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 D-day (2)
***
“다녀왔습니다.”
결국 12시가 넘어서야 집에 왔다.
혹시라도 자고 있는 서현 님을 깨울까 싶어 조심스럽게 현관문을 열었다. 오늘따라 문 열리는 소리가 크게 들리는 거 같은데….
“다녀오셨어요?”
역시 서현 님은 현관 복도에 서 계신다. 잠들 준비를 끝냈는지, 그 귀여운 스누피 수면 바지를 입고서.
“다녀왔습니다. 주무셨던 거 아니었어요?”
“아니요. 아직 안 잤어요.”
그렇게 말하고 살짝 부끄러워한다.
아직까지 파자마는 좀 부끄러운가?
“식사는 하셨어요?”
“네. 아니. 아니요. 근데 생각이 없어요.”
“어머? 왜요? 이 시간까지 저녁도 안 드시고?”
“긴 이야기입니다.”
“저 긴 이야기 좋아해요. 차 드실래요?”
피곤하기도 하고, 내일 출근할 서현 님을 방해하고 싶지 않았지만, 저런 눈으로 이야기해 주세요, 하는데 어찌 내가 거절할 수 있단 말이냐!
“네. 저 금방 씻을게요. 가까이 오지 마세요. 기름 쩐내 장난 아니에요, 지금.”
“네. 씻고 나오세요. 천천히. 아시겠죠? 천천히!”
아… 서현 님. 당신은 어찌도 이리 자상하십니까…….
***
나는 후다닥 씻고, 다시 거실로 나갔다.
뜨거운 열기 앞에서 하루 종일 뜨거운 기름과 싸워 왔더니 피부 일부가 벌겋다 못해 익은 느낌이었는데, 그래도 씻고 나오니 좀 살 것 같네.
거실로 나오자 김이 솔솔 올라오는 캐모마일 차와 견과류가 놓여 있었다.
“너무 늦게 드시는 건 속에도 안 좋으니 간단히 이거라도 드세요.”
사랑합니다. 당신의 자상함과 현명함을 사랑합니다.
“에이. 귀찮게 뭘 이런 걸 준비하셨어요.”
하지만 난 쑥스러워 또 말을 이렇게 하고.
“아니에요. 뭐 그냥 물 끓이고 견과류는 꺼내서 접시에 담은 것뿐인데요. 그리고 여기. 여기 앉으세요.”
서현 님이 자기 옆자리를 손으로 팡팡 치면서 말했다.
내가 그 자리에 앉자, 무언가 네모난 비닐봉지를 꺼내 쭈욱 찢는다.
“이거. 수분 팩인데, 피부 진정에 좋아요. 잠시만요.”
그러면서 하얀색 마스크를, 아니 팩을 들고 나에게 다가온다.
나는 고양이 앞에 쥐처럼 온몸에 힘을 주고 부동자세로 그녀의 손에 얼굴을 맡겼다.
서현 님은 그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꼼꼼하게 내 얼굴에 팩을 덮어 준 후 내 맞은편으로 가서 앉았다.
얼굴 가득 차가운 팩의 냉기가 스며든다.
하루 종일 열기에 익었던 얼굴에 차가운 기운이 스며들었고, 피로가 녹아내리는 기분이 들었다.
“아… 너무… 좋아요.”
다른 누군가가 이 말을 사운드로만 들었다면 분명 오해했을 것이야.
“가끔씩 해 드릴게요.”
서현 님. 당신을 어찌하면 좋습니까? 이토록 사랑스러운 당신을 어찌하면 좋단 말입니까?
안 돼! 깨어나려 한다. 육체적으로 이렇게 피곤한 상황임에도, 서현 님의 아름다운 목소리에 미니미가 깨어나려고 한다!
“긴 이야기를 들어 볼까요? 그럼?”
오늘 어떤 쓰레기가 후배 사진을 도촬해 SNS에 올렸고, 그 사진이 검색어에 올랐으며, 후배를 보겠다고 세상 모든 미친놈들이 다 몰려들었다고.
그래서 작년보다 2~3배 이상 전을 부쳤는데, 돈에 환장한 총무 놈이 미쳐 날뛰어서 정신적으로 더 피곤했다고.
서현 님은 내 이야기를 들으면서 중간중간에, 어머, 저런, 아이코, 흐음… 이런 추임새를 넣어 가면서 내 이야기를 들어주었다.
이야기할 맛 나는구만!
“그랬구나. 오늘 너무 힘드셨겠어요.”
여성 철학자이자 심리학자인 캐롤 길리건은 말했다. 그동안 윤리 사상을 지배해 왔던 남성 중심의 정의 윤리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여성적 성격을 가진 배려 윤리와의 조화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정의, 공정성, 보편성, 이성을 강조하는 정의 윤리만이 강조되기보다, 배려, 공감, 유대감, 책임 등을 강조하는 배려 윤리와의 조화가 필요하다는 이야기다.
