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7 : 확률 6.1% (2)
***
회의가 끝나고 집으로 향하는 길.
나는 지연이와 같이 정문을 향해 걸어가고 있었다.
동기 최유라는 책 반납한다고 도서관으로 갔고, 인생이 개 꼬인 남자 후배 원, 투는 게임방 간다고 후문 쪽으로 가 버렸다.
네놈들은 영원히 게임방을 전전하는 인생을 살게 될 것이야!
아무튼 그래서 지연이랑만 지하철을 타러 가고 있는 중이었다.
“참 나…… 난 몰랐네. 그래도 나름 후배들 보면 잘 챙겨 준다고 생각했는데.”
“아하하. 오빠. 아무리 그래도 승환 선배는 못 이길 거예요. 지금 승환 선배는 1학년들 사이에서 완전 아이돌이에요.”
“……이해할 수가 없다. 아니, 그 녀석의 본질을 아는 순간 상처받을 니들이 걱정이다.”
“아하하.”
또 빵 터졌다.
“저기. 지연 씨? 이건 궁금해서 물어보는 건데. 어느 부분에서 웃긴지 알려 줄 수 있나요?”
지연이는 한참을 웃다가 심호흡을 하면서 겨우 진정한 이후에 말했다.
“2학년 선배들, 특히, 오빠랑 승환 선배랑, 다른 선배들이 서로 디스하는 거. 그게 진짜 재미있어요. 옆에서 보면 완전 시트콤이 따로 없다니까요.”
“그… 그런가?”
“네. 사실 좀 제가 더 재미있어하는 경향이 있어서, 친구들은 저보고 매니악하다고는 하는데, 저는 선배들이 옆에서 서로 막 욕하고 디스할 때 그게 너무 웃겨요. 보고 있으면 재미있고, 또 행복해져요.”
“행복해지기까지? 그… 그러냐. 솔직히 이해할 수가 없네요.”
이해가 안 된다. 독특하네. 이 녀석도.
“그나저나, 오빠. 오빠가 권력을 남용한 거예요?”
“응? 뭐가?”
“제가 요리 팀에 들어간 거.”
유지연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날을, 더러운 짐승들의 처절한 싸움이 있었던 그날을 떠올렸다.
***
유지연을 차지하려는 더러운 짐승들의 싸움은 끝이 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하찮은 것들.
이럴 때 내가 나서야 한다. 내 역할이 필요한 상황이다.
선택받은, 큰일을 하기 위해 선택받은 나 같은 사람의 역할이 말이지.
“야! 그만! 그만 그 욕망 가득한 더러운 입들 좀 다물고 집중해봐!”
내가 책상을 탕탕 치며 말하자 모두의 눈이 나에게로 모인다.
훗. 하찮은 것들.
“백날 떠들어도 답 안나와. 이렇게 양보와 타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지.”
“뭔데? 그게”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합의.”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합의?”
나는 나를 보는 그 녀석들 앞으로 천천히 팔을 뻗었다. 그리고 쭉 뻗은 손이 그 녀석들의 눈높이에 올라섰을 때,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완전한 주먹을 만들었다.
녀석들의 시선이 내 주목에 집중된다.
“가위, 바위, 보.”
내가 말했다.
말이 끝남과 동시에 욕망 가득한 더러운 눈을 한 짐승들의 눈이 빛난다.
그 녀석들도 이미 알고 있다.
더 이상의 평화적인 합의는 불가능하다.
늑대 무리는 냉혹한 질서에 의해서 지배된다.
우두머리 자리에 오를 수 있는 늑대는 단 하나, 단 한 마리만이 무리를 이끌고, 암컷들을 거느릴 수 있는 것이다.
음. 유지연 이야기를 하면서 늑대는 비유가 맞지 않는군.
아무튼!
우리는 모두 알고 있었다. 이 싸움을 끝내기 위한 유일한 방법으로는 가위바위보라는 서든데스만이 남았을 뿐.
모두가 만족하는 합의 따위는 없다.
“몇 판?”
이중훈이 안광을 빛내며 말했다. 무서운 새끼.
경매로 진행했으면 저 놈은 분명 집문서 담보 잡혔다.
“삼세판.”
한 놈이 말했다.
“단판.”
내가 말했다.
다섯 명이 삼세판을 이겨 낸 승자를 만드는 것은 너무 비효율적이다. 단판만 해도 오래 걸릴 텐데.
“사…… 삼세판.”
이중훈의 의견이다. 그렇겠지. 너라면 어떠한 가능성이든 다 열어 두고 싶겠지.
