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 : 고양이의 눈, 소녀의 마음, 5월의 하늘 (3)
“다녀왔습니다.”
나는 현관문을 슬며시 열면서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왜냐고? 집에 도착한 시간이 밤 11시가 넘었으니까.
왜 늦었냐고? 회의가 10시 넘어서 끝났으니까.
진짜 내가 그 망할 놈의 과대표만 아니었다면 진작 도망쳤을 것이다. 도망쳤으면 예전에 집에 도착해서 우리 서현 님이랑 맛있는 저녁 먹고, 저녁 먹은 다음 공원으로 산책 나가고, 산책 나가서 이런저런 이야기 하면서 서로에 대해 조금 더 알아 가고, 그렇게 서로에 대한 마음의 거리가 좁혀지면서 자연스럽게 물리적인 거리도 가까워졌을 텐데!
그! 망할! 놈들! 때! 문! 에!
아니, 진짜 회의를 했다면 억울하지도 않지,
집에서는 ‘밥 줘, 용돈 줘.’ 이 말 말고는 가족들에게 따뜻한 말 한마디 안 건네는 놈들이 모이기만 하면 무슨 놈의 수다가 끝이 없어!
아니, 뭐, 백번 양보해서 그럴 수 있다고 치자, 꼬추 달았다고 수다 못 떠는 거 아니니까.
하지만 씨바! 아무리 그래도 걸 그룹 1군과 2군을 구분하는 기준을 가지고 몇 시간동안 멱살까지 잡아가며 처 싸우는 건 아니잖아!
아무튼 회의라는 이름의 시간낭비 때문에 이 시간이 되어서야 집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이다.
“이제 오세요? 오늘 많이 바쁘셨나 봐요.”
어김없이 서현 님이 현관 앞에서 날 맞이하신다.
웃으며 맞아 주시는 서현 님의 얼굴을 보니, 복잡한 마음이 든다.
집에 돌아왔을 때, 누군가가 날 맞이해 준다는 고마움, 그 누군가가 서현 님이라는 행복함, 그리고 이 시간까지 기다리게 했다는 미안함. 그런 감정이 뒤섞인다.
꼭 현관에 안 나와 계셔도 되는데….
사실 난 처음에 내가 들어올 때마다 현관 앞에 서 있는 서현 님을 보면서 언제부터 서 있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부담스럽기도 하고 그랬는데, 서현 님이 출퇴근을 하면서 그 비밀을 알게 됐다.
이놈의 집은 가족 구성원이 1층 게이트로 들어오거나, 차가 주차장에 들어오면 사람이 왔다고 알려 주는 기능이 있다.
나는 몰랐지. 30년 넘은 다 쓰러져 가는 고향 집이랑, 하숙집에서만 살았는데, 그런 걸 어떻게 알았겠어?
“식사는 하셨어요?”
신발을 벗는 내게 서현 님이 물어보신다.
우리 서현 님은 참으로 자상하시기도 하시지.
“넵! 애들이랑 대충 분식 배달시켜 먹었어요.”
분식이라는 말에 서현 님의 얼굴에 미묘한 표정이 떠오른다.
뭔가 불만족스럽다는 그런 표정. 마치, 할아버지가 ‘저녁으로 라면 먹었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짓는 표정과 비슷한 그런 표정이 떠올라 있었다.
“…부족하지는 않으셨어요?”
“아. 네. 부족하지는….”
당연히 안 부족했지. 왜냐고? 내가 샀거든. 그 말은? 미친놈들이 아주 과방에 분식으로 뷔페를 차렸다, 이거지.
아오, 생각하니 또 빡치네.
아귀 같은 놈들. 아주 식탐은 많아 가지고.
아니지. 정확히 말하면 식탐이 아니라 내 호주머니를 축내겠다는 아주 흉악한 의도 때문이었지.
다 안 처먹으면 돈 안 낸다고 했더니, 그 독한 색히들 끝까지 처먹는 거 봐 봐.
