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 고양이의 눈, 소녀의 마음, 5월의 하늘 (2)
지연이와 헤어진 나는 지하철을 타고 학교에 도착했다.
과방에 가기 전 우선 복사실부터 들러서 회의에 필요한 문서를 출력했다.
오늘이 축제 전 마지막 회의니까.
인력, 진행, 관리에 대한 모든 사항이 오늘 결정된다. 그 내용을 담을 문서다.
역시 큰일을 할 줄 아는 사람은 이렇게 준비도 철저해요.
그저 생각도 없이 좀비처럼 시키는 것만 할 줄 아는 하찮은 놈들에게 일시키는 것도 보통 일이 아니라니까.
문서를 프린트하고, 나는 과방으로 향했다.
어디 보자. 지금이 5시 10분이니까. 4시 약속에 적당한 시간이군. 몇 놈이나 와 있나 보자. 설마 내가 또 제일 먼저는 아니겠지?
그런 생각으로 문을 열었다.
웬일인지 한 놈도 빠짐없이 모두 앉아 있구나.
“먼저 와 있었군. 하찮은 놈들아. 이제부터 이 몸이 일을 나눠 주시겠다.”
나는 그렇게 말하며 자리에 앉았다.
근데…… 그런데…… 어째…… 분위기가 좀 심상치 않다?
“한수야.”
그중 한 놈이 뭔가 진지한 눈빛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온다.
“어. 왜?”
“우리가 이야기를 해 봤는데.”
“뭘?”
먼저 와서 주점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고? 이 녀석들이? 뇌가 문드러져 생각이라는 것을 할 수 없는 좀비들이?
“역시 니 말이 맞는 것 같아.”
“뭐가?”
“왕따.”
“왕따?”
“응. 우리가 이야길 해 봤는데, 이제부터 너를 왕따 시키기로 했어.”
이건 또 뭔 소리야?
“뭐야? 왜? 내가 뭘? 뭘 잘못했는데.”
“너! 이 자식! 아직도 니가 잘못한 걸 몰라!”
이중훈이 두 손으로 책상을 내리치며 나에게 소리를 질렀다.
“…모르겠는데?”
나는 진짜 모른다는 표정을 지었다. 실제로도 몰랐다.
나 뭐 잘못했지?
“범죄는 밝혀지고, 죄인은 벌을 받을 걸세. 하늘의 그물은 성근 것 같아도, 결코 그물을 빠져나가는 법이 없다지 않은가?”
다른 동기 녀석이 이중훈을 달래며 의자에 앉혔다. 그리고는 나를 보면서 선고했다.
“너는. 약속을 어겼다. 친구 사이에 피로 맺은 약속을 어겼다.”
“약속?”
“그래. 유지연에게 5m 이내로 접근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너는 어겼다. 그래서 우리는 너를 징계하기로 결정했다. 너를 징계해서, 너의 마수에서 유지연을 지키기로 우리는 결정했다.”
어이가 없다. 어이가 없어서 욕도 안 나온다.
그저 이런 개소리를 진지하게 하고 있는 이 바보 녀석들을 어떻게 패 줘야 하나 그 생각뿐이었다.
“그래도 한때 친구였는데. 죄인의 마지막 말을 듣도록 하자.”
박승환이 말했다.
이 자식이다. 분명 이 그림을 스케치한 건 박승환 이 자식이다.
내가 손을 들었다. 놈들의 시선이 나에게로 모인다.
동기 한 놈이 마치 발언권을 허락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인다.
“우선.”
나는 입을 열었다. 주먹보다 일단 말부터.
문명인답게.
“뭐 그 장난스러운 각서에 대해서는 미뤄 두고. 나는 잘못이 없어. 내가 다가간 게 아니고, 그 녀석이 다가온 거야.”
“그 녀석이라니!”
이중훈이 벌떡 일어나며 소리쳤다.
미친놈. 태클 걸고 싶지도 않네.
“그래. 유지연. 유! 지! 연! 후배님께서 자신의 사물함과 내 사물함을 착각했고, 비밀번호를 잘못 입력했고, 내 사물함이 잠겼고, 그래서 내가 피해를 봤고, 엉?”
나는 그렇게 말하며 동기 놈들을 바라보았다.
이 자식들아. 나는 완벽한 논리로 무장하고 있단 말이다!
“유! 지! 연! 후배님께서 일을 해결해 보시겠다고 여기저기 뛰어다니셨고. 나는 그런 후배님을 위해서 최선을 다해 사건을 해결했고. 자. 여기 어디에 내 잘못이 있다는 거냐?”
