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 Festival is coming (5)
“죄송해요. 오빠. 진짜로 죄송해요.”
긴 머리를 찰랑거리며 달려온 유지연은 나를 보자마자 고개부터 숙였다.
“학생지원처 가서 물어봤는데, 사물함은 외부 업체가 위탁받아 운영하는 거라서, 자기들이 해 줄 수 있는 게 없다면서…….”
얼마나 헐레벌떡 뛰어왔는지, 제대로 숨도 못 쉬면서도 빠르게 말한다.
내가 뭔가 말을 하기도 전에 내 옆에 있던 이중훈이, 유지연을 심하게, 아주우우우우 심하게 짝사랑하고 있는 이중훈이 먼저 말했다.
“왜 뛰어왔어? 힘들게. 괜찮아. 별일 아니야.”
내 사물함인데 니가 왜 괜찮아? 이 자식아.
사물함을 못 쓰게 된 것도, 이 무거운 책을 들고 다녀야 하는 것도 난데!
“괜찮아. 천천히 와도 되는데.”
나도 유지연에게 그렇게 말했다.
뭐 사실 나도 괜찮다.
턱 밑까지 차오른 숨을 겨우 내쉬면서, 정말 미안한 얼굴로 저렇게 나를 바라보고 있는데, 저 눈망울을 보면서 그 말 외에 다른 말을 할 수 있을까?
소녀와 처녀의 여신 아르테미스여! 당신의 어린양이 이리도 힘들어하고 있나이다!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
내 말에 계속 고개를 숙이며 사과하던 그녀는 갑자기 고개 숙인 그 자세 그대로 멈췄다.
어? 서… 설마? 울어? 우는 거야?
울면 안 되는데. 참 별것도 아닌데. 갑자기 울고 그러면, 내 앞에서 그러면 내가 나쁜 놈 같잖아.
“왜 그래? 유지연. 괜찮아. 괜찮으니까. 응?”
나는 책을 승환이에게 넘기고, 그녀에게 다가가 어깨를 감싸고 몸을 일으켰다.
“왜 그래. 아무것도 아닌 일 가지고.”
“오빠!”
그렇게 말하고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커다란 눈망울에는 닭똥 같은 눈물이… 대신, 결연한 의지가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응?
“오빠.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제가 망치 같은 거 가지고 와서 한번 열어 볼게요.”
뭐야? 뭐야, 얘?
생긴 건 미소녀인데, 눈에 담긴 의지는 왜 독립운동가야?
“괜찮아. 어차피 안에 아무것도 없어.”
막아야 한다. 그녀를 막아야 한다.
조국을 위해 희생하려는 너의 마음은 알겠지만, 그러기에 너의 미래는 아직 창창하구나. 그 희생을 뒤로 미루고 더 큰 일을 해 주렴.
“진짜요?”
나를 돌아보는 지연이의 눈.
그리고 이어지는 승환이의 말.
“그럼. 그 안에 별거 없어. 뭐 노트북이라든가, 조별 과제 준비해 놓은 거라든가, 유주원 선생님 수업 자료 같은 그런 쓰잘데기 없는 것밖에 없지.”
승환이의 말에 지연이의 눈빛이 더욱 빛난다. 결연한 의지가 강하게 빛난다.
고맙다, 이 자식아.
“오빠.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제가. 제가 어떻게든 해 볼게요.”
“아니야. 이 자식아! 농담하지 마. 괜히 후배 놀리려고 저러는 거야. 진짜 아무것도 없다니까?”
뭐, 아예 없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조별 과제는 없다.
조별 과제 있었으면 신력으로 열었지.
잠깐만. 열면 되잖아. 그거.
신력으로. 신의 힘으로.
기계라서 안 먹히려나?
괜히 시도해 보고 좌절했다가 이제 종교의 시대는 끝, 과학이 지배하는 세상에 무력한 예비 신 후보자로 전락하면 어쩌지?
서현 님이 그 사실을 알고, 이제 작은어르신은 별 볼 일 없네요, 하면 어떻게 하지?
***
결국, 유지연은 내 앞에다 가방을 놓고, 방법을 찾아보겠다며 뛰어갔다. 미처 말릴 새도 없이.
그런 유지연을 스토커처럼 짝사랑하고 있는 이중훈은 유지연을 도와주겠다며 따라갔고, 박승환이도 재미있는 광경을 볼 수 있을 것 같다며 그 둘을 따라갔다.
세 사람 다 가방을 내 앞에 두고.
나는 엉겁결에 가방 지킴이가 되어 버렸다.
“이 자식들이…….”
에휴… 뭐 어쩔 수 없지.
그나저나 애들 다 사라졌으니, 한번 시도해 볼까?
주변에 사람 있나 없나 좀 보고.
괜찮군. 빠르게 한번 해 보자.
일단 키오스크에 가서, 신력으로 비밀번호를 원래대로 돌려놓은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 비밀번호만 눌러 보는 것뿐이니까. 뭐 이상해 보이지는 않겠지.
나는 키오스크로 다가가 화면을 주시했다.
