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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업을 이어라-36화 (36/271)

36 : 확률 6.1% (1)

도서관에 있다가 점심 먹기 위해 식당으로 승환이와 걸어가던 중, 승환이가 갑자기 어딘가를 바라보더니 발을 멈춘다.

“진철이 형 아니야?”

승환이의 시선이 향한 방향, 그늘져 으슥한 느낌을 주는 벤치에 진철이 형이 앉아 있는 모습이 보였다.

“맞는 것 같은데?”

진철이 형이 누구랑 통화하는지, 두 손으로 핸드폰을 들고, 몸을 잔뜩 구부리고 있었다. 얼굴표정은 보이지 않았지만, 잔뜩 움츠린 자세 때문인지 어딘가 심각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승환이가 그런 진철이 형의 모습을 보고 생각났다는 듯 말을 꺼냈다.

“얼마 전에?”

“왜 회의하다가 이야기 나왔잖아. 진철이 형이랑 유 선생님이랑 뭔가 심각한 이야기 하는 듯했다고.”

“그랬지.”

그런 이야기를 들었지. 사실 크게 신경 쓸 이야기는 아니었다.

진철이 형은 원래 웃고 다니는 사람이 아니니까, 항상 진중하고, 말 없는 사람이기에, 심각한 표정을 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특별하게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닐까 걱정할 정도는 아니라는 이야기였다.

그런데 오늘은 뭔가 좀 다르다. 평소처럼 우울하긴 한데, 오늘은 좀 더 우울해 보인달까?

“뭐. 가자. 저런 분위기일 때 인사하는 건 오히려 예의가 아니야.”

내가 말했고, 승환이 녀석도 뭔가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읽어 냈는지, 평소처럼 개드립 치지 않고, 발걸음을 옮겼다.

***

점심시간이 좀 지났음에도 식당은 사람들로 꽤 들어차 있었다. 워낙 학생도 많고, 가격도 저렴하다 보니 외부인도 많이 찾아와서, 정말 이른 아침이 아니고서는 학생식당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들어차 있다.

생각해 보니, 여기 중앙그룹 계열사에서 운영한다고 했지? 그리고 중앙그룹이 내 거고.

왜 회장님이 그랬잖아. 당신 게 내 거라고.

후후후. 그런 생각 하니 사람들로 혼잡한 식당이 왠지 아름다워 보이는군.

고객님들! 찾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맛있게들 드세요!

“어이! 박승환! 한수!”

식당으로 들어서자 한쪽에서 밥을 먹고 있던 동기 녀석들이 손을 흔든다.

저 녀석들도, 아니지. 고객님들께서도 점심시간을 피해 지금 먹나 보군.

나와 승환이는 기다리라는 손짓을 한 후, 식권을 뽑고 밥을 받아서 그쪽으로 향했다.

우리가 합석했을 때, 그 녀석들은 벌써 반 정도 비운 상태였고, 결국 우리가 밥을 다 먹기도 전에 밥을 다 처드신 고객님 놈들이 옆에서 잔소리, 아니, 개소리를 해 대기 시작했다.

다 먹었으면 그냥 가든가, 옆에 앉아서 빨리 먹으라느니, 먹는 모습 보니 못 배운 티가 난다느니, 집안에 족보를 좀 봐야겠다느니.

나와 함께 그런 이야기를 듣고 있던 박승환이 숟가락으로 국을 뜨면서 말했다.

“〈일급 살인〉이라는 영화 봤냐?”

“처음 들어 보는데?”

“크리스천 슬레이터와 게리 올드만, 케빈 베이컨.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법정 영화지.”

나도, 다른 녀석들도 승환이 이 자식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하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박승환의 장점이 이거다. 분명히 알맹이 따위는 하나도 없는 개소리라는 것을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귀를 기울이게 만든다는 점. 그게 박승환이 가진 경쟁력이다.

“언제 나온 영환데?”

친구 녀석 중 하나가 물었다.

“1995년.”

“미친놈아, 95년이면 우리 태어나기도 전이다.”

“명작이라는 것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영화에만 붙일 수 있는 타이틀이지.”

확실히 박승환 이놈은 독특하다.

1년 넘게 같이 학교 다니면서 공부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매일 시간 나면 게임방 가서 치킨 먹겠다고 뛰어다니고 있지, 세상 모든 e스포츠는 다 보고 있지, 아니면 뭔가 뻘짓하고 있지. 뻘짓을 안 하면 무언가 참신한 뻘짓을 구상하고 있다.