운동한다고 밀가루 안 처먹는 김창회 그 새끼까지 꾸역꾸역 처먹더라니까.
아오, 빡쳐.
“분식은…. 아니에요. 혹시 나중에라도 뭐 드시고 싶으시면 말씀해 주세요.”
서현 님의 말씀이시다.
나는 의문을 품는다. 어떻게 같은 인간인데, 같은 동물계 척상동물문 포유강 영장목 사람과 사람속 사람종인데, 과방의 그 괴물들과 눈앞의 이 여신님과는 어찌 이리 다르단 말인가?
“아니에요. 괜찮아요.”
확실하게 말한다.
그럴 일은 없다. 갑자기 배가 고파져서 ‘서현 님, 저 좀 출출한데….’ 이런 말을 할 일은 없다. 절대로 없지.
지금 내 위장 안에서 떡볶이와 순대와 튀김이 조금씩 그 부피를 늘려 가고 있었다. 금붕어도 아니고, 여기에 뭔가를 더 집어넣는다는 것은 죽겠다는 이야기다.
아니, 설사 배가 부르지 않다고 하더라도, 일주일을 굶어 아사 직전이라고 하더라도, 내가 감히 아름다우시고 고귀하신 서현 님에게 밥 주세요, 하겠냐?
일주일 굶으면 하려나?
아무튼 그런 내 생각을 알기라도 하듯, 서현 님이 다시 말씀하신다.
“있는 거 데우기만 하면 돼요. 번거롭지 않으니, 꼭 말씀해 주세요.”
단호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신다. 마치, 꼬마에게 당부하는 어린이집 선생님 같은 표정이다.
참으로…. 이렇게 속 깊은 여자가 있다니….
서지 마! 임마! 지금 설 타이밍 아니야! 현관이야! 주저앉을 수도 없어!
“그런데 축제라는 게 원래 그렇게 할 일이 많아요? 토요일 오전부터 지금까지 일하신 거예요?”
“아… 네. 뭐. 하하.”
서현 님은 모르신다. 회의는 늦은 오후였고, 오전에 나간 것은 유지연과 점심을 먹기 위해서라는 것을.
내가 거짓말을 한 건 아니다.
나는 뭉뚱그려서 점심 약속과 회의가 있다고 말했고, 서현 님이 두 일정을 하나로 엮은 것이고, 나는 뭐 해명을 애써 하지 않은 것뿐이고….
뭐 그렇다.
“뭐 거의 다 끝났어요. 수요일에 재료 사고, 준비하고, 목요일부터 열심히 전 부치면 돼요. 그나저나 죄송해요. 주말 식사 준비를 당번제로 하자고 말한 건 저인데, 오늘 제가 나가 버려서.”
우리는 주말에 각각 토, 일 한 명씩 정해서 당번을 하기로 합의했었다.
“아니에요. 일이 있으셔서 그런 건데요.”
“내일은 제가 당번 하겠습니다! 서현 님은 다음 주부터 하세요.”
“서현 님이요?”
“서현 씨는 다음 주부터!”
서현 님이 살짝 웃으신다.
서지 마! 이 자식아! 웃는 거 하나하나에 서지 마!
“음…… 그러면 이렇게 하는 건 어때요?”
“어떻게요?”
“어차피 이렇게 된 거, 이번 주는 당번 그런 거 없이, 그냥 밖에 나가서 먹을까요? 아침 겸 점심으로 밖에 가서 먹고, 차 마신 다음, 저녁 찬거리 사 와서 같이 만들어요.”
아니, 그. 그건…. 데… 데이트와 다를 바가 없는데요? 아니. 데이트가 아니고 신혼부부의….
“어때요, 제 생각? 내일 피곤하시려나?”
“안 피곤합니다. 하나도 안 피곤합니다!”
대답은 빠르게!
“고마워요. 얼른 씻으세요. 피곤하시겠다. 차 드실래요?”
“아. 네. 빨리 씻고 나올게요. 저도 부탁드려요.”
