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40화 (40/271)

40 : D-day (3)

“어머, 벌써 일어나셨어요?”

내가 문을 열고 나가자, 거실에 서 있던 서현 님이 날 보고 인사했다.

“지금 나가시는 거예요?”

“오늘 늦게 시작한다고 하지 않으셨어요? 왜 이렇게 일찍 일어나셨어요? 혹시 저 때문에? 제가 너무 소란스러워서 깨신 건가요?”

“아니요. 자다가 목이 말라서요.”

내가 컵을 들어 물 마시는 제스처를 보여 주면서 말했다.

서현 님은 그런 내 모습을 보고 살짝 웃어 준다.

작은 체크무늬가 대각선으로 들어간 블라우스에 퍼플 슬림 슬랙스 팬츠를 입고 있으신 서현 님은 이미 준비를 다 마치고 막 출근하려던 참이었나 보다.

같이 살게 되면서 신경 쓰게 된 게 몇 가지 있는데, 그중 하나는 서현 님의 출근 복장을 체크 하는 것이다.

여자애들이 왜 인형 옷 입히는 놀이를 하는지 알겠다.

모델이 좋으니까 아무거나 입어도 그냥 쇼핑몰이야. 아니. 패션쇼야. 기냥.

근데, 저 블라우스 너무 비치는 거 아냐……? 흠.

“어때요? 오늘 저?”

내가 너무 빤히 쳐다봤는지, 서현 님이 팔을 살짝 들고 몸을 좌우로 흔든다.

말해 뭐 합니까. 그냥 아름다우시죠!

“너무… 잘 어울려요.”

그렇게 말하고, 엉덩이를 천천히 뒤로 뺀다. 미니미도 내 생각에 동의한다는 듯, 벌떡 몸을 일으켰으니까.

그녀는 입을 살짝 가리고 웃는다.

“이따가 퇴근하고 바로 가려고요. 스커트는 좀 불편할 것 같아서 바지 입었어요.”

난리 나겠군.

준호 형이 그냥 평상복 입은 서현 님 보고도 입을 다물지 못했는데, 오늘 서현 님 오시면 난리 나겠구나.

“오늘… 난리 나겠네요.”

“네?”

“크흠. 음… 서현 님 오시면.”

“그러면요?”

“너무… 그… 예쁘셔서… 학교가 난리가 날 것… 같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나는 쑥스러움을 이겨 내고 겨우 말했다.

사실 하고 싶은 말은 그런 게 아니다.

오늘 예쁘십니다. 옷이 너무 잘 어울려요. 스커트보다 관능적인 느낌이 드는 바지는 처음 봤어요. 항상 아름다우시지만, 오늘 더 아름다우십니다. 제가 부탁이 있는데,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출근 전에 구청 가서 혼인신고하고 가시면 안 될까요?!

이렇게 말하란 말이다!

“어머….”

서현 님의 얼굴에도 부끄러움이 스며든다.

“참…. 한수 씨도.”

“아… 아하하. 아… 목마르다. 그… 그럼 다녀오세요. 이… 이…… 이따가… 봬요.”

나는 말을 더듬으며 적당히 고개를 숙이고, 적당히 몸을 돌려 적당히 주방으로 향했다.

“네. 이따가 봬요. 그리고 한수 씨.”

“네? 네!”

“한수 씨 칭찬으로 하루를 시작하니…… 참 좋네요.”

그리고는 그녀는 후다닥 현관으로 달려가듯이 걸어가 문을 열고 사라졌다.

거… 참…… 행복한 아침이구만. 후후후.

***

과방 문을 여니 유지연이 3학년 선배 누나랑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지연이도 안녕.”

그렇게 인사하고 보니 분위기가 좀…….

심각한 이야기 중인가?

“어. 한수구나. 고생 많다.”

“오빠, 오셨어요?”

“어. 그래. 이야기 중이셨어요? 저 그럼 나가 있을게요.”

내가 분위기를 파악하고 말했다. 둘 다 표정이…….

“어. 이야기 중이긴 한데…. 그래 줄래?”

선배 누나가 말했다.

“잠깐만요. 언니. 한수 오빠랑 함께 이야기 들어도 될까요?”

응? 뭔 이야기?

“한수랑도?”

“네. 아무래도 좀 무섭기도 하고. 남자 선배가 같이 있어 주면 좋을 것 같아서요. 그리고 한수 오빠가 저 많이 챙겨 주니까.”

무슨 이야기지? 이건?

“그럴래? 하긴. 남자 하나가 더 있으면 좋기는 하겠다. 한수야. 잠깐 시간 괜찮니?”

“네. 괜찮아요.”

나는 지연이 옆에 앉았다.

총학생회 임원이고, 올해 축제운영위원회 위원인 선배 누나가 해 준 이야기를 요약하면 이렇다.

