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 Festival is coming (2)
각서.
유지연 반경 5m 이내로 다가가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서야 나는 마크 채프먼들에게서 풀려날 수 있었다.
특히, 이중훈 그 자식. 유지연이라면 이성을 그냥 내던져 버린다.
아니. 그럴 거면 고백을 하든가. 무슨 쌍팔년도 순정남도 아니고, 고백도 못 하면서 말야.
아니. 이중훈은 그렇다고 치자. 뭐, 짝사랑하는 게 죄는 아니니까.
하지만 다른 놈들은 왜 난리야? 그 자식들도 말은 안 했지만, 내심 유지연을 마음에 품고 있었던 거 아냐?
자기들도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하는 건가?
웃기는 놈들. 꿈 깨라! 이 자식들아!
아니, 그리고 김창회. 그 자식은 여자가 ‘오빠. 라면 먹고 갈래요?’ 하면, ‘아니. 난 탄수화물은 보충제로만 섭취해.’ 그렇게 말할 놈이잖아.
머리에 든 게 운동하고, 근육 키우는 것 밖에 없는 놈인데, 그놈은 또 왜 난리야.
아무튼, 흉신악살 같은 놈들. 아주 여자라면 나라도 팔아먹을 놈들 같으니.
나는 그렇게 투덜거리면서 셔틀버스를 타기 위해 도서관 쪽으로 걸어갔다.
뭐 그놈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유지연이 엮일 가능성은 거의 제로라고 봐도 무방하다.
유지연이 예쁜 걸로 하도 유명하고, 또 유명한 만큼 예쁘니까 나도 얼굴을 기억하는 거지, 다른 후배들 같았으면 알지도 못했을 거다.
동기 놈들과 같이 있을 때, 지나가다 한두 번 지나치면서 인사나 했지, 개인적으로 대화를 나눠 본 적도 없다.
실제로, 올해 입학한 신입생 중에서 얼굴을 아는 녀석은 유지연을 빼면 두어 명 정도밖에 안 되고, 이야기를 나눠 본 녀석은 같은 하숙집에서 살았던 녀석 한 명뿐이다.
거기까지 생각했는데, 마침 도서관 쪽에서 그 녀석이 보인다.
정확히는 그 녀석을 포함해 네다섯 명의 무리가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오고 있다.
“어? 한수 형!”
나를 발견한 그 녀석이 손을 흔든다.
흠. 저 자식도 갑자기 사채업자 어쩌구 하는 것은 아니겠지?
“형. 도서관 가세요?”
후배가 물어본다.
“아니. 행정관. 셔틀버스 타러.”
내가 말했다.
“사람 많던데요? 적어도 세 대는 기다려야 할 것 같은데….”
후배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그렇게 말한다.
그렇게 많다고?
흠… 10분에 한 대씩 오는 셔틀버스라고 해도 그럼 30분은 넘게 기다려야 한다는 말이잖아.
그냥 정문으로 내려가서 파란 버스 탈까?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일행 중 누군가가 고개를 빼꼼 내민다.
유지연이었다.
아마도 일행에서 한 발자국 떨어져 누구와 이야기를 하면서 내려오느라 사람들에게 가려졌나 보다.
참. 예쁘긴 예쁘네. 인간적으로 저렇게 예쁘면 반칙이지.
“그럼. 형. 다음에 뵐게요. 저희 밥 먹으러 가려고요.”
유지연의 얼굴을 바라보는 나에게 후배 놈이 말한다.
“어. 그래. 맛있는 거 먹어라.”
다들 우리 과 1학년들이었나 보다. 나에게 말을 걸었던 후배를 비롯해 다른 친구들도 나에게 고개를 살짝 숙이고는 내 옆을 지나쳐 간다.
그리고 유지연도 웃으며 나에게 고개를 숙인다.
다른 여자애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끝까지 나와 눈을 마주쳤다는 것이다.
그 녀석. 눈동자도 겁나 예쁘네.
어떤 놈일지 모르겠지만, 유지연 데려가는 자식은 오래 살 거야.
욕을 조올라게 처먹을 테니까.
***
나는 현관에 서 있다.
현관에 서서 문을 바라보고 있었다.
문이 열리고, 서현 님이 모습을 보이신다.
문 앞에 서서 기다리는 나를 보고 잠깐 놀란 듯한 서현 님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피어오른다.
그리고 나에게 말한다.
“다녀왔습니다.”
그녀가 들어온다.
나는 여신을 맞이하는 한 명의 신도로서 현관 앞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린다.
그러면 서현 님께서는 그런 나를 보고, 구두를 벗고, 천천히 나에게 발을 내민다. 그러면 나는 두 손으로 스타킹 신은 서현 님의 발을 조심스럽게…….