어떻게 이 학교 들어왔는지 모르겠다.

무엇보다 독특한 것은, 정말 쓸데없는 것을 많이 알고 있다는 것이다.

딱 봐도 좋아하는 것 같은 게임이나 e스포츠는 둘째 치고, 영화면 영화, 음악이면 음악, 미술 등의 예술적인 분야는 물론, 역사, 지리, 경제 등 다방면에서 정말 많은 잡지식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잡지식을 정말 이상한 방향으로 사용한다는 점도.

“아무튼 중요한 건 그게 아니고.”

“아니고?”

“그 영화를 보면 주인공이 감옥에 간단 말이지. 5달러를 훔쳤다는 죄목으로.”

“그런데?”

“주인공이 감옥에서 살인을 저질러, 그래서 제목이 〈일급 살인〉이야.”

“그런데?”

박승환이 천천히 숟가락을 눈높이로 들어 올린다. 우리들의 시선이 그 숟가락으로 향한다.

“살인 도구가 숟가락이거든. 숟가락으로 상대방 목 뒤. 여기 숨골을 따 버려.”

“…그래서?”

“닥치지 않으면 내가 네놈들 숨골을 따 버리겠다는 이야기지.”

그렇게 말하고, 숟가락으로 국물을 떠서 입에 넣고, 천천히 빤다.

이런 거.

정말 독특한 녀석이다.

이 녀석은 분명 유명해질 거다. 신문과 뉴스에 이름이 나올 거다.

좋은 쪽이든, 나쁜 쪽이든.

물론 나쁜 쪽이라는 데에 내가 가진 모든 재산과 내 왼쪽 손모가지를 건다.

***

과방이 꽉 찼다. 주점에 참여하는 1학년, 2학년이 모두 과방에 모였다.

화요일. 오늘이 축제를 준비하기 전 마지막 전체 회의 날이니까.

모두 내가 나눠준 A4지를 들고 있는 것을 확인한 후, 입을 열었다.

“자. 모두 모였지? 이제 시작하자.”

대략 육십여 개 정도 되는 눈동자가 나에게 모인다.

아… 이 권력의 맛이란.

“자. 지금부터 설명할 테니 잘 들어. 지금 이거 녹음 뜨고 있으니, 나중에 못 들었네 어쩌구 하면 법적 책임을 지게 해 주겠어.”

하찮은 것들아. 큰 그림을 그리는 고귀한 분이 너희 하찮은 것들의 의무를 알려 줄 터이니, 그 하찮은 귀를 쫑긋 세우고, 음절 하나 놓치지 않고 잘 듣도록 하여라.

“우선. 이번에 주점 운영에 참여한다고 말했던 1학년들은 지난번 회의에서 임의로 업무를 나눴으니까, 혹시 사정이 있거나 변경하고 싶으면, 나에게 말할 수 있도록. 내가 불편하면 1학년 대표한테 말해도 되고.”

그 이야기에 대략 스무 개의 머리가 움직인다.

좋구나. 왜 북쪽에서 아리랑 공연에 목매는지 알 것 같아.

“1학년들은 지금 회의 끝나면 각 담당조장들과 따로 어떻게 할지 이야기들 나누세요. 2학년 담당 지금부터 말해 줄게. 우선 조달 담당에 김창회. 장비 담장에 박찬희, 데코에 박승환.”

와!

뭐야? 지금 뭐야? 왜 박승환 이름이 나오는데, 1학년들 사이에서 환호성이 터지는 거야?

여기저기서, 와, 나도 데코 팀이야. 나도 승환 오빠랑 같이 한다, 이러고 있다.

“뭐야? 왜 그래?”

내가 놀라서 말하자, 박승환이 손가락을 까닥까닥하면서 말했다.

“참나.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그러면 다른 선배들이 질투하니까 사람들 많을 때는 그러지 마.”

그런 재수 없는 소리를 하는데, 1학년 여자애들이 꺄르르 터진다.

뭐지? 왜 웃지? 왜 욕을 안 하지? 때리는 건 몰라도 욕 정도는 할 수 있는데?

“아하하, 승환 오빠 너무 재미있어요.”

나는 이 상황이 뭔질 모르겠다는 눈으로 다른 동기 녀석들을 바라봤다.

동기 녀석들도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나 보다.

서로서로 살피면서 이게 뭔 일이지, 하며 눈으로 묻고 있다.

알 수가 없네…….

나는 절대로 이해할 수 없지만, 우선은 그냥 넘어가기로 했다.