나는 두 팔을 벌려 어깨를 으쓱하며 물었다.
대답해라. 최고의 지성이라는 대학생 놈들아.
“증명할 수 있나?”
뭐야. 재판이냐? 청문회야? 아니면 사문회냐?
“저거랑 저거.”
나는 턱으로 이중훈과 박승환을 가리켰다.
지금 기분으로는 저것들을 사람으로 지칭하고 싶지도 않다.
“저 둘이 내 옆에서. 바로! 옆에서 사건의 전말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봤지.”
포스트잇부터 빠루까지. 전! 부! 다!
“사실인가?”
어느새 재판관의 지휘에 오른 동기 녀석 한 명이 그 둘에게 묻는다.
“발언해도 되겠습니까?”
박승환이 오른손을 번쩍 든다.
“발언을 허락한다.”
아주 쇼들을 하고 있네.
“일견, 간악하고 음흉한 저 악적(惡賊)의 말은 타당하게 들릴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서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본질을 호도하고, 논점을 흐려, 우리의 눈을 가리려 하는 저 음마(淫魔)의 흉계를 조심할 필요가 있습니다.”
뭐야. 고개를 왜 끄덕여?
“그는 5m라는 맹약을 어겼습니다. 원인이 무엇이든 상관없이 그가 맹약을 어겼다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렇습니다. 이제 그 누구도, 어떠한 방법으로도 바꿀 수 없는 과거의 사실이 되었습니다!”
박중훈의 말에 동기 놈들이 고개를 주억거린다.
“허…….”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온다.
“죄인은 웃음을 거두어라! 당장 본 법정을 모독하는 행위를 멈추어라!”
법정으로 확정됐구나.
“존경하는 재판장님. 그가 말하는 것은 진실을 호도하는 것입니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사물함은 그의 사물함이 맞고, 또한 그 사물함에 발생한 문제에 아주 조금, 거의 없다시피 합니다. 유지연이라는 희생자가 사소한, 아주 사소한 잘못을 저지른 것은 사실입니다.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법정이라면 이 사실은 인정해야 함이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하지만 뭐.
“유지연의 사소한 실수는 그가 범한 잘못에 비하면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오히려 조각되는 것이 맞다고 생각합니다. 그가 범한 잘못에 비하면 말이죠.”
“내가 범한 잘못이 뭔데?”
나는 팔짱을 끼고 의자에 등을 기댔다.
어디 얼마나 신박한 개소리가 나오나 들어 보자.
“그가. 한수라는 죄인이 그 사물함의 주인이라는 것. 그것이 저, 간악하고 음흉한 죄인, 줄여서 간음한 죄인 한수의 죄입니다.”
“줄이지 마, 임마!”
그렇게 줄이면 안 되지!
“간음한 죄인이 이 일을 의도했는지, 의도하지 않았는지, 그것은 전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중요한 사실은, 그가 그 사물함의 주인이고, 그래서 유지연에게 접촉했다는 것입니다. 이상입니다. 재판장님.”
나는 안 보이는 테이블 밑으로 발목을 풀었다. 오늘 이 자식들을 다 패 버리려면 확실히 풀어 둘 필요가 있다.
“합리적인 의견인 듯합니다. 재판장님.”
“저도 동의합니다. 재판장님.”
어느새 나는 피고, 승환이는 검사, 나를 죽일 듯 노려보는 이중훈은 유지연과 더불어 피해자. 그 옆에 있는 놈은 부장판사. 나머지는 뭐 배석판사냐?
“야. 니들 연습했냐? 이거?”
나는 천천히 손목을 풀면서 물었다.
“어허! 아직 죄인이 자신의 잘못을 모르고!”
“뭐야? 판사야? 아니면 사또야? 하나로 통일해.”
“어허! 무엄하게도! 어디서 신성한 법정을 모독하느냐! 네 이놈!”
콜라보냐? 퓨전이냐?
“안 되겠다. 일단 좀 맞자들.”
나는 테이블 위로 몸을 날렸다.
***
한바탕 소동이 폭력이라는 수단으로 마무리 되고 나서야 회의를 시작할 수 있었다.
자고로 옛 성현의 말치고 틀린 말이 없다.
다구리 앞에 장사 없다는 말을 뼈저리게. 말 그대로, 단어 그대로, 사실 그대로 뼈가 저리게 느꼈다.
아오, 씹새들. 진짜로 때리네.
“그나저나 하필 왜 저 자식 사물함이지?”