그만하자.
“다녀오셨어요?”
나도 미소로 그녀를 반긴다.
오늘 아침에 출근하는 걸 못 봤는데, 오늘 착장은 하얀색 블라우스에 감색의 슬릿 스커트군요.
도대체 어디까지 아름다워지시려 하십니까?
“일찍 오셨네요. 저녁 식사 하셨어요?”
서현 님이 구두를 벗으며 내게 묻는다.
“아직이요. 서현 님은요?”
그녀의 동작이 멈춘다.
내가 재빨리 정정했다
“서현 ‘씨’는요?”
그녀가 미소를 띠면서 다시 움직인다.
“저도요.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금방 준비할게요.”
서현 님이 말한다.
“아니요. 오늘은 제가 준비할게요. 아니, 사실 준비는 다 끝났어요. 옷 갈아입고 나오세요.”
내 말에 서현 님이 놀란 표정을 한다.
“한수 씨가 준비하셨다고요?”
“네. 오늘 제가 요리를 해야 할 이유가 있어서요.”
내 말에 서현 님이 알 수 없다는 표정을 짓다가 이내 다시 미소를 보인다.
“알겠어요. 그럼 빨리 씻고 나올게요. 20분, 아니, 10분만 기다려 주세요.”
서현 님이 그렇게 말한다.
“아니요. 그렇게 서두르실 것 없어요. 천천히 나오셔도 돼요. 집이니까 편하게.”
내 말에 서현 님이 다시 웃는다.
“네. 집이니까 편하게. 그럼 30분 정도 괜찮을까요?”
30분이요? 서현 님이라면 30년도 기다리죠!
“넵. 30분! 알겠습니다.”
내 시원스러운 대답에 서현 님이 다시 미소를 지으신 후 자신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 뒷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쩐지 주부(主夫:가사를 전담하는 남편)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왜 무라카미 하루키가 2년 동안 전업주부 했다고 했잖아? 그 생활 좋았다고. 가끔 와이프가 회사 일 때문에 늦으면 속상하기는 했지만 그래도 나쁘지 않았다고.
그 마음 알 것 같다.
자. 아무튼 준비를 해 볼까? 우후후.
***
30분 만에 씻고 화장 지우고, 편한 옷으로 갈아입고 나온 서현 님이 식탁 쪽으로 다가온다.
아니, 솔직히 이건 반칙이지. 다른 사람들은 화장 지우면 못생겨진다면서요? 그런데 왜 서현 님은 화장을 지워도 여전히 예쁘십니까? 아니, 더욱 아름다우십니까?
서현 님의 그 아름다운 얼굴에 기대감이 떠올라 있다.
“나오셨어요? 일단 앉으세요.”
30분에 맞춰 음식을 준비하던 나는 서현 님의 등장에 마무리 작업을 시작한다.
하지만 서현 님은 식탁에 앉지 않고, 나에게로 다가와 등 뒤에서 내가 열심히 볶고 있는 음식을 바라본다.
“제육볶음이네요.”
그렇다. 오늘 내가 준비한 메뉴는 제육볶음.
어디 눈에 보이는 아무 식당에나 들어가서 ‘사장님! 제육볶음 하나 주세요!’ 하면 몇 분 후에 식탁 위에 턱 하니 올라갈 일반적인 제육볶음이다.
“드시죠? 제육볶음?”
내가 열심히 냄비를 휘저으며 물었다.
“한수 씨는 저를 어떻게 생각하시는 거예요?”
서현 님이 살짝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본다.
당연히 여신으로 생각하고 있죠. 여신께 바치는 공양물로 제육볶음을 내어놓은 이 죄인이 두려워서 그렇습니다.
“좋아해요. 술안주로도.”
서현 님은 그렇게 말하며, 다시 슬쩍 제육이 담긴 냄비를 바라본다.
“맛 한번 보실래요?”
내가 그렇게 말하자 서현 님의 얼굴에 미소가 피어오른다.
“네.”
나는 새 젓가락을 가져와 조심스럽게 한 점을 집었다. 그나저나 이걸 어떻게 드리지?
그런 내 걱정이 무색하게, 서현 님은 내가 들고 있는 제육 한 점을 입으로 받아먹는다.
그리고 그 예쁜 입으로 오물오물.
여신이시여. 이 하찮은 존재가 바치는 공양물이 어떠하시나이까?
“맛있어요!”
서현 님이 살짝 놀라는 표정으로 말한다.
이거구나.
이 맛에 요리하는 것이구나!
***
“축제요?”
