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 고양이의 눈, 소녀의 마음, 5월의 하늘 (1)
2호선과 3호선이 교차하는 교대역 인근의 카페에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한쪽 구석에 앉아 있던 유지연이 나를 향해 손을 흔든다.
“오빠! 여기예요!”
“어. 어어.”
나도 지연이에게 가볍게 손을 흔들어 주고는 그 쪽으로 다가간다.
보인다. 그리고 들린다.
내가 그쪽으로 다가가자 여기저기서 나에게 날아와 꽂히는 시기와 질투의 시선과 목소리가.
그랬겠지. 그랬을 거야.
지연이가 커피숍에 들어와 두리번두리번 거릴 때, 여기 있는 XY 염색체들은 다들 생각했겠지.
저 미소녀는 어디에서 왔을까. 누구를 찾고 있을까? 어디에 앉을까?
그리고 미소녀가 자리에 앉으면 또 생각하겠지.
누굴 기다리고 있을까? 누가 그녀의 앞자리, 또는 옆자리를 차지할까.
훗.
그게 바로 나다, 이놈들아.
내가 니들이 궁금해하던 그 누구 님이시다.
음하하하하하.
요즘 웃을 일이 많군.
“뭐야? 소개팅 가냐?”
나는 몸을 던지듯 의자에 앉으면서 예쁜 옷을 입은 유지연에게 말했다.
청바지에 후드 티를 주로 입는 평상시와는 달리, 샤랄라한 꽃무늬 원피스를 입고, 그 무릎 위에는 위에 입고 왔을 법한 재킷이 살짝 올려져 있다.
후드 티만 입고 다닐 때는 몰랐는데, 이런 옷을 입으니, 이 녀석도 은근히 몸매가…… 커 흠.
“아니에요. 소개팅 같은 거 안 해요. 저.”
“아… 그래.”
“왜요? 이상해요?”
“응. 이상해. 평소보다 예쁘네.”
“헤헤헤.”
장담컨대, 친구라는 이름의 야수들이 이 대화를 들었다면 분명 나를 때렸을 거다. 물론 나도 누군가 이런 이야기를 하는 것을 제3자 입장에서 들었다면 때렸을 테고.
“그나저나 안 그래도 되는데 무슨 밥을 사겠다고.”
내가 토요일 점심에 여길 찾은 이유는 밥을 사 준다는 제의를 받았기 때문이지.
어제 알바를 끝나고 집으로 가는 길에 지연이에게 깨톡이 왔다.
***
-오빠. 저 지연이에요.
‘어. 그래. 빠루는 잘 가져다 놨어?’
-…죄송합니다.
‘괜찮아. ㅋㅋㅋ 그나저나 웬일이십니까? 이 늦은 시간에.’
-그게…….
‘왜? 뭔데? 또 뭔 잘못했어?’
-혹시 오빠 내일 시간 어떠세요?
‘내일? 내일 언제?’
-네. 내일. 점심때?
‘음…. 뭐 별건 없는데? 오후에 축제 주점 때문에 애들 만나기로 했으니까 점심은 괜찮아.’
-그래요? 혹시 괜찮으시면 내일 점심 같이 드실래요?
‘점심? 상관은 없는데….’
-그럼 제가 맛있는 거 사 드릴게요. 점심에 시간 좀 내주세요.
‘오늘 일 때문에 미안해서 그래?’
-넹 ㅠㅠ
‘ㅎㅎㅎ 그런 사소한 거 신경 쓰면 머리 빠진다.’
-….
‘여자도 탈모 있어. 정수리부터 빠진다.’
-오빠…. 죄송한데…. 시간 괜찮으신 건가요?
‘넵! 시간 괜찮습니다! 근데 뭐 크게 신경 안 써도 되는데.’
-괜찮으신 거죠? 그럼 내일 1시는 어떠세요? 아니면 좀 일찍 볼까요? 11시 반?
‘1시가 좋겠다. 어차피 오후에 애들 만나야 하니까. 어디서 볼까요? 학교 근처에서 볼까?’
-학교 근처는 좀 그렇고…. 그러면 교대는 어떠세요?
‘교대? 교대역?’
-네. 교대역이요.
‘뭐 상관은 없는데…. 혹시, 유지연 씨. 집이 교대 근처?’
-아! 아니에요! 아니. 근처이긴 한데….
‘한데?’
-집 근처라 오시라고 하는 게 아니라, 여기 맛있는 집 있어서…. 그래서 그런 거예요.
‘ㅋㅋㅋㅋㅋㅋㅋ’
-?
‘역시 후배는 놀려야 제 맛이지.’
-….
‘알겠습니다. 1시에 교대역. 콜.’
-네. 그럼 내일 뵐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그리고 오늘 너무 죄송했어요.
‘음. 그러면 오늘 자정까지만 많이 죄송해하세요. 그럼 내일 봅시다.’
-넵. 내일 뵐게요! 안녕히 주무세요. 한수 오빠~
***
뭐 이런 대화가 오고 간 것이다.