우선 사물함 열림 버튼 누르고, 그다음 내 사물함 번호 112번 누르고.
(비밀번호 원래대로 돌아가라.)
그렇게 속으로 말하고. 비밀번호 네 자리 눌렀다.
그리고 숨 한번 깊게 들이 쉰 다음! 확인 버튼!
철컥!
열렸다!
확인 버튼을 누르자, 키오스크 오른쪽 4m 정도 떨어져 있던 내 사물함이 철컥 소리를 내며 열렸다.
음하하하하하하.
훗. 과학 따위.
이 세상을 이루는 근본원리를 밝혀내겠다는 과학의 도전은 위대한 신의 이름 앞에서 좌절될지니.
어디 0과 1로 이루어진 기계 따위가. 이 위대한 예비 신 후보자님 앞에서 되도 않는 암호로 그 몸을 지켜 내겠다는 것이냐!
무엄하다! 불경하고, 또한 무엄하다!
인간의 과학 기술 따위.
음하하하하하하.
이거 참 기분 좋구만.
나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무거운 전공 서적을 사물함에 집어넣었다.
쓸데없이 시간을 좀 허비하기는 했지만, 결과적으로 나의 위대함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나는 큰일을 하는 사람이다.
나 스스로 나에 대해 다시 한번 놀라고 있을 때, 저 멀리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다.
“한수오빠~ 이거 구해 왔어요~”
그러면서 뛰어오는 유지연, 사람들이 학내에서 가장 예쁜 1학년이라고 말하는 그녀의 양손에 들려 있는 물건을 보고 나는 기절할 뻔했다.
표준어로 쇠 지렛대, 영어로 크로바(Crow Bar).
그리고 대한민국 사람들의 90% 이상이 ‘빠루’라고 부르는 쇠몽둥이를 들고 그녀가 뛰어오고 있었다.
하프라이프의 고든 프리맨처럼 나에게 달려오고 있었다.
***
브르르르르. 브르르르르르
유지연과 이중훈과 박승환과 사물함 사이에 벌어진 작은 해프닝을 마무리하고, 다시 한번 죄송하다며 고개를 꾸벅 숙이는 유지연에게 괜찮다고 말하고 학교를 나왔다.
오늘 알바하러 가는 날이니까.
알바하러 가면서 조금 전 나에게 거듭 미안하다고 고개를 숙이던 유지연의 모습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니, 그 녀석이랑 이렇게 길게 이야기한 건 처음이네. 항상 지나다니면서 인사만 했지.
짜식. 얼굴도 예쁜 녀석이 하는 행동도 아주 예쁘네.
만약에, 다른 여자애들처럼 어떻게 해요, 그러면서 눈물 짰으면 좀 실망했을는지도 모른다.
뭐 유지연처럼 예쁜 여자가 눈물을 보이면, 대부분의 수컷들은 아마도 그 눈물을 멈추게 하기 위해서 할 수 있는 모든 짓을 다 하겠지.
특히, 이중훈 그 자식은 유지연이 울지 않아도, 그저 슬픈 눈으로 ‘오빠. 저 보증 좀 서 주세요.’ 그러면 두말없이 집에 가서 인감도장을 훔쳐 오고도 남을 놈이다.
아무튼, 하지만 유지연은 어떻게 하면서 발만 동동 구르고 있지는 않았다.
발만 동동 구르기는커녕, 망치를 찾아서 때려 본다느니, 그런 이야기를 하더니 어딘가에서 빠루까지 찾아 들고 왔다.
뭐랄까. 그 모습이… 마음에 든다. 예쁘고 귀엽다는 것보다 뭔가, 매력이 있다? 사람으로서의 매력이 있다? 그런 느낌이었다.
아무튼, 유지연. 다시 봤어. 괜찮은 녀석이군.
짜식. 얼굴도 예쁜 게 말이야.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학교를 걸어 내려가다 문득 의문 하나가 떠올랐다.
근데, 그 녀석은 내 전화번호 어떻게 안 거지?
분명 내가 문자를 보냈을 때, 유지연이 바로 나라는 것을 알아차렸잖아?
‘한수 오빠가 그 사물함 주인이세요?’ 그렇게 말했지?
어떻게 내 번호를 알았지? 아니, 뭐, 아는 거야 그렇다고 쳐도, 저장을 해 놨다? 내 번호를?
이해할 수가 없네.
거기까지 생각했는데, 마침 타이밍 좋게, 내 주머니에서 전화기가 브르르르르 하면서 진동을 한다.
헉. 설마 유지연인가? 미안해요. 제가 밥 살게요. 그런 이야기를 하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며 전화기를 꺼내 드니 화면에 ‘할아버지’라는 이름이 떠 있다.
싸늘하다. 불길한 예감이 등골을 타고 흐른다. 뭔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갑자기 오한이 인다.
나는 통화버튼을 누르기 전에 내가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재빨리 떠올려 봤다.
딱히 생각나는 것이 없다. 아니, 혹시? 조금 전 그 일 때문에?