“단판.”
근육 바보 김창회의 의견이다. 주먹질로 했으면 저놈을 이길 사람은 아무도 없겠지. 애초에 딜이 안들어가니까.
이제 마지막 남은 한 표는 박승환.
박승환이 캐스팅보트가 되었다.
녀석은 한참을 장고하더니,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남자라면 단판!”
이중훈의 얼굴에 간절함이 스진다. 부정행위를 할 수 있다면 분명 부정행위라도 하겠지.
고개를 끄덕여 동의를 표시한 우리 모두는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조심해라. 손목 날아가붕께.”
박승환이 말한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 입이 열렸다.
“안내면 술래. 가위, 바위, 보!”
***
결과는?
바위 네 개, 보자기 하나.
물론 내가 유일한 보자기.
“아아아아아아아아안 돼!”
이중훈의 비통한 외침이 과방 안에 울려 퍼진다.
“이럴 수는 없어. 안 돼. 뭔가 음모가 있어!”
이중훈은 포기하지 않았다.
“삼세판! 삼세판!”
다른 녀석도 합세한다. 뭐야. 저 녀석도 유지연 좋아했나?
“안 돼. 삼세판이 다섯 판 되고, 다섯판이 일곱 판, 아홉 판 되고 결국은 파국으로 가게 될 거야.”
나는 승리자로서, 또한 큰일을 하는 선택받은 사람으로서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하지만 이승환은 납득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있을 수 없어… 왜… 왜 하필…. 하필 한수 저 자식이….”
포기하지 않는 이중훈의 등을 박승환이 가볍게 쓸어내리며 말했다.
“이보게 친구. 있을 수 있는 일이네. 다섯 명이서 가위바위보를 할 때, 경우의 수는 3의 다섯 제곱인 243. 그중에서 네 사람이 같은 것을 내고 한 사람이 다른 것을 낼 경우의 수는 5C1 곱하기 3C1해서 15. 확률은 243분의 15, 백분율로 치면 약 6.1%. 그리 낮은 확률은 아니지. 그저 자네가 그 6%에 들지 못한 것뿐. 인정 하게, 패배자여.”
“크아아아악.”
박승환이. 너 말 잘하는구나. 데코 팀에는 여자를 잔뜩 붙여 주도록 해주지.
“자자. 이제 유지연이 이야기는 끝! 다음으로 넘어가자.”
나는 슬퍼하는 이중훈을 내려다보며 그렇게 못을 박았다.
***
“그때 오빠가 그랬잖아요. 저랑 같이 하고 싶다고, 요리 팀에 꼭 데려오겠다고. 그래서 권력을 남용하겠다고. 오빠가 권력으로 다른 사람들을 찍어 누르고 절 차지하겠다고.”
그렇게 이야기 안 했지. 아니, 유지연 씨 당신이 들어오고 싶다고 했죠. 제가 아니라.
뭐 이미 상황 끝인데, 구구절절 그런 이야기를 할 필요는 없겠지?
“아니. 그냥 가위바위보.”
“쳇. 실망인데요.”
“왜 실망인데요?”
“그야, 오빠가 저를 노리는 수많은 선배들과 싸워서 저를 쟁취해 낸 줄 알았죠. 마치 공주님을 구하기 위해, 마물과 싸우며 마왕 성을 향해 나아가는 용사님처럼.”
“드래곤퀘스트?”
유지연이 고개를 끄덕인다.
“너 누구냐?”
“네?”
“아저씨의 영혼을 가진 넌 누구냐? 우리 새내기 유지연이 어디 갔어? 어쨌어? 우리 유지연이!”
“아하하하.”
또 빵 터졌다. 그나저나 진짜 독특하네. 이 녀석.
“아니, 진짜로 드래곤퀘스트를 어떻게 알아?”
“오빠가 좋아했어요. 어릴 때 저 옆에 앉혀 놓고 주입식 교육했어요.”
“……명작을 아는 훌륭한 오빠구나.”
“근데 저는 드퀘보다는 파이널 판타지가 제 스타일에 맞아요. 약간 암울하고, 우울하고. 그러면서도 희망을 놓지 않는. 그런 분위기. 식스는 명작이죠.”
느낌이 싸하다. 이 녀석 혹시….
“너… 혹시 와우도?”
“오빠가 몰래 엄마 이름으로 아이디 만들어 줘서 같이 했어요. 오그리마가 제 놀이터였었죠. 거기서 술래잡기 많이 했는데, 뒷골목이 지저분해서 숨기 좋았거든요.”
