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 Festival is coming (1)
오랜만에 인문관 올라가는 도롯가 벤치가 아니라 과방에 앉아 있었다.
다음 주 열리는 학교 축제 때문이다.
우리 과는 매년 축제 기간에 주점을 연다. 그리고 그 주점을 기획하고, 운영하는 담당을 2학년이 맡는 것이 전통이었다. 그 말은 올해 우리 학번이 기획 및 준비를 담당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아싸 짓을 하는 내가 왜 여기 있냐고?
믿지 못하겠지만 내가 2학년 과대표다. 즉 내가 주점 준비를 총괄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물론 내가 과대표를 하겠다고 자청한 것은 아니다.
학기 초, 신지수에게 까이고 겁나게 찌질 거리고 있는 내가 과대표를 하면 재미있을 것 같다고 내가 없는 자리에서 망할 동기 놈들이 나를 과대표로 뽑아 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내가 회의 날짜를 잡고, 빠지지 말고 오라고 지랄을 하고, 의견을 내어놓으라고 압박을 해야 했다.
메이드 주점을 하자느니, 카지노 주점을 하자느니, 경매장을 열자느니 개소리들이 터져 나왔지만. 우리는 안다. 이미 알고 있다. 선배도 알고, 나도 알고, 동기들도 알고 모두 다 알고 있다.
이 주점은 당연히 파전과 부추전, 제육볶음이 기본이 되고, 한쪽에서 오뎅이나 끓이는, 예전과 다를 바 없을 것이라는 걸.
사실 그냥 주점을 할 거면 기획 회의 같은 걸 할 필요도 없었다. 그냥 인원 분담하고, 당일날 요리하고 그러면 끝이다.
하지만 매번 똑같은 주점의 행태가 지겹다며, 올해는 다른 콘셉트로 준비를 해 보라는 선배들의 이야기가 있었다.
뭐 여기가 군대도 아니고, 선배들이 그렇게 말했다고 꼭 따라야 하는 것은 아니다.
그래도 뭔가 하는 척이라도 보여 주자는 생각에 회의를 가장한 노가리를 까고 있는 것이다.
“그나저나 한수 저 자식. 요즘 좀 이상해.”
동기 중 한 놈, 이중훈이 갑자기 이상한 말을 꺼냈다.
이중훈, 소위 말하는 강남 8학군에서 고등학교를 나온 있는 집 자식. 얼마 전에 알게 되었는데. 아버지가 강남에서 유명한 교정 전문 치과 원장님이시고, 어머니도 다른 학교 음대 교수 하신다고 하더만. 첼로를 전공하는 누나는 오스트리아인지, 오스트레일리안지로 유학 갔고. 아마도 오스트리아겠지? 어학연수도 아니고, 설마 첼로 전공인데 호주로 유학을 갔겠어?
아무튼, 나와는 사는 세계가 다른 있는 집 자식이다.
뭐, 그렇다고 해도 재수 없는 놈은 아니다. 지 잘산다고 잘난 척하지도 않고, 돈 자랑하지도 않고. 사실 나도 얼마 전까지, 저 자식이 그렇게 부잣집 아들인지 몰랐으니까.
사실 요즘 심한 짝사랑을 하고 있는 중이라 좀 찌질 모드에 들어가 있다.
“뭔 소리야?”
내가 그 녀석을 바라보며 말했다.
“너 요즘 뭔 일 있냐? 좋은 일 있냐?”
부잣집 아들처럼 안 생긴 부잣집 아들 이중훈이 내게 말한다.
“그게 뭔 소리야. 갑자기.”
이중훈이 마치 동의를 구하듯 동기들을 바라보며 말한다.
“니들은 그런 거 못 느꼈냐? 한수 저 자식, 요즘 갑자기 실실 웃고, 박승환이 헛소리해도 그냥 넘어가고.”
“헛소리? 내가 하는 말이 헛소리라고?”
박승환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발끈했다.
“응.”