정의 윤리 조까!
이 세상에 필요한 건 배려 윤리다! 배려! 공감!
흑흑. 너무 힘들었어요.
“아니에요. 뭐. 그 정도쯤.”
허세. 이놈의 허세.
“그럼 내일도 힘드시겠네요.”
“뭐. 그래도 오늘만큼은 아니지 않을까 기대하고 있어요.”
“기대요?”
“…희망이요.”
그녀는 내 말에 입을 살짝 가리고 웃는다.
그 모습에 미니미가 또 ‘나 불렀어?’ 하며 일어나려 한다.
아니야. 아니야. 아 자식아.
“그럼 어쩌죠? 저 내일 가지 말까요? 괜히 바쁘신데….”
“아니에요. 오세요! 꼭 오세요! 반죽 통을 뒤엎어 버리고서라도 도망 나올 테니!”
“그러시면 안 돼요.”
“넵. 안 그러겠습니다.”
오늘 피곤했던가? 나 오늘 힘들었던가?
그런 기억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던.
그런 밤이었다.
***
유지연은 침대에 누어 있었다. 그런 그녀의 손에는 휴대폰이 들려 있었다.
유지연은 휴대폰 화면을 바라보고 있었다.
화면에는 사진 한 장이 떠 있었다.
양손에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한수의 사진이었다.
벌써 10 분이 훌쩍 넘었지만, 유지연은 질리지도 않는 다는 듯, 여전히 사진을 바라보고 있었다.
처음부터 사진을 찍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축제기간 동안 가장 가까운 곳에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막상 그의 모습을 보자, 앞치마를 두르고, 양손에 프라이팬을 들고 있는 한수의 모습을 보자, 그 모습을 사진으로 찍어두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간직하고 싶다는 욕심이 생겨버렸다.
그렇다고 사진을 몰래 찍을 수는 없었다. 몰래 사진을 찍는 것에 대한 본능적인 혐오감이 있기도 했지만, 그런 혐오감이 없다고 해도 몰래 찍을 수 있는 상황도 아니었다. 오늘은 그녀를 향한 시선이 너무나도 많았다.
몰래 찍을 수 없다면?
대놓고 찍으면 된다.
명분은 있었다. 첫 축제, 같이 고생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두고 싶어요.
그런 명분으로 동기와 선배들에게 렌즈를 들이밀었다. 그들은 자신들이 이용당하는지도 모른 채, 렌즈에 대고 브이자를 그렸다.
그렇게 사전작업을 모두 마친 후, 유지연은 한수에게 다가갔다.
‘한수 오빠.’
그렇게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양손에 프라이팬을 들고 있던 그는 브이자 대신 미소를 지어주었다.
“…심장 터지는 줄 알았네.”
유지연은 사진 속 한수의 미소를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행복했다. 그의 미소를 보는 것이 행복했다.
한편으로 아쉬웠다.
다른 사진도 가지고 싶었다.
전을 뒤집기 바로 직전, 집중하기 위해 입술을 앙다무는 사진도 가지고 싶었다.
뒤집기를 성공하고 뿌듯해 하는 표정도 간직하고 싶었다.
양 손으로 프라이팬 두 개를 들어올리며 ‘까스! 까스! 까스!’를 외치던 얼굴도 간직하고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그가 오늘 보여주었던 그의 모든 모습을 간직하고 싶었다.
유지연은 그렇게 잠시 더 한수의 미소를 바라보다가 휴대폰을 내려 놓았다.
이제 잘 시간이었다. 어서 빨리 자고, 체력을 회복해야, 또 그의 옆에서 같이 있을 수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감았다.
시야를 뒤덮은 어둠 속에서 3월의 그날이 떠올랐다.
***
“에이. 그러지 말고요.”
유지연은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를 애써 무시하며 계속 앞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한 발 뒤에서 따라붙은 남자는 끈질기게 유지연에게 전화번호를 요구하고 있었다.
“저 나쁜 사람 아니에요. 진짜예요.”
유지연은 발걸음을 멈추었다.
도서관 입구에서부터 지금까지 5분, 이 정도 했으면 알아서 떨어져 나가 주면 좋으련만, 남자는 쉽게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계속 유지연을 괴롭히고 있었다.
걸음을 멈춘 유지연은 몸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일반적인 관점에서 키 크고, 잘생겼다는 소리를 들을만한 남자가 유지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유지연은 남자의 얼굴에서 경박함만이 느껴졌다.
“죄송해요. 그런데, 저 너무 불편해요.”
유지연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정중한 거절을 표현했다.
몇 번째인지도 모를 거절.