1학년 애기들은 얼마나 시간이 지나야 저 녀석의 실체를 알게 될까.

“자. 자. 다음 이야기합시다. 총무 겸 예비 팀 이중훈.”

중훈이는 살짝 손을 들었다가 슬며시 내린다.

환호 뒤에 침묵은 더 슬프게 느껴진다.

힘내라, 친구야.

“그리고 마지막으로 요리 팀은 나.”

나야 뭐. 기대도 안 했다. 그나마 이중훈 뒤라서 다행이네.

“각 팀장들은 팀원들 데리고 가서 세부적인 업무 정하고, 다 끝나면 이메일로 보내. 문자로 보내지 마! 경고했다! 문자, 깨톡 다 안 돼! 이메일로 보내! 특히 조달 팀은 당장 내일 재료 준비해야 하니까 빨리 정해서 알려 주고, 인력 부족하면 총무 팀에게 말해서 인력 받고. 알겠지? 요리 팀은 여기 남고, 다른 사람들은 각자 알아서 꺼져 주세요.”

내 말을 끝으로 40여 명의 사람들이 우르르 과방을 나가기 시작한다.

꺄르르 웃으며 박승환을 따라 나가는 1학년들을 보고 있자니. 왜 저 자식에게 여자들을 많이 붙여 줬나 후회가 된다. 어쩔 수 없었다. 데코 팀은 주점 운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면 접객 팀으로 바뀌니까.

다들 나가고 요리 팀 다섯 명만이 과방에 남았다.

우선 나, 그리고 작년에 오뎅 냄비를 담당했던 여자 동기 최유라. 이름 모르는 1학년 남자 놈 둘, 그리고 유일한 1학년 여학생 유지연.

***

“오빠. 우리는 뭐 해요? 이제?”

유지연이 나를 보며 묻는다.

자세히 보아야 예쁘다, 오래 보아야 사랑스럽다고 했는데, 이 녀석은 그냥 봐도 예쁘다. 한 번 봐도 사랑스럽다.

아니지. 아니지. 서현 님이 계신데 무슨!

“우선 업무부터 정하자. 우리가 담당할 요리는 제육볶음, 파전, 부추전, 그리고 오뎅이야. 나머지 마른안주나, 조리 안하는 안주는 조달 팀이 할 거고, 설거지는 나중에 장비 팀이 담당하니까 우리는 요리에만 집중하면 되지. 안주 준비는 내일 조달 팀이 장 봐 오면 내일 밤에 밑 준비하면 되고….”

그러면서 우리 요리 팀은 세부적인 사항들을 조정했다.

나는 부추전을 메인으로 가끔씩 파전을 담당하게 되는 메인 셰프, 동기는 제육을 전담하는 조리장, 이름 모르는 남자 후배 1은 오뎅 냄비 담당, 남자 후배 2와 유지연은 잡일 담당으로 정해졌다.

“지연이가 고생하겠네. 잘 부탁해.”

2학년 동기 최유라가 유지연의 어깨를 팡팡 두드리면서 말했다.

“언니. 제가 열심히 할게요.”

두 주먹으로 파이팅 포즈를 취하는 유지연을 보면서, 나는 어딘가에서 울고 있을 이중훈을 떠올렸다.

쌤통이다, 이 쉐키야!

“근데 박승환이 왜 저렇게 인기야?”

내가 묻고 싶은 걸 동기가 지연이에게 물었다.

나도 궁금했어. 뭐야? 뭔데? 왜 그러는데?

“음…… 승환 선배는 재미있잖아요. 신입생 환영회 때도, 애들에게 먼저 다가가서 술도 따라 주고, 말도 걸어 주고, 말도 재미있게 하니까, 애들도 막 빵빵 터지고. 그래서 그런 거 아닐까요?”

지연이가 말하자 남자 후배 1도. 미안하다. 도저히 니 이름을 모르겠다. 아마 앞으로도 모르겠지만. 아무튼, 그 녀석이 말을 받았다.

“승환이 형이 밥도 잘 사 줘요. 여자 후배들만 챙기는 다른 선배들이랑 달리, 승환이 형은 남녀 가리지 않고 잘 챙겨 주고 해서, 저희들 사이에서는 평가가 좋아요.”

이중훈이 떠오르는 것은 왜일까.

“그죠. 또 이야기해 보면, 진지할 때는 또 진지하고. 그런 부분들이 좀 남자로서도, 선배로서도 멋있달까?”

남자 후배 2의 증언.

물론 나는 수긍 못 한다. 그건 동기인 최유라도 같은 생각인가 보다.