나는 숨을 깊게 한번 들이쉬고,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할. 할아버님. 어. 어쩐 일이시옵나이까?”
나도 모르게 극존칭이 나온다.
어쩔 수가 없다. 목숨이 걸려 있다고 내 본능이 경고하고 있다.
내 말에 전화기 너머에서 ‘흠.’ 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아… 저거 안 좋은 징존데.
-할 말은?
할아버지가 말한다.
비상! 비상! 다들 비상! 경보를 울려라!
나는 신경계에 경보를 울렸다.
왜냐고?
할아버지의 말투 때문이다.
만약 할아버지가 ‘할 말이 있느냐?’처럼 사극 톤으로 말했다면 이렇게까지 경보를 내릴 필요가 없다. 할아버지가 사극 톤을 사용한다는 것은 위험한 상황은 아니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지금처럼 100% 구어체를 사용한다면?
경험적으로 봤을 때, 보통 사커킥 콤비네이션이 따라왔다.
“어? 네? 저…….”
-없느냐?
엇? 갑자기 사극 톤? 뭐지? 분위기를 못 읽겠네?
“아. 저. 그.”
-말해라.
“그. 저. 능력을….”
-썼느냐?
“네….”
나는 조금 전 능력을 사용해 사물함을 열었다고 이실직고 했다.
물론 그냥 죽을 수는 없고, 당연히 내가 능력을 사용하지 않으면 후배가 아주 곤란한 상황에 처할 수밖에 없었고, 나는 원하지 않았음에도 후배를 위해 어쩔 수 없이 능력을 쓸 수밖에 없었다는 말도 빼놓지 않았다.
-그러하냐?
할아버지의 반응이었다.
어? 이상하다? 갑자기 왜? 저렇게 별것 아니라는 반응이시지?
화 안 나신 건가? 괜찮은 건가?
아니. 방심하면 안 된다. 할아버지는 5월의 하늘, 고양이의 눈, 처녀의 마음과 같은 존재다. 언제 어디서 어떻게 변할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으니까.
“할… 할아버님.”
-말하거라.
“화… 화나신 거 아니시온가요?”
-말을 왜 그리 이상하게 하느냐.
“그… 능력. 함부로 써서….”
-그 이야기는 만나서 하자꾸나.
아…… 지금 죽이는 게 아니라 만나서 죽이시겠다?
“지금 당장 내려가겠사옵나이다!”
내 경험상 빨리 맞는 게 덜 맞는다. 괜히 좀 화 좀 수그러들고 맞겠다고 버팅기다 맞으면 더 많이, 더 아프게 맞는다.
-됐다. 조만간 내가 올라갈 터이니, 그때 이야기하자꾸나.
올라와서 죽이시겠다는 말씀이시군요….
“…네.”
-그건 그렇고. 이사는 했느냐?
“네? 네. 안 그래도. 강 회장님이….”
-그래. 민철이가 지난번 내려와서 얼마나 간청을 하던지. 일단 허락은 했다만.
민철이. 중앙그룹 강 회장님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을 들으니 기분이 묘하다. 민철이. 누가 그렇게 부를 수 있을까?
아니지.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다.
허락은 했다만. 했다만? 이런 단어는 무섭다. 원래 역접 접속어는 뒤에 무서운 내용을 품고 있다.
-설마 분에 넘치는 요구를 하거나 한 것은 아니겠지?
“처… 천부당만부당하신 말씀이시옵니다. 어찌 감히 소신이… 아니, 소손이….”
-민철이 손녀도 같이 지내는 것이냐?
알고 계시는군요.
“그. 그렇사옵나이다.”
-설마 음심을 품거나 하지는 않았겠지?
할아버지가 말한다.
“천부당만부당한 말씀이십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나는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솔직히 말해서 음심을 안 품었다고 자신 있게 말 못 하겠다.
이건 진짜 억울한 게, 서현 님처럼 미인이랑 같은 지붕 아래 살면, 아니, 같은 지붕 아래 살지 않아도, 마주 보고 이야기하면 그 뭐랄까….
솔직히 나도 남자고, 혈기 왕성한 20대 초반이고! 미니미는 그 뭐냐. 부교감신경이니까. 내가 마음대로 통제할 수도 없고….
하지만 이건 내가 돌아가신 아버지를 걸고 맹세하건대!
절대로 사회상규상에 어긋나는 음험한 마음을 품어 본 적은 없다. 19금일지언정, AV는 아니다!
-내가 따로 이야기를 안 해도 되겠느냐?
“할아버님이 가르침은 각골명심하고 있삽나이다.”
-오늘 따라 이상한 말투를 쓰는구나. 어찌 되었건 알았다.
그 말을 끝으로 전화가 끊어졌다.
나는 끊어진 전화기를 바라보았다.
아무튼 마지막 말로 봤을 때, 지금 당장 죽이겠다는 말씀은 아닌 것 같은데, 그런데 이 척추를 타고 흐르는 불안감은 뭐지?
아무튼, 조만간 올라오신다고 하니, 지금 당장은 아닌갑다.
며칠 더 살 수 있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