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가업을 이어라-26화 (26/271)

26 : 그날 밤 있었던 이야기.

눈을 떴다.

이미 창밖은 환하다.

오랜만에 정말 푹 잔 것 같다.

어젯밤 서현 님과의 긴급회동이 서현 님의 용기 있는 결단으로 극적 타결되면서 우리는 새로운 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작은어르신의 식구가 되고 싶습니다.

그녀의 그 말로, 우리는 이제 누군가를 모시기 위한 생활에서, 서로가 동등한 입장에서 한 지붕 아래 같이 사는 동거인이 되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마음에 무언가가 차오른다.

행복감? 안도감? 기대감? 흥분? 그렇게 표현할 수 있는 그런 감정이.

나는 고개를 숙여 내 미니미를 내려다보았다.

미니미에게도 무언가가 차오르고 있다.

저 자식이! 눈치 없이!

나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리고 어젯밤을 다시 떠올렸다.

***

“그럼. 제가 먼저 정리해 볼게요. 우선 서현 님은 평소와 똑같이 출근하는 것으로. 맞죠?”

“네.”

서현 님이 고개를 끄덕인다. 어쩌면 저렇게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예쁠까?

가서 와락 안아 주고 싶다. 아흐.

안아 준다는 생각만으로 미니미가 나 불렀어? 하면서 고개를 들려고 한다.

나는 몸을 조금 굽혔다.

“그… 그리고.”

“네? 왜 그러세요? 자세가 불편하세요?”

“아뇨. 갑자기 배가 좀.”

“배가 아프세요? 많이 아프세요? 일단 누워 보실래요?”

서현 님이 그렇게 말하면서 날 눕히려 한다.

안 된다! 눕는 것만은 안 된다.

헐렁한 반바지는 자신의 존재감을 드러내려는 미니미를 절대로 막아 낼 수 없다.

아씨! 누우라는 말 들었더니 더 난리를 친다.

나 불렀네! 나 부른 것 맞네!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

아니야! 이 자식아!

“아니에요. 괜찮아요. 별거 아니에요.”

별거 아니라는 말에 서현 님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날 바라보신다.

그렇게 보지 마요. 제발. 그런 눈으로 날 보지 마요.

“계, 계속 이야기할까요?”

그러면서 나는 조금 전 우리 두 사람이 작성한 합의문을 바라본다.

서현 님은 조금 더, 나를 걱정스러운 눈으로 바라보고는 손에 든 종이로 시선을 돌린다.

“음. 그러니까 일단, 저는 평소처럼 출근을 하면 되는 거네요.”

“정확히 말하면 평소 서현 님의 모습으로 계셔 주셔야 한다는 이야기죠.”

“알겠습니다.”

그러면서 살짝 웃는다.

그만! 제발 그만!

나는 숨을 깊게 들이마신 다음 다시 종이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다음은.”

“다음은 집에 들어왔을 때, 업무 모드가 아니라, 휴식 모드로 있을 것. 맞죠?”

“맞아요. 집은 또 다른 일터가 되어서는 안 되니까. 집에서는 최대한, 아니. 절대로 일하면 안 돼요. 가령 저를 챙긴다든가, 저를 모신다든가, 제가 뭘 원하는지 신경 쓴다든가.”

그 말에 그녀가 또 웃는다.

와… 저 입술 봐 봐.

입술이라는 부위가 성염색체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닐 텐데, 어쩌면 저렇게….

“일이라는 개념에서 가사 노동은 빠진 거죠?”

“맞아요. 가사 노동은 서로 분담한다. 그 세부 내용은 따로 정한다.”

“알겠어요. 그리고 또 뭐 말씀하셨죠?”

“옷이요. 이거는 뭐랄까. 서현 님의 기본 권리이니까 제가 참견할 부분은 아닌 것 같은데, 예를 들어서 지금 입고 계신 옷. 그 옷이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이라고는 말씀 못 하실 것 같아요.”