“알겠습니다. 천천히 씻고 나오세요.”
그러면서 서현 님은 몸을 돌렸다.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나는 생각했다.
신이시여! 어찌하여 여자의 뒷모습을 저리 아름답게 빚으셨나이까!
잠깐만, 신은 우리 할아버지라며? 그럼 할아버지가….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저. 저기. 서현 님.”
“네? 작. 은. 어. 르. 신?”
“죄송합니다. 서현 씨. 그게.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네.”
“어제 아침에 저기 말씀하신 건데요.”
“네. 어제 아침에.”
“그. 제가 서현 님… 그, 뭐… 훔, 훔쳐보고”
더듬지 마! 말을 왜 더듬어! 졸라 의심스럽잖아!
“크흠. 아무튼 그런 추… 추잡스러운 짓 안 했다는 사실을 아신다고 하셨죠?”
내 말에 서현 님이 빙긋 웃는다.
“투시, 투명인간, 시간 정지 이런 거요?”
“……네. 그런데 제가 그런……. 아무튼 안 했다는 걸 어떻게 아시나 해서요. 혹시 서현 님도, 아니 서현 씨도 그, 뭐… 능력 같은 게 있으신가요?”
내 질문에 그녀의 얼굴에 미소가 변한다. 무언가 장난스러운 미소, 뭐랄까, 어린아이를 놀려먹을 때 보여 주는 그런 미소다.
“잠시만요.”
그러고는 자신에 방에 들어갔다 금방 나오는데, 그 길고 흰 손에 무슨 스케치북이 하나 들려 있다.
그 뭐냐, 〈러브 액추얼리〉에 친구의 여자를 탐하는 나쁜 놈이 들고 있을 법한 스케치북 있잖아. 그런 게 들려 있다.
갑자기 웬 스케치북? 저게 왜 서현 님 방에서 나와?
“처음 보시죠?”
서현 님이 스케치북을 살짝 들어 보이며 말씀하신다.
나는 멍청한 표정을 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히 처음 봤지요. 서현 님 방에 들어가 본 적이 없는데요.
내 고갯짓에 서현 님이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하신다.
“한수 씨의 눈을 보면 알 수 있어요.”
눈? 내 눈?
“뭐를…요?”
“이 스케치북을 처음 본다는 사실을요.”
“…네?”
서현 님은 분명 멍청한 표정을 하고 있을 내 얼굴을 웃음기 가득한 눈으로 바라보며 스케치북을 천천히 들어올렸다.
그리고 한 장을 넘겼다.
거기에는 크레파스로 쓴 글씨가 커다랗게 쓰여 있었다.
(작은어르신. 제 방으로 와 주세요.)
응? 뭐지? 저게 뭐지?
서현 님은 내 얼굴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는 아직 현관에 서 있는 나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그 눈을 보면 알아요.”
서현 님의 두 팔이 천천히 나에게로 다가온다.
“믿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나를 안아 주었다.
***
- 한수는 모르는 이야기 (2) -
두 사람이 같은 집에 살게 된 첫 날.
강서현은 한수가 방으로 들어가고, 방문이 닫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자신의 방문을 열었다.
문을 닫은 그녀는 방문에 등을 기댄 채, 천천히 호흡을 가다듬었다.
강서현은 피곤함을 느꼈다.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오후에 중앙그룹 본사 앞에서 한수를 맞이한 후부터, 아니, 정확히는 한수를 맞이하기 위해 엘리베이터를 타고 로비 층으로 내려가던 그 순간부터 강서현의 심장은 평소보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렇게 조금 빨라진 심장박동은 한수를 회장실로 안내하고, 이야기를 나누고, 호텔로 이동해 저녁을 먹고, 이곳, 성수동의 새로운 거처로 올 때까지 계속 빨라진 그 상태 그대로를 유지하고 있었다.
태연한 얼굴 표정을 유지하고, 자연스럽게 행동했지만, 오늘 강서현의 체력 소모는 평소보다 조금 더 많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한수가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강서현은 자신의 방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방문에 등을 기댄 채, 길었던 반나절을 회상한 강서현은 천천히 발걸음을 침대로 옮겼다.
