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 : D-day (4)
***
“저기 자리 있잖아요!”
손님, 아니, 손님이라고 부르고 싶지도 않네.
유지연의 미모에 홀려 불타 죽을지도 모르고 모닥불로 달려드는 불나방 같은 손놈 자식이 주점 구석에 만들어진 빈 테이블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긴 안 돼요. 예약석이에요.”
전 조달 팀, 현 접객 팀 후배 하나가 그 손님 놈 녀석에게 말했다.
“아니. 그런 게 어디 있어요? 여기 온다고 대기표 받고 1시간 넘게 기다렸는데, 예약이라니. 무슨 영업하는 집도 아니고, 대학 축제 주점에 무슨 예약석이 있어요? 뭐 얼마나 대단한 손님인데 예약까지 받아 줘요?”
진상의 법칙.
장사하는 곳에는 진상이 있다는 법칙은 대학 축제에서도 통하는구나. 진리로구나.
힘내세요. 대한민국 자영업자들!
“뭔데? 왜 그래?”
팀원이 실랑이하자 김창회가 나선다.
한국대 최고의 근육량, 밥보다, 물보다 프로틴을 더 처먹는다는 김창회가 나서자 손놈이 당황한다.
“아니. 저기. 뭐야. 그…….”
“뭔데요?”
저 덩치 앞에서 함부로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별로 없겠지.
“아니. 그게. 저기… 기다리기도 많이… 그 기다렸는데. 뭐… 예약석이라고… 그러니까. 축제 주점에 무… 무슨 예약을….”
잔뜩 위축되었지만, 손님 놈이 마지막 발악을 해 본다.
하지만 그래 봤자지.
“교수님.”
김창회가 손님 놈을 내려다보며 말한다.
“네… 네?”
“교수님들 오시면 앉을 자리.”
크크크. 저 자식 반말하네.
“아. 네.”
“앉을래?”
“아… 아닙니다. 그…냥….”
김창회는 주점 앞에 박스 깔아 놓은 구석 자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로.”
“네…….”
손놈은 고개를 푹 숙이고 그리로 향했다.
역시.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자본과 폭력이다.
무서운 자식.
어깨를 축 늘어뜨린 손님 놈이 구석으로 향하자 누군가가 재빨리 그쪽으로 다가갔다.
“헤헤헤. 환영합니다. 주문하시죠.”
총무 팀장 이중훈이 그렇게 자본주의 가득한 인사를 건네며, 어제보다 가격이 30% 인상된 메뉴판을 내밀었다.
김창회보다 저 자식이 더 무서운 놈이다.
***
오늘도 어제처럼 두 손에 프라이팬을 들고 영혼 없이 부추전을 뒤집고 있는데, 누군가가 다가와 내 어깨를 툭툭 하고 두드렸다.
뭐야! 바빠 죽겠는데!
“나중에 이야기해! 지금 겁나 바쁘니….”
그렇게 말하며 뒤를 돌아보는데, 선배 누나가 서 있다.
몇 시간 전, 지연이에게 도촬범의 신상을 알아냈다는 이야기를 해 주던 총학 누나였다.
“많이 바쁘니?”
“아니요. 아닙니다. 하늘 같은 선배님! 그나저나 주방은 어쩐 일이세요? 자리 없어요? 자리 만들어 주라고 할까요?”
그렇게 말하며 막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1학년을 부르려던 찰나, 선배 누나가 고개를 젓는다.
“아니, 그게 아니고, 해 줄 말이 있어서.”
선배 누나가 그렇게 말하는데, 어딘가 얼굴이 어둡다.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한다는 시그널이었다.
“…그러면 조용한 데로 갈까요?”
“아니. 차라리 여기가 좋겠다. 시끄럽고, 다들 정신없으니까.”
“네. 무슨 이야기인가요?”
“지연이 이야긴데….”
프라이팬을 잡은 내 손에 힘이 들어갔다.
선배 누나가 목소리를 낮춰 해 준 이야기는 자못 충격적인 이야기였다.
도촬범, 그러니까, 유지연의 사진을 몰래 찍어 별스타그램에 올린 다른 단과대 선배에게 스토킹 전과가 있다는 이야기였다.