그녀가 입고 있는 옷. 당장 회사에 있어도 이상할 것 같지 않은 여성용 정장.

몸에 딱 붙는 스키니도 아니고, 활동하기 편하게 조금씩 여유가 있는 옷인데도, 서현 님이 입으니. 웬만한 수영복보다 더 섹시하다.

그런 생각을 하자, 조금 잠잠해지려 하던 미니미가 다시 존재감을 드러낸다.

아니야! 임마!

“그렇죠. 확실히 집에서 편하게 입는 옷은 아니네요.”

자신이 입은 옷을 확인하는 서현 님이 살짝 부끄러워하면서 말한다.

그 표정은…. 금지입니다! 당분간!

“그… 그렇죠? 그러니까 이건 권유 드리는 거예요. 좀 편하게, 집이니까, 편한 옷 입으시는 게 좋지 않을까. 물론, 남자가 있으니까 아예 집에서처럼 편하시진 않으시겠지만.”

“어머? 왜요? 집에서처럼 입으면 안 되는 거예요?”

저는 기본적으로 잘 때, 올 누드입니다. 성장(?)에 좋다고 해서요.

“아. 뭐, 저도 이 반바지 집에서 입는 거니까. 상관없겠네요. 하하… 하….”

미안하다. 넌 이제 다 컸다.

“알겠습니다. 옷차림도 편하게 할게요. 작은어르신은 참 자상하시네요.”

“그 부분도!”

“네?”

“제가 자상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이야기예요. 당연한 이야기를 해도 되게 칭찬해 주시니까 좋기도 하지만, 익숙해질까 봐 두려워요.”

“아. 네. 이해했습니다.”

“칭찬 금지! 하고 싶지만…. 뭐 칭찬받으면 좋은 게 사람 마음이니까. 당연한 것을 칭찬하지 말기!”

“네. 노력해 볼게요.”

“그다음 또 뭐가 있더라. 아, 청소. 각자의 방은 각자가 청소하기. 공동의 공간은 매주 정해진 요일에 같이 정리하기. 가도와주시는 분이 와 주신다고 하셨죠?”

“네. 가사 도우미분이 월, 수, 금에 오세요.”

“그러면 공동공간은 크게 신경 안 써도 되겠네요.”

“네. 보이는 곳만 그때그때 하면 될 것 같아요.”

“그다음에 식사 준비와 뒷정리.”

“그냥 제가 하면 안 될까요?”

“안 돼요. 그러면 이런 논의하는 의미가 없어요.”

“저 요리 하는 거 좋아하는데….”

“저도 좋아해요. 봤잖아요. 튀긴 물만두 카레덮밥.”

“맛보다 이름이 더 강렬해요.”

내 친구들이 그 이름을 들었을 때는 숟가락을 던졌지. 그런 쓰레기 같은 이름을 달고 있는 음식은 못 먹겠다고….

서현 님은 어찌 이리도 관대하신지.

“그러니까, 이렇게 하죠. 서현 님은 아침 잘 안 드신다 했죠?”

“네. 전 그냥 가볍게.”

“전 아침을 보통은 챙겨 먹으니까, 평일 아침은 제가 담당 할게요.”

“괜찮으시겠어요? 학교 가시는 준비하시는 것도 힘드실 텐데.”

“회사 가는 게 더 힘들 것 같은데요?”

“그건 그래요.”

살포시 웃는 그녀의 얼굴.

아. 진짜 너무하네.

왜 이렇게 이쁜 거야?

뭐 말 좀 하다 보면 이쁘고, 내가 이럴 때가 아니지 하면서 정신 좀 차리면 또 이쁘고.

그만 좀 이뻐요! 쫌!

“헛험. 아무튼, 아침은 제가 차려 먹을게요. 대신 서현 님도 아침 드실 때는 본인이 차려 드시는 걸로.”

“알겠어요.”

“뒷정리는 각자 먹은 사람이 할 것. 설거지는 바로바로.”

사실 난 설거지는 최대한 몰아 뒀다 하는 스타일인데 말이지.