그래서 내가 여기 있는 거고.
“어제는 진짜 죄송했어요. 진짜. 진짜.”
“괜찮아. 뭐 일도 잘 해결됐고.”
해결 못 했으면 지연이가, 여기 샤랄라 꽃무늬 원피스를 입은 저 20살 아가씨가 빠루로 사물함을 뜯어 냈으려나?
“정말 어제는 너무 죄송하고, 놀라고 당황하고 그래서.”
“놀랐어? 별것도 아닌데 뭘 놀라고 그래.”
“아니에요. 진짜. 오빠 번호로 문자가 오는데, 정말 순간 머릿속이 새하얘져서. 학생지원처에서 사물함 있는 데까지 울면서 뛰어갔어요.”
“그런 것치고는 너무 침착하던데. 빠루도 들고 오고.”
“죄송하지만 그 이야기는 이제 좀….”
살짝 얼굴이 빨개진다.
“알겠습니다. 그래서 오늘 점심으로 뭘 사 주실 건가요?”
“오빠 몇 시까지 학교에 가야 해요?”
“음. 4시부터 회의하기로 했으니까, 한 5시 정도까지만 가면 될 것 같은데?”
“네? 회의 시작이 4신데, 5시까지 가신다고요?”
“…문명인이 아니야. 그놈들은.”
내 이야기에 지연이가 빵 터졌다.
“아하하하. 너무 귀여워요. 선배님들.”
“막상 당해 봐. 진짜. 처음 당했을 때는… 아오.”
지연이는 마치 눈물이라도 흘릴 것처럼 한참을 웃더니 조금씩 진정해 나갔다.
근데, 웃긴가? 이 이야기가?
“휴우~ 암튼 지금 그럼 시간 여유가 있으시다는 이야기네요.”
“응. 뭐. 아. 근데 프린트할 게 있어서 그 전에 가기는 해야겠네.”
“아… 네….”
“그래. 유지연 씨. 사과의 의미로 뭘 사 주시렵니까?”
“음. 오빠. 뭐 좋아해요?”
“나? 나 아무거나 잘 먹는데, 아무거나 잘 먹는다고 하면 음식을 골라야 하는 상대방은 화나겠지? 그럼 나는 지연이 니가 생각해 놓은 식당 중에서 두 번째 음식을 잘 먹는 거로 하자.”
“네? 그게 무슨 말…?”
“유지연 씨가 절 여기로 부르셨다면 분명 염두에 둔 음식과 식당이 있으시겠지? 그런데 한 곳만 찾아보지는 않으셨겠지. 왜냐하면, 나 그거 못 먹는데. 그러면 난감해지니까. 그래서 유지연 씨는 후보군을 최소 한 개 더 생각해 놓았을 것이라는 합리적인 추측입니다.”
“우와… 한수 오빠 무슨 탐정 같아요.”
훗. 내가 좀 똑똑하지.
“들어 보면 내용은 별거 없는데, 말이 엄청 그럴싸해요.”
쳇. 예리한 자식.
“뭐. 그건 그렇고. 추천 음식부터 들어 볼까? 유지연의 선택은!”
“음. 초밥 어떠세요? 좋아하세요?”
“초밥! 완전 좋지!”
“역시. 초밥 싫어하는 사람은 없네요.”
“승환이 알지? 박승환.”
“승환 선배요? 네. 알아요.”
“그 자식 생선 눈 싫다고 어류는 안 먹거든. 새우버거도 안 먹어. 근데 초밥은 또 처먹어.”
“그래요? 신기하네요.”
“신기한 게 아니라 양아치인 거지. 비싼 건 먹으니까.”
“아하하하.”
또 빵 터졌다.
알 수가 없어. 터지는 타이밍을…….
***
지연이와 나는 커피숍에서 나와 지연이가 미리 정해 놓은 초밥집으로 향했다.
초밥 비쌀 텐데, 용돈 받아 쓰는 대학교 1학년이 사 주고 할 음식은 아닐 텐데 말이지.
하지만 상관없다.
어차피 얻어먹을 생각도 없었으니까.
자고로 선배가 후배에게 얻어먹는 법은 없다. 특히 후배가 1학년이라면.
그렇게 생각하고 마음 편히 왔는데, 생각 외로 깜짝 놀랐다.
1인분 1만 5천 원에, 초밥이 12피스에 생선 질도 좋아 아주 훌륭했다.
호오…. 이 녀석 이런 맛집을 알고 있다니. 집 근처가 맞기는 맞나 보네.
계산하려는 나를 말리면서 결국 자기가 계산까지 다 마치고서 우리는 또다시 커피숍에 자리를 잡았다.
“내가 산다니까.”
“아니에요. 오늘은 제가 죄송한 것도 있고 해서. 그리고 그렇게 비싸지도 않고. 어때요? 그 집?”
“나 완전 깜짝 놀랐어. 그 가격에 그 양에, 그 정도 품질이면 진짜 대박집이야. 대박집.”