정확히 말하면 경찰기록에 남은 공식 전과는 아니고, 도촬범이 1학년 때, 같은 과 동기 여학생을 반년 동안 스토킹하다가 참지 못한 여학생이 경찰에 신고했는데, 있는 집 자식이었는지, 다시는 접근하지 않겠다는 구두약속과 거액의 합의금으로 경찰 조사 단계에서 흐지부지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는 내용이었다.
“근데 왜 소문이 안 났죠? 그 정도 사안이면, 뭐 감옥에는 안가더라도, 학교에서는 매장되고도 남을 사안인데?”
나는 다른 사람들이, 특히 바쁘게 이리저리 뛰어다니는 유지연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양손으로 계속 프라이팬을 움직이며 물었다.
“그 사건 이후, 바로 전공을 바꾸고, 어학연수를 갔거든. 피해자에게는 거액의 합의금, 아니, 입막음 비용을 지불했고. 이번 사건 아니었으면 아무도 몰랐을 거야. 총여에서 증거 모은다고 조사하다가 알게 되었지.”
“…지연이는 모르고요.”
“응. 이야기 안 했어.”
“그래서 저에게 당분간 지연이랑 같이 다녀 달라고 해 주신 거군요.”
“그래. 별일 없겠지만, 혹시라도 무슨 일이 생길지 몰라서. 한수 너에게 부탁 좀 할게.”
“알겠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당분간 집에 데려다줄게요. 어차피 집도 같은 방향이니까.”
내 말에 누나가 안타까운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미안하다. 안 그래도 힘들 텐데.”
응? 이건 또 무슨 이야기?
“…이야기 들었어. 경제적인 도움을 주지는 못하지만, 혹시라도 법적인 부분이나, 다른 부분으로 도움이 필요하면 알려 줘. 사채업자가 밤에 찾아와 문을 두드리는 불법 추심행위를 한다든가.”
나는 쓰러질 뻔했다.
환장하네. 그 소문이 아직도 돌아다닌다고? 박승환 이 자식을….
그렇게 생각하는데, 호랑이 제 말 하면 나타난다고, 박승환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이름은요?”
나와 선배가 목소리가 들려온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거기에는 평소답지 않게 진지한 얼굴을 하고 있는 박승환이 서 있었다.
“응? 뭐, 뭐라고?”
갑작스러운 박승환에 등장에 당황한 선배가 말을 더듬었다.
“그 돈 많은 스토커 선배 이름이요.”
박승환이 물었다.
선배 누나가 날 돌아본다.
그 눈빛이 박승환에게 이름을 말해 줘도 되는지를 묻고 있다.
나는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박승환, 내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미친놈이지만, 그렇다고 생각 없이 일을 벌일 놈은 아니다. 설사 일을 벌인다고 해도, 절대 남들에게 들키지 않을 것이다.
“제이슨 임.”
“제이슨?”
“교포야. 미국 시민권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
선배 누나의 말에, 불길한 기운이 내 등골을 스치고 지나갔다.
***
8시가 좀 넘은 시간, 졸업한 선배들과 교수님들이 오셨다.
“그래. 고생들 많아요. 아주 성황이네.”
학과장이신 유주원 선생님이 학생들에게 일일이 인사해 주시면서 들어오셨다.
아… 유 선생님. 오늘도 댄디한 그 모습 그대로시군요.
“한수 군. 준비한다고 고생했어요.”
“아닙니다.”
“중훈 군은 운영한다고 고생이 많고.”
“아닙니다. 선생님. 이쪽으로.”
이중훈이 선배들과 교수님들을 모시고, 손님 놈들이 탐내던 예약석으로 모셨다.
축제 마지막 날, 졸업한 동문 선배들이 교수님을 모시고, 주점을 방문해 마지막 매상을 올려 주는 것. 이것이 우리 과의 전통, 선배들 이야기로는 벌써 몇십 년은 됐다는 전통이다.
교수님들과 선배들이 준비된 자리에 앉자, 빠르게 테이블이 세팅된다.
테이블에 놓인 잔이 하나둘 채워지면, 주점에서 일하는 학생을 포함해 우리 과 학생 모두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같이 잔을 채운다.
그리고 전통에 따라 학과장이신 유 선생님이 잔을 들고 자리에서 일어서신다.
우리도 모두 채운 잔을 들어 올렸고, 일제히 유 선생님을 바라보았다.
시끌벅적하게 떠들던 손님 놈들도 조용히 유 선생님을 바라보고 있다.