한참 축제 주점 준비에 대해 논의하다 또 주제가 그리로 흐른다.
“내 말이!”
이중훈이 격하게 공감했다. 그리고 나를 째려본다.
“야, 이 미친놈들아. 그만 좀 하고 회의나 하자. 빨리.”
“왜 하필 유지연일까?”
“그러게.”
그러면서 나를 보는 눈들. 질투 반, 부러움 반.
“내가 전생에 공덕을 잘 쌓아서 다 그런 복을 받는 것이란다.”
“우연이야! 단순한 우연!”
이중훈이 다시 한번 격하게 반항한다.
하지만 여기에서 빠질 박승환이가 아니지.
“아다치 선생님께서 말씀하시길. 우연이 겹치면 인연이니라.”
“크흐흑.”
아…… 그만 좀 하자.
난 우리 서현 님밖에 없어 이 자식들아.
물론, 유지연은 정말 도자기 같은 피부에, 그 작은 얼굴에 오목조목 조화롭게 모여 있는 이목구비에, 지나가던 사람도 돌아보게 만드는 미모를 가지고 있지만, 오늘 보니 몸매도…… 생각 외로…….
그래도 나는 한 여자와 같은 지붕을 쓰는 지아비이거늘. 어찌들 이리 경박하게 말이야.
오늘 같이 밥 먹고 왔다고 했으면 진짜 피바람 불었겠구만.
약 올려 주려고 말할까 했는데, 안 하길 잘했다.
“야. 됐고. 이제 진짜 회의하자. 밤샐 거야?”
내 말에 다들 마지못한 듯 고개를 끄덕이며 집중한다. 역시 하찮은 것들은 큰일을 하는 사람이 관리해야 하는 법이야.
“우선, 장비 담당. 준비 다 끝났어?”
“거의 다 끝났는데, 올해는 프라이팬이 하나 부족하다.”
“왜? 여섯 개 있으면 되는 거 아냐?”
“과방에 있는 거 버렸잖아.”
맞다. 과방에 있던 거, 대형 뽑기 해 먹는다고 설탕 들이붓다가 하나 해 먹었지.
“한수 니가 임마. 대형 뽑기 해 먹는다고 하면서 말이야.”
내가 그랬지…….
“하나만 더 구해 봐.”
내가 말했다.
“자취하는 녀석들 집에 있는 거는 다 모았는데, 나머진 다들 엄마 눈치 보인다고.”
하긴 그렇다. 엄마들의 주방 용품 사랑은 인정해 줘야 하지.
“그럼 하나 사야 하나? 얼마 안 하잖아. 프라이팬.”
“사는 거야 사는 거지만. 뭐.”
미래를 예측하려면 과거를 보라고 했다.
나는 장비 담당에게 물었다.
“작년에 누구누구 가지고 왔는지 봐 봐. 안 겹치는 놈 한 놈은 있겠지.”
그러자 장비 담당 녀석은 작년 회의록을 뒤적거리다가 손가락을 튕겼다.
“있다. 한 명.”
“누군데?”
“신지수.”
모두의 시선이 나를 향한다.
뭘 봐, 이 자식들아.
“그냥. 하나 사자. 몇만 원 하지도 않는데. 어차피 과방에 있으면 고기도 구워 먹고 하니까.”
눈치 빠른 한 녀석이 재빠르게 말했다.
“그래. 그게 좋겠네. 좋겠다. 그게.”
빠른 동의.
뭐 난 아무렇지도 않은데, 이 자식들 괜히 오버하고 말이야.
“그래. 그러면 넘어가고. 다음은 장 보는 거. 작년에 갔다 온 사람 있어?”
그러자 조달 담당이 손을 들었다.
“작년에 어디 갔었냐? 몇 명 갔어?”
“작년에 가락시장 옆에 마트.”
“그렇게 멀리? 왜?”
“거기 신지수 집 근처라. 작년에 거기서 사서, 지수네 집에 뒀다가 지수 아버님이 날라 주셨지.”
모두들 나를 본다.
에휴…….
“……그래서 올해는 어떻게 할까?”
“뭐 장이야 아무 데서나 보면 되지. 뭐 요 역 근처에 큰 마트 많던데. 거기서 보자. 짐 많아지면 사람 좀 많이 가서 택시 타고 오면 되지. 뭐. 그치?”
그래. 그래. 그게 좋은 생각이다. 굿 아이디어야. 이러고들 있다….