이중훈이 당연한 것을 묻는다는 듯 즉답했고, 다른 동기 녀석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나도.
그러자 승환이도 인정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네가 끄덕이면 안 되지, 임마!
“아무튼, 한수 이 자식. 뭔가…… 좀…… 여유가 있달까? 뭐 말하는 거나, 풍기는 분위기나?”
이중훈이 다시 나를 보면서 말한다.
“그러고 보니 그러네? 이 자식 지수에게 차이고 졸래 찌질하게 굴었던 게 얼마 전인데.”
찌질하단 이야기 하지 마.
“찌질했지. 그때.”
하지 마!
“뭐. 찌질할 만했지.”
“하지 마, 이 자식들아!”
내가 소리를 지르기 전에 승환이가 먼저 버럭 했다.
“이 자식들아. 아직 진행형이라고! 마치 끝난 것처럼 이야기 하지 마! 얼마 전에도 이 자식 지수 만나서…….”
나는 일어나는 자세 그대로 몸을 돌려 승환이 옆구리에 왼발을 꽂아 넣었다.
내 발에 맞은 승환이는 온몸을 내던지며 날아가 과방 바닥에 쓰러졌다.
“닥쳐.”
나는 모두를 돌아보며 말했다.
“으…… 으…….”
승환이의 신음 소리만이 과방 안에 흐를 뿐이었다.
그렇게 나는 상황을 정리하고 다시 자리에 앉았다.
“앉아.”
내가 조용히 읊조렸다.
승환이는 옆구리를 부여잡고 기어와 자신의 원래 자리에 앉았다.
“다시 시작하자.”
역시 나는 할아버지 핏줄. 확실하다.
***
조금 회의가 진행되려던 찰나, 또 한 녀석이 또 축제와 상관없는 말을 했다.
“그나저나 나 저번에 진철이 형 봤는데.”
진철이 형.
3학번 위 선배, 작년까지 같은 고시원에서 지냈던 형, 얼마 전 나에게 캔 커피를 건네며, 고3 때 중국집에 들어가 배달을 시켜 달라며 울었다는 이야기를 전해 준 형, 그리고 나에게 꼬깃꼬깃하고, 온기 가득한 식권을 건네준 형.
“그 형이 왜?”
“저번에 학교 올라오는데, 유 선생님이랑 엄청 진지한 표정으로 이야기하고 있더라고.”
“담당 교수님인가 보지.”
“뭐 별거 아닐 수도 있는데, 둘이 분위기가 엄청 심각해서, 눈에 확 들어오더라고.”
평소라면 뭐 중요한 것도 아닌데, 하고 말 텐데, 진철이 형이 마음 써 준 것도 그렇고, 예전 이야기를 들었더니 마냥 남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는 않는다.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그런 나와는 다르게, 아직 진철이 형에 대해서 잘 알지 못하는 다른 녀석들은 그냥 가벼운 얘깃거리로 삼았다.
“난 그 형 좀… 뭐랄까. 거리감 느껴진 달까?”
“맞아. 진철이 형이 좀. 말도 없고, 너무 진중하고. 그렇지?”
“그 형 동기들과도 그렇게 막 엄청 친하고 그렇지는 않나 봐.”
“아무래도 고시 준비하니까 날카로워서 그런 거 아닐까?”
“뭐 상관없겠지. 우리에게 피해 주는 형도 아니고.”
“그렇다고 도움 주는 형도 아니고 말이야.”
아마 예전이었다면, 나는 그냥 적당히 듣고 넘어갔을 것이다.
그런데, 어쩐지 오늘은 신경이 쓰인다.
진철이 형이 마음을 보여 주었기 때문인가?
생각보다 괜찮은 사람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뭐, 나중에 분위기 봐서 한번 물어보지.
***
진철이 형에 관한 짧은 이야기가 끝나고, 회의를 가장한 노가리가 잠시 계속되는가 싶더니 다시 흐름이 끊겼다.