“자. 모두 잔들 채웠나요?”
유 선생님이 특유의 온화한 미소로 학생들을 돌아보신다.
나도 잠시 프라이팬을 놓고 내 앞에 종이 잔을 들었다. 어느새 유지연도 내 옆에 서서 잔을 들고 있다.
모두의 잔이 채워진 것을 확인하신 유 선생님이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셨다.
“반갑습니다, 여러분. 길게 말하지 않겠습니다. 우리는, 서로 다른 시간에, 서로 다른 곳에서, 서로 다른 모습으로 태어난 우리는, 지금 같은 시간에, 같은 장소에서 동문이라는 이름 아래 만났습니다. 60억의 인구를 감안하면, 이는 기적에 가까운 확률입니다. 우리는 그 기적을 뚫고, 지금 이 자리에 같이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 기적이 얼마나 큰 의미를 가지는지, 꼭 알아주었으면 합니다. 저는 교수 대표인 학과장으로, 그리고 또한 여러분의 동문 선배로서, 건배를 제의합니다. 오랜 전통에 따라 오마르 하이얌의 시로 건배사를 대신할까 합니다.”
나왔다. 선배의 선배, 그 선배의 선배, 그 선배의 선배 때부터 내려오던 전통의 건배사.
“여기 나무 그늘 아래 빵 한 덩어리, 포도주 한 병, 시집 한 권, 그리고 황야에서도 내 곁에서 노래하는 그대가 있으니.”
유 선생님의 선창. 그리고 우리들의 후렴!
“황야도 낙원과 다름없구나!”
우리는 그렇게 외치고, 잔에 든 술을 단숨에 털어 넣었다.
***
“형. 형!”
남자 후배 2가 갑자기 나에게 다가와 말했다.
“왜?”
나는 프라이팬 두 개를 동시에 흔들면서 말했다. 이 자식 바빠 죽겠는데.
“저기. 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어엄청나게 예쁜 여자가 이쪽을 보고 있는데요?”
“그래?”
나는 손은 멈추지 않으면서도 후배가 몰래 손으로 가리키는 방향을 바라봤다.
주점 입구에서 살짝 떨어진 가로등 밑. 거기에는 아침에 보았던 서현 님이 그 모습 그대로 나를 보며 웃으며 서 있었다.
오셨구나! 우리 서현 님 오셨구나!
근데 언제 오신 거지?
내가 그쪽을 바라보자 서현 님이 날 보고 살짝 손을 흔든다.
귀여워! 진짜 미칠 듯이 귀여워!
아침에는 분명 성인의 아름다움이 철철 흘러넘치는 전문직 여성 같았는데, 저 장소에 서 있으니 그냥 대학생, 아니지. 엄청나게 예쁜 여대생 같다.
“형! 소… 손 흔드는데요.”
“잡아.”
“네?”
“프라이팬 잡아.”
나는 그 녀석에게 프라이팬을 넘겨주고 그쪽으로 다가갔다.
앞치마에 기름에, 밀가루에, 먹다 흘린 술 자국에, 안주 자국이 흥건했지만, 그 앞치마를 벗으려 하는 동안 그녀를 기다리게 하는 게 더 죄악이 아닐까.
내가 그녀에게 다가가자 순간 사람들의 소리가 잦아드는 것이 느껴졌다.
열심히 전 부치느라 몰랐는데, 이미 사람들의 시선이 그녀에게 몰려 있었나 보다.
“오셨어요? 언제 오셨어요?”
“언제 왔을까요?”
그러면서 입을 가리고 웃는다.
아니야! 아니야! 지금 아니야! 아니야, 이 부교감신경아!
“오셨으면 말씀해 주시지. 그랬으면 바로 나왔을 텐데.”
“아니에요. 바쁘신데. 그리고 한수 씨 일하는 거 보고 있었어요. 파팟! 그거.”
그러면서 프라이팬 뒤집는 모양새를 흉내 낸다.
귀엽다. 너무 귀엽다. 너무 사랑스럽다. 우리 서현 님.
“보… 보셨어요?”
“네. 한수 씨. 진지한 표정으로 전을 파팟 뒤집고, 아주 짧은 순간 흐뭇해하는 표정이 너무 귀여워서 계속 보고 있었어요.”