“에휴……. 그래. 조달 담당 니가 정해라. 사람 몇 명 필요한지 정해지면 이야기해 주고. 그다음에 홍보 담당. 데코하는 거. 박승환 너지?”
“이 몸이올시다.”
“작년에 누구랑 했냐?”
설마…….
“신지수.”
역시.
분위기가 또 이상해질라 그러네. 내가 결단을 내려야지.
“야. 잠깐만. 이건 그냥 하는 이야긴데, 나 진짜 괜찮거든? 그러니까 우리 편하게 이야기하자.”
“괜찮냐?”
“괜찮아. 괜찮아. 이미 다 지난 일인데.”
“그렇다면 다행이고.”
“좋아. 올해는 신지수가 없으니까, 누구 한 명 더 있어야겠지? 누구 데리고 할래?”
“신지수.”
“닥쳐!”
내가 소리쳤다.
“그러게. 신지수가 참 애가 야무지고, 일도 잘하고 좋은데……. 하필…….”
이중훈이 그렇게 말하면서 날 본다.
“사실 과를 생각한다면 한수보다 신지수가 더 도움이 되는 건 맞지.”
또 다른 녀석이 동조한다.
“아까운 사람을 잃었어.”
얼씨구?
“지금이라도 안 늦은 거 아닐까?”
“안 늦었으면? 신지수에게 가서, 한수는 우리가 왕따시키기로 했어. 그러니까 부담 없이 와서 일 좀 도와주라 할라고?”
“아니. 뭐 꼭 그 이야기라기보다는. 그냥. 뭐. 그런 시나리오도 있다. 뭐 그런…….”
“나 갈까? 집에 가면 되냐? 이제?”
“아니. 뭐 꼭 가라는 이야기는 아니고. 뭘 그렇게 민감하게 그래.”
에휴. 참자. 큰일 하는 사람의 업보다. 하찮은 것들을 데리고 일을 하자니 쉬운 게 하나도 없구나.
박승환이 손을 번쩍 들었다.
“내가 그럼 한 명 지목해도 되는 거지?”
“……그래. 한 명이면 되겠냐?”
“뭐. 힘들겠지만 무리하면 어떻게 되지 않겠냐?”
“누구 붙여 줄까?”
“유지연.”
그리고 예상처럼 벌떡 일어나는 한 사람.
“안 돼!”
이중훈.
“그러네. 유지연이 참 애가 야무지고, 일도 잘하고 좋겠네.”
내가 말했다. 박승환이의 어둡고 음습한 의도가 눈에 보였지만, 지금은 이중훈이를 공격할 때.
적의 적은 나의 편.
“뭐, 여러 명 있으면 좋기는 하지만, 나 편하자고 사람 많이 쓸 수도 없고. 유지연 한 명만 있으면 내가 밤을 새워서라도 다 준비해 올게.”
그렇게 말하면서 혀로 입술을 핥는 박승환.
총구를 돌려라. 아군이 아니다!
“……안 되겠다.”
내가 말했다.
“당연하지!”
이중훈이 말했다.
“그래. 안 돼. 저 녀석에게 유지연은 절대로.”
다들 동조하는 분위기.
“이야기 나온 김에 1학년 업무 분장 좀 짜자.”
“지연이는 당연히 장비 팀에서 데려가야지.”
“야! 그 여리여리한 애를 장비 팀에서 어따 쓰냐? 조달 팀이지!”
“조달 팀 데리고 가서, 그 팔에 무거운 장바구니를 들리겠다고? 니가 사람이냐?”
처음 나라는 공동의 적을 상대로 연합전선을 만들었던 연합군은 유지연이라는 최종목표를 앞에 두고 산산이 흩어졌다.
아군과 적의 구분이 없는, 말 그대로 난전이다. 개판이다.
그리고 그 선봉에 서 있는 이중훈.
“야! 그만! 그만 그 욕망 가득한 더러운 입들 좀 다물고 집중해봐!”
내가 책상을 탕탕 치며 말하자 모두의 눈이 나에게로 모인다.
훗. 하찮은 것들.
“백날 떠들어도 답 안나와. 이렇게 양보와 타협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하나 있지.”
“뭔데? 그게”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합의.”
“거부할 수 없는 절대적이고 강제적인 합의?”
나는 나를 보는 그 녀석들 앞으로 천천히 팔을 뻗었다. 그리고 쭉 뻗은 손이 그 녀석들의 눈높이에 올라섰을 때, 손가락을 하나씩 접어 완전한 주먹을 만들었다.
녀석들의 시선이 내 주목에 집중된다.
“가위, 바위, 보.”
내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