“그쵸? 완전 최고죠?”
마치 자기가 칭찬이라도 받은 양 으쓱거리는 게 귀엽다.
중훈이가 왜 스토커가 되었는지 알 것도 같구만.
“응. 다음에 여자친구 생기면 데리고 와야겠다.”
서현 님~ 초밥 먹으러 가요~
“흐음. 뭐 그러시든가요.”
뭐야, 이 반응은.
“그나저나. 너도 이번 축제 때 일하러 올 거야?”
내가 물었다. 어디에서든 자신의 임무를 잊지 않는 나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니까. 후후후.
“네. 근데 1학년들은 무슨 일 해요?”
“허드렛일.”
“네?”
“서빙도 하고, 요리도 하고, 호객도 하고, 정리도 하고, 열심히 요리하는 선배들 술도 가져다주고, 음식도 챙겨다 주고. 암튼 시키는 건 다 하는 거지. 그게 1학년이지!”
“와… 쉽게 말해서 그냥 노동 착취네요.”
“숭고한 자원봉사지.”
“…오빠도 작년에 심부름 했어요?”
“아니. 난 프라이팬 잡았지.”
“그래요? 1학년들은 그런 거 못 하는 거 아니에요?”
1학년은 심부름, 2학년이 운영. 3학년은 잔소리. 4학년은 술 먹고 개꼬장, 선배들은 와서 술 사 주고, 교수님들은 더 많이 사 주는 것이 우리 과 주점의 전통이다.
“그래서? 뭐 하셨는데요?”
“나는 부추전 부쳤지. 진짜 손목 나가는 줄 알았어. 한 백 장 넘게 부쳤을걸?”
“우와. 오빠. 그럼 오빠도 그거 할 줄 알아요? 손목 스냅으로 뒤집는 거?”
거기가 포인트입니다!
“그럼요! 그거 때문에 발탁된 건데.”
“대박. 몰랐어요. 오빠 요리하는 남자네요! 셰프. 한 셰프.”
음하하하하.
이 녀석. 미안하긴 한가 보다. 엄청 비행기 태우네. 그걸 알면서도 기분이 좋기는 좋구만.
이래서 선배가 좋은 거야.
“그럼 전 그냥 막 있다가 시키는 거 하면 되나요?”
“이따가 만나서 나누긴 할 건데, 1학년 대표가 명단 줬거든. 그거 보고, 우리가 이 녀석은 접객, 이 녀석은 요리, 이 녀석은 다른 주점에 스파이로 보내고, 요 녀석은 교수님 담당. 이런 식으로 나누는 거지.”
“저는요?”
“응? 아직 안 나눴는데.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오늘 밥 사 준 기념으로 이 선배가 권력을 한번 남용해 볼까? 이 선배는 큰 그림 그리는 큰일 하는 사람이니까.”
“음… 오빠는 그럼 이번에 뭐 해요? 전체적으로 관리하고 그래요?”
“아니. 아마 또 부추전 할 것 같은데?”
“그래요? 그럼 전 요리!”
“요리 힘든데. 괜찮겠어?”
“저 요리 잘해요.”
“잘하고 못하고는 저어어어언혀 상관없어. 얼마나 힘을 많이 쓸 수 있느냐가 중요한데.”
저 야리야리한 팔 봐라. 저 팔 가지고 반죽이라도 하겠어?
“걱정 마세요. 저 이래 봬도 힘세요. 은근 체력도 좋고.”
“그래? 내 생각엔 아마 접객시키자고 할 것 같기는 한데.”
“접객이요?”
“음… 아무리 생각해도 힘들 것 같다. 내가 너 요리로 보내면 다들 난리를 칠 거야. 아주 그냥. 월권이라고. 내가 요리한다고 맘대로 했다고.”
“권력 남용하신다면서요…….”
“너도 알다시피 권력 남용의 후유증은 상당히 크다니까……. 뭐 알았어. 암튼 한번 해 보지 뭐. 써야 권력이지. 그까이꺼 몇 대 맞고 말지. 뭐.”
“때려요?”
“안 때려요. 말이 그렇다는 거지.”
“다행이다.”
“참나. 아이고, 우리 지연이 이렇게 순진해서야. 이 험한 세상을 어찌 살꼬.”
“아하하. 그러니 앞으로 많은 지도 편달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러면서 고개를 꾸벅 숙인다.
알고 있어. 이 녀석은 자기가 귀여운지 알고 있고, 어떻게 행동하면 더 귀엽고 예쁜지도 알고 있어.
여시 같은 기집애.
서현 님만 없었어도 내가 어떻게 한번 해 보는 건데…가 아니지!
야! 한수! 넌 임마 여자의 얼굴에 혹하는 그런 가벼운 남자가 아니야!
그런 생각을 하지만, 눈앞에서 에헤헤, 하고 웃고 있는 유지연을 보니….
뭐 좀 가벼워도 좋지 않을까?
아니야, 임마! 서현 님을 생각해!
나는 마음을 다잡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