범인은 과방 한 쪽에서 24kg 무게의 캐틀벨을 들고 열심히 손목운동을 하던 김창회 놈이었다.
김창회, 키 192cm, 몸무게 124kg, 3대 600을 친다는 근육 괴물.
난 저 자식의 여자 허리통만 한 허벅지를 볼 때마다, 저 자식이 우리 학교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이해할 수가 없다.
우리 과가 체육특기자를 뽑는 체대도 아니고, 저 몸을 만들면서 공부까지 해서, 그래도 우리나라 최고 대학이라는 한국대에 들어왔다고?
아무튼 그 자식이 나를 보며 말한다.
“확실히 뭔가 다르긴 한데….”
“평소와 똑같구만. 뭐가 다른데? 엉?”
내가 말했다.
“아니야. 확실히 좀 바뀌었다니까. 확실히 중훈이 말처럼 여유 있는 것도 그렇지만, 뭔가 자신감이 붙었다고 할까? 말이나 행동이나?”
그 말에 동기 놈들이 승환이를 바라본다.
승환이는 여전히 옆구리를 부여잡고 신음 소리를 내면서 괴로워하고 있다.
“여유로워졌나? 아무튼, 확실히 좀 분위기가 좋아졌어. 나빠진 건 아니야.”
이중훈이 재빨리 옆에서 한마디 보탠다.
“그건 나도 동의. 확실히 뭔가 변했어. 나쁜 쪽은 아닌 것 같은데…….”
“여자의 냄새가 나는 것 같기도 하고…….”
“혹시 너 여자 생겼냐?”
동기 놈들이 한마디씩 말을 한다.
감 좋은 자식들. 여자도 그냥 여자가 아니라 서현 님이다! 서! 현! 님!
니들은 감히 쳐다보지도 못할 그런 고귀한 분!
물론, 내 여자는 아니지만….
“아니야. 여자는 무슨.”
나는 한 손을 들어 부정을 표시했다.
“어? 뭐야. 저 재수 없는 표정과 제스처는?”
“저 자식 지금 얼굴 붉어지는 것 같은데?”
“뭐야? 뭐야? 뭐 있는 거야?”
“누구야? 현주? 수빈이? 아니면, 1학년 애들 중에서? 그 뭐야. 지애? 보영이? 명은이? 민혜? 아니면 지연이?”
“지연이는 안 되지!”
부잣집 아들 이중훈이 책상을 크게 내리치며 벌떡 일어난다.
나는 그런 이중훈을 한심하다는 눈으로 봐 준다.
으이구, 찌질한 자식.
유지연. 우리 과, 아니 우리 학교를 통틀어 미인을 뽑으라면 세 손가락 안에는 들어갈 우리 과 1학년.
캠퍼스를 돌아다니면서 다른 과 남학생은 물론, 이쁘고 잘생긴 제2의 명문대 출신 미녀를 찾아 캠퍼스를 어슬렁거리는 연예기획사 관계자들도 모두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는 전설의 그녀.
그래서 별명이 3보 1저, 세 발 걸으면 ‘저기요.’ 하면서 누군가 말을 건다는 전설의 유지연.
이중훈의 짝사랑 상대가 바로 그 유지연이다.
“에이. 설마. 그 지연이가 한수를? 에이. 말도 안 되지.”
다른 동기 놈이 날 보며 그렇게 말한다.
“내가 어때서!”
내가 그 자식을 노려보며 말한다.
“진짜냐!”
이중훈이 나에게 이글이글 불타는 시선을 고정한 채로 말한다.
저 눈 봐라. 저거. 저거 선배의 눈이 아니야. 짝사랑하는 남자의 눈도 아니야.
스토커의 눈이다.
존 레논을 살해한 마크 채프먼의 눈이다.
“아니야, 임마! 제대로 이야기해 본 적도 없어! 이 자식아!”
“하긴. 지연이가 미쳤냐? 잘생겼다는 놈들 한 번씩 다 껄떡거렸는데, 그 공격을 모두 다 막아 낸 유지연이 미쳤다고 한수를.”