“네.”

“그리고 토요일과 일요일은 각자 번갈아 가면서 하는 것으로 하죠. 토요일에 제가 하면 일요일은 서현 님이. 어때요?”

“네. 좋아요. 그럼 주마다 바꿔서?”

“괜찮네요. 이번 주 토욜에 제가 했으면 그다음에는 다음 주 일요일로. 대신 약속 있거나 일 있으면 양해해 주기.”

“네. 좋아요.”

이 정도면 거의 다 끝난 것 같다. 뭐 빼먹은 거 없나?

“차는 어떻게 할까요?”

“차요?”

“네. 주차장에 있는….”

“아. 그거. 벌써 등록된 건 아니죠?”

“일단은 법인 소유로 등록은 해 놓았어요.”

법인 차. 말로만 듣던 법인 차였구나.

“음. 아마 제가 그 차 탈 일은 없을 것 같은데요.”

“알겠습니다. 그러면 그 부분은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혹시 다른 차라면 이용하실 생각은 있으세요?”

다른 차?

눈에 안 띄는 차라면 괜찮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든다.

마치 기다리기라도 한 듯 악마가 속삭인다.

다른 차야. 2억 넘는 차 아니고, 그냥 다른 차. 서현 님이 저렇게 양보했는데, 이것까지 거부하면 너는 서현 님이 내민 손을 단순히 거절하는 게 아니라 손으로 쳐 내는 거다. 받아들여. 적당한 걸로. C클래스. 3시리즈. 그 정도면 괜찮잖아. 응?

그럴싸한데. 너무 거절하는 것도 예의가 아니잖아. 그치?

아니지! 예의가 아니긴! 정신 차려, 임마! 너 첫 차로 침수차 산다고 그랬잖아!

아니지. 침수차는 아니지. 아무튼, 내가 막 고개를 저으려는 그때, 서현 님이 다시 말했다.

“혹시 이런 방법은 어떠세요?”

“어떤… 방법이요?”

“일도 그렇고, 저도 가끔 차를 사용해야 하는데, 작은어르신을 보험에 포함시키면 어떨까요?”

“그 말씀은….”

“작은어르신께서 차량이 필요하시면 그때 제 차를 쓰시면 어떠하냐는 말씀이죠. 아니면 할아버지께 차를 보내 달라고 말씀드릴까요?”

“보험에 올려 주십시오.”

내가 말했다. 공중 부양 차는 안 된다.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서현 님이 미소를 보여 주신다.

무서운 서현 님 같으니. 회장님 차 이야기를 꺼낸 것이 그 때문이구나.

“작은어르신,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서현 님이 말씀하신다.

생각났다!

“호칭! 서로에 대한 호칭 정리하죠?”

“호칭이요?”

“네. 작은어르신 싫어요. 어색하고, 거리감 느껴지고.”

작은어르신이 뭐야, 작은어르신이.

21살짜리 총각에게. 혼삿길 막을라고! 서현 님이 책임지시려면 뭐 그렇게 부르시든가.

그렇게 생각하니 괜찮네.

딜 쳐 볼까?

“음… 저도 처음엔 좀 이상했는데, 며칠 썼다고 입에 붙었나 봐요. 그럼 호칭을 어떻게 할까요?”

“그냥 이름으로. 한수 어때요?”

“네? 그래도 이름을 부르는 것은….”

서현 님이 주저하신다.

“서현 님. 혹시… 저보다 연상…이시죠?”

“연상은 싫으세요?”

“좋아합니다. 옛날부터 연상만 좋아했습니다!”

대답은 빠르고 명확하게!

그런 내 빠른 대답에 서현 님이 다시 미소 짓는다.

아… 이성의 끈을 놓고 싶어라. 놓고 싶다. 진심으로!

“그러고 보니 전 서현 님에 대해서 아는 게 별로 없네요.”

“음… 여자는 비밀이 좀 있어야 매력적이라고 했어요.”

여기서!

