로 주위 사람들에게 친척 집으로 오해하게 만드는 잘못을 저질렀다. 적극적으로 할아버지의 친구분의 집이니까 친척 집과 비슷하지만, 친척 집은 아니라고 알렸어야 했는데, 그러지 않았다. 작위만 죄가 되는 것이 아니지. 부작위도 죄가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겠지?”
이건 아니지.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지.
“그런 신뢰 없는 피의자의 신뢰 없는 발언을 우리는 전적으로 믿어서는 안 되지. 예를 들어, 할아버지의 친구분의 손녀딸은 적어도 세 단계를 넘어가야 하지. 창회 말대로 편의점 주인아줌마보다 더 먼 사이처럼 보일 수도 있지. 그렇지만…….”
“그…… 그렇지만?”
이중훈이 침을 꼴딱 삼키며 말했다. 너 이 자식아. 넌 왜 여기서 이러고 있는데?
“만약, 할아버지들끼리의 약속이 있다면?”
“야…… 약속이라니.”
박찬희가 식칼을 든 손에 힘을 주며 물었다.
야, 임마. 힘 풀어. 힘 풀어. 얼마나 힘줘서 잡았는지 손가락이 하얗다 못해 투명해지겠다. 이 자식아!
“예를 들어…… 정. 혼. 자?”
“정.”
“혼.”
“자!”
김창회, 박찬희, 이중훈이 한 음절씩 말했다.
그놈들의 눈이 나를 향한다. 그 안에 살기가 담뿍 담겨 있다.
“아니면, 태. 중. 혼. 약?”
“태.”
“중.”
“혼.”
“약?”
마지막 음절은 유지연이.
한 명이 더 늘었다.
어? 넌 또 언제 여기 왔어?
언제부터 여기에 참여하고 있었던 거야?
“태…… 태중혼약이라면, 그 노인 둘이 술상을 앞에 두고. 자네 손자가 있지? 내가 조만간 손녀를 볼 텐데, 나중에 크면 둘을 맺어 주는 것은 어떠한가. 그러면, 좋네. 그럼 나중에 성인이 되면 둘을 결혼시키도록 하세. 그렇게 말하고 시간이 한참 지난 후에 어느 날 갑자기, 서방님. 저는 할아버님의 명을 받들어 서방님을 모시기 위해 왔습니다 하면서 10대 후반의 미소녀가 찾아오는 그 시추에이션!”
이중훈이 외쳤다.
너…… 평소에 뭐 보고 다니는 거냐?
“그렇지. 그러면서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 미소녀와 의도치 않는 동거생활이 시작되는 거지. 아침에 일어나면 인사해 주고, 밥 차려 주고, 학교 가면 배웅해 주고, 집에 오면 반겨 주고, 목욕하면 등 밀어 주고…… 그런 생활이…….”
흠칫!
나는 놀랐다.
박승환이 이 자식. 똥 촉 어디 갔어? 다 맞는 건 아니지만, 비슷하게 맞혔다.
“에이…… 설마. 그건 너무 나갔다.”
김창회가 말했다.
“설마. 그런 만화 같은 일이 벌어질까. 그러면 한수 저 자식을 묻어 버려야지.”
그러면서 나를 본다.
야. 눈. 눈 좀 어떻게 해 봐.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
“토막 내서 말이지.”
박찬희가 말하고.
“몇 조각으로?”
이중훈이 말했다.
“소각하는 게 더 좋지 않을까요? 처리하기에는 그게 더 깔끔하고, 발각될 위험도 없고.”
유지연. 너마저…….
세상 모두가 나를 버린 느낌이다.
나는 동지들에게서 버림받고, 나를 따르던 후배에게서 버림받고, 살해당해, 토막 난 다음, 어디 소각로에서 한 줌 재가 되어 죽었다는 인정도 받지 못하는 그런 고혼이 될 신세로구나.
“어? 니들 뭐 하냐?”
다들 나를 어떻게 죽이면 좋을까, 를 생각하고 있는데, 갑자기 들려오는 목소리에 다들의 고개가 돌아갔다.
“어? 형. 안녕하세요? 지금 오시는 거예요?”
그곳에는 준호 형, 얼마 전 석촌 호수 커피숍에서 서현 님과 함께 만났던 준호 형이 서 있었다.
“어. 그래도 축제인데, 한잔하려고. 이 녀석 데리고 온다고 좀 늦었지.”
준호 형이 가리키는 곳에는 진철이 형이 서 있었다.
준호 형도 고시준비반이었던가?
“진철이 형. 안녕하세요?”
다들 진철이 형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고 보니 진철이 형 축제 주점은 한 번도 안 와 봤다 했었지?
“어. 그래. 다들 고생이 많다. 근데 한수는 왜 묶여 있는 거지?”
진철이 형이 물었다.
“그게 사실은 말이죠…….”
그러면서 이중훈이 사실보다 더 확장되고 왜곡된 이야기를 형들에게 해 줬다.
준호 형이 그 이야기를 듣더니, 서현 님과 교수님이 계신 쪽을 슬쩍 보고서는 말했다.
“어? 서현 님이시네?”
“형도 알아요? 저 미인을?”
“어. 저번에 한수랑 같이 있는 거 봤어.”
“같이요? 한수랑?”
“음. 며칠 전이지. 지난 일요일이니까.”
그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김창회가 내 멱살을 잡았다.
“지금 시작할까?”
뭘? 뭘 시작해.
“지금 시작하죠. 다 모인 김에.”
지연아! 넌 여기 끼면 안 돼!
“뭘 시작할 건데?”
진철이 형이 물었다.
“형! 이 자식들 좀 말려 봐요. 이 바보들이 괜히 질투심으로, 추한 질투심으로 저 괴롭히고 있어요!”
내가 형들에게 도와 달라고 말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준호 형이 애들에게 웃으면서 말했다.
“질투심? 아하. 아냐. 한수랑 서현 씨랑 그런 사이 아니래. 뭐 사귀고. 그런 거.”
그렇게 말하고서는 나에게 눈을 돌렸다.
그리고 씹어 먹을 듯한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며 말했다.
“아직은 말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