“그러면 번호 주시면 되죠. 저 진짜 나쁜 사람 아니에요.”
그럼에도 끈질기게 전화번호를 요구하는 이 남자.
익숙했다. 익숙하지만 절대 적응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저돌적으로 밀고들어오는 남자들의 공격성에 유지연은 질려 있었다.
그녀는 어릴적부터 예쁘다는 소리를 들었다. 그래서 어릴적부터 공포를 느껴야 했다.
유지연을 바라보는 눈빛, 갈망하는 눈빛은 그녀에게 공포감을 안겨 줬다. 야생에 홀로 떨어진 초식동물이 된 것 같은 느낌이었다.
여중, 여고를 가도, 남자, 교사라는 이름의 남자들의 눈빛은 다르지 않았음을 알게 됐다.
유독 그녀를 편애했고, 자연스럽게 친구들의 배척으로 이어졌다.
힘겨운 사춘기였다. 그래서 할 수 있는 것이 공부 밖에 없었다.
“에이. 그러지 마시고. 진짜 전화번호만 주시면 저 금방 사라진다니까요. 금방 뛰어갈게요.”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는 말이 얼마나 여자들을 괴롭히는지, 저런 경박한 남자들은 모를 것이다. 아니, 안다고 해도, 자신이 고통받는 상황이 아니라면 상관하지 않을 것이다.
“부탁드려요. 제발 좀. 가 주세요.”
유지연은 다시 나직한 목소리로 부탁했다.
“사람 무시해요?”
남자의 목소리가 변했다. 지금까지와는 다른 어조였다.
남자의 얼굴에 분노라는 감정이 떠오르고 있었다.
“내가 뭐 하자고 했어? 왜 사람 무시하는데?”
남자의 말이 짧아졌다.
이 경박한 남자는 자신이 타인에게 준 피해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서, 그저 자신이 무시당했다는 사실에 집중하기 시작했다는 증거였다.
유지연은 놀라지 않았다. 처음 있는 일도 아니었다.
애초에 이런 인간이었고, 유지연은 이런 인간들을 많이 만나보았다.
그렇다고 공포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소리를 질러야 하나 고민하던 그때, 다른 남자의 목소리가 유지연에게 들려왔다.
“야! 한슬기!”
유지연은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한 남자가 두 사람을 향해 빠른 걸음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한슬기, 너 오늘 보일러 그대로 켜 놓고 나왔지? 엄마가 퇴근하고 오니까 집 사우나 되어 있다고 하더라. 넌 이제 집에 가면 엄마한테 주욱었어!”
그렇게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유지연에게 다가온 남자는 자연스럽게 유지연과 괴한 사이를 파고 들었다.
유지연은 고개를 들었다. 자신을 한슬기라고 부르면서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는 이 남자.
아는 사람이었다. 아니, 정확히는 아는 얼굴이었다.
한 학번 위의 선배, 신입생 환영회 당시, 구석에서 우울하게 술을 마시던 사람, 인문관 올라가는 도로 벤치에서 우울하게 앉아 있는 모습을, 셔틀버스를 타고 가며 몇 번 보았더랬다.
학부 선배라는 것은 분명지만, 이름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몸으로 유지연과 경박스러운 남자를 갈라놓은 선배는 몸을 돌렸다. 그리고 경박스러운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나저나. 누구? 내 동생에게 뭐 용건 있어?”
경박스러운 남자의 얼굴에 당황이 떠올랐다.
“아. 아니….”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전형적인 쓰레기.
“누구냐고. 내 동생이랑 아는 사이냐고!”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 죄. 죄송합니다.”
그 추한 인간은 그런 말을 남기고는 눈앞에서 사라져 갔다.
“가자.”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선배는 그렇게 말하고 몸을 돌려 버스 정류장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유지연은 말없이 그 뒤를 따르며, 이름이 기억나지 않는, 대화 한 번 나눠 본 적 없는 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라는 것을 알고 한 것일까?
유지연은 마음을 놓지 않았다. 이런 일은 처음이 아니었고, 보통 잘 짜여진 시나리오가 있었다.
정문을 지나 버스 정류장까지 내려온 이름모를 선배는 주위를 다시 살펴보았다.
아까 그 경박한 남자가 있는지를 확인하는 것이다.
“어디 딴 데 가지 말고 바로 집으로 들어가. 나. 잠깐 어디 들렀다가 집에 갈 거니까. 엄마한테는 도서관 갔다고 하고. 알았지?”
그리고서는 유지연이 버스에 타는 것을 확인하고, 그 남자가 따라붙지 않은 것을 다시 한번 더 확인한 다음, 몸을 돌려 걸어갔다.
유지연은 버스 안에서,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의 이름을 기억해 냈다.
“…한수 선배.”
유지연이 작게 읊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