그러나 그녀는 바로 침대에 몸을 눕히지는 않았다.
강서현은 침대 옆에 놓여 있는 캐리어를 바라보았다. 본가에서 그녀가 손수 싼 캐리어는 아직 풀지 않은 상태였다. 저 캐리어를 풀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었다.
강서현은 미리 마련해 놓은 스케치북을 펼쳤다.
그렇게 스케치북을 펼친 강서현은 침대 모서리에 앉아, 한 손에 흔히 크레파스라고 불리는 오일 파스텔을 들고 잠시 스케치북의 흰색 화면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시 스케치북을 바라보던 강서현은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크레파스로 스케치북에 글씨를 써 내려 갔다.
벽 두 개와 복도 하나만큼 떨어져 있는 한수가 알아볼 수 있도록 큼직큼직하게 글씨를 썼다.
(작은어르신. 제 방으로 와 주세요.)
강서현은 그런 글씨가 쓰인 스케치북을 잠시 바라보다가, 천천히 한수가 있는 방문 쪽을 향해 들어 보였다.
한수가 투시 능력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면, 확실히 알아볼 수 있도록.
강서현은 그렇게 스케치북을 든 채로, 한참동안을 한수의 방이 있는 벽 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어느 때보다 강서현의 심장박동은 빠르게 뛰고 있었다. 쿵쿵 울리는 심장박동 소리가 마치 그녀의 방안을 가득 채운 듯한 느낌을 받았다.
잔뜩 집중하고 있는 그녀의 청각에 들리는 유일한 소리였다.
한수의 방문이 열리는 소리도, 한수가 복도를 걸어오는 소리도, 한수가 강서현의 방문을 노크하는 소리도 들려오지 않았다.
그가 보고 있을까? 지금 고민하고 있을까? 저 벽 너머에서 그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강서현의 머릿속에 그런 질문들이 계속 떠올랐다가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강서현은 아무런 미동도 없이, 그저 스케치북을 들고서 한수의 방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 이상한 행동이 30여분 가까이 이어지고 나서야, 강서현은 천천히 스케치북을 내려놓았다.
스케치북을 내려놓고도, 잠시 동안 한수의 방이 있는 방향을 바라보다가, 옷을 갈아입기 위해 블라우스 단추로 손을 가져갔다.
그런 강서현의 입가에는 작은 미소가 걸려 있었다.
***
자신이 추잡스러운 짓을 하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냐는 한수의 질문에 답하기 위해, 강서현은 자신의 방으로 가서 스케치북을 집어 들었다.
강서현은 첫날뿐만 아니라, 틈만 나면, 한수 방을 향해 들어 보인 그 스케치북을 들고 다시 밖으로 나갔다.
강서현은 한수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들린 스케치북으로 향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시선에서, 그가 이 스케치북을 처음 본다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뭐지? 저게 뭐지?
한수의 눈이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강서현은 그런 한수의 눈을, 어리둥절해하는 한수의 얼굴을 보면서, 스케치북을 열어, 이 집에 온 첫날 오일 파스텔로 쓴 글씨를 보여 주었다.
한수의 눈이 글자를 읽어 내려가고 있었다.
처음 보는 글을 읽는 눈이었고, 처음 보는 문장을 해석하기 위해 노력하는 표정이었다.
강서현은 그 눈과 그 얼굴이 귀엽다고 생각했다.
어떻게 보면 바보 같다고 표현될 수도 있는 그 표정이, 그 눈이 어쩐지 귀엽고 사랑스럽다는 기분이 들었다.
강서현은 조심스럽게 스케치북을 내려놓았다.
그리고 천천히 한수에게 다가갔다.
“그 눈을 보면 알아요.”
그렇게 말하는 강서현의 두 팔이 천천히 열렸다.
“믿고 있었어요.”
그렇게 말하며, 가볍게 한수를 안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