안 되겠다. 신력이고 나발이고. 우선 시간 정지. 그리고 그녀만 깨워서 오랜 시간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
그녀의 표정과 그녀의 얼굴과 그녀의 목소리를 죽을 때까지 마주 보고 싶다.
“우선 들어가실래요? 아니. 축제 구경부터 하실래요?”
나는 앞치마를 벗으며 말했다.
“아니에요. 바쁘신 거 뻔히 아는데. 잠깐만 있다가 가려고 했어요.”
“안 돼요. 여기까지 오셨는데.”
“그래도 어떻게… 다들 저렇게 바쁘신데.”
불을 질러 버려야겠어. 주점에 불을 질러 버리면 더는 서현 님이 거리낄 것이 없겠지.
잠시만요. 저 불 좀 지르고 올게요.
불을 지르기 위해 막 몸을 돌리려는데, 등 뒤에서 불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안녕하세요?”
나는 재빨리 고개를 돌려 뒤를 돌아보았다.
어느새 박찬희와 김창회가 잔뜩 허리를 굽힌 비굴한 자세에 비굴한 웃음을 머금고 내 뒤에 서 있다.
“안녕하세요? 한수 씨 친구분들?”
“아니요. 전 모르는 사람입니다.”
내가 재빨리 부정했다.
절대 귀신을 만나면 아는 척하면 안 된다. 재빨리 그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
그런데, 지금 내 등 뒤에는 귀신이, 그냥 귀신도 아니고, 악귀가 붙어 있다.
벗어나야 한다. 빨리 여기에서 벗어나야 해!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김창회, 밥보다, 물보다, 프로틴을 더 처먹는다는 김창회의 두꺼운 완근과 상완 이두근이 내 목을 감쌌다.
“아하하. 안녕하세요. 한수 동기입니다. 친구분이시구나. 그럼 들어오세요.”
마치 연습이라도 한 것처럼 박찬희의 대사가 이어진다.
나는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해 외쳤다.
“도망… 웁!”
그러나 외치지 못했다.
김창화의 솥뚜껑 같은 손이 내 입을 막아 버렸으니까.
야, 이 자식이. 지금 코도 막혔어! 야! 임마!
“아니에요, 지금 바쁘신데… 한수 씨에게 인사만 하려고 가려던 참이었어요.”
“안 됩니다. 한수 친구시면 우리에게 가족이나 마찬가지인데! 어서. 어서 이리로 오세요.”
박찬희가 말한다.
친구의 친구가 어떻게 가족이 되냐! 무슨 논리가 그따구냐!
김창회가 나를 막고 있는 동안 박찬희가 빠르게 서현 님을 유혹한다.
우리 천사 같은 서현 님은 얼굴에 아름다운 미소를 머금고 살짝 고개를 숙이며 말씀하신다.
“그럼 실례해도 될까요?”
“실례라뇨! 그런 말씀 마세요!”
이건 박찬희.
(우리… 할 이야기가 많은 것 같은데.)
내 귀에 속삭이는 건 김창회.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이건 어느새 나타난 박승환.
호스트냐! 어? 호스트야!
서현 님은 그 녀석들의 넉살에 호호 웃으며 주점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연행되어 가는 모습으로 그 뒤로 끌려갔고.
***
“안녕하세요.”
주점 안으로 들어온 서현 님이 그렇게 인사하자, 잡일 하던 1학년, 운영하던 2학년, 잔소리하던 3학년, 개꼬장 부리던 4학년은 물론, 교수님들과 앉아 있던 졸업 선배들까지 모두 일어서서 그녀를 맞이한다.
이 양반들이 진짜… 총장님이 와도 안 그러겠다!
“어머.”
계속 고개 숙여 인사하던 서현 님이 누군가를 보고 놀라움을 표시했다.
뭐지? 나 말고 아는 사람이 또 있나?
서현 님은 교수님들이 계시는 테이블로 다가가 고개를 숙이며 말했다.
“선생님이 계신 줄은 몰랐어요.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그녀의 친근한 인사를 받은 노신사. 로맨스그레이의 주연 배우 같은 유 선생님이 특유의 인자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했다.
“오랜만이네요. 서현 양. 그동안 잘 지냈어요?”
나는 김창회의 팔에 매달린 채로 그 모습을 지켜봤다.
뭐지? 두 분이 어떻게 서로 알고 계신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