어떻게!

얼마나!

더!

매력적이 되시려고 하십니까!

제가 당신의 매력에 눈이 멀어야 그만 매력적이 되시렵니까?

“제가 눈이 멀면….”

“네?”

“아. 아닙니다. 암튼 그냥 한수라고 편하게 불러 주시고, 저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누…나?”

“누나라는 호칭은….”

서현 님이 거절의 시그널을 보낸다.

저도 싫어요. 자고로 자기 여자에게 누나라고 하는 남자는 없어요.

자기 여자란다. 미쳤구나, 나.

“그냥 지금처럼 서현 님으로….”

“서현 님은 싫어요. 거리감 느껴져요.”

“아… 아하하….”

솔직히 내가 서현 님에게 님 자를 붙이기 시작한 건, 그날 호텔 센트럴 남산에서 같이 밥을 먹은 그날 서현 님의 고귀하고, 기품 있는 모습에서 감히 나 같은 놈이 서현 님을 그냥 이름으로 부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음… 그럼 서현… 씨?”

“음. 그냥 서현이는 어떠세요?”

“그… 그럼… 말을 놓아야 하잖아요.”

“놓으면 되죠. 서현아! 일어났어? 방에 들어가도 되겠니?”

“들어가도 되나요?”

“네. 하지만 노크는 부탁드려요.”

아… 심장아. 나대지 마. 그만 좀 뛰어.

뇌야. 멈춰. 지금 그거. 그 명령 내리지 마. 아래로 피 보내지 마!

터져! 터진다고!

나는 얼굴이 벌게져서 아무 말도 못 했다. 그러다 살짝 그녀를 보니 그녀도 얼굴이 발그레해졌다.

“그… 그럼 서현 님도 말… 놓고….”

아. 이건 못 하겠다.

“암튼 서현 님도 절 그냥 한수…라고….”

나의 말에 서현 님은 얼굴이 발그레해진 상태로 곰곰이 생각하더니, 고개를 절레절레.

“아직은… 힘들 것 같기도… 그럼 당분간은 씨로 같이 쓸까요?”

“네… 그럼. 그렇게.”

“그렇게 해요. 한수 씨.”

“네. 서현 씨.”

한 발자국 더 가까워졌다.

***

아우… 어젯밤 일을 떠올렸더니, 심장이 또 두근두근하네.

참나. 난 여자의 얼굴에 반하는 그런 가벼운 남자가 아닌데 말야. 왜 이렇게 됐지?

나는 그런 생각을 하며 부엌으로 발을 옮겼다.

서현 님, 아니, 우리 서현 씨는 이미 회사에 출근한 듯 거실은 조용했다.

어제 늦게까지 이야기했는데, 괜히 나 때문에 아침에 고생했겠구나 싶어 마음이 조금 아팠다.

뭐? 마음이 아파?

미쳤구나. 내가.

뭐 암튼 시리얼이나 대충 말아 먹고 학교 가면 되겠구나, 생각하며 부엌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식탁에는 포스트잇이 붙어 있는 작은 보울이 하나 놓여 있었다. 나는 포스트잇을 떼서 거기 쓰여 있는 글자를 읽었다.

-‘한수 씨’. 아침에 ‘제가’ 먹으려고 샐러드를 만들었는데, 조금 많이 만들어서 남겨 놓고 가요. 그냥 채소 씻어서 물 털고, 적당히 잘라서 드레싱만 뿌린 거라서 오래 걸리지도 않았고요. 아침에 대충 시리얼 같은 거 드시지 마시고, 이거 꼭 드시고 가세요. 제가 먹으려고 만든 거라는 거 잊지 마시고요.

예쁜 글씨체가 저 작은 포스트잇이 가득 찰 정도로 오밀조밀하게 쓰여 있었다.

“하하하.”

웃음이 나온다.

나는 무어라고 설명할 수 없는 행복감을 느끼면서, 예쁜 손 글씨로 쓰여진, 그 글을 읽고 또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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