어제 지연이 사진을 몰래 도촬한 범인의 신원을 확보했고. 그 사실을 지연이에게 알려 주기 위해 지연이와 만나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범인은 우리 학교 학생, 다른 단과대 소속, 나보다 두 학번 선배인데, 일이 커진 것을 알고 잠수를 탔는지, 연락을 안 받고 있다는 이야기다.

그래서 그쪽 단과대를 통해서 계속 연락을 하고 있는데, 전화기가 켜져 있음에도 전화를 안 받고 있다는 이야기였다.

총학에서도 이번 문제에 대해 논의 중인데, 총여학생회 측에서는 이 문제를 가볍게 넘어가면 안 된다고 강하게 주장하고 있는 상황이라는 것, 총여학생회에서는 형사고발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지연이의 동의를 얻어 일을 확대할 생각이라는 이야기다.

“그렇게 된 거야.”

누나의 이야기를 다 들은 나는 지연이를 바라보았다.

“괜찮아?”

지연이의 표정이 어둡다.

어제 돌아가는 길에는 그렇게 씩씩하던 녀석이…….

뭐, 성인이라고 해도,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아직 반년도 안 지났는데. 또 그런 경험이, 자신도 몰래 사진이 찍히고, 유출되는 경험이 처음은 아니라고 해도, 익숙한 것은 아니겠지.

익숙해질 수 없겠지. 익숙해져도 안 되고.

“네. 그냥. 조금…….”

뭔가 겁먹은 듯하기도 하고 걱정하는 것 같기도 한 표정을 하고 있다.

“내가 어떻게 도와줄까? 괜찮아. 편하게 말해도.”

나는 내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자상한 표정으로 지연이를 바라보며 말했다.

“그래. 한수가 당분간 지연이랑 같이 좀 움직이면 좋겠다. 학생회에서 연락도 지연이에게 바로 하는 것보다 한수를 통해서 하는 것은 어떨까?”

선배 누나가 의견을 제시했다.

“저는… 저는 감사한데, 한수 오빠에게 죄송해서….”

“아니야. 나는 괜찮아. 누나. 저에게 연락해 주세요. 지연이가 알게 될 일이 있거나 하면요.”

“그래 줄래? 한수가 그렇게 해 주면 총학에서도 좀 마음을 놓을 수도 있고.”

“네. 그럼요. 지연이. 우리 사랑하는 후배를 위해서라면 그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죠.”

나는 일부러 호기롭게 말했다. 든든함을 보여 주고 싶어서.

“오빠. 괜히 저 때문에 번거롭게.”

“아니야, 아니야. 그런 말 하지 마. 우리 사랑하는 후배를 위해서 뭘 못 하겠어?”

“…그럼 부탁드릴게요.”

“그래. 별일 없겠지만 당분간은 같이 다니자고. 괜찮지?”

“네. 고마워요, 오빠.”

“고맙지. 고마워해야지!”

“한수야. 고마워. 그래도 니가 지연이 옆에 있으면 큰 걱정은 안 해도 되겠지.”

“네. 걱정하지 마세요. 누나. 무슨 변동 사항 있으면 알려 주세요.”

“그래. 알았어. 그럼 지연이를 부탁해. 지연아. 너무 걱정하지 말고.”

“네. 알려 주셔서 감사합니다. 선배님.”

지연이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였다.

이런 생각 처음 해 보는데.

지켜 주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거.

***

3시부터 모이라고 했는데, 어제 다들 끔찍한 경험을 했던 탓인지, 2시 반도 안 됐는데, 주점 스태프들은 거의 다 도착해 있었다.

각자 팀끼리 모여 어제 고생한 부분들에 관해 이야기하고 오늘은 어떻게 할지 등등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나는 구석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장비 팀과 조달 팀 팀장에게 다가갔다.

“야. 설마 오늘도?”

구석에서 쭈그려 앉아 몰래 담배를 피우던 조달 팀 김창회가 나에게 물었다.

“음. 아마도?”

나도 그쪽으로 가서 같이 쭈그려 앉은 다음 담배 한 대를 빌렸다.

“진짜 끔찍하다. 끔찍해. 그냥 도망칠까?”

장비 팀장 박찬희가 몸을 부르르 떨며 말했다.

“아니. 솔직히 축제라는 게, 그냥 적당히 주점에서 어슬렁거리다가, 안주 만들어서 먹고, 술 몰래 먹고, 졸업한 선배들 오면 바가지 씌우고 그러는 거 아냐?”

김창회의 주장이다.

“평소 좋아하던 여자 있으면 불러다 고백하고.”

박찬희의 의견이다.

“그러다 차이고. 울고. 술 마시고 꼬장 부리다 처맞고.”

이건 내 의견.

“올해는 아니지. 진짜 이건 아니지.”

“이게 다 저 녀석 때문인가?”

박찬희의 시선이 열심히 반죽을 휘젓고 있는 유지연에게 향한다.

“아니지, 이 자식아!”