“의외네. 한수야. 니가 가장 많이 붙어 있잖아. 원래 그런 녀석이야?”

“원래?”

“그렇게 살갑고, 속 깊고, 그런 녀석이야?”

“아니지.”

“그렇지? 그냥 뭐랄까……그…… 적절한 단어가 생각이 안 나네. 뭐랄까… 그 또라이…?”

최유라의 말에 나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개또라이.”

그 말에 유지연이 빵 터졌다.

알 수가 없어. 이 타이밍.

“아하하. 언니. 너무 재미있어요. 2학년 선배들 진짜 너무 재미있어요.”

동기가 나를 본다. ‘얘, 왜 이래?’ 그런 표정으로.

‘나도 몰라.’ 하는 표정으로 어깨를 으쓱해 줬다.

“그나저나. 그럼 한수. 한수는 평가가 어떤데?”

동기 녀석이 갑자기 불쑥 말을 꺼냈다.

야! 지금 타이밍에 그건 아니지!

“한수 형은…….”

남자 후배 1이 입을 연다. 어쩐지 불안하다.

“한수 형은 사실 잘 몰라요. 형이랑 뭐 이야기해 본 적도 별로 없고, 또 형이 말이 별로 없어서…….”

“그죠. 뭐 싫다는 게 아니라, 아직 잘 모른다. 그런 느낌?”

남자 후배 2의 증언.

“그래? 한수 너 애들 밥 안 사 줬냐?”

“사 줬지. 사 줬을걸…… 사 줬나?”

별로 기억이 없네?

그럴 수밖에!

1학년들이 막 들어왔을 때는 내가 신지수랑 깨져서 겁나 우울할 때였고,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왠지 마음이 불편해서 과방도 잘 안 가고 하면서 찌질할 때였는데!

찌질하다고 말하다니. 내가 나 스스로를 찌질하다고 말하다니…….

“저도 얻어먹은 적 없어요!”

유지연이 손을 번쩍 들면서 말했다. 그 귀여운 얼굴로.

야! 우리 얼마 전에… 아. 내가 얻어먹었지?

“뭐야? 그럼 우리 동기 한수는 남녀 차별 없이 후배들을 박대했다는 이야기네?”

“……넘어가자.”

“참. 한수 못됐네. 작년에 누나들한테는 그렇게 얻어먹고서 말이야.”

“자. 넘어갑시다.”

하지만 넘어갈 생각이 없었나 보다. 특히 유지연은.

“한수 오빠. 작년에 선배 언니들한테 밥 얻어먹고 그랬어요?”

유지연의 질문에, 동기 녀석이 말도 말라는 표정으로 말한다.

“작년에 언니들이 한수 제일 예뻐했다니까? 밥도 제일 많이 사 주고. 그랬는데 한수는 언니들 사랑도 저버리고, 우리 동기 중에서 제일 예쁜 애랑 CC 해 버렸잖아. 언니들 그때 배신감 느꼈다니까. 오빠들도 엄청 분노했고.”

“어머. 못됐다. 한수 오빠는 은혜를 모르는 사람이네요. 그렇게 사랑받았으면서, 후배들 사랑해 주지도 않고.”

유지연이 고개를 주억거리며 말한다.

“그러게. 다시 생각해 보니, 한수 참 못됐다. 후배들 밥 한 번 안 사 주고.”

아니.

“너. 너는. 너는 애들 밥 사 준 적 있어?”

“저는 유라 누나한테 많이 얻어먹었는데요.”

남자 후배 1의 증언.

“저도요.”

남자 후배 2의 증언.

나는 마지막 희망의 끈을 놓지 않으려 지연이를 바라봤다.

“언니. 저번에 먹었던 그 파스타 진짜 맛있었어요. 다음에도 또 먹으러 가요. 다음엔 제가 살게요.”

“어쩜 우리 지연이는 얼굴도 예쁜데, 이렇게 말도 예쁘게 할까?”

“…….”

세상에게 버림받은 느낌이 이런 것일까?

“그래. 뭐. 알았어. 축제 끝나면 그때 밥 한번 먹자. 내가 거하게 한번 살게.”

내가 책상을 탕 치면서 말했다.

“아니. 뭐 괜찮아요. 형. 그렇게까지.”

“저도 괜찮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남자 후배 원, 투.

니들은 인생 꼬였다.

내가 단언하건대! 니들은 인생 개 꼬였어.

나 예비 신이야, 이 자식들아!

신! God! 신이라고!

두고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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