식탁을 마주보고 앉아 있는 서현 님이 내가 만든 제육볶음을 젓가락으로 집으며 말하신다.
“네. 다음 주 목금 이틀간 학교에서 축제가 열리는데, 우리 학년이 주점 기획 담당이라서요.”
“제육볶음이 안주인가 보네요.”
“네. 만들기 쉽고, 재료값 많이 안 들고, 호불호 없고, 최고의 안주죠.”
오늘 제육볶음을 만든 이유가 바로 축제 준비 때문이었다. 작년에 선배에게 배운 레시피를 실현해 보는 것.
오늘 만들어 보니 나쁘지 않군. 나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아주 괜찮다. 이 정도면 올해도 걱정하지 않아도 되겠군. 후후후.
“한수 씨는 요리에 재능이 있으신가 봐요.”
서현 님이 날 바라보며 말한다.
사랑이 담겨 있어서 그렇습니다.
“다음엔 다른 것도 만들어 드릴게요.”
“그럼 한수 씨는 축제 때 제육볶음을 담당하시는 건가요?”
“아직 정해진 것은 아닌데, 아마 부추전을 하지 않을까 싶은데요? 작년에도 부추전 담당이었거든요.”
1학년은 프라이팬을 잡지 않는다. 잡일을 담당하는 것이 1학년의 임무다.
하지만 나는 작년에 1학년 중 유일하게 프라이팬을 잡았지. 후후후.
“부추전이요? 그런 것도 할 줄 아세요?”
“에이. 그게 뭐 어렵나요? 그냥 반죽해서 프라이팬에 지지면 되는데.”
“와…… 그래도 대단하긴 대단하죠. 그럼 한수 씨 그것도 할 수 있어요? 그 뒤집개 없이 손목만으로 전 뒤집는 거.”
기다렸습니다. 바로 그 부분이 포인트입니다.
“작년에 그거 때문에 부추전 담당하게 된 거예요. 저 그거 진짜 잘하거든요.”
기억난다.
나는 열심히 부추전을 부치고, 지수는, 아직 여자친구가 아니고 썸이었던 시절, 내가 열심히 전을 부치면, 그녀가 접시를 들고 와 다른 사람들은 모르게 나에게 웃어 주고 부추전을 받아 갔지.
가끔씩 와서 반죽도 저어 주고, 선배들 몰래 술도 한 잔씩 가져다주고…….
그랬더랬지.
옛날 생각을 하니 좀 우울해질라 하다가 눈앞에 서현 님을 보니 하나도 우울하지 않네.
“보고 싶어요. 신기하네요. 전 한번 시도해 봤다가 실패한 뒤로 무서워서 못 하는데.”
“작년에 뒤집은 부추전만 백 장이 넘을 거예요. 다음에 가르쳐 드릴게요.”
프라이팬을 잡고 있는 그녀, 그리고 그 뒤에 찰싹 달라붙어서 양손으로 백허그 하듯 그녀를 안고 있는 나.
자기야 무서워.
하하하. 걱정 마. 이 오빠만 믿으면 아무 걱정 없어.
그리고 그녀의 손을 잡는 나의 손. 부드럽게 움직이는 프라이팬, 그리고 나를 돌아보는 그녀의 그윽한 눈, 작은 입술……. 입술…….
영화의 한 장면이 떠오른다. 마주친 눈, 그리고 치워지는 음식…….
그만!
밥 먹고 뒷정리해야 한단 말이다! 일어서야 한단 말이다! 미니미가 뿔룩 서 있으면 안 된단 말이다!
밥 다 먹기 전까지 가라앉았으면 좋겠는데…….
“근데, 그 축제 주점, 저도 갈 수 있어요?”
“그럼요! 학교 다닐 때 축제 참가 안 해 보셨어요?”
“저는 학교를 미국에서 다녀서…….”
아…… 어쩐지. 그래서 기품과 품위가 이 세상의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졌구나…는 좀 오버고.
아무튼 서현 님에 대해서 하나 더 알았다.
이렇게 하나씩 하나씩 알아 가다 보면 전부 다 알게 되겠지. 예를 들어 속옷 사이즈라든가.
아니야. 그런 거 아니야. 선물. 선물하려면 알아야 하잖아!
“그러셨구나. 대학 축제는 꼭 재학생뿐만 아니라 다른 학교 학생도, 또 지역 주민들도 많이 와서 놀아요. 오셔도 괜찮아요.”
“가도 되나요?”
“네. 오셔도 돼요. 아니, 꼭 와 주세요.”
내가 말했다.
그러자, 그녀는 다시 온 세상을 가득 미소로 채우면서 말한다.
“네. 꼭 갈게요. 기대돼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