다른 동기 녀석이 한 수 보탠다.
마크 채프먼, 아니지, 이중훈의 눈에 안도의 빛이 떠오른다.
“야. 쓸데없는 소리 그만 하고, 빨리 이거 마무리 해. 나 오늘 집에 일찍 가야 한단 말이야.”
오늘 서현 님이랑 저녁 먹을 거야. 저녁 먹고, 산책 가자고 할 거란 말이다!
다들 다시 고개를 끄덕이며 회의 모드로 들어가려 하는데, 갑자기 이름 하나가 들려왔다.
“신지수.”
박승환이었다.
아직도 옆구리에 손을 가져다 대고 있는 박승환이 내 전 여자친구의 이름을 읊조렸다.
그리고 그 소리는 마치 호수 표면의 파문처럼 과방 안에 파장을 만들며 퍼져 나갔다.
신지수는 오늘 이 자리에 없다. 당연하지. 그녀가 있는 곳에 내가 가지 않듯, 신지수도 내가 주재하는 이 회의에 오지 않는다. 축제도 마찬가지겠지.
그런 신지수의 이름을 박승환이 꺼낸 것이다.
불길하다.
불길한 예감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신지수가 뭐?”
이중훈이 박승환에게 물었다.
“신지수. 작년 이맘때, 한수 저 자식이 신지수랑 사귈 거라고 예상했던 사람 있으면 손들어 봐.”
박승환을 향했던 시선이 모두 나에게 돌아왔다.
적의를 가득 담아서.
이 자식들아! 나 까였다고!
“모두가 예상하지 않았을 때, 저 간악하고 음험한 한수는 몰래 손을 써서 우리의 여신이었던 신지수를 더럽혔다.”
더럽히진 않았어!
“맞다. 생각났어. 그때 우리가 다 모여서 지수 이야기할 때, 저 자식이 그랬지. 자기는 여자 얼굴에 반하는 스타일이 아니라고. 그래 놓고서는…….”
어? 분위기 이상하다? 나는 재빨리 나를 변호했다.
“아니야. 그게 아니라. 걔랑은.”
“닥쳐!”
“네.”
나는 입을 닫았다. 분위기 진짜 안 좋아지는데…….
“그래서 신벌을 받아, 감히 여신을 탐한 죄에 대한 신의 벌을 받아 한동안 찌질거렸지만, 그렇다고 저 간악하고 음험한 흉신의 아바타인 한수가… 과연 유지연에게 어둠에 물든 저주받은 손을 뻗치지 않았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미친놈아, 뭔 개소리야!”
나는 다시 몸을 일으켰다.
여기서 막아야 한다. 이 이상 사태를 악화시켜서는 안 된다.
그래서 나는 승환이, 지금 이 상황을 악화시키고 있는 원천을 틀어막기로 했다.
친구의 우정에 틈을 만들고, 그 사이에 분란이라는 씨앗을 심는 너에게 내가 우정이라는 이름 아래 징벌을 내리겠다.
자고로 매를 아끼면 친구를 망치는 법.
그렇게 막 징벌을 내리려는 찰나, 거대한 힘이 나를 막았다.
나를 저지하는 손 하나. 그리고 그 손의 주인.
한쪽에서 캐틀벨로 손목 단련을 하던 김창회다.
192cm, 몸무게 124kg, 3대 600을 친다는 근육 괴물이 내 어깨를 잡는다.
아니지! 여기서 김창회는 아니지! 이건 반칙이지!
이중훈이 나에게 다가온다.
다시 채프먼의 눈을 하고 있다. 존 레논을 살해하기 전에 오노 요코를 먼저 죽이러 온 마크 채프먼이다.
“우리 이야기 좀 하자.”
나는 도움을 요청하는 눈빛으로 다른 동기를 돌아보았다.
그리고 다른 마크 채프먼들에게 둘러싸여 있는 나를 발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