내가 뭐라고 하기도 전에 김창회가 나섰다.

“야. 유지연이 뭔 잘못이냐? 이쁜 거? 몰래 사진 찍힌 거? 잘못이 있다면 그 개자식에게 있는 거지. 잡아다가 십자가에 거꾸로 매달아 주점 앞에 세워 두고 싶네.”

“선배라던데? 다른 단과대?”

내가 말했다.

“찾았대? 선배고 나발이고. 우리가 언제 그런 거 따졌어? 사람이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는 것이 세상 이치래드라.”

“해바라기?”

“명작이지. 한 백 번은 봤겠네.”

박찬희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건 그거고. 니들도 팀원 애들한테서 혹시라도 유지연 때문이다, 뭐 이런 이야기 안 나오게 이야기 좀 잘해 놔.”

내가 말했다.

이 자식들. 그렇게 멍청한 녀석들은 아니니 잘 이야기 하겠지.

“오케이. 알았어. 그거는 그거고. 저 자식만 없어지면 괜찮지 않을까?”

박찬희의 시선이 다른 곳으로 옮겨간다.

그 시선 끝에는 어제 자본주의의 괴물로 탈바꿈한 이중훈이 있었다.

“그렇네. 우리가 도망갈 것 없이, 저 자식만 묻어 버리면 되는 거 아닐까?”

김창회가 말했다.

“생산수단을 독점한 자본가 계급을 몰아내고, 생산수단 공유를 통해 노동자들의 낙원을 만드는 거지.”

박찬희가 동의했다.

지금 여기, 이 자리에서 20세기와 함께 사그라진 사회주의 혁명의 불씨가 다시 타올랐다.

마르크스를 부활시키기 위한 마법 진을 그리려 하고 있었다.

“나도 동의한다. 동의하지만, 우선은 축제 끝나고. 끝나고 묻자. 이 고난이 모두 끝나고, 그때 묻어 버리자.”

내가 중재했다.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

“자. 힘들겠지만, 그래도 오늘이 마지막 날이니까 다들 힘내자. 물 들어올 때 노 저어야지? 안 그래?”

축제 주점 오픈 20분 전.

총무 팀장 이중훈이 스태프들을 모두 모아 놓고 자유방임주의 시대 공장장 같은 소리를 하고 있다.

“역시 혁명뿐인가.”

내 옆에서 김창회가 중얼거렸다.

괜히 막았나? 그냥 혁명했으면 편했을 것 같은데.

“각자 팀장들은 팀원들 잘 챙기고! 오늘도 손님 많을 것 같으니까. 다들 실수하지 말고. 가즈아아!”

그런 말을 끝으로 공장장, 아니 공장주의 연설이 끝났다.

왜 나는 저 모습에서 《1984》가 떠오르는 것일까?

“오빠도 한마디 해요!”

각자 역할로 흩어지려 하는데, 유지연이 나를 지목하며 말했다.

나? 갑자기?

“그래요. 형도 한마디 해요. 준비할 때 전권 가졌던 사람으로서.”

남자 후배 1이 옆에서 말로 거들었다.

허… 이 자식. 너 인생 개 꼬인 거 눈치챘구나. 이렇게까지 하니, 개 꼬인 거에서 그냥 꼬인 거로 바꿔 주지.

“그래. 너도 한마디 해라. 어제 마무리 발언도 네가 했으니까.”

찬희가 말을 거들었다.

저 자식 지금 그냥 이중훈 멕이려고 그러는 거지.

“뭐. 나까지 말할 거 있나. 암튼 다들. 이거 놀자고 하는 거지, 돈 벌자고 하는 거 아냐. 그러니까 재미있게 하자고. 1학년들은 내년에 또 해야 하니까. 선배들 하는 거 잘 봐 두고, 선배들은 1학년들 가르쳐 가면서 하고. 마지막으로 다들 다치지 말고, 다치지 말고, 그리고 다치지 마라. 자, 렛츠 기릿!”

“와!”

다들 내 말에 한 손을 들며 호응한다.

훗. 나 좀 멋있군.

“오빠. 멋있어요.”

나의 전장, 가스버너를 향해 걸어가는 나에게 유지연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야. 너 왜 그랬어?)

내가 귓속말로 물었다.

(뭘요?)

(왜 나한테 말하라고 한 거야?)

그러자 이 녀석 웃는다.

분명 악의가 담긴 미소인데도…. 귀엽다.

(중훈 선배 좀 얄미워서요.)

그런 것 같더라.

(그러지 마. 나쁜 마음 있어서 그런 거 아니니까.)

(알아요.)

(그리고 그 녀석이 임마…. 아니다.)

(그리고 또 있어요.)

(또 뭐?)

(본격적으로 일하기 전에 오빠 목소리 듣고 시작하려고요.)

그러고서는 총총걸음으로 반죽을 가지러 간다.

뭐야? 저 녀석 나 좋아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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