“…몇 살 때?”
“3학년인가? 아무튼 처음 시작은 2학년 때.”
“중학교?”
“초등학교요.”
“종족은?”
“굽은 등의 긍지를 아는 트롤!”
“…직업은?”
“드루요. 오빠가 억지로 시켰어요. 버프 때문에. 그게 억울해서 나중에 오빠 몰래 얼라 도적 부캐 만들어서 오빠 찾아다닌 적도 있어요.”
“…니네 오빠는 무서운 사람이구나.”
“확실히 정상은 아니에요. 우리 오빠. 지금은 미국에 유학 갔는데, 나중에 소개시켜 드릴게요.”
아니. 뭐… 소개까지야….
“그나저나 진짜 그냥 가위바위보였어요? 단순하게?”
단순한 가위바위보냐고 물으면 그렇다고 말할 수밖에 없지.
물론 가위바위보를 할 때, 마음속으로 ‘남자라면 주먹들을 내겠지.’라는 생각은 했다.
다시 한번 분명히 말하는데, 그렇게 생각한 거지, ‘주먹을 내라!’ 그렇게 생각한 것은 아니다.
내 의지가 아니라 박승환의 ‘남자라면 단판’이라는 대사도 있었고, 또 태생이 여자친구 같은 건 모르는 개마초들뿐이니 주먹을 냈을 것이라고 나는 판단한다.
신력 따윈 쓰지 않았어요~
아마도.
“응. 아… 아마도?”
“흐음. 뭔가 있는 느낌인데요?”
“…없습니다. 그런 거.”
“뭐 있는 게 더 좋은데.”
“응?”
“아니에요. 그냥.”
그러고는 또 말없이 걸어간다.
계절의 여왕 5월, 한낮에는 햇살이 많이 뜨겁지만, 저녁에 불어오는 선선한 미풍은 정말 그 어느 계절에도 느낄 수 없는 청량감을 준다. 특히 녹지가 많은 캠퍼스 특유의 나무 향 가득한 5월의 공기는 고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바람이 참 좋아요.”
유지연도 같은 생각을 하는지, 그렇게 말한다.
“딱 5월 요맘때, 아주 짧은 시기만 즐길 수 있는 바람이니까, 최대한 만끽해 둬야 해.”
“오! 역시 2학년. 뭔가 대단해 보여요.”
“…그거 지금 디스지?”
“아니에요. 오빠는 참.”
그러더니 한 발자국 앞으로 나가며 알 수 없는 이야기를 했다.
“오빠랑 이 시간에 이렇게 이 길로 가는 거 두 번째네요.”
“응? 누구랑? 나랑?”
내 질문에 유지연이 뒤를 돌아본다.
커다란 눈, 조화로운 이목구비, 그리고 잡티 하나 안 보이는 도자기 같은 피부. 연하게 바른 립글로스가 입술의 윤택을 더한다.
“오빠는 기억 못 하는구나. 흐음.”
“내가 너랑?”
“저랑요.”
“여러 명이?”
“단둘이.”
나는 빠르게 머릿속을 뒤졌다.
장기기억, 장기기억에는 있을 거야.
내가 이렇게 예쁜 애랑 학교를 단둘이 걸어 내려왔는데 기억이 없다고?
설마. 내가 치매도 아니고.
“에이. 너 착각하는 거 아냐? 나 말고 다른 사람이랑.”
유지연은 그 이쁜 얼굴에 어떻게 사람이 그럴 수 있어요? 하는 표정을 하고 있다.
“오빠 맞아요. 한수 오빠.”
“확실해? 난 기억에 없는데? 언제?”
“…몰라요.”
그러더니 몸을 돌려 터벅터벅 걸어간다.
뭐야? 화났나?
그런데 아무리 생각하고 생각해도 기억이 안 난다.
내가?
유지연이랑.
1학년 중에서 예쁜 걸로 세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는 유지연이랑.
단둘이.
이 어두운 길을 내려왔는데.
기억하지 못한다고?
둘 중 하나다.
내가 치매에 걸렸거나, 저 녀석이 잘못 알고 있거나, 당연히 전자보다 후자의 가능성이 훠어어어얼씬 더 높다.
“야. 잠, 잠깐만. 거기 유지연 씨!”
“몰라요!”
“잠깐만. 아휴, 쪼그만 애가 뭐 저렇게 걸음이 빨라. 기달려 봐.”
“싫어요!”
나는 빠른 걸음으로 그 녀석을 따라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